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8:48:38

프셰미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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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프셰미실 공방전
Siege of Przemyśl
Перемышльская осада
Belagerung von Przemyśl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Twierdza_Przemysl.svg
프셰미실 요새 지도
날짜
1차 포위전: 1914년 9월 17일 ~ 1914년 10월 10일
2차 포위전: 1914년 11월 5일 ~ 1915년 3월 22일
3차 포위전: 1915년 5월 18일 ~ 1915년 6월 3일
장소
오스트리아-헝가리 갈리치아 프셰미실 요새
협상국 동맹국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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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틀:국기|]][[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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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라드코 디미트리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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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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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안드레이 셀리바노프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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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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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
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
]](프셰미실 수비대 사령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제10군 사령관)
병력 약 300,000명 약 130,000명
피해 규모 사상 및 포로
약 50,000명 이상
사상 및 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사: 20,313명
부상: 6,782명
포로: 117,000명
실종: 290명
독일 제국
구체적 수치 미상
총합 약 144,385명
결과
러시아 제국의 승리, 그러나 67일 만에 요새를 재상실
영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사력 급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독자적 전쟁 수행 능력 상실 및 사실상의 독일 제국의 위성국으로 전락
러시아 제국의 전략적 기회 상실
동맹국의 서부전선/이탈리아 전선 공세계획 중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가속화

1. 개요2. 배경
2.1. 제1차 포위전(1914.9.17 - 1914.10.10)2.2. 제2차 포위전(1914.11.5 - 1915.3.22)2.3. 제3차 포위전(1915.5.18 - 1915.6.3)
3. 결과

[clearfix]

1. 개요

프셰미실 공방전 혹은 프셰미실 공성전(폴란드어: Twierdza Przemyśl, 독일어: Festung Przemyśl, 러시아어: Перемышльская крепость)은 1914년 9월부터 1915년 6월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프셰미실프셰미실 요새를 두고 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 간에 벌어진 세 차례의 대규모 포위전이자 공성전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긴 포위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였다. 일각에서는 이 전투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스탈린그라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배경

1914년 5월, 헤르만 쿠스마네크 장군이 요새의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당시 프셰미실 요새에는 25,000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포병 부대는 1,05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776명이 요새 진지에 고정 배치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4문의 305mm 박격포로, 각각 630kg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임박했을 때는 프셰미실 요새의 전투 준비 태세가 계획된 수준의 75% 정도에 그쳤다. 총 41개의 요새 중 단 12개만이 "모든 종류의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되었고, 나머지는 개별 포탄의 직접 타격만을 견딜 수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19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약 27,000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긴급 보강 공사를 실시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요새의 방어력은 대폭 강화되었다. 714문의 야포, 52문의 곡사포, 95문의 박격포, 72정의 기관총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병력도 증강되어 최종적으로는 131,000명의 군인과 21,000마리의 말이 요새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이 점차 프셰미실에 가까워지자, 사령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요새 주변 15km 반경 내의 모든 민간 건물과 과수원, 숲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이는 포병대가 주변 지역을 완벽하게 관측하고 사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1914년 8월, 러시아 제국군은 독일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영토인 갈리치아를 동시에 공격했다. 독일 방면의 공세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저지되었으나, 갈리치아 방면에서는 러시아군 사령관 니콜라이 이바노프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렘베르크 전투에 이어 라바 루스카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을 돌파하자, 콘라트렘베르크 탈환 시도는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이에 9월 15일, 러시아군의 강력한 압박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3군 사령부는 산(San) 강 동쪽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야로스와프(Jarosław)를 포기하고 요새에서 철수했다. 이후 요새에는 쿠스마네크가 지휘하는 수비대만이 남게 되었다.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60km 이상 카르파티아 산맥 쪽으로 후퇴했고, 프셰미실 요새만이 유일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손에 남게 되었다. 9월 28일에는 요새가 완전히 러시아군 후방에 고립되었다. 프셰미실의 전략적 위치는 러시아군이 독일의 산업 중심지인 실레지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기에, 이 요새의 방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뿐만 아니라 독일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2.1. 제1차 포위전(1914.9.17 - 1914.10.10)

