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8 06:28:08

장도


1. 粧刀
1.1. 개요1.2. 관련 기록1.3. 종류1.4. 무형문화재 장도장1.5. 여담
2. 長刀3. 杖道4. 張導5. 臧荼6. 장기도사의 약칭

1. 粧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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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옹의 여러가지 장도들

1.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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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공예관 특별 전시 : 19세기 평양의 장도

칼집이 있는 작은 을 말하며,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 하여 패도(佩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하여 낭도(囊刀)라고도 불렀다. 보통 '은'으로 세공된 물건이 많다 보니 '은장도'라고 흔히 불리우지만, 재질에 따라 다른 이름도 붙는다.

1.2. 관련 기록

언제부터 패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남선고려시대 원나라에서 전파된 몽골의 풍속이라고 주장했다.[1] 그 외에도 장도는 몽골에서 유래한 풍속이라 설명하는 글들이 있다[2].

하지만 신라시대 고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에서 장도 모양을 본뜬 장식칼이 순금 유물답게 그 형태가 현대까지 또렷하게 남아있으며, 황남대총 북분의 피장자는 여성임이 밝혀졌으므로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호신용으로 소지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순금 작은고리칼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작은 칼을 제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만큼, 장도처럼 작은 칼을 패용하는 문화는 몽골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에 대한 중국 측의 사료에도 연개소문이 성격이 포악하여[3] 항상 5개의 칼을 차고 다니며 위엄을 과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칼 하면 떠올리는 대도를 5자루나 주렁주렁 찼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5개의 비수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연개소문 때의 고구려에서는 비수를 던지는 '비도술'이 유행했다고 한다.[4] 고려인들은 칼과 붓이 함께 달린 칼을 차고 다닌다는 기록[5]과, 백성들에게 비수 차는것을 금했다는 기록[6]도 있으니, 장도의 형태와 유사한 칼을 소지하고다니던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것은 조선 전기이다.[7]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휴대용 소형칼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한시대 사용된 철제 손칼이다.

경국대전에는 도자장 6명과 환도장 12명이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궁중의 장도를 제작하였음이 기록되어있다.[8] 이는 칼을 만드는 장인이 중앙에 소속되어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자장은 작은 손칼을 만드는 사람, 환도장은 군용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차별과 규제가 법제화되어있었는데, 장도의 사용에도 신분상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 6조. 갓끈은 예조에서 아뢴대로 하고, 은장도자는 단지 서민에게만 금할 것이며....[9]
....마류, 호박, 산호, 청금석의 입영과 은장도자는 당상관 외에 사용하는것을 일체 금하고....[10]

국가에서 규제를 논할 만큼 일반 서민들도 장도를 널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7세기 현종 때,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의 장도 패용을 금한 것[11]을 보면 나라에서 금지해도 갖고 다닐 사람은 계속 갖고 다녔던 것 같다.

1774년에는 전인 20여 명과 도자장 5~6명이 가게를 열었고,[12] 도자전은 장도, 은비녀, 패물, 금은가락지, 담배통 등을 팔았다고 한다.[13]

장도가 보급되면서 자연히 장식이 화려해졌는데, 주로 부녀자들이 애용한 매화연화입사, 주로 선비들이 애용한 백동입사, 그 외에도 물소뿔, 대모갑, 침향목, 흑각, 화리, 오동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오동[14] 장식은 오동으로 칼집과 자루를 만들고 자루에 무늬를 새긴 것으로 왜제(倭制)라고 불렀으며, 매우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장식이다.

승정원일기》의 '명나라 사절이 요구한 물건중 은장도의 수량을 채우지 못해 근심했다'는 기록이나, 《열하일기》에는 예단물목으로 석장도 37자루, 초도 284자루, 환도 7파, 은장도 7자루가 들어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웃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의 부녀자들이 애용하던 3대 소지품으로 거울, , 장도가 꼽혔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여인의 정절을 지키는 상징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무슨 임란 당시 자결이 아닌 공격용(?)으로 사용했으면 열녀로 선정 되지 못했느니 하는데 열녀 담양국씨의 사례에서 보듯 전혀 아니고, 실제로도 당연하겠지만 원래 의식적인 용도로 지닌것이 아닌, 생활도구로서 남녀 가리지 않고 다용도로 쓰던 작은 칼이었기 때문에 자결용보다는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 사용된 예가 훨씬 더 많다. 다만 열녀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켜야 주는것이었으므로 자결이 더 확실히 받을 수 있었던것. 최명길환향녀[15]를 두둔하며 하던 말이 기록에 전해진다.
그녀들을 청나라로 잡혀가게 한 게 대체 누군데, 왜 그녀들을 욕하는가? 아녀자들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이들이 정작 아녀자들에게 안 죽고 돌아왔냐고 큰소리치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은장도라는 쓸데없는 것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죽으라고? 은장도를 던져주기 앞서 자신이 칼을 들고 그녀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았는가.

