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9:14

종묘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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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A3B2><colcolor=#fff>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Royal ancestral ritual in the Jongmyo shrine
and its music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정번호 16
등재연도 2001년
목록구분 대표목록

1. 개요2. 어가행렬
2.1. 고증2.2. 복식2.3. 행차 구성
3. 종묘제례
3.1. 절차3.2. 제관3.3. 제수·제기3.4. 제복
4. 종묘제례악
4.1. 역사와 구성4.2. 음원 자료4.3. 동영상 자료4.4. 악단과 무용수 배치4.5. 장단에 대한 연구들
5. 예행 행사 관련
5.1. 관람 예약
5.1.1. 종묘제례 부정 예약논란
5.2. 휴행
6. 여담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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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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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제례' 또는 '종묘대제'로 불린다.

종묘에서 거행하는 조선대한제국의 국가적인 제향의식.

1975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1],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 2008년에는 세계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통합되었다.

2. 어가행렬

어가행렬(御駕行列)은 말 그대로 가마에 탄 국왕이나 황제가 행차하는 것을 말한다. 전제 군주가 집권하는 국가에서 국왕의 안위는 국가의 존립과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자신의 집인 궐을 나와서 먼 곳으로 행차할 시에는 국왕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는 여러 문반 관리와, 왕실의 사무와 잡일을 도맡는 서리와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장물을 쥔 인물들과 가마꾼, 왕실의 호위를 맡는 군사와 장수들이 행차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왕이 한번 행차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 천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종묘대제의 어가행렬은 종묘에 제례를 지내기 위하여 대한제국 시기의 황제황태자를 포함한 여러 문무관리들이 종묘로 함께 따라서 행차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현행 어가행렬은 조선 시대대한제국 시기에 동원되었던 대규모의 행차를 축소한 형태로, 1년에 1~2번 볼 수 있는 특별한 조선 왕실의 전통 문화와 관련된 볼거리로 제시하고 있어 문화재청(後. 국가유산청)과 한국문화재재단, 종묘대제봉행위원회 등이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거행하는 궁중문화축전의 프로그램 중 일환이자 궁중문화축전의 마지막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종묘대제의 부속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2.1. 고증

현행 종묘대제는 과거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한다기보다는 지금의 시기에 맞추어 변통할 것은 변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왕조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백년에 이르러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의례인만큼 재현의 개념도 포함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재현을 하려면 어떠한 시기를 재현해야하는지를 설정해야하는데, 어가행렬의 경우 여러 의궤에 실린 반차도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팔일무, 십이장복 등의 춤, 복식에서도 대한제국의 시기로 설정되어있는만큼 어가행렬 재현 시기 역시 대한제국의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기초가 되는 자료는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중인 대한제국동가도 유물에서 보이는 고종 시기의 행차도를 참고하여 재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

다만 참여하는 인물들의 복식이나 의장의 구성으로 봤을 땐 분명 황제국인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되었던 것들을 재현하고 있으나, 행차 중 배역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시하고 있는 각종 깃발에서는 왕, 세자와 같은 조선시대의 제도로 밝히고 있어서 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에 배역 구성에 있어서 정확한 설정과 설명이 필요하다.

2.2. 복식

앞서 밝혔듯 고증 시기를 대한제국 시기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조선 말 ~ 대한제국 시기의 복식들로 재현되고 있으나, 2~30년전에 사용되던 복식을 그대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어 고증에 있어서는 조금 더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수 천명이 입는 복식들을 일일이 고증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요 역할인 황제 역할의 인물은 여러 전문가들의 고증과 자문을 토대로 제작된 강사포(絳紗袍)와 통천관을 착용하고 있다. 아래는 강사포 차림을 한 황사손 이원의 모습이다.

파일:황사손통천관복.jpg

그 외에 인물들은 조복, 군복, 철릭, 의장수의 홍의, 청의, 단령, 갑주 등의 복식을 각자의 배역에 맞춰 착용하여 행사에 참여한다.

2.3. 행차 구성

어가행렬 행차 구성은 아래 이미지와 같으며 매년 1,000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3]된다.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는만큼 많은 보조출연자들이 참여하는데, 출연자들이 복식이나 의장을 단정히 갖추거나 제대로 쥐지 않아 어가행렬의 행차 퀄리티가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파일:어가행렬 구성.jpg

이러한 어가행렬은 종묘대제 뿐만 아니라 사직대제, 환구대제의 제례 행사에서도 볼 수 있고, 매년 재현되는 각종 지자체의 축제 행사에서도 재현된다. 그러나 참여하는 국왕이나 황제의 역할의 경우 실제 직계 황손이자 2005년 7월, 회은황세손 이구(懷隱皇世孫 李玖)가 후사없이 타계함으로서 사후 조선 및 대한제국의 500년 법통 제위(입승대통)를 정식 계승받은 황사손 이원(皇嗣孫 李源)이 맡는다는 점에서 가장 정통이 높고 왕의 복식도 가장 원형에 가깝고 높은 퀄리티의 복식을 착용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 종묘제례

종묘제례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수많은 제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사계절과 납일(臘日)에 올리는 5대향, 수시로 올리는 천신제(薦新祭), 영녕전과 사직에서 , 가을 및 납일에 올리는 3대향이 있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1969년부터 종묘제례보존회(전주이씨 대동종약원)가 행사를 주관한다. 현재 예식은 대한제국의 제도를 따라 천자국(황제국)의 양식으로 시행하고 있으며,[4] 크게 제향을 봉행하기 위해 임금이 종묘에 이르러 재계하는 절차인 어가행렬과 제례봉행(제례악, 일무 포함)으로 나뉜다.

제례봉행에 동원되는 제관들은 전주 이씨 중에서도 족보상의 정통성을 갖춘 사람들을 1순위로 선발한 인력으로, 2순위는 그들의 왕비 일가나 문중이 동원된다고 전해진다. 국왕을 재연하는 사람은 왕의 종친 중에서 가장 촌수가 가까운 사람인데, 현재 그 역할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후손(고종의 증손자)인 황사손(皇嗣孫) 이원이 명목상 황제로서 매년 양력 5월 첫째주 일요일, 11월 첫째주 토요일에 그 종묘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3.1. 절차

