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3:50:36

모용충(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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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92><colcolor=#ece5b6>
서연 2대 국군
위황제 | 威皇帝
출생 연대 미상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86년 2월
서연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2대 국군
384년 6월 ~ 38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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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92><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충(沖)
부황 열조
형제자매 8남 1녀 중 8남
불명
아명 봉황(鳳皇)
작호 중산왕(中山王)
시호 위황제(威皇帝)
연호 경시(更始, 385년~3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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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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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의 제2대 황제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8남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상당한 미남으로 전진의 제3대 세조 선소제 부견이 그를 외모만 보고 총애했을 정도였다.

2. 생애

359년, 형 모용홍이 제북왕에 봉해질 때, 모용충도 중산왕에 책봉되었다.[1] 363년에는 영동장군에 임명되어 동진의 형양태수 유원(劉遠)을 공격해 형주 남부로 쫓아냈고, 368년에 대사마로 승진했다.

370년, 전진부견전연을 멸망시키고 선비족 40,000여 호를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모용씨 황족들에게 관직을 배분했다. 이때 모용충은 부견의 총애를 받아 황궁에 수년간 머물다가 평양태수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이동했다.

384년, 모용홍이 선비족들을 모아 화음(華陰)에서 제북왕을 자칭하자, 모용충도 평양에서 20,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형에게 호응하기 위해 전진의 포판(蒲阪)을 공격했다. 하지만 좌장사 두충(竇衝)의 토벌군을 만나 황하(黄河)에서 대패하고 선비족 기병 8,000명만 추스려 모용홍과 합류했다.

384년 6월, 모용홍의 신하들인 고개(高蓋)와 숙근숭(宿勤崇) 등이 모용홍을 살해하고 모용충을 황제로 추대했다. 모용충은 백관을 설치하고 고개를 상서령에 임명한 뒤, 계속 장안성을 향해 나아갔다. 당시 후진의 군주였던 요장은 부견과 싸우는 중이었는데, 그는 서연과 연합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요숭(姚嵩)을 인질로 보냈다.

384년 7월, 모용충의 서연군이 장안성에 이르기까지 200여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부견은 요장과 싸우다 말고 고양공 부방(苻方)을 여산(驪山)에 주둔시킨 채 급히 철수했다. 이후 부견은 조서를 내려 평원공 부휘(苻暉)를 거기대장군으로 임명해 50,000명의 병력으로 모용충을 막도록 명령하고, 하간공 부림(苻琳)을 중군대장군에 임명해 후속부대로서 부휘를 돕게 했다. 모용충은 비전투인원들까지 소와 말에 태워 마치 기병의 수가 많아 보이도록 만들고, 병사들에게 명령해 흙먼지를 최대한 일으키면서 진격했다. 이러한 모용충의 허장성세 계책은 부휘와 그의 군사들을 겁주기에 충분했고, 전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대치 상태에서 싸우기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연의 군사가 북을 치고 흙먼지를 휘날리며 먼저 돌격하자 부휘는 크게 놀라 후퇴하다가 정서(鄭西)에서 모용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정서 전투)

부휘의 패배를 전해들은 부견은 재빨리 상서 강우(姜宇)를 전장군에 임명해, 3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휘와 부림을 도와 아방성(阿房城)에서 모용충의 진격을 막도록 했으나, 모용충은 다시 한번 전진군을 궤멸시켜 아방성마저 빼앗았다.(아방 전투) 아방성이 함락되면서 부림은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강우 또한 난전 중 전사했으며, 부휘만이 홀로 살아남아 장안으로 도망쳤다.

