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외척에 대한 내용은 등강 문서 참고하십시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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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羌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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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중국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용장. 용맹하고 기마궁술에 능했다. 전진에서는 장자와 함께 만인지적으로 불렸으며, 등강과 부비는 관우·장비와 같은 사람들로서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다라고 다른나라에 자랑하기도 했다.2. 행적
357년, 전연의 장수 장경이 지관(軹關)을 침략하자 유주 자사 강철(強哲)과 함께 그를 격파하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그 해, 강족 요양이 군사를 이끌고 전진을 공격해 관중을 빼앗으려 했다. 부생은 부견, 부황미, 등강을 파견해 행성에서 요양을 막게 했다. 요양이 초반에 보루를 쌓고 진영을 지켰으나, 3천 기병을 이끌고 도발하는 등강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모든 군사를 이끌고 전진군을 향해 총공격을 가했다. 등강은 그를 삼원(三原)까지 성공적으로 유인했고,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부견과 부황미는 요양의 군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요양은 도망치다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포로로 사로잡혀 죽고 만다(...).선소제 부견에 의해 부생이 폐위되었을 때 효기장군에 임명되었다. 부견이 친히 군대를 일으켜 병주 일대의 군벌 장평을 토벌할 때 동행해 그의 양아들인 장자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359년, 악양에서 일어난 평강호군 고리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 경조윤이었던 왕맹의 호족 숙청에 앞장서서 무력으로 저항하려는 호족들을 제압하였다. 대대적인 숙청이 끝나고 황권이 안정된 후 등강은 상서에 임명되었다.
365년, 흉노의 우현왕 조곡과 좌현왕 유위진[1]이 전진을 따르지 않았다. 등강은 다시 건절장군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해 전멸시킨 뒤, 목근산(木根山)에서 유위진을 생포했다.
367년, 진공(晉公) 부류가 다른 공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왕맹과 협공해 포판을 함락하고 부류를 죽였다. 반란이 진압된 후 건무장군, 낙주자사에 임명되어 섬성에 진수했다.
369년, 전연이 약속했던 호뢰 이서 땅을 주지 않아 부견은 왕맹을 총대장으로 삼고 등강, 양성에게도 각기 군사를 주어 전연을 토벌하게 했다. 등강의 부대는 모용장을 격퇴시키고 형양을 점령하면서 진군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왕맹의 주력이 노천(潞川)에서 모용평의 30만 대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왕맹은 사성교위 서성[2]에게 정찰을 명했다. 그러나 서성이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것을 보고 왕맹은 매우 노하여 그를 처형하려 했다. 등강은 왕맹에게 서성을 죽이자 말아달라고 여러 번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왕맹과의 언쟁 끝에 등강이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 왕맹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왕맹은 하는 수 없이 서성을 특별히 사면하였다.
모용평의 대군과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자 왕맹은 등강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등강은 자신을 사예교위직에 천거해주길 요구했으나 왕맹이 거절했다. 이에 심통이 난 등강이 왕맹의 부름을 무시하니 이번에도 왕맹은 어쩔 수 없이 등강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전연의 잔존세력까지 제거한 후, 왕맹은 일전에 약속한대로 등강을 사예교위로 추천했다. 하지만 부견이 등강에겐 어렵고 복잡한 관무 처리보단 군을 통솔해 사방을 정벌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며 거절하고, 등강을 사예교위가 아닌 진군장군에 임명했다.
371년, 익주에서 장육과 양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5만 군을 이끌고 양안과 함께 이들을 토벌하였다. 부견이 탁발부의 대나라를 정벌할 때 종군하고, 대나라 멸망에 공을 세워 거기장군, 병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379년 2월에 부견이 장자를 병주자사로 임명했다는 『진서』 부견재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379년 초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전진의 이름있는 장수들이 모두 거국적으로 출전하여 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