종묘제례악이든 문묘제례악이든 옛 제례의 절차를 모른다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흔히 일반 사가에서 지내는 유교식 제사와 기본 틀은 비슷하지만, 한층 복잡하고 엄격하여 매우 장황하기까지 하다.
  • 영신(迎神): 왕과 왕비의 혼을 부르는데 닭피와 털, 고기를 기름에 버무려 쑥불에 태운다. 집박이 끝나면 악장이 <희문곡>(熙文曲)을 아홉 번 반복해 부르는데, 헌가에서 연주하고 문무(文舞)를 춘다.
  • 전폐(奠幣): 신들에게 폐백(비단)을 올린다. 등가에서 《전폐희문》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 신관(晨祼): 초헌관이 제사지내는 방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땅에 울창주를 부음으로써 역대 국왕들의 혼백(魂魄)을 맞아들인다. 향을 피움으로써 하늘에 있는 '혼'(魂)을, 울창주를 부음으로써 땅에 있는 '백'(魄)을 부른다. 유교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혼과 백으로 나뉘어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간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생긴 절차이다. 왕이 친제할 때는 당연히 임금이 몸소 신관을 행한다. 지금은 왕이 없으므로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이구가 죽은 이후에는 이구의 사후 양자가 된 황사손 이원이 한다.
  • 진찬(進饌): 신들에게 음식을 올린다. 기본적인 음식은 제사 전에 미리 차려두지만, 중요한 음식을 이때 올린다. 연주는 헌가에서 《진찬악》을 연주하고 춤은 추지 않는다.
  • 초헌(初獻): 신들에게 첫 번째 술잔을 올린다. 전폐와 마찬가지로 등가에서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이때 《보태평》 전곡을 모두 연주한다.
  • 독축: 독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 아헌(亞獻): 신들에게 두 번째 술잔을 올린다. 헌가에서 연주하고 무무(武舞)를 춘다.
  • 종헌(終獻): 신들에게 마지막 술잔을 올린다. 아헌과 마찬가지로 헌가에서 연주하고 무무를 춘다. 이때 《정대업》 전곡을 모두 연주한다.
  • 음복(飮福): 젯상에 차려둔 술과 음식을 먹는다. 음복은 제사를 받은 신령과 제사를 지낸 사람들이 한솥밥을 먹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5] 신이 강림한 자리에서 신이 먹었던 제사 음식을 누군가는 먹어야 하는데, 모든 참석자가 다 같이 먹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번거롭기 때문에 초헌관이 대표로 조금만 먹는다. 제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정말로 제사 음식을 나누는 것은 제사가 다 끝난 뒤.
  • 철변두(撤籩豆): 제례에 사용된 제기를 거둬들인다. 신께서 식사를 다 하셨으니 상을 물리는 것이다. 다만 정말로 제기를 다 정리하지는 않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제기 중 변과 두를 상에서 위치를 조금 옮긴다. '철변두'란 이름 자체가 변과 두를 철상한다는 뜻. '진찬'에서 연주되었던 음악을 이번에는 등가에서 연주한다. 무용 생략.
  • 송신(送神): 제사가 끝났으니 신들을 되돌려 보내는데 폐백을 함께 태운다. 이번에는 다시 '진찬'의 음악을 헌가에서 연주한다. 역시 무용 생략.
  • 망료(望燎): 사용한 축문 등을 모아서 태운다. 제사에 사용한 자잘한 것들을 깨끗이 없애면서 하늘로 돌아간 신령들에게 보낸다는 뜻이다. 음악과 무용은 모두 생략. 다만 사직에서는 태우지 않고 땅에 묻는데 이 경우에는 '망예'(望瘞)라고 한다. 사직에는 땅과 곡식의 신령을 모시기 때문에 태우지 않고 묻는다. 하지만 '망료'와 '망예'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기도 한다.

3.2. 제관

  • 초헌관(初獻官): 첫째 잔을 올리는 사람. 왕이 직접 제례를 지내는 친제(親祭)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왕이 맡았다. 왕실이 없어진 뒤로는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가 담당. 이구가 2005년 세상을 떠난 뒤로는 이구의 후계자로 지명된 황사손 이원이 봉행하고 있다.
  • 아헌관(亞獻官): 둘째 잔을 올리는 사람. 친제의 경우 왕세자가 맡음.
  • 종헌관(終獻官): 셋째 잔을 올리는 사람. 친제의 경우 영의정이 맡음.
  • 집례(執禮):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
  • 찬례(贊禮): 초헌관을 모시는 사람.
  • 천조(薦俎): 조(익힌 고기)를 받치는 사람.
  • 봉조(捧俎): 조를 받들고 가는 사람.
  • 대축(大祝): 축문 읽는 사람.
  • 감찰(監察): 모든 제례의 업무를 확인하고 감독·감찰하는 사람.
  • 우전(右奠)·묘사(廟司): 오른쪽에서 작(술잔)을 올리는 사람.
  • 내봉(內奉): 신실 안에서 작을 전해주는 사람.
  • 외봉(外奉): 준상에서 내봉에게 작을 전해주는 사람.
  • 사준(執尊): 작에 술을 따르는 사람.
  • 찬의(贊儀): 집사와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
  • 관세위(盥洗位): 손 씻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

3.3. 제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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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쓰이는 음식(제수)은 모두 40여 가지로 한 상마다 제삿상 그릇(제기) 63개에 나누어 올린다. 종묘에선 신주 27위 앞마다 이렇게 한 상씩 차리므로 제사 한 번에 제기를 1700개씩 사용하는 것이다. 제수에는 주로 오곡, 육류, 술이 마련되며 특히 간을 하지 않은 국(갱), 날고기, 양념하지 않은 것들까지 포함한다. 이는 고대의 제례에선 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천조갑(薦俎匣): 소와 양의 장, 위, 폐와 돼지껍질(豕膚)을 삶아서 담는 나무 그릇.
  • 폐비(幣篚): 흰 모시로 만든 폐(幣)를 담는 대나무 그릇.
  • 용찬(龍瓚): 강신주(降神酒)인 울창주(鬱鬯酒)를 담아 지하의 혼(魂)을 모시는 의식에 쓰이는 놋쇠 그릇
  • 목두(木豆): 물기 있는 젖은 제수 12가지를 담는 나무 그릇.
  • 죽변(竹籩): 생과실과 물기 없는 마른 제수 12가지를 담는 대나무 그릇.
  • 세뢰(洗罍): 왕이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맑은 물을 담아두는 놋쇠 그릇.
  • 작(爵): 국가에서 행하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와 궁중에서 쓰이는 술잔을 한 격 높인 놋쇠 술잔.
  • 희준(犧罇): 소 모양 술통으로 봄과 여름 제사에 한 쌍씩 현주(玄酒)와 예제(醴齊)를 각각 담아서 초헌례에 사용하는 놋쇠 그릇.
  • 상준(象罇): 코끼리 모양 술통으로 봄과 여름 제사에 한 쌍씩 현주(玄酒)와 앙제(盎齊)를 담아 아헌례에 사용하는 놋쇠 그릇.
  • 조이(鳥彝): 봄에는 울창주(鬱鬯酒)를, 여름에는 명수(明水)를 담는 놋쇠 술통. 겉에 봉황 무늬가 양각되었다.
  • 계이(鷄彝): 봄에는 명수(明水)를, 여름에는 울창주(鬱鬯酒)를 담는 놋쇠 술통. 겉에 닭 무늬가 양각되었다.
  • 착준(著罇)·호준(壺罇): 한 쌍으로 가을과 겨울 제사에 현주(玄酒)와 청주(淸酒)를 담아 사용하는 놋쇠 술통.
  • 전촉기(剪燭器): 흘러내리는 촛물과 타다남은 심지를 잘라서 넣는 놋쇠 그릇.
  • 전촉자(剪燭子): 심지를 자르고 담을 때 사용하는 놋쇠 가위.
  • 향로(香爐): 향을 피워 천상의 혼(魂)을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
  • 향합(香盒): 향을 담는 그릇.
  • 멱(冪): 마포건(麻布巾)으로 만들고 구름 무늬를 그려넣어 술통 뚜껑으로 사용.

