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08:04:07

바덴의 빅토리아

<colbgcolor=#efeff4,#191912><colcolor=#000,#fff> 스웨덴 구스타프 5세의 왕비
바덴의 빅토리아 공녀
Prinzessin Viktoria von Baden
파일:Queenvictorias.jpg
이름 독일어 조피 마리 빅토리아
(Sophie Marie Viktoria)
스웨덴어 소피아 마리아 빅토리아
(Sofia Maria Victoria)
출생 1862년 8월 7일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 궁전
사망 1930년 4월 4일 (향년 67세)
이탈리아 왕국 로마
배우자 구스타프 5세 (1881년 결혼)
자녀 구스타프 6세 아돌프, 빌헬름, 에리크
아버지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형제 프리드리히 2세, 루트비히
서명 파일:Victoria_of_Baden's_signature.svg.pn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결혼3.3. 왕세자비3.4. 왕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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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구스타프 5세의 왕비.

2. 작위

파일:Greater_coat_of_arms_of_Queen_Victoria_(Sweden.).svg.png파일:Royal_Monogram_of_Queen_Victoria_(of_Baden)_of_Sweden.svg.png
문장 모노그램
  • 바덴의 빅토리아 공녀 전하 Her Highness Princess Victoria of Baden (1862년 8월 7일 – 1881년 9월 20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베름란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Consorts of Sweden and Norway, Duchess of Värmland (1881년 9월 20일 – 1905년 6월 7일)
  • 스웨덴의 왕세자비, 베름란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Consort of Sweden, Duchess of Värmland (1905년 6월 7일 – 1907년 12월 8일)
  • 스웨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1907년 12월 8일 – 1930년 4월 4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862년 8월 7일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와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애칭은 비키(Vicky).

몸은 허약했지만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피아노와 사진에 재능이 있었는데, 후에 유럽을 여행하며 수천 장의 전문가 수준의 사진을 남겼다.

3.2. 결혼

결혼 적령기에 이르러 사촌 러시아의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대공[1]이나 프로이센빌헬름 황태손[2] 등과 혼담이 오갔지만 전부 무산되었다. 1881년 빌헬름 황태손의 결혼식에서 스웨덴구스타프 왕세자와 만나게 되었다.

양가에서는 둘을 어떻게든 이어주려고 애썼다. 먼저 바덴 대공국의 입장에서 구스타프는 빅토리아의 오빠 프리드리히의 친구에 왕위 계승자라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스웨덴 왕실에서 빅토리아와 왕세자의 결합은 반기다 못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정통성 문제 때문이었다. 기존 스웨덴의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는 바람에[3] 새롭게 성립된 베르나도테 왕조는 권위와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었다.[4] 한편 홀슈타인고토로프 왕조는 남계가 단절되고 여계 후손만 이어지고 있었는데, 빅토리아는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마지막 국왕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증손녀로써[5]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빅토리아가 베르나도테 왕조의 후계자에게 시집을 오면 베르나도테 왕조의 부족한 정통성이 채워질 수 있었다.
파일:022wZ1bwyi1E (1).jpg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세자와 바덴의 빅토리아의 약혼사진, 1881년

막상 두 사람은 서로에게 별 호감이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에 따라 약혼을 하게 되었다. 1881년 9월 20일, 바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3. 왕세자비

부부는 슬하에 3남을 두었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스톡홀름 왕궁을 '교도소'라고 칭하거나 이혼한 부부의 기사를 보면 부럽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등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첫번째로 건강 문제가 있었다. 습하고 추운 스웨덴에서 빅토리아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 명의 자식을 낳으며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우울증까지 오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이탈리아 남부 등 따뜻한 곳으로 자주 여행을 갔다. 시부모님인 오스카르 2세소피아 왕비는 왕세자 부부가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면 왕족의 명성이 손상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럼에도 빅토리아는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스웨덴을 떠났고, 시댁과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구스타프 왕세자의 동성애 성향이 문제가 되었다. 아들 3명을 낳고부터 구스타프는 아내에게 자신의 성향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쇼윈도 부부가 되었다. 이후 빅토리아는 몇 차례 스캔들에 연루되었는데, 남편과 함께 떠난 이집트 여행에서 남편의 부관과 불륜을 저지르고 이를 시인하기도 했다.

