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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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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덕왕지기삼사
2.1. 당태종모란꽃2.2. 옥문지의 개구리2.3. 자신의 최후를 예지하다
3. 영묘사 건축과 두두리4. 첨성대5.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이유6. 지귀 설화7. 밀본 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8. 선덕여왕의 남편9. 선덕여왕의 화주10. 천곡사 창건 설화

1. 개요

선덕여왕의 관련 설화들을 나열한 문서.

선덕여왕과 관련해서는 현재 많은 설화들이 존재하고, 이들 설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특히 불교와 연관되어 있다. 선덕여왕과 불교가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불교가 신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선덕왕지기삼사

아마 선덕여왕이라고 하면 곧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과 관련해서는 '선덕왕지기삼사' 즉 '선덕왕이 미리 안 3가지 일'이라는 설화들이 유명하다.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에도 꽤나 유명한 설화였던 모양인지,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정사라는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으므로 둘 다 기술한다.

2.1. 당태종모란꽃

첫째,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3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첫째.
선대 임금(진평왕) 대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은 비록 아주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꽃씨를 심어보았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임금이 되기 전, 아버지 진평왕이 재위하고 자신은 덕만공주였던 시절 일화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이를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대답하는 부분도 있다. 그건 아래의 '옥문지와 개구리' 참고.

하지만 사실 모란꽃은 멀쩡히 향기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모란 항목 참조. 이 설화가 실화였다면, 그건 선덕여왕이 중국 동양화 읽는 법을 몰라서 황당한 오해를 했고, 신하들은 여왕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과연 향기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된다.

다만 당시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마냥 그렇게만 보기도 어렵다. 후술.

2.2. 옥문지의 개구리

둘째,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사나흘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ㆍ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1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둘째.
여름 5월, 개구리가 궁궐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개구리의 성난 듯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지명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웃 나라 병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려고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5년(636).
일단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린 이야기가 이렇다. 이 기사를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없고, 여왕이 첩자를 부렸다는 설, 혹은 여왕이 방어에 성공한 다음 불교계가 퍼뜨린 프로파간다라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막아낸 건 잘한 일이었다.[1]

삼국유사에는 '여근곡', 삼국사기에는 '옥문곡'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여근곡/옥문곡이 어디인지를 두고 삼국유사 등을 기반으로, 경주시 근처에 지금도 실제로 있는 골짜기 '여근곡'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위치의 문제도 그렇고 당시 나제의 상황도 그렇고 특히 '독산성을 치려고 하였다'는 정황을 보았을 때 경주 근처 여근곡은 말이 안 된다.[2] 그냥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서부 전선의 어딘가로 보아야 옳다.

신종원 등의 주장에 따르면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이 둘 다 여성의 음문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연이 그냥 경주에 실제로 존재하는 여길 여근곡이라고 대충 비정해버린 듯하다고 한다. 실제 이 아래의 기사는 그러한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위의 모란꽃 일화와 개구리 일화를 두고 신하들이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걸 미리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의 대답이 다음과 같았다.
"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그래서 쉽게 잡을 줄도 알았소."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3가지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이들이다. 당나라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둘째.
그런데 실제 역사 속 당나라에서 모란꽃나비가 같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기는 대단한 실례였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모란꽃을 부의 상징으로, 나비를 '영원하지 못함'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모란꽃과 나비가 한 그림에 같이 그려진 그림이란 '영원하지 못하고 머지 않아 고갈될 부'란 상징이 되므로, 선물을 할 때는 반드시 나비를 뺀 모란꽃 그림을 선물했다. 결국 위의 설화가 실화라면 모란꽃 설화는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니라, 사실 그러한 문화 차이를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서 "저놈이 나 노처녀라고 씹는 거지?"라고 오해한 이야기라는 것.

