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4:53:15

진안(서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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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할거 군주
양왕 진안 | 涼王 陳安
출생 ?
진주(秦州) 천수군(天水郡) 성기현(成紀縣)
(現 감숙성 핑량 시 징닝현)
즉위 322년
사망 323년 7월
재위기간 양왕
322년 ~ 323년
호후(虎侯)
역임지위 장하도위
토로장군 ⮕ 대장군[1]
자칭 진주자사
대도독, 가황월, 대장군, 옹양진양4주목(雍涼秦梁四州牧)
1. 개요2. 생애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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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陳安
(? ~ 323)

오호십육국시대의 군벌. 자는 호후(虎侯). 진주(秦州) 천수군(天水郡) 성기현(成紀縣) 출신. 오호십육국시대 초에 난립했던 할거 세력 중 하나로 양왕(涼王)을 자칭했다.

2. 생애

평범한 농민 집안의 아들이었던 진안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강개함을 품고 있었다. 한번은 독서를 하다가
"대장부라면 마땅히 고관에 올라 장절(杖節)을 쥐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쟁기와 호미만 붙잡고 있으랴!"
라 한탄하고는 고향을 떠나 동쪽의 낙양(洛陽)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승을 섬기고 한자와 글을 배웠는데, 이때 《위서》를 읽고 〈허저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본인의 자(字)를 '호후(虎侯)'라 지었다. 이후 팔왕의 난이 발발하여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자, 진안은 황족과 영합하기 위해 사마씨의 빈객으로 활동하였다. 진안은 힘이 좋아 7척의 칼을 들고 완전무장을 하고도 달리는 말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날래고 용맹하였다고 하며, 사격에도 능했기에, 장안(長安)에서 할거하던 남양왕 사마모가 그를 불러 장하도위로 삼았다.

영가 5년(311년) 5월, 남양왕 사마모가 세자 사마보를 평서중랑장, 동강태위로 삼아 상규(上邽)를 진수하게 하였는데, 진주(秦州)자사 배포(裴苞)가 이에 반발하면서 사마모와 마찰을 빚었다. 이에 진안은 사마모의 명령을 받고 배포를 공격해 무찔렀고, 배포는 안정(安定)으로 도망쳐 안정태수 가필에게 의지하였다.

영가 5년(311년) 9월, 남양왕 사마모가 한(漢)의 시안왕 유요, 하내왕 유찬 등에게 패하여 장안성을 들어 항복하였으나, 유찬은 포로로 잡혀온 사마모를 군영에서 즉각 살해하였다. 그러자 사마모의 세자였던 사마보가 남양왕을 칭하며 장안 서쪽 진주에서 세력을 기르기 시작하니, 진안은 사마보를 찾아가 섬겼다.

건흥 3년(315년) 2월, 남양왕 사마보의 명령에 따라 정예 기병 1,000여 기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토벌하였다. 남양왕 사마보가 진안을 총애하고 후히 예우하자, 사마보의 장수인 장춘(張春) 등은 이를 시기하여 진안이 다른 뜻을 품고 있어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마보가 이를 불허하자, 장춘 등은 은밀히 자객을 보내 진안을 찌르게 하였다. 진안은 이들이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상처 입은 채로 말에 올라 농성(隴城)으로 들어갔다. 이후로 진안은 사마보를 직접 만나지 못했으나, 주기적으로 사자를 보내 공물을 끊임없이 바쳤다. 이후 민제 사마업에 의해 토로장군에 임명되었다.

건흥 5년(317년) 정월, 양주(凉州)목 장식은 장안성이 함락되고 민제 사마업이 한나라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슬퍼하며, 반격하고자 태부사마 한박(韓璞), 무융장군 장랑(張閬)에게 보•기 10,000명으로 한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농성의 진안, 안고(安故)의 가건(賈鶱), 농서(隴西)의 오소(吳紹) 등도 제각기 군(郡)의 병력을 일으키고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남안(南安)에서 강족들과 싸우다가 양식과 화살을 모두 소진하는 바람에 한군과는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회군해야만 했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사마보가 진안을 농성에서 쫓아내니, 진안은 안정태수 초숭(焦嵩)에게로 가 함께 거병하고 사마보의 본거지인 상규(上邽)를 압박하였다. 사마보는 장식에게 구원을 청했고, 장식은 그 요청에 따라 장수 두도(竇濤)에게 보•기 20,000명으로 신양(新陽)에 주둔하게 하여 진안과 초숭을 압박하고자 하였다.