9월 17일 러시아 제3군 사령관 라드코 디미트리예프는 91,800명의 병력과 133명의 장교를 동원하여 프셰미실 요새의 포위를 시작했다. 당시 프셰미실 요새의 방어는 65개의 보병대대가 맡고 있었으며, 주로 루테니아인헝가리인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요새는 988문의 포를 보유했으나 그중 단 28문만이 당시 현대적 수준이었고, 38개의 외곽 요새 중에서도 12개만이 현대화된 상태였다. 또한 14,500마리의 말과 4,000대의 수송마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9월 20일, 러시아군은 다로비체 근처에서 산 강을 건넜고, 다음날 프셰미실 수비대는 라딤노 방향으로 반격을 감행하여 라딤노와 야로스와프 수비대 일부를 구출했다. 9월 24일, 디미트리예프는 포위 공격을 개시했으며, 9월 26일에는 요새를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충분한 공성 포병을 보유하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3일간의 공격에서 러시아군은 40,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월 3일, 러시아군은 동부 요새군[2]을 공격했으나, I/1 "리시츠카" 요새를 제외하고는 돌파에 실패했다. 10월 5일에는 러시아군이 항복을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10월 7일 새벽 3시에 리시츠카 요새에 대한 침투에 성공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10월 8일, 러시아군은 요새의 북부 구역[3]을 공격했으나 철조망 방어선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10월 9일, 제3군 사령관 보로예비치가 이끄는 구원군은 산 강까지 러시아군을 밀어냈다. 여기다 더해 독일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바르샤바를 향해 공세를 개시한 것도 도움이 되어, 디미트리예프는 결국 10월 11일부로 포위를 해제하고 산 강 너머로 철수했다. 제1차 포위전에서 러시아군은 총 10,000명의 손실을 입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사망 313명, 부상 1,282명, 실종 29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후 213대의 보급 열차가 요새에 진입했으나, 필요한 보급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2.2. 제2차 포위전(1914.11.5 - 1915.3.22)

10월 말, 힌덴부르크비스와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하면서 보로예비치의 제3군도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11월 4일, 프셰미실 요새 사령부는 민간인 강제 퇴거령을 발령했다. 11월 5일, 러시아군은 프셰미실-자고시 철도를 차단하여 마지막 보급로마저 봉쇄했다. 이 시기 갈리치아의 악천후로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 다른 보급로 활용도 불가능했다. 11월 9일, 러시아군은 프셰미실 요새를 재포위했다. 이번에는 디미트리예프 대신 안드레이 셀리바노프가 이끄는 제11군이 포위를 담당했다. 그런데 셀리바노프는 이전과 달리 정면 돌파 대신 요새를 고립시켜 보급을 차단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1915년 1월 23일부터 2월 27일까지 보로예비치의 구원군은 세 차례에 걸쳐 카르파티아 산맥을 통한 구원 작전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2월 말, 콘라트는 요새 사령관 헤르만 쿠스마네크에게 더 이상의 구원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포위 상황이 길어지면서 요새 내부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요새 의무관 요제프 토만(Josef Tomann)의 일기에 따르면, 병원에서는 십대 소녀들을 간호사로 고용했으나 이들은 장교들의 성적 착취에 노출되었고, 매일같이 성병 환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콜레라도 함께 창궐했으며,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21,000마리의 군마 중에 13,000마리를 도살해 식량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크라쿠프의 "Nowa Reforma" 신문은 3월 초까지도 요새의 상황이 양호하며 학교와 극장이 정상 운영되고 있다는 낙관적인 수비병의 편지를 게재했다. 결국 3월 14일까지 외곽 방어선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거나 파괴되어 위기를 맞고 말았다. 3월 19일,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쿠스마네크가 직접 나서서 마지막으로 돌파를 시도해봤으나, 약 5,5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쿠스마네크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허가를 받아 명예로운 항복을 결정했고, 같은 날 모든 군사 문서의 소각이 시작되었다. 3월 22일에는 모든 포병 무기가 파괴되는 동안 알로이스 마르티네크(Alois Martinek) 대령과 오토카르 후베르트(Ottokar Hubert) 중령이 셀리바노프와 투항 협상을 진행했고, 수비대는 항복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공식 전황보고를 통해 4개월 반의 포위전과 모든 전력을 다한 끝에 명예로운 항복을 했다고 발표했다. 쿠스마네크를 비롯해서 8명의 장군, 93명의 고위 참모, 2,500명의 장교, 117,000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은 민족별로 분류되어 투르키스탄,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등지로 이송되었다.