3.4. 제복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복은 지도자가 착용하는 면복과 제관들이 착용하는 제복으로 나뉘어진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현행 종묘제례는 대한제국의 격식에 맞춰 진행중이므로 착용하는 제복 역시 대한제국의 시기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초헌관인 황제의 역할은 황사손 이원이 맡아서 하고 있으므로 황사손은 황제의 십이장복[6]을 착용하고[7], 그 외 나머지 제관들은 대한제국 시기의 제례복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현행 종묘제례에 사용되고 있는 면복과 제복의 구성은 아래와 같으며 나열 순서는 착장 순서[8]대로가 아니라 머리에 쓰는 관모부터 하나씩 차례로 내려가면서 보이는 순서대로 나열하였음을 앞서 밝힌다.

- 초헌관(황제)의 면복 구성
파일:종묘십이면류관.jpg
  • 면류관(冕旒冠) : 면복 차림시 머리에 쓰는 검붉은 빛깔의 관모로, 원통형의 관모 위에 긴 나무 판을 댄 형태이다. 나무 판 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日), 월(月)의 문양을 그려넣으며, 나무 판의 앞은 둥글며, 뒷 부분은 각진 행태다. 또한 앞이 사선으로 조금 더 낮고 뒤가 더 높은 형태이며, 나무 판의 앞 뒤에는 7가지 색채의 구슬을 12개씩 12줄을 늘어뜨렸다. 나무 판과 원통형 관모는 옥으로 된 긴 막대를 대어 서로 연결시켰고, 원통형 관모에는 옥비녀를 가로질러 꽂으며, 앞, 뒤와 비녀가 꽂는 곳, 턱끈이 달린 관자 놀이와 테두리 부분에는 금속 장식을 단다. 턱끈은 관자 놀이 부분에 각각 1개씩 달려서 내려오는데, 이 끈을 턱에 보내어 동심결(同心結)로 묶어서 늘어뜨린다.
파일:종묘방심곡령.jpg
  • 방심곡령(方心曲領) : 제복 착용시 제복 위 목 부분에 착용하여 둘러주는 것으로 둥근 목깃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중앙 부분에는 가느다란 끈이 하나 내려오고 네모난 조각을 달아준다. 면복에 사용하는 방심곡령은 좌, 우측에 붉은색과 초록색의 끈[9]을 달아서 늘어준다. 본래는 별도로 착용하나 현행 종묘제례의 방심곡령은 의(衣)와 일체형으로 구성되어있다.
파일:종묘십이장복.jpg
  • 의(衣) : 면복의 겉옷으로 흑색이어서 현의(玄衣)라고도 부른다. 의에는 6가지의 장문을 그림으로 그려넣는데, 양 어깨에는 일(日), 월(月), 등에는 성신(星辰)과 산(山), 양쪽 소매 바깥쪽에는 용(龍)과 화충(華蟲)이 있다.
파일:종묘옥대.jpg
  • 옥대(玉帶) : 면복 착용시 허리춤에 둘러주는 예복용 허리띠로, 조선시대에는 평상시 익선관복이나 강사포 차림에 사용하던 것을 면복에도 사용하였다. 허리띠의 형태는 네모난 형태이며, 아래쪽에는 금박을 대고, 그 위에 옥에 용의 모습을 투각한 과판 20개[10]를 덧붙인 형태다.
파일:종묘패옥.jpg
  • 패옥(佩玉) : 양 옆구리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으로 옥을 깎아 만든다. 형(衡), 우(瑀), 거(琚), 충아(冲牙·衝牙), 옥화(玉花), 옥적(玉滴), 황(璜) 등의 옥의 조각들로 구성되며, 황제의 경우 6채색의 패옥 받침[11]을 댄다. 위쪽에는 금속의 갈고리를 달아 옥대나 대대에 걸어준다. 현행 종묘제례의 황사손이 쓰는 패옥은 옥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걸을 때마다 옥이 부딪히는 청아한 소리가 나며, 패옥의 받침은 5채색의 패옥 받침을 사용한다.
파일:종묘후수.jpg
  • 대대(大帶) & 후수(後綏) : 후수는 뒷판 등허리 아래에서 늘어뜨리는 것이며, 대대는 후수를 가운데에 연결하여 앞으로 보내어 묶어서 늘어뜨리는 허리띠의 형태를 하고 있다. 본디 후수와 대대는 별개의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일체형으로 달아서 만든다. 대대에는 요(繞)와 신(紳)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광다회(廣多會)를 달아서 광다회를 앞으로 보내어 묶는다. 후수의 경우 위쪽 중심과 좌,우에 옥환(玉環)을 달아주며, 6채색으로 짠 후수와 망수(網綬)를 늘어뜨리나, 현행 종묘제례의 후수는 위쪽 좌, 우에 금환(金環)을 달고 5채색의 후수를 사용하고 있다.
파일:종묘규.jpg
  • 규(圭) : 규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예복 착용시 손에 쥐는 홀(笏)의 일종으로, 백옥을 산(山)자 모양의 장방형으로 깎아 만든다. 규의 아래쪽에는 비단으로 싸서 손잡이를 만드는데, 황제의 경우 황색을 사용하였다. 현행 종묘제례의 규는 옥이 아니라 아크릴을 깎아 만든 것으로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다.
파일:종묘폐슬.jpg
  • 폐슬(蔽膝) : 대례복 차림시 무릎을 가려주는 무릎가리개로, 도끼의 날을 아래로 내린 모양과 유사하다. 황제의 폐슬 가운데에는 용(龍), 화(火)의 문양을 수놓고, 테두리에는 오색의 실을 꼬아서 만든 오색 조대를 U자형으로 달아준다. 현행 종묘제례의 폐슬은 자수가 아닌 그림으로 대신하였다.
파일:종묘중단.jpg
  • 중단(中單) : 대례복 차림 시 받쳐 입는 옷으로, 소색 바탕에 옷고름, 목깃, 소매 끝, 도련과 같은 테두리 부분에 흑색의 선을 댄 것이 특징이며, 목깃 부분에는 아(亞)자와 유사한 불문 13개를 그려넣는다.
파일:종묘상.jpg
  • 상(裳) : 대례복 차림 시 중단의 허리춤에 두르는 붉은색의 예복용 치마로, 과거에는 상의 색깔로 훈색(纁色)을 써서 훈상(纁裳)이라고도 한다. 앞이 3폭, 뒤가 4폭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 앞에는 종이, 화, 조, 분미, 보, 불의 6가지 문양을 좌,우로 배치하여 수놓았는데, 현행 종묘제례의 상에는 그림으로 대체하였다.
파일:종묘적말.jpg
  • 적말(赤襪) : 대례복 차림시 신는 버선으로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다. 신기 좋게 뒷부분에는 트임이 살짝 있으며, 흘러내리지 않도록 뒤에 고름끈을 달아두어 묶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행 종묘제례의 적말은 붉은색 면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파일:종묘적석.jpg
  • 적석(赤) : 대례복 차림시 신는 목이 짧은 형태의 신으로 앞코에는 황제의 적석은 붉은색 비단으로 겉을 싸고, 테두리에는 황색의 선을 대고 발등에는 방망이술을 단다. 신발의 뒷판 중심, 양 옆에 끈이 통과할 수 있는 고리를 달고, 붉은색 고름끈을 별도로 달아 통과하여 신이 벗겨지지 않도록 묶도록 하였다. 현행 종묘제례의 적석은 붉은색 비단을 쓰나 테두리와 방망이술은 청색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성품을 토대로 열두장문으로 꾸며진 황제의 면복을 착용한 황사손의 모습은 아래 사진과 같다.
파일:황사손용교의.jpg


