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제브뤼헤 급습 Zeebrugge Raid Aanval op de haven van Zeebrugge Raid sur Zeebruges | |||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습격 작전 이후 제브뤼헤 항구 도면 | |||
날짜 | |||
1918년 4월 23일 | |||
장소 | |||
벨기에 제브뤼헤 항구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영국군 [[틀:깃발| ]][[틀:깃발| ]][[존 젤리코| ]] [[틀:깃발| ]][[틀:깃발| ]][[로저 키스| ]] [[틀:깃발| ]][[틀:깃발| ]][[레지널드 베이컨| ]] | 독일군 [[틀:깃발| ]][[틀:깃발| ]][[루트비히 폰 슈뢰더| ]] | |
병력 | 해병대 1,700명 구축함 1척 | 기록 없음 | |
피해 규모 | 전사 227명 부상 356명 구축함 1척 침몰 | 전사 8명 부상 16명 | |
결과 | |||
독일군 승리 | |||
기타 | |||
영국 해군의 벨기에 U-보트 기지 봉쇄 시도 제2차 세계 대전시 생나제르 습격전의 모델이 됨 |
영어: Zeebrugge Raid
네덜란드어: Aanval op de haven van Zeebrugge
프랑스어: Raid sur Zeebru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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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브뤼헤 급습은 1918년 4월 23일 영국 해군이 독일 제국이 점령한 벨기에 제브뤼헤 항구를 봉쇄하기 위해 시도한 작전이다. 영국군은 오래된 함선들을 시멘트로 채워 운하 입구에 침몰시켜 독일 잠수함들이 항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당시 이 항구는 독일 제국 해군의 잠수함 기지이자 경함선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영국 해협과 남부 북해 지역에서 협상국의 통제를 위협하는 요소였다.2. 배경
2.1. 전략적 중요성
1916년 말부터 영국 해군은 제브뤼헤와 오스텐더에 대한 합동 작전을 여러 차례 구상했다. 그러나 상륙군에 대한 보급 문제와 독일군의 지상 반격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계획들이 모두 기각되었다. 1917년 초에는 작전 허쉬(Operation Hush)라는 이름으로 벨기에 해안 상륙 작전이 계획되었으나 이 역시 실행되지 못했다.잠수함에 의한 선박 손실이 증가하면서 항구 봉쇄 방안을 찾는 것이 시급해졌고, 영국 해군성은 마침내 습격 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존 젤리코 제독이 1917년에 처음 제안했고, 로저 키스 제독이 계획을 수정하여 1918년 1월에 최종 승인되었다.
2.2. 작전 준비
작전을 위해 그랜드 플리트에서 특수임무 지원자를 모집했다. 봉쇄에 사용될 구형 순양함들은 채텀에서 2,000여 명의 작업자들에 의해 특수 개조되거나 불필요한 장비가 제거되었다. 첫 시도는 4월 초에 계획되었으나, 연막 작전에 필요한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아 취소되었다.2.3. 주요 작전
1918년 4월 23일, 영국 해군은 제브뤼헤와 오스텐더 항구를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우선 구형 순양함 빈딕티브호가 머지강의 페리선인 대포딜호, 아이리스 2세호와 함께 1마일 길이의 방파제를 공격했다. 이 선박들에는 200명의 수병과 한 개 대대의 해병대가 탑승해 있었으며, 이들은 운하 입구의 독일군 포대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두 번째로, 폭약을 가득 실은 C1호와 C3호 잠수함이 방파제와 해안을 연결하는 고가교 파괴를 시도했다. 이는 방파제에 주둔한 독일군 수비대를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시멘트를 가득 실은 테티스호, 인트레피드호, 이피게니아호가 운하 입구를 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작전 도중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바람의 방향 변화로 인해 영국군의 연막이 오히려 해안 쪽으로 밀려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 함선들이 독일군 포대의 시야에 그대로 노출되어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또한 빈딕티브호가 독일군의 포격을 받아 계획된 위치가 아닌 곳에 상륙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해병대는 중화기 지원 없이 전투를 치르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2.4. 작전 결과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일부 작전 목표는 달성되었다. C3 잠수함의 리처드 샌드포드 중위는 성공적으로 고가교까지 접근해 폭약을 폭발시켜 이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봉쇄함 중에서는 인트레피드호와 이피게니아호가 운하의 가장 좁은 지점까지 도달해 자침에 성공했다. 반면 테티스호는 수중 그물망에 걸려 엔진이 고장 나면서 운하 입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침몰하고 말았다.3. 결과
제브뤼헤 습격 작전 이전에는 매일 두 척의 잠수함이 플랑드르 기지에 드나들었고, 이 빈도는 작전 이후 일주일 동안도 유지되었다. 봉쇄함들이 잘못된 위치에 침몰하면서 운하는 며칠 동안만 막혔을 뿐이었다. 독일군은 봉쇄함들 근처 운하 서쪽 둑의 두 부두를 제거하고 함미 근처의 퇴적물을 준설했다. 이로 인해 고조 때는 잠수함들이 새로운 수로를 통해 봉쇄함들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6월까지 평균 통행량이 유지되다가 하루 한 척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일부분 6월 9일의 제브뤼헤 포격 때문이었다. 피해가 복구된 후에도 U-보트 통행량은 작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는 6월에 도버 해협에서의 작전이 너무 위험해졌다는 보고 이후 일부 U-보트가 독일로 소환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통상적인 해결책인 구축함 습격 횟수 증가도 제브뤼헤 항구 사용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가능했다.
피해 상황을 보면, 영국군은 227명이 전사하고 35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구축함 1척이 침몰했다. 반면 독일군은 8명이 전사하고 16명이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 또한 영국군은 작전에 참여한 1,700명 중 대다수가 사상자가 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4. 기타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이 전투의 무대 중 하나인 제브뤼헤 항구를 배경으로 한 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