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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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鮮于亮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경산(景山).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출신.
2. 생애
초기에는 후조에 임관하여 천왕 석호를 섬기며 별장(別將)으로서 활동하였다.함강 4년(338년) 12월, 후조군에게 패해 밀운산(密雲山)에 숨어있던 단료가 후조와 전연으로 각각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천왕 석호는 정동장군 마추(麻秋)에게 30,000 군사를 주어 단료를 영접해오게 하면서 선우량, 양유도 같이 종군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조군은 진군하다가 삼장구(三藏口)에서 모용황이 보낸 태원공 모용각과 용기상시 황보진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여 군대가 모두 흩어졌다. 대장인 마추는 말을 잃고 걸어서 이미 도망쳤으며, 선우량 또한 말을 잃은 채로 산을 오르다가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되자,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단정히 앉아 전연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전연군이 선우량의 주변을 동그랗게 포위하고 윽박지르니 선우량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몸은 귀인이거늘, 어찌 소인에게 의(義)를 굽히겠느냐! 너희가 능히 죽일 수 있으면 얼른 죽이고, 죽일 수 없으면 여기서 떠나라!"
전연군은 선우량의 기세에 눌려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돌아가 모용황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들은 모용황은 재빨리 사람을 파견해 선우량에게 말을 주어 영접하였다. 이후 선우량이 이르자 모용황은 그를 불러 대화를 나눈 다음, 매우 흡족해하며 좌상시(左常侍)로 삼고 최비의 딸 최씨를 선우량의 처로 주었다.함강 8년(342년) 11월, 연왕 모용황이 친히 40,000 군사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선봉군을 이끌던 모용황의 서형 모용한이 먼저 고국원왕과 전투를 벌였고,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모용한의 뒤를 이어 연왕 모용황이 이끄는 후속부대가 도착하였다. 이때 선우량이 모용황에게 나아가 말했다.
"신은 포로 신분이었음에도 왕께서 국사(國士)로 대접해주신 이 은혜를 언젠가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신이 죽는 날입니다."
그러고는 자원하여 수십 기의 기병만 거느리고 돌격해 고구려의 진영을 돌파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군은 크게 혼란스러워졌고, 이내 전연군이 총공격을 하면서 고국원왕은 대패하였다. 연왕 모용황은 승세를 몰아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시켰으나, 고국원왕의 동생인 고무가 전연의 별동대를 궤멸시키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져 회군하였다. 선우량은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전봉장군에 임명되었다.영화 6년(350년) 2월, 연왕 모용준이 대군을 일으켜 후조 정벌을 선언하고, 선우량을 선봉으로 삼아 진군하였다. 선우량은 항상 선두에 서서 적군의 진영을 무너뜨렸고, 마침내 계(薊)를 떨어뜨려 후조의 장수 왕타(王墮)를 사로잡음으로써 그 위세와 명성을 널리 알렸다. 이때의 공으로 선우량은 양위장군으로 승진하였다가 장무(章武)태수에 임명되었다.
원새 5년(356년) 11월, 제군(齊郡)태수로 부임지가 옮겨졌고, 이후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