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04 09:11:05

모로코 위기

식민제국들의 대외정책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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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Moroccan Crisis
프랑스어: Crise de Maroc
독일어: Marokkokrise
스페인어: Crisis Marroquí
아랍어: الأزمة المغربية

1. 개요2. 제1차 모로코 위기3. 제2차 모로코 위기4. 관련 문서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이었던 20세기 초반에 모로코를 둘러싸고 독일 제국영국-프랑스-스페인간에 벌어진 국제적 갈등.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해외 팽창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독일과 이를 억제하려던 영국-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오랫동안 대치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협력관계로 전환했다.

2. 제1차 모로코 위기

사건이 발발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탕헤르 위기(Tangie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로코는 대서양지중해 사이에 자리잡은 나라인 관계로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시절 유럽 여러 나라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1880년에 체결한 마드리드 조약에서 모로코의 독립은 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았으나 힘이 우선시되는 제국주의 시대에 조약이란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고, 프랑스가 내정 개혁을 빌미로 스페인과 함께 모로코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세력 확장이 심히 못마땅했던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1905년 3월 31일 모로코를 전격 방문하여 모로코 국왕과 회담을 갖고 '모로코의 자주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빌헬름 2세의 지원에 고무된 모로코 국왕은 프랑스가 요구한 내정 개혁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빌헬름 2세와 독일제국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베를린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들간의 회의를 조성하여 최대한 독일의 이권을 챙겨보려 했지만 프랑스는 완강히 거부했고 독일도 물러서지 않아 양국 사이에는 전운이 감지되었다.[1] 하지만 보불 전쟁 참패가 기억에 생생했던 프랑스 정부는 유럽 열강 중 최고의 생산력을 지닌 독일과 단독으로 전쟁을 치루기에는 위험이 너무나 크다고 판단했고, 결국 프랑스가 한 발 물러서면서 이듬해 1월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유럽 열강들간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회담 과정에서 예전과는 달리 왕따는 프랑스가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제외한 그 어떤 국가도 독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3] 그리고 건함 경쟁 등으로 독일과 대치 관계였던 영국이 시종일관 프랑스의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 결정타[4]로 작용, 결국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수용해야만 했다.[5]

1차 모로코 위기에서 독일은 자신들이 국제 왕따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제대로 망신을 당한 빌헬름 2세는 분노하여 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 동맹삼국 협상[6] 사이의 긴장감은 점점 커졌다.

3.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에 일어났으며 1차 위기와 마찬가지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따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독일이 군함을 파견했기 때문에 그 군함의 이름을 따 판터 호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1차 모로코 위기의 결과인 알헤시라스 협정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지배권을 착착 강화시켜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모로코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이러한 무력 진압은 알헤시라스 협정 위반이었기에 독일은 1차 모로코 위기 때의 실패를 만회할 목적으로 일부러 독일 민간인 1명을 아가디르에 파견 후 구출을 핑계로 일티스급 포함 판터(SMS Panther)를 모로코에 파견했다. 목표는 프랑스의 어그로를 끌기 위하였던 것. 결국 여기에 프랑스가 자극받으면서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한편 프랑스의 동맹국인 영국 또한 모로코에 군함을 파견, 1차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프랑스에게 힘을 실어줬다.[7] 상호 대치속에 독일은 프랑스가 통치 중이던 콩고를 주면 철수하겠다고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거부하며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영불협상 위력 앞에 독일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왕따라는 사실을 절감, 사건 발발 한 달여 뒤인 7월에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가 프랑스 정부 측에 '독일은 모로코의 영토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통보,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독일과의 우호적 관계를 추구하는 조제프 카요(Caillaux) 내각이 들어서면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일부를 독일에게 할양해 주었고 그 대가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했다. 이러한 협상에 스페인이 반발했으나 영국이 이를 중재하여 해결되었다. 결국 이듬해인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페즈 협정을 체결, 모로코를 분할해 각각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다만 모로코는 형식적으로나마 독립국 신분은 유지했다.

2차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은 심각한 금융 위기[8]를 겪었는데 독일이 외교적으로 왕따 신분인 것도 있었지만, 백기를 든 결정적인 사유는 바로 금융 위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때문에 당시 독일에서는 금융 위기가 '영국과 프랑스의 음모' 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당시 독일은 잠시이기는 했지만 금본위제 국제무역망에서 퇴출당할뻔한 신용불량 국가로 전락할 정도로 위기가 심각했다.

4. 관련 문서


[1] 프랑스는 아예 군대를 독일과의 국경인 알자스-로렌 근처까지 전진시켜 놓았고 독일도 예비군을 소집시켜 놓았다.[2] 이전까지는 비스마르크의 신들린 외교 능력으로 프랑스를 고립시켰고 그 덕택에 보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3] 심지어 독일과 이렇다할 트러블이 없는 스페인조차 모로코를 비롯한 아프리카 식민지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었다.[4] 이미 영불협상에서 양국은 서로 협조하기로 약속했다.[5] 그나마 독일이 얻은 게 있다면 프랑스로 하여금 모로코 내 치안 경비에 대한 권리는 토해내게 했던 것인데, 정치/경제적 면에서 프랑스가 모로코를 거의 다 잠식한 상황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6] 다만 이 시기에는 러불동맹영불협상만 체결됐을 뿐 아직 러시아와 영국을 잇는 영러협상은 체결되지 않았다.[7] 비록 영국은 독일을 자극하면 전쟁이 일어날까봐 노심초사하기는 했지만 프랑스가 시종일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자 영불협상의 중요성 때문에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군함을 파견했다.[8] 하루만에 주가 지수가 전체에서 30%(!)가 떨어졌으며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금을 인출하면서 라이히스방크가 보유한 금의 20%가 증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