- 제관의 제복 구성
파일:종묘제복.jpg
  • 제관(祭冠) : 양관(梁冠)의 일종으로 양(梁)은 관모 위에 자리한 금색 줄을 말한다. 조복(朝服)에 착용하는 금관과 형태가 거의 동일하나 색채와 장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본디 조선시대에는 제복이나 조복에 모두 금칠한 양관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점점 흑칠한 제복용 양관이 등장하면서 조복용 관과 제복용 관이 구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품계에 따라 1~5량의 양관을 사용했으나, 대한제국 시기에는 1~7량의 양관을 착용하였다.[12]
  • 방심곡령(方心曲領) : 황제의 방심곡령과 형태는 동일하나, 좌, 우 쪽에 자리한 녹색과 홍색의 끈이 없다. 의에 징궈서 일체형으로 구성되어있다.
  • 의(衣) : 흑색의 겉옷이다. 조복의 의와 형태는 같으나 색상에서 차이가 있다. 현행 종묘제례에서는 흑색의 항라를 사용하고 있다.
  • 품대(品帶) : 문무백관의 예복 차림에 두르는 허리띠로 품계에 따라 서각(犀角)[13], 금(金), 은(銀), 흑각(黑角) 등의 소재가 사용되었다. 황제의 면복에 사용하는 옥대와 구성과 형태는 동일하나 색상과 품계를 구분하는 것이 목적인만큼 품계에 따라 소재나 색상에서 차이가 있다. 현행 종묘제례에서는 아크릴로 과판을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다.
  • 패옥(佩玉) : 패옥은 제복이나 조복 착용시 허리 양쪽에 착용하는 것으로 구성은 황사손의 패옥과 동일하나, 패옥 재료가 아크릴로 되어 있으며, 패옥의 받침인 소수 대신에 옥색 사로 된 것을 사용한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패옥이 서로 부딪혀 깨지거나 분실되는 경우를 막기 위하여 문무백관의 패옥은 청색의 얇은 비단으로 된 주머니[14]를 만들어 그 속에 패옥을 넣어서 착용하였다.
  • 대대(大帶) & 후수(後綏) : 후수와 대대는 국왕의 것과 거의 동일하나 뒷판에 자리한 자수의 문양이 다르다. 조선시대 후수 문양의 종류에는 운학(雲鶴)ㆍ반조(盤鵰)ㆍ연작(練鵲)ㆍ계칙(鸂䳵) 등이 있다. 후수의 윗부분에는 1·2품 금환, 3·4품 은환, 5품 이하가 동환을 품계에 따라 한 쌍씩 달았다.
  • 홀(笏) : 문무백관이 조복이나 제복 차림시 손에 쥐는 수판(手板)으로 상아로 만든 아홀(牙笏)과 나무로 만든 목홀(木笏)이 있다. 현행 종묘제례에서는 모든 제관들이 아크릴로 된 홀을 사용하고 있다.
  • 폐흉(蔽胸) : 조선 말기가 되면 폐슬(蔽膝)은 무릎이 아니라 왼쪽 가슴쪽으로 올라오게 되면서 폐흉과 폐슬이라는 명칭이 혼용되게 된다. 직사각형의 붉은 직물을 이용해 만들며, 의의 왼쪽 가슴 부분에 징궈서 고정한다. 현행 종묘대제에서는 제관들이 엎드려 절할 때와 같이 양 손을 써야할 경우 잠시 홀을 담아두는 홀집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중단(中單) : 면복과 마찬가지로 문무백관의 대례복 차림시 의 안에 받쳐 입는 옷으로 소색의 비단으로 만들며, 도련, 소매 끝 등에 흑색의 선을 댄다. 학창의와 형태가 유사하나 목깃에는 흑색 선이 없다. [15]
  • 상(裳) : 문무백관의 조복과 제복 차림시 중단 위 허리춤에 두르는 예복용 치마로 앞은 3폭, 뒤는 4폭으로 구성되어있다. 조선 말기 조복이나 제복 유물 중에서 상을 중단의 앞, 뒷자락에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현행 종묘제례 역시 이와 같은 구조로 된 것을 사용하고 있다.
  • 말(襪) : 백색의 버선을 사용한다. 현행 종묘제례에서는 백색의 버선 또는 백색의 양말도 허용하고 있다.
  • 제혜(祭鞋) : 제복 차림 시 신는 신발로 목이 짧은 혜(鞋)의 형태를 하고 있다. 현행 종묘제례에서 당상 제관은 운혜(雲鞋)를 신고, 당하 제관은 조선 후기에 보이는 제혜(祭鞋)를 신는다.

4. 종묘제례악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종묘제례악한국의 궁중 음악으로, 조선 왕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진행 할 때 사용한 음악, 성악, 춤의 일체[16]를 말한다.[17] 문묘제례악과 함께 대표적인 궁중 제례악으로 손꼽히며, 수반되는 제례 의식과 함께 국가무형문화재이다.[18] 지정 연도는 1964년. 그리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무형유산' 에도 한국 무형문화재 중 최초로 포함 및 지정되었다.

이름 그대로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역대 왕과 왕비 및 대한제국 황제와 황후의 신주(위패)가 모셔져 있는 종묘(정전, 영녕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만 연주되는 전례용 음악이다. 일종의 종교음악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데, 왕조 시절에는 음력 기준으로 연중의 큰 제사 5회 때마다 연주했다.

