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넬 해전 Battle of Coronel | ||
날짜 | ||
1914. 11. 01. | ||
장소 | ||
칠레 서부 연안 코로넬 앞바다 | ||
원인 | ||
독일 슈페 제독이 아시아에서 철수하는 태평양 전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 하기 위하여 방해하는 영국 함대와 결전 | ||
교전국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크리스토퍼 크래독 경† 존 루스 | 막시밀리안 폰 슈페 백작 |
결과 | ||
영국 크래독 제독의 함대 대파, 이후 포클랜드 해전의 계기를 제공함 | ||
병력 | 본문 참조 | |
피해규모 | 본문 참조 |
[clearfix]
1. 개요
1914년 11월 1일 칠레 중부 연안인 코로넬(Coronel) 근처 해역에서 일어난 영국 해군과 독일 제국 해군 간의 해전.2. 해전의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독일 제국은 비단 유럽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독일은 1889년 청나라 칭다오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였으며, 이후 개전의 총성이 울릴때까지 캐롤라인, 마셜 제도, 마리아나 제도 등 많은 해외 기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의 태평양전대는 막시밀리안 폰 슈페 (Graf Maximilian von Spee) 중장 제독이 지휘하고 캐롤라인 제도의 포나페(Ponape) 항을 모항으로 하는 순양함 6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러던 중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전부터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던 일본 제국이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은 선전포고 이후 독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칭다오를 무력 점령하며 칭다오 해전을 벌였으며, 이것으로 독일의 극동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진출의 영향으로 아시아에 산개해 있던 개별 함대들의 작전 수행이 어려워지고 위험도가 높아질 것을 개전 이전부터 우려한 슈페 제독은 전쟁이 터져서 칭다오 같은 거점이 협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기 전에 그의 전대를 인솔해 칭다오와 태평양 군도의 태평양전대를 이끌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남미대륙 서해안을 경유해 마젤란 해협을 거쳐서 대서양으로 진입하여 독일로 귀항하는 원거리 항해를 진행하면서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또한 그는 경순양함 엠덴 (SMS Emden)을 인도양으로 파견해 통상파괴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한편 영국은 자신들이 설정한 봉쇄선 밖에서 독일 함정들이 실시하는 통상파괴전에 고심하며 이들을 물리치려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당시 남대서양의 함대를 지휘하던 영국 순양함전대 사령관 크리스토퍼 크래독 (Sir Christoper Cradock) 소장 제독은 예하 함정들을 인솔해 포클랜드를 출항한 후 마젤란 해협을 통과, 태평양으로 진입하여 북쪽 침로를 취하면서 독일의 슈페 전대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그들이 귀항하기 전에 전대를 격침시키기 위함이었다.
2.1. 첫 조우
슈페 제독은 11월 말 경 칭다오와 태평양에서 긁어모은 군함들을 이끌고 칠레 외해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슈페 제독은 영국 순양함이 이미 남미대륙 서부해안에 도착하여 작전을 수행 중 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화력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한 슈페 제독은 영국 함정과의 결전을 결심하고 이 해역에 독일 함정이 1척만 활동하는 것으로 영국이 믿도록 하기 위해 방호순양함 라이프치히 (SMS Leipzig)의 무선침묵을 해제하였다.크래독 제독도 독일 함대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의 무선침묵이 깨졌다는 것은 즉각 알아차렸으나, 그것이 슈페 제독의 계략임을 눈치채지는 못하였다. 슈페 제독이 판 함정에 빠진 크래독 제독은 주포의 열세를 우려해 구식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카노푸스 (HMS Canopus)가 빠진 상태에서는 교전하지 말라는 영국 해군성의 훈령을 무시하고 라이프치히 함이 발하는 전파를 따라 빠른 속도로 북진하였다.
그렇게 슈페 제독의 기만작전에 당한 크래독 제독에 의해 구식 전함이었던 카노푸스는 신식 함정들의 속력을 따라가지 못해 뒤처지게 된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독일측 함대보다 영국측 함대가 함선이나 승조원 면에서 모두 불리한 점이 있어서 크래독 제독이 어째서 본국의 훈령까지 무시하면서 해전에 돌입했는지는 독일의 함정에 빠진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호레이쇼 넬슨이 활약하던 전열함 시대부터 내려오던 영국 해군의 전통인 적극적인 전투를 권장하며 불리한 상황임을 핑계로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군사법원에 회부되어 큰 처벌을 받은 관례에 있었다. 이게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실제로 처벌 사례도 상당했으며 형량도 중형이 떨어졌다. 덤으로 크래독 제독의 친구인 어니스트 트루브리지 (Ernest Troubridge) 제독이 당시에 적과의 교전 실패로 군법회의를 기다리는 처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실제로 크래독 제독이 출격하면서 자신이 전사했을 경우를 대비한 편지를 남겼는데 자기 친구처럼 군법회의에 끌려가고 싶지 않다고 써놓을 정도였다.
