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2:10:02

등하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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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鄧遐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응원(應遠). 예주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출신. 평남장군 등악의 아들. 용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그를 번쾌에 비할 만하다 평했다.

2. 생애

영화 8년(352년) 2월, 등하는 본래 독호를 지내고 있었으나, 정서대장군 환온이 그를 자신의 참군으로 삼고, 익주자사 주무(周撫)를 도와 소경문(蕭敬文)의 반란을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소경문이 부성(涪城)의 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니, 주무와 등하는 쉽게 이길 수 없었다. 이후 환온이 보낸 양주자사 사마훈의 지원군에 힘입어 겨우 부성을 함락하고, 소경문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영화 10년(352년) 2월, 환온이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북벌하기 위해 강릉에서 출발했다. 수군은 장강을 따라 북진하여 양양에서 균구(均口)로 들어가, 남향(南鄉)에 이르렀고, 보병은 석천(淅川)에서부터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관중(關中)으로 향했으며, 양주자사 사마훈(司馬勳)은 자오도를 통해 기습을 시도했다. 등하는 환온의 주력군의 선봉이 되어, 상낙(上洛)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전진의 형주자사 곽경(郭敬)을 사로잡았다. 또, 파죽지세로 잔군하여 청니(青泥)에서 전진군을 대파했다.

영화 10년(352년) 6월, 환온의 북벌군은 당시 보급 문제를 현지조달 방식으로 해결했는데, 이를 눈치챈 전진의 경명제 부건이 청야전술을 펼치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기 시작했다. 결국 환온은 하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하고 회군했으나, 이때만을 노린 태자 부장(苻萇)이 전군을 들어 그 뒤를 추격해왔다. 북벌군은 부장의 맹공을 받고 대패해, 동관(潼關)에 이를 때까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등하는 상황이 위급함을 알고, 홀로 숨어있다가 전진군이 다시 공격해올 때, 활을 들어 부장을 저격했다. 지휘관이자 태자인 부장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비로소 전진군도 물러났고, 환온은 남은 패잔병을 수습해 귀환할 수 있었다. 귀국한 후, 공을 인정받아 경릉태수에 임명되었다.

융화 원년(362년) 정월, 전연의 예주자사 손흥(孫興)이 표를 올려 전연 조정에 남벌을 청했다. 이에 전연이 영남장군 여호(呂護)를 파견해 하음(河陰)에 주둔하게 하고 낙양성을 압박해오자, 동진의 하남태수 대시(戴施)는 완(宛)으로 도망쳐버렸다. 관군장군 진우(陳祐)가 환온에게 위급함을 알리니, 환온은 서연2주자사 유희(庾希)와 경릉태수 등하에게 수군 3,000여명을 주고 낙양을 구원하게 했다.

융화 원년(362년) 7월, 유희와 등하의 수군이 구원하러 오는 것을 본 여호는 소평진(小平津)에서 이들과 맞서다 유시에 맞아 전사했다. 여호의 부장 단숭(段崇)은 전군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고자 북쪽으로 물러나 야왕(野王)에 주둔했다. 이에 등하는 신성(新城)에 주둔해 낙양을 보위했다. 조정에서 전연의 공세를 막은 것을 치하하며 등하를 관군장군에 임명했다.

태화 4년(369년) 7월, 환온이 강주자사 환충, 예주자사 원진(袁真)과 의논한 끝에 다시 북벌을 결정하고, 조정에 표를 올려 전연 정벌을 청했다. 등하는 이번에도 선봉이 되어, 정로장군 주서와 함께 임저(林渚)에서 전연의 장수 부안(傅顏)을 격파하자, 전연의 고평태수 서번(徐翻)이 항복해왔다. 그러나 환온의 북벌군은 또다시 보급 문제에 시달리면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전황은 점차 불리해져만 갔고, 결국에는 환온의 주력군이 방두(枋頭)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북벌군은 배와 치중을 모두 불사르고 전연군의 추격과 싸워가며 겨우 동진으로 돌아왔다.

태화 4년(369년) 10월, 환온은 방두에서의 패배를 무척 부끄러워 했다. 그래서 패전의 책임을 예주자사 원진에게 전부 뒤집어씌웠는데, 원진은 노하여 수춘(壽春)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환온은 진작에 등하의 용맹을 꺼렸고, 원진과 등하는 고향 또한 같았기에, 등하가 반란에 가담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등하는 환온에 의해 면직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영강 연간(373년 ~ 375년), 효무제 사마요에 의해 여릉태수로 추증되었다.

3. 기타

  • 양양성 북쪽 면수(沔水)에는 교룡이 살고있어, 항상 인근의 사람들을 해쳤는데, 이 소문을 들은 등하가 교룡을 잡기 위해 검을 뽑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교룡은 등하의 발목을 감싸며 공격해왔지만, 등하는 침착하게 칼을 휘둘러 교룡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서 죽이고는 무사히 강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 동생 등일(鄧逸)은 형과 마찬가지로 무예에 재능이 있어, 등하 사후에도 감교광2주제군사(監交廣二州諸軍事), 건위장군, 평월중랑장, 광주자사, 가절을 지냈다.
  • 《세설신어》 「출문편(黜免)」에 따르면 면직된 후, 간문제 사마욱이 사망하자, 그의 능묘에 참배하러 갔다가 환온을 만났다. 이때 환온은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어 안 본 사이에 그리도 여위었는가?"

    라 묻자, 등하가 답했다.
    "제 도량이 깨진 시루에도 개의치 않은 숙달(叔達)[1]에 미치지 못하여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 답했다고 한다.


[1] 후한 시기 인물인 맹민(孟敏)의 자. 파증불고(破甑不顧) 고사의 기원이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