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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촌 사마고리 유적 (사마의 생가)
태극권을 연마하는 주민들
1. 개요
温县영어 Wen County
허난성 자오쭤시의 현. 자오쭤 서남쪽, 황하 북안의 평원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40만명이다. 황하 건너편의 궁이시와 마주한다. 2천년간 이어진 온현 지명은 옛 현성이 있던 멍저우시 즈창촌 (治墙村)[1]과 현 시가지 서남쪽에 온천이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다.[2] 사마의의 고향인 하내 온현 효경리로 유명하며, 서쪽 10km 지점의 구청촌 (古城村)에 사마고리 (司马故里)가 있다.
나름 중국 전통 무술의 성지이다. 진식 및 조보 (신가) 태극권의 발원지로, 광장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출신 인물로 삼국지의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팔달 등의 하내 사마씨 일족 (서진 황족), 전한 시기의 재상인 채의와 석경, 전한 말의 외척 부희, 북송 대의 화가 곽희 등이 있다. 현대에는 여러 과학자 및 정치인들이 배출되었다. 태극권의 창시자 진왕정의 후예 및 사마씨에서 왕씨로 개명한 서진 황실의 후예들이 일대에 거주한다.
2. 역사
고대 시기 일대는 제수 (濟水)의 발원지로, 중시되었다. 서주 시기 주무왕의 공신 소분생 (蘇忿生)에게 분봉된 온나라 (溫) 혹은 소나라 (蘇)에 속했다. 기원전 650년, 적인 (북적)의 침공으로 온나라가 멸망한 후 일대는 왕령지로 회수되었다. 기원전 635년, 주양왕은 자신의 복위를 도운 진문공에게 남양 (南阳)이라 불린 타이항산 ~ 황하 일대의 원 & 온 땅을 하사하였다. 진문공은 현 시가지 서쪽 10km 지점의 구청촌에 온읍 (溫邑)을 세우고 호진 (狐溱)을 그 대부로 봉하였다.2.1. 고대
한나라 시기 온읍에 온현(溫縣)이 설치되어 하내군 (河內郡)에 속했다. 온현은 온성 (溫城)으로도 불렸다. 기원전 206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당시 은왕으로 봉해졌던 사마앙의 일족이 일대에 정착하여 지역 유지이자 문벌 가문이 되었다. 후한 시기 사마균-사마량-사마준-사마방이 4대에 걸쳐 고관을 지내며 하내 사마씨의 명성이 높아졌다. 191년에는 왕윤 온후 (溫侯)에 봉해졌고, 이듬해 그가 피살된 후에는 여포가 이어받았다.한편 동탁 집권 후, 사마팔달은 장남 사마랑의 주도 하에 낙양에서 온현으로 돌아갔다. 이후 20년 가까이 칩거하던 차남 사마의는 208년에 출사하여 조위 정계의 핵심 인물로 거듭난다. 사마의는 238년 공손연을 토벌한 후 회군하며 온현에 들려 잔치를 열고 금의환향했다. 이때 연주된 타악곡인 '사마의득승고'는 현재까지 전통 음악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마씨가 조위의 패권을 잡은 후, 진왕 사마소는 온현에 안락궁을 세웠다.
2.2. 중세
서북쪽 20km 지점, 첸촌의 원나라 시기 사찰인 자승사 (慈胜寺)
다만 서진 멸망 후 쇠락하여 북제 시기인 556년에 현이 폐지되었다가 수나라 시기인 596년 복구되어 회주 (懷州)에 속하였다. 당나라 시기인 621년, 온현은 이성현 (李城縣)으로 개칭되었고 평주 (平州)를 거쳐 맹주 (盟州)로 이관되었다. 625년, 재차 회주 산하 온현으로 돌아왔다. 657년, 온현은 낙주 (洛州)로 이관되었가 843년 재차 맹주에 편성되어 근대까지 이어졌다.
2.3. 현대
중화민국기인 1945년, 온현을 분할하여 온척현 (温陟县)과 온맹현 (温孟县)을 설치했다가 다시 온현으로 합쳤다. 1960년, 원현은 서북쪽의 친양현에 병합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다.3. 우선관 (遇仙观)
원현 북쪽 10km 지점, 친허 남안의 우더진에 위치한다. 원나라 초기인 1290년경에 세워진 도교 사원으로, 명청대에 보수되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맞지 않고 온전히 중근세 건축 양식을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