궁중음악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는 음악인 만큼, 일반 민속악에서 보여지는 흥겨움이나 강렬함은 없고 의전에 맞추어 엄격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대중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물놀이판소리만 가지고 한국 전통음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앙금 없는 호빵이고, 국악 전공자들도 정악과 속악 모두를 공부하고 연주하는 것이 필수인 만큼 살면서 한두 번쯤은 꼭 들어볼 만한 음악이다.[19]

4.1. 역사와 구성

종묘제례악 등 아악으로 분류되는 제례음악은 북송휘종이 창제한 《대성아악》(大晟雅樂)(1105년)에서 기원(발원)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1116년(고려 예종 11년)으로 편종편경 스물두 틀ㆍ일현금ㆍ삼현금ㆍ오현금ㆍ칠현금ㆍ구현금ㆍ슬ㆍ지ㆍ적ㆍ소ㆍ소생ㆍ화생ㆍ우생ㆍ훈ㆍ박부ㆍ진고ㆍ입고ㆍ축ㆍ어 등 아악기 20종을 북송으로부터 전수 받았다.

그러나 불교를 우선하던 고려에선 유교식 제사음악인 《대성아악》이 크게 발전하진 않았고, 여몽전쟁을 거치며 서서히 쇠락하다가 조선에 접어들어 세종세조 두 임금이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20]

현행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 치세 때 창작되거나 중국의 제례악에서 편곡 혹은 개작된 곡들이 주를 이루는데, 크게 《보태평》(保太平) 그리고 《정대업》(定大業)이라는 두 묶음으로 구성된다. 세종은 《보태평》과 《정대업》을 제사용이 아닌 회례용으로 만들었다.[21] 음악 두 묶음을 정리하고, 일부 수정/축소해서 제례악으로 바꾼 때는 세조 10년(1464년)이었다.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년) 6월 5일자 기사#
"又作文武二舞, 文曰保太平, 武曰定大業, 譜各一卷"
"...또한 문과 무 두 개의 춤을 만들었는데, 문은 "《보태평》"이라 하고, 무는 "《정대업》"이라 하며, 기록이 각 1권이며..."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년) 12월 11일자 기사#
"新樂節奏, 皆上所制, 以柱杖擊地爲節, 一夕乃定"
"...새로운 음악의 박은 임금이 다 만들었는데,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 하루 저녁에 완성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 기록은 '현재 모습'으로서 종묘제례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이전의 조선, 고려 또 그 이전 신라에도 종묘는 존재했었으며, 종묘제례도 존재했었고, 종묘제례악도 존재했다.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인류문화이다.

《보태평》은 조선왕조의 학문적인 업적, 즉 문덕을 찬양하는 곡으로 기본 조성은 본래는 임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임종평조였다. 세종 때는 <희문>ㆍ<계우>ㆍ<의인>ㆍ<형광>ㆍ<보예>ㆍ<융화>ㆍ<승강>ㆍ<창휘>ㆍ<정명>ㆍ<대동>ㆍ<역성> 11곡이 묶여 만들어졌지만, 이 역시 세조가 정리하면서 여러 번 개작하고 첨삭하였다. 조성도 마찬가지로 황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황종평조가 되었다.

확정된 순서: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享壽)-<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중광>(重光)[22]-<대유>(大猷)-<역성>(繹成)

《정대업》은 조선왕조의 군사적인 업적, 즉 무공을 찬양하는 곡으로 기본 조성은 처음에는 남려음을 기본으로 하는 남려계면조였다. 세종 때는 <소무>ㆍ<독경>ㆍ<선위>ㆍ<탁정>ㆍ<혁정>ㆍ<신정>ㆍ<개안>ㆍ<지덕>ㆍ<휴명>ㆍ<순응>ㆍ<정세>ㆍ<화태>ㆍ<진요>ㆍ<영관> 15곡이 묶여 만들어졌지만, 세조가 정리하면서 각 곡의 순서가 바뀌고 몇 곡이 삭제, 수정 또는 추가되어 11곡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기본 조성도 남려계면조에서 황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황종계면조로 바뀌었다.

확정된 순서: <소무>(昭武)-<독경>(篤慶)-<탁정>(濯征)-<선위>(宣威)-<신정>(神定)-<분웅>(奮雄)-<순응>(順應)-<총유>(寵綏)-<정세>(靖世)-<혁정>(赫整)-<영관>(永觀)

《보태평》과 《정대업》 두 묶음 모두 황종음이 기본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용되는 악기가 모두 같은 황종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서 평균율 기반의 서양음악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음고가 불안정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된다. 실제로 제례악에 동원되는 악기 중 대금해금, 태평소의 황종은 서양 평균율에 (억지로) 대입시켜보면 내림마(Eb) 음에 해당되지만, 나머지 악기들의 황종은 다(C) 음이다.

세조가 종묘제례악을 완성한 이후로 의식이나 음악, 무용에 큰 변화는 없이 쭉 전승되어 왔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갖은 방해와 협박 등으로 제례와 공연 양식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몇 가지 절차를 수정하거나 생략하여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23]이 주최하여 매년 이어진다. 제례는 종약원 회원들이 담당하고, 음악 연주와 무용은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주축이 되어 맡았으나 현재는 종묘제례악 보존회에서 맡는다. 다만 국립국악원의 정악단과 무용단에서 소수의 단원을 파견/지원하는 정도로 참여한다.

참고로 국립국악원신라시대의 음성서(音聲署), 고려 시대의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 조선 시대의 아악서·전악서·장악원(掌樂院), 대한제국 시대의 교방사(敎坊司),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아악부로 이어져 오다가 1945년 해방 후 궁중음악기관이 해체되며, 한때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존속하다가 1951년 이후 국립국악원으로 격상된 국가 최고의 음악 연구/보존/재현 기관으로, 전신(前身)들을 쫓다보면 1,000년에 달하는 유구한 기관이다. 이런 곳이 종묘제례의 음악과 무용의 재현에서 배제되었음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제례와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만큼, 모든 절차에 각 음악이 배당되었고 순서를 바꾸어 연주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주자와 악기의 배치, 음악에 곁들여지는 노래나 춤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절차에 따라 편성되고 공연된다.[24] 다만 1990년대에 들어서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밖에 못 듣는다는 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종종 국립국악원 등에서 연주회 형식으로 축약해 따로 연말 때 공연하기도 한다. 이때는 연주와 관람의 편의상 의식 절차나 악곡ㆍ악기ㆍ무용이 일부 생략되기도 한다.[25]

4.2. 음원 자료

2003년 녹음된 자료인데 기본적으로 전체가 다음 27개로 구성된다.[26] 전체 음악을 수록했으면서도 각각을 독립된 파일로 구분한 유일무이한 음원 자료이다. 안타깝게도 음원이라서 시각정보는 없다.[27]