1892년 스웨덴의 의사 악셀 문테가 빅토리아의 주치의를 맡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문테와 평생에 걸쳐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우정인지 사랑인지에 대해서의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 둘은 서로 아주 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친애를 쌓았고, 궁중에서 스캔들이 돌기도 했다. 문테는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 별장을 짓고 종종 빅토리아를 초대했다. 빅토리아는 건강을 이유로 카프리에서 문테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3.4. 왕비

1907년 시아버지 오스카르 2세가 숨을 거두고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빅토리아는 카프리 섬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스웨덴에 반독 감정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빅토리아는 고향 바덴에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국 왕족 출신인 며느리 코넛의 마거릿 공녀[6]와 사이가 험악해졌다고 한다.

왕비가 되고 전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 보수적인 빅토리아와 자유주의자인 문테는 몇 차례 충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금세 다시 가까워졌다. 빅토리아는 문테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에 개인 빌라를 구입하고 더 자주 해외를 방문했다. 이에 스웨덴 왕실은 왕비의 해외 체류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해외로 떠나기 힘들어지자 빅토리아는 스트레스를 받았고, 점점 건강이 나빠졌다. 이탈리아 왕국 로마에 머물고 있었던 1930년 4월 4일, 악셀 문테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덴의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Baden)
<colbgcolor=#FFF3E4,#331c00>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 Grand Duke of Baden)
<colbgcolor=#FFFFE4,#323300> 바덴 대공 레오폴트 1세
(Leopold, Grand Duke of Baden)
<colbgcolor=#E4FFEC,#00330f>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Baden)
호흐베르크의 루이제 카롤리네
(Louise Caroline of Hochberg)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e of Sweden)
구스타프 4세 아돌프
(Gustav IV Adolf)
바덴의 프리데리케
(Princess Frederica of Baden)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Princess Louise of Prussia)
빌헬름 1세
(Wilhelm I)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Saxe-Weimar-Eisenach)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구스타프 6세 아돌프
(Gustav VI Adolf)
1882년 11월 11일 1973년 9월 15일 코넛의 마거릿 공녀
슬하 4남 1녀[7]
루이즈 마운트배튼
2남 쇠데르만란드 공작 빌헬름 왕자
(Prince Wilhelm, Duke of Södermanland)
1884년 6월 17일 1965년 6월 5일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8][9]
슬하 1남[10]
3남 베스트만란드 공작 에리크 왕자
(Prince Erik, Duke of Västmanland)
1889년 4월 20일 1918년 9월 20일

5. 여담

파일:20170709_Solliden_0095.jpg
  • 악셀 문테의 카프리 빌라 산 미켈레를 본떠 욀란드에 솔리덴 궁을 지었다. 1906년 완공되어 현 소유주는 증손자 칼 16세 구스타프로 왕실의 여름 별장이다.

[1] 고모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장남.[2] 외삼촌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3] 남성 황족의 대가 끊어졌고 소피아 황녀라는 여성 황족 한 명만 남았다.[4] 베르나도테 왕조의 창사자인 칼 14세 요한프랑스의 평민 가문 출신이었다. 정확히는 나폴레옹의 친구였다가 스웨덴으로 파견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 때문에 별 문제없이 칼 14세가 물려받은 스웨덴과는 달리 본가인 노르웨이의 국왕 자리는 쿠데타로 빼앗겨 버렸다.[5] 빅토리아의 친할머니 바덴의 대공비 소피아가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장녀다.[6] 빅토리아 여왕의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의 장녀였다.[7]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비스보리 백작 시그바르드, 덴마크의 잉리드 왕비, 비스보리 백작 칼 요한 등.[8]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막내아들 파벨 알렉산드로비치(1860 ~ 1919) 대공과 첫번째 부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1870~1891, 요르요스 1세의 큰딸(셋째)) 사이의 1남 1녀 중 첫째.[9] 1914년 이혼[10] 렌나르트 왕자(1909년 5월 8일~2004년 12월 21일 향년 9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