마침내 모용충의 서연군이 장안성 앞까지 도착하자, 부견은 성벽에 올라 모용충을 향해
"너희 노비들은 노비답게 소와 양이나 방목하면서 지낼 것이지, 왜 죽으러 오느냐!"
라며 꾸짖었다. 이에 모용충이 대답했다.
"우리 노비들은 노비의 고통에 이제 싫증이 났다. 그러니 그대가 그 고통을 대신 느껴보거라!"
그러자 이번엔 부견이 사자를 보내 비단옷 한 벌을 선물하면서 회유하려 하니, 모용충이 사자에게 말했다.
"지금 마음은 천하에 있는데, 어찌 비단옷 한 벌의 작은 은혜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만약 너희 군신들이 천명을 받들어 싸우기를 포기하고 당장 황제를 풀어준다면, 내 당연히 부씨들을 사면하여 네가 우리에게 대우한대로 보답해주도록 하겠다."
모용충의 대답을 들은 부견은 격분하여
"내가 왕경략과 양평공(부융)의 말을 따르지 않아 백로(白虜)[2]가 감히 여기까지 이르게 했구나!"
라며 울부짖었다.

384년 12월, 부견이 그의 뒷통수를 치려다가 걸린 모용위를 잡아 그 일족과 함께 몰살시키고, 장안성 내에 있는 모든 선비족들을 싸그리 잡아 죽였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려 구반거(仇班渠)에서 서연의 군대를 상대로 이기니, 모용충은 일단 아방성으로 철수했다.(구반거 전투)

385년 정월, 모용충은 아방성에서 황제에 올라 연호를 경시(更始)로 개원했다. 서연의 황제에 즉위한 모용충은 이후 장안을 손에 넣기 위해 전진과 승패를 주고 받으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부견과 작상(雀桑)에서 교전해 패배했지만, 백거(白渠)에서 부견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부견군을 포위했다. 전진의 상장군 등매(鄧邁), 좌중랑장 등수(鄧綏), 상서랑 등경(鄧瓊)이 등씨 가문이 받은 전진의 은혜를 갚겠다며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용맹스럽게 서연군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서연의 포위망을 뚫었다. 이들의 분투로 겨우 부견은 장안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백거 전투)

부견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모용충은 상서령 고개를 보내 장안의 남성을 점령했으나, 전진의 좌장군 두충, 전금장군 이변(李辨)에게 격파되어, 서연군 800여 명이 참수되고 전진군이 그 시체를 나누어 먹었다. 고개는 패잔병들과 함께 위수 이북으로 도망치다가 태자 부굉의 추격을 받고 성이벽(成貳壁)에서 궤멸당해 서연군 30,000명이 전사했다.(성이벽 전투) 반격으로 승세를 탄 부견이 장안성 서쪽에서 모용충의 서연군을 또 격파하고 아방성까지 추격했지만 함정이 있을 것을 염려해 징을 울려 다시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385년 3월, 부휘가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모용충이 이를 모두 막아냈다. 모용충은 이후 여산으로 진격해 그곳에 주둔중인 고양공 부방을 공격해 죽이고 상서 위종(韋鍾)과 그의 아들 위겸(韋謙)을 사로잡았다. 모용충은 위겸을 빙익태수로 삼고 관중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게 하니, 전진의 빙익누주 소안민(邵安民) 등은 위겸이 불충하다고 책망했다. 이를 들은 위종은 수치심에 자결하고, 위겸은 서연을 빠져나와 동진으로 망명했다.

부견은 좌장군 구지(苟池)와 우장군 구석자(俱石子)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여산을 탈환하려 했으나 오히려 모용충에게 역습당해 패배했다. 구지는 서연의 상서 모용영(慕容永)에게 잡혀 참수되었고, 구석자는 부비가 있는 업성으로 도주했다.(여산 전투) 부견은 분노하여 영군장군 양정(楊定)과 2,500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장안 인근에서 모용충을 격파하고 선비족 10,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부견은 양정이 끌고 온 선비족 포로들을 전부 생매장해 죽여버렸다. 부견이 다시 양정을 보내 서연의 우복사 모용헌(慕容憲)을 격파하자, 양정이 두려웠던 모용충은 모용영의 계책을 받아들여 아방성 주변에 참호를 깊게 파고 방어를 공고히 했다.