다만 마냥 선덕여왕 혼자만의 급발진이라고만 하기도 뭐하다. 선덕여왕의 입장에서 당 태종은 얼마든지 타국에 그런 식으로 돌려까기를 시전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버젓이 당 태종이 신라에 대해 "니들은 여자를 왕으로 세워서 모시니까 백제나 고구려가 니들을 만만하게 보고 자주 쳐들어오는 거다. 내가 우리 종실 중에 한 명 뽑아 너희 나라 왕으로 세우고 겸해서 군사도 같이 보내 놓으면 걔네들 다시는 못 그럴걸?"이라고 발언한 기록이 나온다. 그것도 당나라에게 신라가 위급한 상황임을 알리는 신라 사신 면전에서.[3]
내가 변경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 너희 나라는 저절로 풀려서 1년 정도는 포위가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군대가 없음을 알면 도리어 멋대로 침략하고 업신여겨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질 것이니,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내가 또 너희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으니, 두 나라의 군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워서 늘어놓으면 그것을 본 자들이 나의 병사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국은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兵器)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럽게 섞여서 서로 연회만 베풀고 있는데,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병사를 싣고 소리 없이 바다를 건너서 곧바로 그 땅을 습격하려 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서 도둑을 불러들여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종친 한 사람을 보내 너희 나라의 왕으로 삼을 것인데, 혼자서는 왕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서 호위하며, 너희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너희에게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고 한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너는 잘 생각해 보라. 장차 무엇을 따르겠는가?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善德王) 12년(643년) 9월#

신라에만 남은 기록도 아니고 당나라의 책부원귀에 실린 기록을# 삼국사기가 편찬될 때에 옮겨온 이 기록은 아무리 당시 신라가 수도 서라벌 코앞까지 위협받을 정도로 위태로웠고 선덕여왕에게 군주로서 난관을 해결할 역량이 부족했다고 해도, 그리고 문제의 발언 뒤에 '나중에 신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다시 신라인들에게 정치를 돌려 주겠다.'는 단서를 붙이긴 했어도, 선덕여왕뿐 아니라 신라인들 입장에서 심각한 모욕이며 위협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당 태종의 신라에서의 이미지를 상정하기에 충분하다. 전근대뿐 아니라 현대의 기준에서도 외교적 결례가 된다.[4] 말로는 나라가 안정되면 신라 임금의 자리를 다시 신라인들에게 돌려준다고 했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바보는 없다. 이미 신라는 당으로부터 한 번 감정의 '스크래치'를 입은 상황이었던 것.

모란꽃 그림도 당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자국에 모란꽃 그림에 나비를 안 그리는 문화가 존재했고, 선덕여왕에게 모란꽃 그림을 보낸 것이 정말 자신들 풍습대로 선의를 담아 보낸 것이든 선덕여왕의 판단대로 선덕여왕과 신라라는 나라를 애둘러 조롱할 목적이 있었든, '좋은 마음으로 선물했더니 니들 혼자 왜 그렇게 억지로 고깝게 해석하느냐?'고 해 버리면 그만이다. 신라가 사신을 중국에 보낸 것이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으니 당이 신라의 문화를 전혀 몰랐다고 할 수도 없고[5] 신라의 입장에서 "축하 선물이라고 보낼 게 모란꽃 그림밖에 없었냐? 다른 거 많잖아?"라고 반박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물론 의심이라는 게 한 번 갖다 붙이자면 끝도 없는 거고 자칫 병림픽 나서 피차간 감정 골 패이기 딱 십상인 데다, 모란꽃 그림도 정말 당의 입장에서는 별 생각 없는 선의로 보낸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당과 신라 사이의 문화 차이로 인한 오해가 있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당시 당나라가 신라를 고구려나 백제 다음으로 자국의 헤게모니 안에 들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고, 선덕여왕이나 신라인들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 선물을 마냥 순수한 선의로만 여길 수 없는 정황 배경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얘기다. [6]

선덕여왕에게는 남편이 있었다는 내용이 다른 책도 아니고 (지기삼사 설화가 기록된) 삼국유사에 있다. 음갈문왕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에 이미 고령이었으므로, 원래 남편이 있기는 했으나 당 태종이 그림을 보낼 당시에는 사별한 몸이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록상 충돌은 없어진다.

다른 설로는 경주 외곽의 여근곡이 전장이 맞는데 선덕여왕이 아닌 진성여왕 시대의 사실이 각색, 와전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7] 먼 훗날 진성여왕 시대에 통일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무너지면서 경주 서쪽 모량리에 적고적 등 도적이 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나오는데, 여왕이란 공통점 때문에 선덕여왕 시대의 일화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2.3. 자신의 최후를 예지하다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셋째.
이 설화는 삼국사기에 없다. 삼국사기는 '낭산에 장사지냈다' 하고만 짧막하게 기록하였다.