따라서 본국에서의 훈령이 어떻게 떨어지건 간에 크래독 제독이 슈페 제독을 놓치기라도 하면 바로 군사재판에 끌려가서 중형을 받고 인생이 끝장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문서에서도 크래독 제독은 전투 성공 가능성이 아주 적더라도 그걸 핑계로 출격을 거부하거나 연기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한이 없다고 기록된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2.2. 양측 함대 전력
독일 | 영국 | ||||||||
함명 | 함종 | 배수량 | 주포 | 속력 | 함명 | 함종 | 배수량 | 주포 | 속력 |
SMS 샤른호르스트 | 장갑순양함 | 11,600t | 8×8.2 | 23.5kts | HMS 굿호프 | 장갑순양함 | 14,000t | 2×9.2 | 24kts |
SMS 그나이제나우 | 장갑순양함 | 11,600t | 8×8.2 | 23.5kts | HMS 몬마우스 | 장갑순양함 | 9,800t | 4×6 | 24kts |
SMS 라이프치히 | 방호순양함 | 3,250t | 10×4 | 23kts | HMS 글레스고 | 경순양함 | 4,800t | 2×6 | 26.5kts |
SMS 뉘른베르크 | 경순양함 | 3,450t | 10×4 | 24kts | HMS 오트란토 | 보조순양함 | 12,124t | 4×4.7 | 16kts |
SMS D드레스덴 | 경순양함 | 3,450t | 10×4 | 24kts | HMS 카노푸스 | 전드레드노트급 전함[1] | 12,950t | 4×12 | 16.5kts |
2.2.1. 이론
독일 제국 해군 태평양전대와 영국 해군 남미 서해안전대는 기본적인 전력을 간단한 표로만 보면 서로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독일측이 2척의 장갑순양함과 2척의 경순양함과 1척의 방호순양함을 보유했고 영국은 1척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2척의 장갑순양함과 1척의 경순양함과 1척의 보조순양함을 보유하여 군함의 숫자는 5척대 5척으로 동등하며 화력의 경우에도 영국측에 있는 보조순양함의 화력 저하를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의 화력으로 충분히 보충가능하므로 정면 승부시에도 동등한 전투력을 보일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본거지를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제대로된 보급을 못받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장거리 항해를 한 독일에 비해서 대서양에 있는 기지에서 출항해서 보급을 제대로 받고 남미 서해안으로 온 영국측이 군함을 정비하고 수병들을 휴식시켜서 컨디션을 올릴 기회가 더 많았으므로 영국이 해전 돌입시 좀 더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2.2.2. 실제
하지만 해전 돌입 시점에서 위의 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영국측 병력이 표에 나온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차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첫번째로 영국측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이 실질적으로는 해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카노푸스급 전함 1번함 카노푸스(HMS Canopus)는 전드레도노트급 전함을 확립한 마제스틱급 전함 다음 함급일 정도로 오래된 전함으로 원래 기본 스펙상 최고속력은 18노트지만 1차대전 시점쯤 가면 16.5노트로 속력이 줄어들었으며 이것도 본국에서 정비를 철저하게 받은 상태에서나 잠깐 가능한 속도라서 실제로 해전에 참여하기 위해 항해할 시점에서는 12노트를 내면 다행일 지경이었고 순항시에는 9노트가 한계였다. 덤으로 기관부 고장이 자주 일어났으며 출격 당시 선임 기관사가 정신병에 걸려있는 등의 악재가 연속되었다. 그래서 해전에 참여하려고 최대한 속력을 올리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해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두번째로 영국측 보조순양함 1척은 사실상 전력외나 마찬가지의 화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말이 좋아서 보조순양함이지 실제로는 HMS 오트란토(HMS Otranto)는 무장상선이었다. 애초부터 영국과 호주간을 항해하던 여객선에다가 4.7인치 (120mm) 함포 8문을 달고 탄약고를 방어하기 위해 12.7mm 두께의 장갑판을 달아놓은 것에 그쳤기 때문에 화력이 빈약해서 독일 군함을 상대하기 어렵고 독일측 포탄을 1발만 맞더라도 얇은 장갑을 관통하고 탄약고 유폭으로 굉침할 가능성이 높은 함선이었다. 