385년 5월, 모용충이 금세 군사를 수습하고 장안성을 다시 공격했다. 부견이 철갑을 입고 성벽 위에 올라 몸소 전투를 독려하다가 온몸에 화살을 맞아 피를 철철 흘렸을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지만, 모용충이 잠시 물러나면서 겨우 장안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렇듯 전황은 전진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관중의 민중들은 부견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당시 관중에는 30여 개의 요새가 있었는데, 부견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돕기 위해 평원장군 조오(趙傲)를 주축으로 연합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와 식량을 장안성으로 보냈다. 빙익의 백성들 또한 자신들이 직접 모용충의 서연군 진영에 불을 놓겠다고 제안해와 부견이 기병 700명을 보내 호응하도록 했다. 그러나 관중에서 보낸 지원병들은 모조리 모용충의 공격을 받아 빼앗겼고, 빙익의 백성들이 저지른 방화도 하필이면 그 날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불어 오히려 방화를 하던 백성들 열 중 여덟이 타죽었다. 모용충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관중을 잔학하게 약탈하니, 관중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로는 끊어지고, 1,000리 안에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모용충은 장안성 서쪽에서 부견이 의지하던 위장군 양정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부견은 절망에 빠져 평소 배척하던 참언을 믿기 시작해, 장안을 태자 부굉에게 맡기고 자신은 두 딸 부보와 부금, 어린 아들인 중산공 부선(苻詵) 등과 함께 기병 수백 명을 대동한 채 오장(五將)으로 향했다. 비록 부견이 출발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초겨울 안에 장안을 구하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연히 그게 가능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태자 부굉은 얼마 안가 자신의 어머니와 처, 친척 등 남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동진으로 망명했다. 대장이 사라진 장안은 그대로 모용충에게 함락되었고, 서연의 군사들은 장안에 들어와 죽은 백성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약탈했다.(장안 공방전)

385년 10월, 장안을 점령한 모용충은 강족의 후진까지 도모하기 위해 요장과의 화친을 파기하고, 거기대장군 고개에게 50,000명의 군사를 주어 후진을 치도록 했다. 고개는 신평군(新平郡) 남쪽에서 요장과 교전해 패배하고, 남은 병사 수천 명과 함께 요장에게 항복했다.(신평 전투)

386년 2월, 모용충은 숙부 모용수후연이 두려워 감히 동쪽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서쪽 진출 의지 역시 후진의 요장에게 한번 꺾여 그냥 장안에 안주하길 희망했다. 농사를 장려하고 황궁을 축조하면서 장안에 눌러앉으려 하는 모용충의 모습을 본 선비족들은 크게 실망하여 모두 그를 원망했다. 좌장군 한연(韓延)이 선비족 무리들의 불만을 이용해 모용충을 살해하고, 서연의 장수 단수(段随)를 연왕으로 옹립했다.(경시정변)

3. 여담

  • 전연을 멸한 부견이 모용충의 누이인 청하공주 모용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상당한 미소년이었던 모용충도 총애해 궁궐에 두었다. 부견은 이 두 남매를 무척 총애하여 다른 모든 후궁들이 총애를 잃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보다못한 왕맹이 이를 간언하자 부견은 하는 수 없이 모용충을 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장안에
    "봉황(鳳皇)이 아방(阿房)에 머무네."

    라는 노래가 퍼졌는데, 부견은 이를 봉황새(鳳凰)로 해석하고 길조라 생각해 아방성 내에 오동나무와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3] 모용충의 아명이 봉황(鳳皇)이고, 훗날 아방성을 거점으로 부견과 격렬하게 다툰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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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중산왕이었던 모용위가 357년 2월에 황태자로 올라가면서 중산왕의 자리가 한동안 비어있었다.[2] 당시 선비족에 대한 멸칭[3] 고대 중국에서 봉황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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