1. 영신 희문 - 03:26
2. 전폐 희문 - 08:29
3. 진찬 - 풍안지악 - 02:26

01. 보태평 인입 희문 - 02:44
02. 보태평 기명 - 01:28
03. 보태평 귀인 - 01:50
04. 보태평 형가 - 01:18
05. 보태평 집녕 - 01:39
06. 보태평 융화 - 02:02
07. 보태평 현미 - 01:39
08. 보태평 용광정명 - 02:28
09. 보태평 중광 - 01:13
10. 보태평 대유 - 01:39
11. 보태평 역성 - 01:19

01. 정대업 소무 - 02:51
02. 정대업 독경 - 01:38
03. 정대업 탁정 - 01:32
04. 정대업 선위 - 04:16
05. 정대업 신정 - 02:48
06. 정대업 분웅 - 02:50
07. 정대업 순응 - 01:39
08. 정대업 총유 - 01:57 [28]
09. 정대업 정세 - 01:34
10. 정대업 혁정 - 03:13
11. 정대업 영관 - 02:30

1. 철변두 - 옹안지악 - 02:20
2. 송신 - 흥안지악 - 02:16

4.3. 동영상 자료

동영상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 1/2. 실제 종묘에서 실제 조상에게 올리는 실제 제사 의식 - 당연히, "종묘제례"를 위주로 기록된 자료이다.
  • 2/2. 공연 무대에서 관객(시청자)에게 보여주는 문화 예술 - "종묘제례악" 공연 기록물이다.

첫 번째 종류의 최근 기록물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두 번째 종류의 기록물 중 두 개

4.4. 악단과 무용수 배치

제례악에 동원되는 악단은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각각 위쪽 댓돌 및 아래쪽 댓돌에 앉아서 연주한다.[33] 윗쪽의 악단이 등가(登歌), 아랫쪽 악단은 헌가(軒架)로 불리는데, 악기 편성도 조금씩 다르다.

등가와 헌가는 함께 연주하지 않고, 제례 절차에 따라 연주하는 부분이 나뉘어 있다.

무용수도 《보태평》과 《정대업》에 따라 따로 동원되는데, 각기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춘다. 정전과 영녕전 앞마당에서 가로세로를 모두 8열로 맞추어 총 64명의 무용수가 추는데, 팔일무(八佾舞)라고 한다[35]
  • 문무(文舞): 피리인 약(籥)과 의 깃털로 만든 셔틀콕 비스무리한 장식물을 겹친 적(翟)을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쥔다. 무용수의 모자도 문신들이 쓰는 것을 착용한다.
  • 무무(武舞): 문무와 다르게 오른손[36]에만 무구를 들고 춤을 추는데 제후국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육일무로 앞의 2줄은 검을 들고, 중간의 2줄은 창을 들고, 뒤의 2줄은 궁시(弓矢)를 들고 추었고, 광무개혁 이후에는 팔일무로 변경되어 앞의 4줄은 검을 들고 춤을 추고, 뒤의 4줄은 창을 들고 춤을 춘다.

물론 그렇다고 무무가 문무보다 춤사위가 역동적이라거나, 문무가 무무보다 더 얌전하거나 하다고 생각하면 실망할 듯. 둘 다 종횡대를 유지하며 몸의 동작을 최소화한 제례무이기 때문에, 웬만한 전문가 아니면 큰 차이점을 구별하기 힘들다.

참고로 문무와 무무 모두 중국의 제례악에서 파생된 것인데, 본토에서는 거의 사멸된 탓에 가끔 중국이나 대만 쪽 음악학자 혹은 무용학자들이 연구하러 오기도 한다.[37]

4.5. 장단에 대한 연구들

흔히 국악 관련 이론 서적들에서는 제례악의 박절법은 일정하지만, 장단은 불규칙하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례악이 전해지고 있는 《세종실록》과 《세조실록》, 《대악후보》, 《속악원보》 등의 고악보에 대한 해독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내용에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가령 <희문곡> 같은 경우, 《대악후보》에 기재된 <정간보>에는 비교적 정확한 형태의 장단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38] 물론 제례악의 곡들이 전반적으로 장단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전문가들이 아닌 이상 장단을 알아맞추기는 쉽지 않다.

5. 예행 행사 관련

봉행일 1차 매년 양력 5월 첫째 주 일요일 (춘계 대제)
2차 매년 양력 11월 첫째 주 토요일 (추계 대제)

양력 5월에 열리는 종묘제례(종묘대제)는 마찬가지로 5월 첫째 주에 개최되는 궁중문화축전과 연계되어 진행된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39]에서 거행된다.

5.1. 관람 예약

일반인 관람도 가능하다. 기존에는 즉석 참관제였으나 2023년부터 예약제로 바꾸었다. 예약 대행사(티켓링크)에서 사전예약의 형식으로 예매를 받고 있다. 관람료는 0원이며, 봉행일로부터 5일 전에 미리 예약을 받는다. 제한인원은 2024년 5월 기준, 150석.

현장 사전 예약온라인 예약이 따로 진행되는데, 현장 사전 예약에 한해 1시간 더 일찍 예약할 수 있는 특혜를 준다. 2023년 5월 2일 오후 1시에 현장 사전 예약이 진행되었고 온라인 예매는 오후 2시에 진행됐는데, 앞선 현장 사전예약에서 150석이 모두 마감되어버려 온라인 티켓팅이 개시되자마자 매진이 뜨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2022년부터 정전 보수공사 문제로 인해 영녕전에서만 거행된다는 디메리트가 있는데도, 종묘 대제 관람을 향한 국민들의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행사 자체에 대한 국민 관심도가 낮았던 시절에는 참관 여부 자체조차 체계적으로 잡히지 못했었다. 이전까지는 예약제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으며 무려 즉석 대기였다. 그렇다고 그 전에 이 행사의 인기가 덜했던 건 결코 아니었는데, 연휴가 많은 5월이라 우연히 종묘 근처를 지나가다가 문정성시를 이룬 대기열을 보고 함께 들어가는 인파도 상당했었다.[40] 그런 인파에 순번이 밀려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마니아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즉석 대기는 영녕전과 정전 각각 따로 진행되는데, 영녕전에 운 좋게 들어갔다고 치더라도, 다음 코스인 정전 대기열에는 못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이러한 무법천지의 상황을 방지하고자 2023년이 돼서야 온라인 티켓팅이나 사전 예약제를 도입하는 등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첫 해 사전현장예약 매진 사태가 터지고 나서 온라인 티켓팅이 유명무실[41]로 남아버리자 또 다른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5.1.1. 종묘제례 부정 예약논란

이렇듯 국민 관심도가 높아 본행사 시작 5일 전에 사전예약이 티켓링크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큰 문제점이 발생하곤 한다. 바로, 매크로와 같은 부정 프로그램 사용을 통한 예약 방법이다. 따로 불법이라 명시된 것은 아니나, 종묘제례 즉 종묘대제에 대한 대국민적인 관심과 참여도가 높은 마당에 14:00에 사전 예약 신청을 받는 것을 미리 선점해, 일반 사람들은 시작하자마자 매진 안내와 함께 시작하자마자 금방 표가 1분도 안 돼서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후 매진으로 인한 판매종료가 뜨게 된다.