그 외에 삼국유사보다 조금 더 앞서 고려 고종대에 편찬된 해동고승전에도 '승려 안함의 비문에 의하면, 선덕여왕을 도리천에 장사지냈다.'는 구절이 있다.#. 즉 삼국유사의 위 기록은 일연이 살던 고려시대에 아직 남아있던 안함의 고승비가 출처인 듯하다.[8]

이 설화는 불교가 말하는 우주론을 알아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불교 우주론에서는 이 세상의 중심에는 터무니없이 높고 거대한 수미산이라는 산이 있다. 수미산을 가운데에 두고 동심원처럼 산맥과 대해(大海)가 몇 겹으로 둘러싸는데, 그중 남쪽 바다에 있는 대륙 남섬부주(南贍部洲)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사는 사바세계이다.

수미산의 중턱에는 사천왕이 거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고, 산 정상에는 제석천(인드라)을 필두로 한 신들이 사는 도리천(忉利天)이 존재한다. 수미산 정상, 도리천 위쪽으로는 미륵이 거처한다는 도솔천(兜率天) 등등 하늘들이 여럿 존재한다. 이중 사천왕천과 도리천은 일단 '하늘'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수미산이라는 '땅'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하늘'이라고 할 순 없으므로 지거천(地居天: 땅에 거하는 하늘)이라고 구분한다. 도리천 위쪽으로 있는 하늘들은 말 그대로 공중에 있는 세상이라 공거천(空居天: 허공에 거하는 하늘)이라고 분류한다.

불교에서는 도리천이 인드라 등등 신들의 세상이므로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사람으로서 도리천에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외들이 있는데, 부처나 신통력을 터득한 아라한, 그리고 전륜성왕 정도이다.

선덕여왕이 경주 낭산을 '도리천'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거기 묻으라고 했다는 설화를 보자. 문무왕이 낭산 아래쪽에 사천왕사를 세웠기 때문에, 사천왕사의 위쪽에 있는 낭산은 수미산의 사천왕천 위쪽에 있는 도리천이 된다는 것이다. 설화대로라면 선덕여왕은 자신을 도리천에 들어간 군주, 즉 전륜성왕이라고 자칭한 셈이다. 또한 수미산 꼭대기인 도리천이 경주 낭산이라고 한다면, 신라 땅이 (상징적으로나마)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이라는 말이 된다.

선덕왕이란 왕명에서 '선덕'은 불경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의 명칭을 따온 것인데,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너는 미래세에 전륜성왕이 되리라.' 하는 수기(예언)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덕여왕이 자신을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단 설화는 선덕여왕을 전륜성왕이라고 주장하면서, 또한 석가모니의 수기가 신라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도를 연출한다.

불교 우주론을 이해하고 나면, 낭산 도리천 설화야말로 선덕여왕 우상화의 중핵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3. 영묘사 건축과 두두리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선덕여왕 시대에 영묘사를 건립할 당시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역시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였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편이다.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마지막 부분에도 영묘사 건축이 언급되는데,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양지사전은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불명이다.

2015년 국가공무원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 한국사 시험 6번 문제에 2번 선택지로 영묘사가 언급되었다.

4. 첨성대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마지막 부분 따르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별기(別記)에 전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별기 또한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5.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이유

황룡사 9층 목탑과 관련해서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승려 자장율사가 당나라의 태화지 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서는 말했다.
신라여왕이 다스리니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나의 맏아들인데,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거든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워라. 그리하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할 것이다.

그래서 자장이 그 말을 듣고는 선덕여왕에게 가서 9층탑을 지어야 한다고 했고, 선덕여왕이 이 말을 믿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다. 추가적인 이야기는 황룡사, 아비지 문서 참조.

6. 지귀 설화

삼국유사 제4권 의해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공이 영묘사의 몇몇 곳에 새끼줄을 둘러치고 3일 후에 풀라고 하였다. 과연 3일 만에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방문했을 때, 지귀가 탑을 불태웠으나 혜공이 새끼줄로 맨 곳은 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귀'라는 귀신과 영묘사 탑의 화재 사건만 살짝 언급할 뿐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조선 시대 책인 '대동운부군옥'에 지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덕여왕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지귀가 선덕여왕이 불공 드리는 절에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탑 아래에서 지쳐서 잠이 들자, 선덕여왕이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팔찌를 지귀의 가슴 위에 놓고 갔다. 지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9], 가슴부터 온몸이 불타올라 탑까지 태우고 결국 불의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지귀주사(志鬼呪詞)를 짓게하여 지귀의 화재를 방비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 이미 50살이 넘은 고령이었고, 당시 기준으로는 그냥 할머니였다.