호송선단 호위용으로 써도 한계점이 있는 무장상선을 정식 해전에 참여시켰으니 실제로 전력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번째로 영국측 장갑순양함들이 같은 수준의 군함도 아니었으며 둘 다 독일군의 장갑순양함보다 성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드레이크급 장갑순양함인 굿 호프와 몬머스급 장갑순양함인 몬머스는 배수량부터 14,380t과 10,000t으로 큰 차이가 났으며 무장도 9.2인치 (234mm) 단장 주포탑 2기와 6인치 (152mm) 단장 주포곽 16문과 6인치 (152mm) 2연장 주포탑 2기와 단장 주포곽 10문으로 큰 차이가 난다. 건조목적도 정규 해전용과 호송선단 호위용으로 차이가 났다. 사실상 장갑순양함으로 묶이기만 했지 굿 호프와 몬머스의 차이가 커서 정규 해전에서 호흡을 맞추기가 힘들었으며 독일의 장갑순양함이 보유한 8.2인치 (210mm) 주포와 비슷한 위력과 사정거리를 가진 함포가 9.2인치 2문밖에 없어서 함포 화력면에서도 열세였다.
영국측 군함들이 이렇게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서 실질적으로 동급인 독일 군함과 성능이 동등한 군함은 타운급 방호순양함인 HMS 글래스고(HMS Glasgow) 밖에 없었다. 해당 군함은 6인치 (152mm) 단장 주포좌 2기와 4인치 (102mm) 단장 주포곽 10기로 무장해서 4.1인치 (105mm) 주포밖에 없는 독일측 방호순양함과 경순양함보다 화력이 우세했으며 속도도 26.5노트로 약간 빨랐다.
이에 비해 독일측 병력은 표에 나온 것보다 강력했다.
첫번째로 독일의 장갑순양함은 샤른호르스트급 장갑순양함으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모두 자매함이며 8.2인치 (210mm) 주포 8문을 탑재했는데 함수와 함미에 2연장 주포탑 1기씩을 배치하고 단장 주포곽으로 한쪽 측면 당 2문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한 쪽 측면으로 주포 6문을 집중할 수 있어서 주포 화력의 75%를 집중가능한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설계를 가진 장갑순양함이었다.
두번째로 독일의 군함들은 모두 고속을 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23노트가 가능했다. 이에 비해서 영국측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보조순양함을 모두 제외해야 24노트를 낼 수 있는데 이러면 당연하게도 전력 숫자만 봐도 독일의 군함 5척을 영국의 군함 3척이 상대해야 하므로 불리해지며 영국측 군함의 성능문제까지 따지면 영국이 더 불리해진다.
승조원의 측면에서도 독일이 영국을 압도하였다. 독일측은 애초 승조원 선정부터 정예였으며 태평양전대로 묶여서 지난 3년 동안 같은 함선에서 근무하였으며 꾸준한 훈련으로 높은 수준의 전투 수행 능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례로 장갑순양함 샤른호르스트 (SMS Scharnhorst)는 1913년 독일 함정 중 Top Gun으로 선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장갑순양함 그나이제나우 (SMS Gneisenau)가 2등을 수상했다.
반면에 영국의 굿 호프는 예비함 상태에서 해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임 장교와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오트란토 (Otranto)는 무장상선으로 화력도 빈약하고 장갑도 없다시피 했고 속력도 변변치 못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해전 개시 이전부터 독일이건 영국이건 이미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최신예 함선이고 9.2인치 (234mm) 2연장 주포탑 2기와 7.5인치 (191mm) 단장 부포탑 10기로 중무장한 미노토어급 장갑순양함인 HMS 디펜스(HMS Defence)를 영국 남미 서해안전대에 추가하려고 했고 디펜스를 다른 임무에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하자 속도는 느리지만 장갑과 화력이 강력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카노푸스를 추가한 후 해당 함선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해전을 벌이지 말라고 영국 본토에서 훈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디펜스도 다른 임무에 투입할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바로 영국 남미 서해안전대 소속으로 다시 파견했으나 이미 해전이 벌어진 후였다.