이는 절차상으로도 그렇고, 똑같은 출발선에서 1인당 2매씩 예약얘매를 받는 그 공정성이 침해될 문제점(우려성)이 있다. 종묘제례를 주관하는 한국문화재재단이나 문화재청궁능유적본부 그리고 궁중문화축전 운영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원론적인 말로 "좌석수가 한정되어 있고 국민적인 관심도가 높은 행사이다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는 얘기를 하다보니, 티켓팅에 실패한 다수의 인원들은 매크로와 같은 비매너적인 프로그램을 사용해 예매한 것이 틀림없다고 다들 화딱지가 나는 상황이다.[42]

이에 대해 경찰청이라든지, 관계 서버를 담당하는 관계자분들의 사전에 법적 조치라든지 제도 개선이 필요할 듯 싶다.

5.2. 휴행

제향 의식을 아예 거행하지 못했던 해도 있었다. 바로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그 원흉. 이 해만큼은 예행을 쉬어갔다.

그러나 1년 넘게 봉행을 쉬어가면 유네스코에서 바로 탈락하는 조건이 있으므로, 2021년에는 방역을 준수하여 5월 2일 거행되었으며, 직관 신청 역시 받지 않았다. 또 이때만큼은 제관과 악사 인원을 1/4로 축소하였고 종묘제례악도 음원 파일을 별도로 재생하였다. [43]

같은 사유로 2021년 11월에도 제향 의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6. 여담

  •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종묘제례 뿐만 아니라 사직제례도 거행한다. 본래 사직대제용 음악이 따로 있었는데, 이를 복원하지 못하여 한동안 종묘제례악을 대체로 사용하였다. 2014년 사직제례악 복원에 성공하여 현재는 사직대제에 종묘 제례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 파일:external/www.cha.go.kr/1611769.jpg
    제례에 사용되는 신주의 형태는 위와 같다. 신주와 신주를 모시는 궤는 밤나무로 만드는데, 목질이 단단해 오래간다는 점과 더불어 밤나무가 새싹을 틔울 때 다른 나무와 달리 종자의 껍질이 뿌리와 줄기의 경계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이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종묘의 신주는 대체로 납작한 형태를 갖춘 일반적인 신주와 달리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신주의 가운데는 상•하, 전•후, 좌•우로 '규'(窺)라는 구멍을 내어 혼이 깃들어 의지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혼구멍'이란 말의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제수·제기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고유 명칭에 1급 한자를 뛰어 넘는 준특급, 특급 수준의 한자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 , , 는 준특급~특급 수준에 있는 한자지만 罍, 篚, 罇는 아예 미배정이다. 이 정도면 여간한 한자 전문가들도 읽지 못하고 사전을 찾아본다.
  • 그룹 해파리는 영신희문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진찬, 형가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소무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송신 등을 전자음악(앰비언트 테크노)으로 편곡했다.
  • 전폐희문 최신 편곡도 있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그룹 이름은 확실치 않다)[44].
  • 음악그룹 "나무"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역시 종묘제례악에 관심을 둔다.