대흥 2년(319년) 4월, 남양왕 사마보가 진왕(晉王)을 칭하자, 진안은 진주자사를 자칭하고 전조에 투항하였다가, 얼마 뒤 성한에 항복하였다. 당시 상규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진안의 공격은 멈출 줄 몰랐기에, 장춘은 사마보를 받들어 기산(祁山)으로 들어갔다. 이에 장식이 한박에게 기병 5,000 기를 주어 상규를 구원케 하니, 진안은 면제(綿諸)로 물러나 지켰다. 이후 진안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사마모가 상규로 돌아오자, 진안은 다시 상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장식이 장수 송의(宋毅)를 구원군으로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병사를 거두어 물러났다.

대흥 3년(320년) 5월, 사마보의 장수 양차(楊次)와 불화하던 장춘은 사마보에게 양차를 주살한 뒤 진안을 칠 것을 건의했으나, 사마보가 듣지 않자 사마보를 유폐한 후 살해하고 그 종실의 아들 사마첨(司馬瞻)을 세자로 세워 대장군이라 칭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마보가 사망했다는 것을 안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전량으로 달아났고, 진안은 이를 기회로 삼아 전조의 황제 유요에게 상표하여 사마첨 토벌을 주청했다. 유요는 이를 허하고 진안을 대장군으로 삼았으며, 진안은 곧바로 출격해 상규를 장악하고 사마첨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이때 주모자인 장춘은 부한(枹罕)으로 달아나면서 놓치고 말았으나 양차는 붙잡았기에, 진안은 사마보의 시신 앞에서 양차를 참수하고는 천자의 예로 사마보의 장사를 지내고 시호는 '원왕(元王)'이라 하였다.

광초 5년(322년) 2월, 황제 유요가 친정에 나서서 구지양난적을 격파하고, 농서의 백성 10,000여 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 구지 토벌을 계속 진행하려던 참에 전조군 내에서 역병이 돌았고, 황제인 유요조차 병에 걸리고 마니, 유요는 양난적의 칭번에 만족하고 회군하였다. 유요군이 안정군(安定郡) 교외에 이르렀을 때, 진안은 황제와의 알현을 청했지만 병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진안은 분노하여 유요는 이미 죽었는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라 섣불리 단정하고, 반란을 일으켜 대거 약탈하며 날뛰기 시작하였다. 유요는 병이 위독해 진안을 차마 막지 못하고 일단 계속하여 장안성으로 진군했으나, 진안이 정예 기병으로 회군하는 유요군의 후미를 쳐 치중을 감독하던 장수 호연식(呼延寔)과 그 장사 노빙(魯憑)을 사로잡았다. 진안은 호연식을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오게 하고 물었다.
"유요는 이미 죽었는데 그대는 누구를 보필하려는 것입니까? 족하께서는 마땅히 저와 손을 잡고 대업(大業)을 세우시지요."
그러자 호연식이 진안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개새끼야! 너는 총애를 받고 의심할 여지없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과거에는 사마보를 배신했고 지금은 또 이러하구나. 네가 주상보다 나은 점이 뭐가 있느냐? 네놈의 목은 머지않아 상규에 효수될 텐데 무슨 대업을 이르려 하느냐! 나를 속히 죽이고 내 목을 상규 동문(東門)에 걸어 대군이 입성하는 광경을 보게 하라!"
이를 들은 진안은 노하여 호연식을 죽이고, 투항한 노빙은 참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우 진집(陳集)에게 기병 30,000기를 주어, 장수 장명(張明)과 함께 유요군의 뒤를 추격케 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비하고 있던 위장군 호연유(呼延瑜)가 요격하여 진집은 전사하였고 그 병사들은 포로가 되었다.

그제서야 두려운 마음이 든 진안이 일단 상규로 돌아오고, 장수 유열(劉烈)과 조한(趙罕)을 파견해 견성(汧城)을 뽑으니, 농상(隴上) 일대의 저족과 강족들이 진안에게 귀부하였다. 이리하여 100,000명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게 된 진안은 대도독, 가황월, 대장군, 옹양진양4주목(雍涼秦梁四州牧), 양왕(涼王)을 자칭하고 조모(趙募)를 상국으로 삼음으로써 전조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때 참군 노빙이 울음터뜨리며
"나는 차마 진안의 죽음을 지켜볼 수 없다!"
라 절규하자, 진안은 격분하여 노빙을 참수하라 명했다. 노빙은 처형되기 직전에
"죽음은 본래 나의 몫이나, 내가 죽으면 조(趙)가 진안을 참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내 머리를 진주(秦州) 길가에 걸어다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노빙의 죽음을 전해들은 유요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현인은 천하의 희망이다. 현인을 해하는 것은 천하의 정(情)을 해하는 것으로, 태평성대의 군주는 감히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거스르는 법이 없거늘, 하물며 천하면 어떠하랴! 진안은 어진 인재를 구해야할 이 시기에 군자를 해쳐 작금의 희망을 끊어놓았으니, 나는 이로써 그 무능함을 짐작할 수 있구나."