1.3. 종류

장도는 형태에 따라, 또한 재료와 조각의 문양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 형태에 따른 분류
    칼집과 칼자루에 복잡한 장식이 붙은 것은 '갖은장식', 단순한 장식은 '맞배기'로 나뉜다. 여기서 맞배기에는 칼집과 칼자루가 일자형인 '평맞배기'와 을(乙)자형인 '을자맞배기'가 있다. 또한 단면이 사각형이면 '사모장도', 팔각형이면 '모잽이장도'라고 부른다. '첨자도'라는 것이 있는데, 장도 칼집과 칼자루에 젓가락이나 과일꽂이, 귀이개 등이 붙어있는 장도를 말한다. 주로 으로 만들며, 음식에 비소가 포함된 독이 있을 경우 검게 변색되어 을 검사하는데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 재료에 따른 분류
    재료에 따라 목장도와 골장도, 은장도 등으로 나뉘는데, 먹감나무로 만든 것은 '흑시도', 대모갑, 즉 거북이의 등껍질로 만든 것은 '대모장도', 은으로 만들었으면 '은장도', 옥으로 된 것은 '옥장도'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 외에 비취, 호랑이 뼈로 만들기도 한다.[16] 또한 칼집과 자루는 나무지만 장식과 고리 등이 은이면 '은장장도', 금이면 '금장장도', 칼날이 없으면 '벙어리장도', 노리개에 달기 위해 금은보석으로 만든 순수한 장식용은 '패물장도' 혹은 '노리개장도'라고 불렀다. 특히 대나무에 낙죽(대나무 표면에 인두로 그림이나 글자를 새긴 것)으로 장식한 것은 낙죽장도라고 한다.
  • 장식에 따른 분류
    장도에는 부귀문, 수복문, 다남문, 안녕문, 절개문 등을 많이 새겼는데, 부귀문은 부(富), 수복문은 수(壽), 복(福), 십장생 그림이 대표적이고, 다남문은 박쥐문, 안녕문은 용문, 나비문, 강(康)자, 영(寧)자, 절개문은 사군자 및 소나무가 대표적이다. 목장도의 조각이 장생문이면 '장생문장도', 박쥐면 '박쥐문장도'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 외에도 조각, 상감, 칠보, 화각, 낙죽 등으로 장식하며, 화각장도, 칠보장도, 낙죽장도 등으로 부른다.

    위 3가지 분류에 따라 은장오동포도문자도, 대추나무백동을자도, 칠보은장맞배기도, 대추나무금은장팔모도, 화류은장첨자도, 금은장십장생문갖은을자도, 배부른은장원통형은장도, 나전칠기박쥐문갖은맞배기도, 흑시은장맞배기도, 은장십장생문첨자도 등등으로 이름이 길게 붙는다. 하지만 특징을 전부 보고 만든 사람이 이름을 붙여놔도 부르는 건 부르는 사람 마음이다.

1.4. 무형문화재 장도장

광양시 은장도 박용기, 곡성시 낙죽장도 한병문[17] 등이 유명하다. 박용기 옹은 광양에 장도박물관 및 장도전수회관을 세웠다. 이 외로도 울산광역시 병영 은장도 등이 있으나, 병영 은장도의 경우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1.5. 여담

현대의 장도는 맥이 일단 끊어진 것을 재현한 것에 가깝다. (라고 하기엔 광양은장도나 병영은장도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기술이 이어져 왔기에 무리가 있다. 곡성의 낙죽장도가 특이한 경우) 애초에 장도에 관련된 문헌은 없고, 단편적인 기록만 조금씩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장인들의 기술에 관한 내용은 책으로 남겨진 경우가 몹시 드물다. 영업 비밀이기도 하고, 장인들의 학식이 글(한문)로 기술에 대해 남길 정도가 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이건 당연한거다.) 특히 한병문 선생은 종조부 한기동 옹에게 어릴 때 9년 간 배우다 말았는데, 맥이 끊기자 이곳 저곳 찾아다니면서 물어물어 정보를 찾아 재현했다고 한다.

