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24:31

도절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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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왕태자(王太子)
성씨 고(高)
이름 도절(都切)
부왕 유리명왕
형제 해명, 무휼, 색주, 재사, 여진
생몰년도 ? ~ 기원후 1년

1. 개요2. 생애3. 기타4. 둘러보기

1. 개요

고구려태자. 제2대 유리명왕장남이자 해명태자, 대무신왕의 형제였다.

2. 생애

도절태자의 생년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아버지인 유리왕이 즉위 2년차인 기원전 18년 음력 7월에 왕후 송씨와 혼인했고, 동생인 해명태자가 기원전 12년에 태어난 점으로 보아 기원전 18년 ~ 기원전 1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년에 부여대소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인질 교환을 요구한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때 유리명왕이 대소왕의 세력이 강한 것을 알고는 요구대로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이 이를 거부하여 끝내 부여로 가지 않았다. 기록에 따라 '보내봐야 지키라는 약속은 안 지키고 나만 죽을 게 뻔한데 그래도 보낼 거냐' 라거나, 부여로 가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할 만큼 무서워했다는 등 분분하다. 이에 분노한 대소왕이 같은 해 겨울에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심한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패배하고 돌아갔다.

이후 서기 1년 1월에 죽었는데, 사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해명태자호동왕자가 그랬듯이 아버지와의 갈등 끝에,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책임을 지고 자살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혹은 날 때부터 몸도 마음도 유약했던 탓에 요절했다는 추측도 있다.

도절이 일찍 죽는 바람에 아우였던 해명태자가 3년 후인 서기 4년에 태자가 되었으나, 해명태자 역시 유리명왕과의 갈등 끝에 자살하고 말았다. 결국 차기 왕좌는 해명의 아우였던 왕자 무휼이 이어받았다.

3. 기타

유리명왕이 도절태자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해명태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것으로 보아, 모계가 졸본성 인근의 비류국 출신인 대무신왕동복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왕후 송씨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왕후 송씨는 기원전 17년에 사망했는데 대무신왕은 4년생이라서 생모에 논란이 있으므로 아닐 수도 있다. 거기다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는 가설도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유리명왕의 정실이 왕후 송씨, 화희, 치희로 셋이나 되는지라 셋 중 누가 어머니인지 불명이다. 기록에 따르면 왕후 송씨가 왕후가 된 지 1년 만에 사망해서 후처로 화희와 치희가 들어왔지만 두 정실은 서로 심하게 싸우기만 하다가 끝내 유리명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화희가 전한 한족[1]이라는 이유로 비첩이라 인종차별해 충격 받은 치희는 친정으로 돌아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고구려인인 화희가 치희를 견제한답시고 심한 인종차별을 한 것과 둘의 지위가 비등했고 치희가 떠나자 유리명왕이 슬퍼서 황조가를 지을 정도로 총애했다는 점, 아무리 부여가 고구려보다 훨씬 강성했던 시절이라지만 뜬금없이 대소왕이 동생인 주몽의 손자인[2] 도절을 내놓으라며 협박한 데다 군대까지 몰고 생난리를 친 걸 감안할 때 도절의 어머니가 치희일 수도 있다. [3] 다만 치희가 정말 친어머니라면 자식도 있는데 모욕을 좀 받았기로거니 바로 떠나버린다는 것은 좀 납득하기 힘들기에 화희나 송씨 설이 더 우세하기도 하다.

4.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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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희가 유리명왕의 후처가 되었을 당시 중국은 전한 말이었다.[2] 주몽의 실제 항렬과 상관없이 주몽은 대소의 의붓동생에 가까웠다.[3]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소는 주몽을 동성(同姓)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절의 어머니가 중국인이었다면 혼혈 따위가 지파의 봉사손이 될 수 없다는 종가 당주의 꼰대질(?)같은 느낌으로 도절을 내놓으라 요구한 걸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