광초 6년(323년) 6월, 진안이 남안으로 진격해 전조의 정서장군 유공(劉貢)을 포위하였다. 이때 흉노의 휴도왕(休屠王) 석무(石武)가 상성(桑城)에서 나와 상규를 공격하자, 근거지가 털리는 것을 염려한 진안은 남안의 포위를 풀고 황급히 상규로 향했다. 퇴각하던 진안은 석무의 군대와 고전(瓜田)에서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진안의 병력이 훨씬 많아 전세가 매우 유리하였다. 석무는 중과부적으로 잠시 후퇴하여 예전에 장춘이 세웠던 보루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켰다. 신이 난 진안은 석무의 뒤를 추격하며 외쳤다.
"역적 오랑캐 종놈아! 곧바로 저 종놈을 생포한 후에 유공(劉貢)도 참하리라!"
하지만 진안이 보루를 공격하는 사이에 유공이 남안에서 나와 진안의 후군을 치니 진안군 10,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진안은 보고를 받고 얼른 군사를 돌려 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이로 인해 진안군은 서로 엉키면서 더 큰 혼란에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을 파악한 석무가 보루에서 나와 유공과 협공하였다. 결국 앞뒤로 공격받게 된 진안군은 대패하여 궤멸당했고, 진안은 살아남은 기병 8,000기만 수습해 농성(隴城)으로 도망쳤다.

광초 6년(323년) 7월, 진안의 패주 소식을 들은 유요는 이번 기회에 진안을 뿌리뽑고자 친정하여 농성을 포위하고, 따로 군대를 보내 상규도 포위하였다. 진안은 여러 차례 성 밖으로 나와 전조군과 싸웠지만 번번이 패했고, 그 와중에 전조의 우장군 유간(劉幹)이 이끄는 별동대가 평양(平襄)을 함락시키자, 진안에게 투항했던 농상(隴上)의 여러 현들이 일제히 전조에 항복하였다. 이에 유요는 농우 일대에 진안과 그 측근인 조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더욱 투항을 독려하였다. 바깥 상황을 모르던 진안은 상규와 평양의 병력을 끌어와 농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장수 양백지(楊伯支), 강충아(姜沖兒) 등을 남겨 지키게 하고, 수백 기의 정예 기병과 함께 전조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상규로 향했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함락당했고, 상규도 이미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진안은 이내 섬중(陝中)으로 달아났다.

유요는 장수 평선(平先)과 구중백(丘中伯)을 보내 진안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진안은 10여 명의 기병과 섬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접근하는 적은 왼손에 7척의 칼과 오른손에 장팔사모를 휘두르면서 한번에 5 ~ 6명을 베어 죽였고, 멀리 있는 적은 좌우의 기병들에게 활로 엄호하게 하였다. 평선과 구백중은 여러 번 진안을 쳤으나, 매번 생포에 실패하였고 오히려 죽은 전조군의 수만 400명을 헤아렸다. 이대로는 진안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 여긴 용장 평선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진안과 일기토를 벌여, 서로 3합을 주고받은 끝에 진안의 오른손에서 장팔사모를 빼앗고 물러났다. 그때 마침 날이 저물면서 세찬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진안은 말을 버리고 좌우 병사들과 산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전조군은 샅샅히 인근을 수색해보았으나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진안의 명령을 받고 추격군의 동향을 살피러 가던 장수 석용(石容)이 전조의 보위장군 호연청인(呼延青人)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호연청인은 석용을 고문해 진안이 있는 곳을 실토케 하려 했으나, 석용은 고문으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진안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전조군은 다시 수색을 재개하여 산 속에서 진안의 발자국을 발견하였고, 이를 추적해 산골짜기에 머무리고 있던 진안을 찾아 그 자리에서 참수하였다. 진안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유요는 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진안의 사망 소식은 널리 퍼져, 양백지는 강충아를 참수하고 농성을 들어 유요에게 항복하였고, 진안의 장수 송정(宋亭)도 조모를 참수하고 상규를 들어 전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진주는 완전히 평정되었고, 유요는 진주의 대성(大姓)인 양씨(楊), 강씨(姜) 등 여러 유력 호족 2,000여 호를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진안에게 호응했던 저족과 강족들은 각각 인질을 보내 다시 전조에 복속되었고, 진안을 돕던 구지의 양난적은 성한의 한중(漢中)으로 도망쳤다.

3. 기타

  • 진안은 장수와 병사들을 자주 위무하여 그들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었기에, 진안 사후 농상 일대의 사람들은 그를 회상하며 〈장사지가(壯士之歌)〉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진안과 싸웠던 유요조차도 이 노래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진 나머지 악공에게 명하여 기록을 남기게 하였다. 그 덕에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전해지며, 당나라의 시인 이백도 이 노래에 감명받아 〈사마장군가·대농상건아진안(司馬將軍歌·代隴上健兒陳安)〉이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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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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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연(전조)에게 투항해서 얻은 직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