게다가 만드는 사람들이 딱히 금속공학 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인지라 칼날의 성능 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대의 은장도에 생활용 날붙이로서의 기능은 기대할 수 없고, 그저 장식용 전통 공예품으로서의 의미만 있다고 보면 된다. 카더라 통신으로는, 낙죽장도로 긴 칼을 만들었는데, 다다미로 시참을 하려고 위로 들었더니 슴베에서 그대로 칼이 부러져 뒤로 날아갔다고 한다. 실제로는 대나무를 잘만 자른다...

매체에서는 사극 등에서 반가의 여인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할 때에나 종종 등장하고, 기타 서브컬쳐 매체에서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유명한 게 퇴마록의 주인공 이현암이 가진 월향 정도.

간혹 이걸 여자한테 자결의 의미가 아닌 직접 남자를 찌르라는 의미로 주는 매체도 있다.

2. 長刀

도검 중 하나인 월도의 별칭.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3. 杖道

일본의 봉술. 한자로는 지팡이이지만, 의 역할과 형태를 고려하면 봉이라 할 수 있지만 더 짧다. 일본 독음으로는 조도라고 한다. 중국의 연봉과 달리 단단한 강봉에 속한다. 기원은 일본 고류 무술 유파인 신도몽상류(神道夢想流). 물론 장이 아닌 봉 자체는 많은 유파에서 다룬다. 대표적으로 가토리신토류구귀신류. 메이지 시대에서부터 쇼와 전기까지는 대일본무덕회에서, 쇼와 후기에서부터는 전일본검도연맹에서 전하고 있다. 1956년 신도몽상류 장술이 전일본검도연맹에 가입하면서, 검도, 거합도, 장도를 삼도(三道)로 칭하고 보급시켰다. 현재 수련 인구가 가장 많기 때문에 장도라고 하면 보통 전검련 장도를 칭한다. 장도는 검도와는 다르게 격검은 하지 않고 카타만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장까지 다루는 도장은 감소 중이며, 한국의 검도계에서는 없다고 봐도 된다. 이외에 아이키도에서도 다루고 있다.

4. 張導

5. 臧荼

6. 장기도사의 약칭


[1] 최남선, <고사통>, 삼중당, 1943.[2] '신라의 유물이나 고려 시대 작은 칼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장도는 아니지만 유사한 칼이 있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장도는 몽고의 영향을 받아 고려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했다고 보았다.' 황호근, <한국장신구미술연구>, 일지사, 1976. '신라시대에 존재하던 비수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몽고식 칼이 한국에 이미 있던 비수와 결합하여 장도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김종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94호,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21집, 문화재관리국.[3] 중국 층 사료에서는 연개소문을 당연하게도 악인으로 묘사한다. 적국의 장수이니...[4] 추원교, <한국 도자공예의 발달과정 고찰-장도의 조형성을 중심으로>, 논문집 제11집, 1988. 박종군, <한국도검에 관한 연구-장도를 중심으로>,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9.[5] <고려도경>, 권32, 기명.[6] <고려사절요>, 권3, 현종5년. <고려사절요>, 군4, 정종11년.[7] <세종실록>, 권6, 1년 12월 19일(기축).[8] 권6, 공전[9] <연산군일기> 권29 4년 6월 15일(경진)[10] <중종실록> 권45 17년 8월 12일(을유)[11] <비변사등록> 29책, 현종 11년 12월 29일[12] 비변사등록 178책, 정조 15년 1월 8일.[13]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비고편, 한성부[14] 구리에 금, 은을 합금한 것. 비율은 구리가 9할정도. 삭힌 오줌으로 검게 착색시킨다. 오동나무가 아니다.[15] 흔히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가 돌아온 아녀자들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는 잘못된 단어. 화냥년의 어원이 아니다. 환향녀 참조.[16] 2015년 10월 4일 KBS TV쇼 진품명품 방송 참조. 의뢰인이 가지고 나온 건 아니고, 심사위원이 호랑이 뼈로 겉을 만든 호골장도 유물을 가지고 나왔다.[17] 현재는 은퇴하고 아들인 한상봉이 무형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