이 설화의 유래는 중국 불교 설화인 술파가설화로 추정된다.

7. 밀본 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

삼국유사 신주 편에 기록된 이야기. 선덕여왕이 병에 걸리자 흥륜사의 스님 법척을 불러서 병 간호를 하게 했는데 낫지 않았다. 그래서 밀본 법사를 불러 경을 읽게 했고, 밀본은 경을 읽은 뒤 막대기를 침실로 던졌다. 그러자 늙은 여우 1마리와 법척이 찔려 쓰러지고 왕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8. 선덕여왕의 남편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의 국서(여왕남편)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음(飮)을 반(飯)의 오기로 보아서 진평왕의 두 아우인 김국반, 김백반 중 한 명과 음갈문왕이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당장 진평왕 삼형제의 도 고모와 조카 사이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선덕여왕이 용춘, 을제, 흠반의 세 남편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9. 선덕여왕의 화주

선덕여왕은 화주(火珠)라고 하는 수정 돋보기를 가지고 있었다. 햇볕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어 화주라고 불렀다. 삼기팔괴 중 하나로 꼽힌다. 삼기팔괴,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수정화주 문서 참고.

10. 천곡사 창건 설화

포항의 천곡사에서 전해지는 설화로, 선덕여왕이 천곡령의 샘물에서 목욕한 뒤 피부병이 나아 자장율사로 하여금 그 곳에 천곡사를 짓게했다고 한다.


[1] 이는 무왕 본기에도 나온다. 군사 500명을 보내 독산성을 함락하려 출병한다. 그런데 잠시 쉬고 있는데, 알천이 기습해 전멸시키고 장수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군사 500명으로 함락될 만큼 성의 규모가 작았다고 볼 수 있다.[2] 이 곳은 골짜기 내부가 밖에서 훤히 보이므로 매복이 불가능하다.[3] 학계에서는 당 태종의 이 발언을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신라까지 장악하려는 당의 동북아 전략이 신라가 원병을 요청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방증으로 해석한다.(김창석, 2010,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제언과 모색』, 동북아역사재단).[4] 현대 기준에서 봐도 미국 대통령이나 중국 주석이 한국 외교관에게 "니들 나라 대통령이 뭐 같아서 정치도 국방도 엉망인데, 우리가 사람 하나 보내 줄 테니까 지금 대통령 하야시키고 새로 보내는 걔 출마시켜서 대통령 시켜라'라고 했다고 생각해 보자. 신라 왕실의 다른 남자 종친도 아니고 당 태종 자신의 인척을, 아무리 (애초에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여성에다 군주로서 모자란 점이 많다지만 엄연히 신라 성골 왕실의 적통인 선덕여왕을 퇴위시키고 당의 종친을 새로운 신라 왕으로 삼아 모시라는 것은, 한 마디로 신라 왕국의 왕통 자체를 바꿔 버리겠다는 신라로서는 충분히 위협적이며 심각한 발언이다. 말 좀 험하게 보태면 경술국치의 신라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5] 당나라는 외교 문제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건드리지 않는 한, 그 나라 문화를 최대한 존중해 당의 국내에 거주하는 이국인 커뮤니티에 대해서도 최대한 자치권을 인정했던 나라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당 현종 때에 대식국(페르시아)에서 온 사신이 마침 무슬림으로 현종에게 절을 하지 않았어도 '저 나라 애들은 원래 자기네들 모시는 유일신 앞이 아니면 왕한테도 절을 안 합니다'는 이슬람의 법도에 대해 장열에게 전해 듣고 "그네들 풍속이 그렇다면 그러라고 해라." 하고 넘어가는 등 최대한 그 나라 사신의 문화에 맞춰주었다.[6] 이후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나당전쟁이 벌어졌음을 생각하면 결코 쓸데없는 피해의식이 아니었다.[7] 김선주, <선덕왕 지기삼사의 형성 시기와 배경>[8]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이미 고려시대에 안함의 석비에는 이끼가 끼고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고려 말에서 또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이 비석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9] 혹은 만나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며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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