3. 해전의 경과
1914년 11월 1일 아침, 코로넬 외해를 지나가던 독일 상선이 슈페 제독에게 영국 경순양함 글래스고 (HMS Glasgow)가 투묘해 있는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기회를 잡았다 판단한 슈페 제독은 상선이 알려준 해역으로 급히 기동하였고, 같은 시각 크래독 제독의 함대는 북상하고 있었다. 1600시 경 두 함대는 육안 식별이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었는데, 당초에 슈페 제독과 크래독 제독 모두 적함이 한 척 뿐일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로의 함대를 보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800시가 지난 시각 크래독 제독은 교전을 결심하고 침로를 남으로 변경하여 자신의 함대를 독일 함대의 서측에 평행하게 위치하게 하였다.슈페 제독은 햇빛을 마주보는 상태에서 영국 함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 까지 공격을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시간이 떨어지자 상황은 독일 함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전투에서 해를 마주보고 싸우는 것은 매우 불리하지만, 해가 기울자 영국 함대가 박명으로 인해 그 그림자가 독일 함대에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반대로 영국 함대는 해가 기울어지면서 해안선의 검은 그림자 때문에 독일 함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해가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자 영국 함대는 백색 스크린에 뜬 검은 그림자처럼 잘 보이는데 독일 함대는 해안선의 검은 그림자와 완전히 합쳐져서 발포시 섬광으로만 잠깐 나타날 정도로 더 심해진다.
1850시에 해가 지고 영국 함대와 독일 함대의 거리가 10,970m 까지 좁혀졌을 때, 슈페 제독은 전 포문의 개방을 명령했다. 독일 함대는 사격 개시 명령이 떨어진 지 단 5분만에 영국의 장갑순양함 굿 호프(HMS Good Hope)의 전방 주포탑과 조함실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9.2인치 (234mm) 단장 주포탑 2기가 독일 장갑순양함의 주포인 8.2인치 (210mm) 주포와 비슷한 위력과 사정거리를 가진 함포의 전부였는데 그 중 1기가 초전에 박살나면서 사실상 독일 장갑순양함에게 대응할 함포가 없다시피했다. 6인치 (152mm) 함포는 부포곽 형태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포신 각도에 한계점이 많아서 사정거리와 위력에서 독일의 8.2인치 (210mm) 주포를 상대할 수 없는데다가 측면에 설치된 특성상 거친 바다에서 포문을 열면 침수현상이 심해져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이 시점에서 4.7인치 (120mm) 함포 8문을 장착한 HMS 오트란토(HMS Otranto)는 무장상선인데다가 원래 여객선이라서 덩치까지 커서 집중포화를 맞기 시작했으므로 더 이상 전투할 상황이 아니라서 전속력으로 서쪽 방향으로 퇴각한다. 영국의 방호순양함인 HMS 글래스고(HMS Glasgow)는 독일의 방호순양함 라이프치히(Leipzig)와 드레스덴(Dresden)과 교전중이었고 동등하게 전투중이었으나 그 정도가 한계였다.
1930시까지 크래독 제독은 6인치 (152mm) 함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독일 함대에 접근했고 5,490m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으나 함대가 접근할수록 독일측 함포도 점점 정확하게 명중하기 시작했다. 결국 반복된 피탄으로 인해 영국 장갑순양함 2척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몬머스가 먼저 발포를 중단했다. 굿 호프는 계속 발포를 하였으나 1950시에 발포가 중단되었고 곧 전방 함체에서 대규모 유폭이 발생하면서 침몰한다. 침몰당시 어두운 전장환경과 치열한 전투로 인해 침몰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생존자도 없었다.
굿 호프가 사라지자 샤른호르스트는 화력을 몬머스에 집중하였고 그나이제나우는 목표를 글래스고로 돌렸다. 그 동안 글래스고는 독일의 4.1인치 (105mm) 주포에는 손상을 별로 입지 않았지만 8.2인치 (210mm) 주포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고 일부 구획이 침수당했으나 아직 24노트의 속도가 가능하기에 교전을 포기하고 몬머스 옆을 지나서 남쪽으로 탈출했다.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글래스고는 몬머스를 도와줄 수 없었다.
해전이 잠시 중단되고 어둠속으로 사라진 영국 군함에 대한 독일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는 해면에서 불타는 무언가를 보고 항진했으나 도착해보니 불타는 잔해뿐이었다. 뉘른베르크(Nürnberg)는 약간 속도가 느려서 본격적인 해전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장에 도착해서 몬머스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몬머스는 칠레 해안에 좌초해서 승조원이라도 구할 목적으로 심하게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항진하고 있었으나 결국 뉘른베르크가 항복권고를 한 후 그걸 몬머스가 거부하자 조명탄을 날리면서 집중포화를 날려서 몬머스를 격침한다.