러시아군이 입성한 후에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약탈과 폭력이 발생했다. 헬레나 야블론스카의 일기에 따르면, 코사크 병사들이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회당에 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채찍으로 구타했으며, 일부 유대인들은 지하실에 숨었으나 그곳까지 추적당했다고 한다. 4월 25일 니콜라이 2세요새를 방문하여 승리를 자축했다.

2.3. 제3차 포위전(1915.5.18 - 1915.6.3)

1915년 5월 2일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의 성공으로 전황이 역전되었다. 러시아군은 후퇴하면서 프셰미실 주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전 전투에서 덜 파괴된 요새들을 활용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5월 16일 독일군이 프셰미실에 도달했고, 5월 18일부터 요새에 대한 포위가 시작되었다.

5월 31일 결정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 공격은 요새의 북서부 방어선에 집중되었다. 맹렬한 박격포 공격 이후 바이에른 부대, 프로이센 연대, 오스트리아 저격병 부대가 공격에 나섰다. 브루실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5월 19일에는 러시아의 L.N. 고바토 장군이 보병 반격을 직접 지휘하다 전사했다.

바이에른 제22보병연대는 X "오제호브체"와 XI "둔코비치키" 요새를 점령했고, 같은 날 저녁 오스트리아 저격병 대대가 XII "베르너" 요새를 점령했다. Xb "자그로드니아"와 IXa "크시즈" 요새는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6월 3일 새벽 3시 30분, 바이에른군이 자사니아 방면에서 처음으로 시내에 진입했고, 이어서 서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4기병사단이 자사니아 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입했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면서 산 강의 다리들을 파괴했다. 6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총사령관인 프리드리히 대공이 탈환된 요새를 방문했다. 이후 프셰미실 요새는 1918년 10월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제국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독립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3. 결과

프셰미실 공성전의 영향과 결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체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전투에서 144,000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했다. 특히 2,500명이 넘는 장교들이 포로로 잡혀 숙련된 지휘관들을 잃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더 이상 독자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동부전선은 물론 발칸 전선에서도 독일의 지원 없이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의존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사실상 독일의 위성국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했다. 동맹국 내에서의 발언권도 크게 약화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경우,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프셰미실 함락 후 헝가리 평원으로의 진격이 예상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67일 만에 요새를 다시 상실했다. 50,000명 이상의 병력 손실도 있었지만, 러시아로서는 더 큰 전략적 기회를 놓친 것이 문제였다. 이 전투의 결과는 주변국들의 전쟁 참여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루마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약화를 지켜보면서 협상국 측으로의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도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동맹국들의 전체적인 전략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서부전선이탈리아 전선에서 계획했던 공세들을 중단해야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군의 재배치가 필요했다. 이는 전쟁 전체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프셰미실 공성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심각한 군사력 약화는 제국의 전반적인 통치력 약화로 이어졌고, 이는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의 독립 요구를 더욱 강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주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프셰미실 공방전은 단순한 요새 공방전을 넘어 제1차 세계대전의 향방과 전후 유럽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 후에 독일 제국 참전[2] XIV "후르코", XV "보레크", IV "옵틴", I/2 "비쿠프", I/3 "플레쇼비체", I/4 "마루슈카", I/5 "포포비체", I/6 "제비엔치체"[3] Xa "프루흐니츠카 드로가", XIa "체겔니아", XI "둔코비치키", XII "주라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