7. 같이보기


[1] 종로에 있는 건물인 "종묘"는 사적이며, 종묘에서 진행되는 제사 행사인 "종묘제례"는 국가무형문화재 그리고 종묘제례 도중에 사용하는 "종묘제례악"(음악+노래+춤) 역시 국가무형문화재이다. 개정(2016년) 된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국가무형문화재"이다. 1962년 처음 제정됐을 당시부터 2016년까지 "중요무형문화재"라고 불렀지만, 현재는 국가무형문화재라고 지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2021.6.23 시행에 따라, "지정번호"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2] 종묘제례 사이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3] 어가행렬의 군졸이나 신하 역 같은 엑스트라는 사전에 1365 자원봉사 등 유관기관에 별도로 신청하면 일반인 참가자도 맡는게 가능하다. 외국인들도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끔 '백인 조선 군졸', '흑인 대신'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있다. 경복궁 광화문에서 세종로, 종로를 거쳐 종묘(외대문 앞)까지 이어진다.[4] 12장복과 12류 면류관, 팔일무 등[5] 만약 음복을 하지 않는다면 제사를 받은 신령을 업신여기는 격이다. '너는 나와 한솥밥을 먹을 급이 안 된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제사를 받지 못하는 외로운 귀신이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서, 마치 현대에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나눠주듯이, 제사를 못 받는 귀신들 먹으라고 '여제'(厲祭)라는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여제에선 음복을 하지 않았다. 여제를 받는 귀신들은 숭상하고 받들 대상이 아니라, 사고 치지 말라고 나라님이 복지활동(?)을 베풀어주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6] 12가지의 문양을 옷에 표현한 옷이다.[7] 영녕전 제향 또는 황사손이 불참할 경우에는 전주 이씨 종친 중 한 명이 대신한다.[8] 착장 순서대로 나열할 경우 기본의대(적말 또는 백말 포함)→중단→상→의→후수&대대→폐슬→옥대 또는 품대→패옥→방심곡령→면류관 또는 제관→적석 또는 제혜→규 또는 홀의 순서대로 착용하였을 것이다.[9] 홍영(紅纓)과 녹영(綠纓)이라고 한다.[10] 삼태(3)·남두육성(6)·북두칠성(7)·좌보(1)·우필(1)·타미(2)로 구성된다.[11] 소수(小綏)라고 한다.[12] 양이 많을수록 품계가 높다.[13] 물소뿔을 말한다.[14] 패대(佩袋)라고 한다.[15] 흑색 선이 있기도 한 유물도 있다.[16] 현재는 악기로 연주된 음악, 가수가 부르는 성악, 무용수가 추는 춤을 모두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고전 한문에서 "악"은 이를 모두 포괄하며, 현대에 들어서 개념이 분화된 것이다.[17] 두 가지 의미가 병행되고 있다. 실제 자기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태조 고황제 이성계의 후예인 전주 이씨 문중(종친회) 사람에게는 엄중하고 현실적인 가문 행사인 것이지만,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과 관여하는 공무원까지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전 문화 행사다. 이 두 관점의 교차점으로 소중한 전통문화라는 사항은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18] 종묘제례악도 국가무형문화재이고, 그 의식인 종묘제례 역시 국가무형문화재이다.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라, "지정번호"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어 번호는 없다.[19] 혹자는 살면서, 종묘제례악은 죽기 전에 꼭 들어봐야 할 음악 중 하나로 손꼽을 만큼 궁중음악의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강력히 추천한다고 한다.[20] 세종 이전에는 편경은 기와를 잘라 만들었고, 편종은 음의 높낮이가 제멋대로였다. 이 때문에 박연이 처음 한 일도 악기 정비가 아니라 음계 자체를 새로 만들기였다.[21] 즉,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가 아니고, 궁궐에서 파티할 때에 쓸 것이라는 소리다[22] 중광장은 1626년 인조 4년에 선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첨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래 별도의 곡이었던 용광장과 정명장을 용광정명으로 합쳤다.[23] 대동종약원에서 산하 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묘제례악을 연구, 전수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을 종묘제례악 기능보유단체로 공식 인정한다.[24]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시간이 가면 변한다. 연주도, 노래도, 춤도, 절차도 조선 시대에도 계속 변했다. 또한, 《보태평》, 《정대업》이 철저하게 제사용으로만 사용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른 행사에서도 사용되었다.[25] 주로 뒷부분인 철변두, 송신은 없다고 보면 되고, 팔일무는 거의 없으며, 육일무도 보기 힘들고, 대충 10명 정도로 진행한다. 64명은 현대에도 부담스러운 숫자이다.[26] CD 러닝타임은 65분 17초이다. 물론 실제 종묘제례에서 실연할 때에는 제사 진행에 맞추어 곡 중 일부분만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연주시간이 달라진다.[27] 아주 훌륭한 영상자료가 몇 개 있지만 영신희문, 철변두, 송신 등이 빠졌다.[28] 총유(寵綏)가 옳으나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선 로마자로 Chonsu라고 잘못 옮겼다. 綏 자에 수/유 두 가지 있기 때문에 음원 제작자, 또는 유튜브에 올린 이가 실수한 모양.[29] 2011년 라디오 프랑스의 음반 레이블인 오코라 라디오 프랑스(Ocora Radio France)에서 종묘제례악 음반을 출반했다. 이 음반은 국립국악원이 제공한 음원으로 2003년 3월 1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있었던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종묘제례악 실황 녹음으로 제작하였다. CD 안에는 프랑스어, 영어, 한국어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해설서가 동봉되었다. 우리말 설명 부분은 국악방송 사장을 역임한 한양대학교 음대 국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영운이 집필하였다.[30] CD는 10년이 지난 2021년 현재에도 구입 가능하다. 다만, 프랑스에서 발매된 제품이므로 프랑스 아마존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31] 정전은 수리 공사 중이어서, 행사는 영녕전에서 진행되었다.[32] 음량이 너무 작다.[33] 물론, 서서 연주하는 사람도 있다.[34] 정대업의 악곡인 소무, 분웅, 영관 3곡만 연주한다.[35] 다만 조선시대에는 6X6, 즉 36명이 육일무를 추었다. 팔일무는 황제의 예법이기 때문. 육일무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학자들 의견이 갈려서 6X6명이 추는지, 6X8명이 추는지 분분했다. 하지만 조선은 6X6설을 채택했다. 학술적인 고증 문제도 있겠지만, 그게 더 안정적으로 보여서가 아닐까. 팔일무로 바뀐 건 당연히 얼떨결에 황제가 된 대한제국 때부터이다. 그 전에는 팔일무를 절대로 출 수 없었다.[36] 땅을 상징하는 헌가에서 연주되는 정대업과 무무는 음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양을 상징하는 왼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오른손에만 무구를 들고 춤을 춤으로써 음을 더욱 강조한다.[37] 긴 혼란기와 결정적으로 문화대혁명 크리로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제례악을 올리는 장소인 종묘(중국에서는 '태묘')는 중공 수립 직후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마개조해버렸다.[38] 이를 토대로 작곡가 김대성이 국악기와 양악기를 혼합 편성한 편곡 작품인 <희문>을 2003년에 발표했다.[39] 원래 종묘 정전은 태조와 현 왕으로부터 선대 임금 넷을 모신다. 단, 이는 제후국 예법으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태조와 현 왕으로부터 선대 임금 여섯을 모셨다. 태조와 현 왕으로부터 선대 임금 넷/여섯을 외에도 불천위신위로 지정된 임금 신위는 계속 정전에 모신다. 하지만 불천위신위로 지정되지 않으면, 후대로 내려가 당시 임금으로부터 4대 이상이 되는 때에 정전에서 물러나와야 한다. 이런 신위는 원래 정갈한 곳에 묻어야 하지만, 세종은 그러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본디 정갈한 곳에 묻었어야 할, 정전에서 나온 신위를 따로 모시는 건물을 세웠다. 이것이 영녕전이다. 영녕전은 어디까지나 종묘 정전에서 물러나온, 묻었어야 할 신위를 별도로 모신 곳이므로 정전보다는 제사를 덜 지냈다. 예전 판본에서는 영녕전이 막장 임금, 혹은 재위기간이 짧은 임금을 모시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제례 절차는 모두 종묘와 동일하게 행해진다. (이하 편집 추가입니다.) 현재 종묘는 19칸이지만, 이성계가 건축한 당시의 종묘는 5칸이었다. 세종 초기, 정종1419년 승하하는 데 그를 모실 자리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 1명 + 추존왕 4명 = 5명 끝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정전 옆에 영녕전을 새로 만들어서 여유를 갖도록 한다.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예법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성계가 "딸랑" 5칸을 만든 것이 바로 그 중국의 예법이었다.[40] 이 봉행 행렬이 종로에서부터 이어지는데, 이걸 본 나드리객들이 '뭐지'하고 따라가다가 휘말리는 인파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41] 이도 궁능유적본부가 티켓링크 측에 비용을 내고 티켓팅 대행을 예탁한 것인데, 아예 의미없는 삽질이 되어버린 것이다.[42] 보통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짓은 하지 말고 공정하게 예약 바랍니다.[43] 온라인으로 생중계된 이번 행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방송팀이 도화서 화원의 복장을 한 것이다. 그림을 담당하는 궁중 기관인 도화서에서 화원의 소임이 궁중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종묘제례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방송팀이 도화서 화원의 복장을 한 것은 전통의 또다른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었는지 그 뒤의 전통의례 재현행사 때에도 공식 중계방송팀이 도화서 화원의 복장을 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44] 출연진: 최덕렬(음악감독·작곡), 김소엽(피리), 김승태(해금), 김진욱(대금), 오단해(소리), 이은지(아쟁), 하수연(가야금), 한솔잎(운라)[45] 작곡 | 두인경 ○ 연출 | 김주혜, 전시은 ○ 가야금 - 최지원 ○ 대금 - 김주혜 ○ 해금 - 전시은 ○ 첼로 - 박재현 ○ 피아노 - 민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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