2215시에 슈페 제독은 추격전을 중단하고 함대를 다시 모아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굿 호프가 격침되었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슈페 제독은 굿 호프가 후퇴했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으로 코로넬 해전이 마무리된다.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캐노푸스는 영국 본토의 명령을 받고 9노트의 속도로 계속 항진하면서 영국 함대에 합류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으나 전투 해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전이 종료된 상황이었고 전투 해역에 진입할 시점에 글래스고로부터 해전 패배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함수를 돌려서 후퇴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상당히 무리를 한 나머지 포클랜드까지 돌아가는 과정에서 기관고장이 2번 이상 발생하게 된다.
4. 결과
영국 함대의 피해 | 독일 함대의 피해 | ||
HMS Good Hope | 침몰 | SMS Scharnhorst | 2발 피탄 |
HMS Monmouth | 침몰 | SMS Gneisenau | 4발 피탄 |
사망 | 1,600 여 명 | 부상 | 3명 |
영국은 2척의 장갑순양함이 격침당하고 1,660명의 손실을 보았다. 그 외에는 방호순양함 글래스고가 5발의 피탄과 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보조순양함 오트란토는 손실이 없었다.
독일의 경우에는 샤른호르스트에 6인치 포탄 2발이 명중했으나 주장갑대에 명중한데다가 불발탄이라서 아무런 피해가 없다시피 했다. 그나이제나우는 6인치 포탄 4발이 명중했으며 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장교용 선실이 침수당할 뻔 했고 후방 주포탑이 일시적인 작동불능에 빠지는 피해를 입었다.
수치 상으로 판단하면 슈페 제독 지휘 하 독일 함대의 완벽한 승리로, 이전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에서의 굴욕을 확실하게 갚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독일 태평양 전대는 대서양을 지나 독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항로 상 마땅한 저탄기지도 없는 마당에, 독일 함대는 이 전투로 인해 많은 석탄과 8.2인치 포탄의 42%를 소모했다. 구체적으로는 샤른호르스트는 422발을 쏘고 350발이 남았으며 그나이제나우는 244발을 쏘고 528발이 남았다. 그 외에도 방호순양함과 경순양함의 4.1인치 함포도 많은 양의 포탄을 소비하였다. 이는 이후 포클랜드 해전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이후
독일 함대는 재집결한 후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11월 3일에 칠레의 항구인 발파라이소에 도착했다. 중립국인 칠레의 항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척씩만 항구에 들어가야 했고 24시간의 정박만 허용했다. 그래서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뉘른베르크만 항구에 진입하였다.슈페 제독은 칠레에 거주하는 독일인의 환영을 받았지만 전승행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꽃다발도 받긴 했으나 꽃다발이 자신의 무덤에나 어울릴 것이라며 거부의사를 밝힐 정도로 비관적이었다고 한다. 슈페 제독의 생각으로는 크래독 제독은 자신이 파멸하더라도 독일 함대에 손상을 입힐 것이며 카노푸스가 추가적인 손상을 더 가할 것으로 보고 작전을 진행한 것이며 슈페가 승리는 했으나 생존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살아남은 함선들은 각자 마젤란 해협을 거쳐서 대서양으로 돌아왔으며 11월 4일에는 영국 본토에서 증원한 병력과 합류하라는 재집결 명령을 내렸다.
6. 분석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기본적으로 우수한 수상함 전력과, 주포 화력에서의 우위, 승조원들의 숙련도 및 우세한 위치 선점을 들 수 있다.반면, 영국이 패배한 원인은 수상함 전력의 열세, 주포 화력에서의 열세, 미숙한 승조원들 및 불리한 위치를 들 수 있고, 추가적으로 영국 본국에서 증원된 구식전함 카노푸스의 전투 미참가를 꼽을 수 있다. 영국 해군성은 전력에서 열세인 순양함 전대가 독일의 태평양 전대에게 고전할 것을 우려하여 속력은 느리지만 무장이 매우 뛰어난 카노푸스를 출전시켰다. 하지만, 크래독 제독이 교전 직전에 독일의 기만작전에 당하여 속력이 느린 카노푸스를 남겨두고 무리하게 전투에 임하다가 해전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1] Pre-Dreadnought Class B, 1920년 이전에 건조된 전함의 기호는 BB가 아니라 B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