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7:01:54

사마담(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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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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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황족
무릉장왕(武陵莊王)
司馬澹 | 사마담
시호 장(莊)
작위 동무공(東武公) → 무릉군왕(武陵郡王)
성씨 사마(司馬)
담(澹)
사홍(思弘)
재위 서진의 무릉왕
304년 ~ 311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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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사홍(思弘). 사마주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제갈태비.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용종복야를 지내다가 283년에 아버지 무릉왕 사마주가 사망하자 형제들과 땅을 나누어 받았고 동무장에서 무릉왕에 봉해져 식읍 5200호였으며, 대장군, 중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의 성품은 질투와 시기가 많아 효성과 우애가 없었으며, 동생인 동안왕 사마요가 좋은 명성이 있어 부모에게 사랑받자 그를 싫어해 원수같이 여겼다.

291년에 사마요가 양준 일파를 주살한 것으로 인해 멋대로 상을 주는 것을 보고 이로 인해 사마요와 틈이 더욱 벌어져 참소했으며, 여남왕 사마량이 이를 믿어 참소했고 사마담은 그를 폐해 옮기자고 주장했다. 한편, 허창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하왕 사마하 대신 낙안왕 사마감이 도독예주자사, 안남장군에 임명되었을때, 사자가 파견되었으나 사마감이 병으로 인해 행동할 수 없어 사마담이 대신 진압했다.

300년에 조왕 사마륜이 군사를 일으켜 가남풍을 몰아낼 때 사마륜에게 가담해서 영군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자신과 친한 곽숙(郭俶)과 그의 동생 곽간(郭侃)과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곽간이 술에 취할 때 장화에 대한 원한을 이야기하자 술에 취했던 사마담은 그들을 나란히 죽여 사마륜에게 그 머리를 보냈다. 이에 대해 사서에서도 그의 주정부리는 것의 사나움이 이와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마담의 아내 곽씨는 황후 가남풍의 사촌 여동생으로, 처음에 권세를 믿고 사마담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시어머니인 제갈태비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하지만 가남풍이 주살되고 제왕 사마경이 보정을 할 때 제갈태비가 아들 사마담의 불효를 고발하고 사마요를 돌려달라고 간청하여 사마담과 곽씨는 요동으로 유배되었다. 사마담의 아들 사마희(司馬禧)는 당시 5살이였는데, 부모를 따라 유배되지 않았고, 여러 해 동안 부모가 석방되기를 사정하였다.

후에 제갈태비가 죽고, 사마요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살해당하고 나서야 사마담은 풀려날수 있었다. 그 후, 사마담은 광록대부, 상서, 태자태부, 무릉왕으로 봉해졌다.영가 말년에 영가의 난이 발생했고, 사마담은 석륵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시호를 장왕(莊王)으로 받았다. 사마희는 숙부 양효왕 사마융의 후사를 이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석륵에게 주살되었고, 사마담의 후사는 또 다른 아들인 사마철(司馬喆)이 이었으나 사마철 또한 석륵에게 살해당하여 진원제의 아들 사마희(司馬晞)를 무릉왕으로 봉하여 사마담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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