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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1. 개요2. 기록3. 현존하는 측우기4. 같이 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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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이 약 30 cm라고 쓰였는데 이는 측우기의 기준척이 주척(周尺)이기 때문이다.[1][2]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우량계의 일종으로, 1442년 5월 19일, 세종의 명에 따라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고안하고 장영실 등이 제작한 발명품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도구는 아니다.[3] 그러나 한국사에서 측우기가 의미있는 발명품인 이유는, 단순 빗물받이가 아닌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로 표준화된 기상측정기구였다는 점에 있다. 이는 16세기 이탈리아보다 무려 200여 년을 앞선다.

2. 기록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3년(1441) 4월 29일 기사 #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우량(雨量)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오니, 토성(土性)의 조습(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천심(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본관(本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 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촌·분수를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천심을 측량하여 본조(本曹)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또 외방(外方) 각 고을에도 경중(京中)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傳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23년(1441) 8월 18일자 기사#[4]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雨量)을 측정(測定)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그러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 별로 열기(列記)합니다.

1.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本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둘 것이며,

1.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鑄造)한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 매 1건(件)을 각도(各道)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한결같이 상항(上項)의 측우기의 체제(體制)에 의거하여 혹은 자기(磁器)든지 혹은 와기(瓦器)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周尺)도 또한 상항(上項)의 체제(體制)에 의거하여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守令)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測量)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거(典據)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24년(1442) 5월 8일자 기사#
이외에도 정조 때부터 조선이 멸망하는 20세기 초까지 강수량 측정 기록이 남았다.

3. 현존하는 측우기

가장 유명하고 또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은 것은 1837년 공주 충청감영에 설치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금영 측우기, 錦營測雨器)이다.

이 측우기를 1915년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가 일본으로 반출했다. 와다는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내무성 지리국 측량과 기상괘(気象掛)[5]에서 근무하며 초기 일본의 기상 사업을 관할하다가 1908년 대한제국의 관측소 기사로 위촉되었다. 이때 조선의 측우기가 세계 최초의 규격화된 우량계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세계에 측우기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즉 측우기의 역사적 가치는 시대의 아픔 때문에 우리가 아닌 일본인 기상학자가 재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근대학문적으로 정립하지 못했을 뿐, 조선 정부가 측우기를 잊지는 않았다. 문종이 측우기를 고안한 1442년 이래 관아나 중요시설에는 언제나 측우기를 설치했고 청계천 등 하천의 다리를 수표교로 만들었다. 또한 고을 수령이 직접 측우기로 강수량을 재어 장계로 올리도록 했다. 농업 생산력이 국가의 근본인 조선시대에서 농업의 주요 척도가 되었기에, 측우기를 통한 강수량 측정은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6]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정조시대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측우기를 사용한 조선시대 후기의 강수량 측정 기록이 있다.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금영측우기는 1971년 한국으로 반환된 뒤 바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에 국보 제329호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7] 측우기 실물 외에도 측우기를 설치한 측우대는 몇 개가 더 남아있는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제330호, 국립기상박물관 소장), 관상감 측우대(보물 제843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제331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통영 측우대(보물 제1652호, 국립중앙과학관 소장), 연경당 측우대 등이다.

문화재청은 2019년 12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금영측우기를 좀 더 순화된 표현인 '공주감영 측우기'로 명칭을 변경하고, 2019년 현재 보물로 지정된 측우기와 측우대들을 국보로 승격지정하겠다고 밝혔다. # 대상은 금영측우기(공주감영 측우기, 구 보물 제561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구 보물 제842호), 창덕궁 측우대(구 보물 제844호)이며, 2020년 2월 7일 각각 국보 제329호, 국보 제330호, 국보 제33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4. 같이 보기



[1] 1주척은 약 20.8 cm. 조선에서는 주척, 황종척, 영조척, 포백척 등등 여러 가지 척을 사용했고 각각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 그래서 문화재 복원시에도 해당 유물에 사용된 척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 30.3 cm짜리 척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쓰이는 곡척(30.3 cm)을 받아들인 것으로 우리네 전통이 아니다. 다만 일본의 곡척이 조선에서 주척과 함께 자주 쓰인 영조척(약 30.8 cm)과 길이가 거의 같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쉽게 받아들였던 점도 있다.[2] 근대에는 서양의 도량형에 근접한 단위를 사용하고자 했다. 단적으로 고종이 1902년 발표한 1척은 30.303 cm였는데, 이는 미터법을 전근대 도량형에 맞게 도입하면서 1미터를 3.3척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30.303에 3.3을 곱하면 99.999가 나온다. 일본은 을사늑약 직전인 1909년에 강제로 조선의 도량형을 일본 도량형과 통일시키면서 무효화했다. 고종의 도량형은 일본과 별개로 형성되었는데도 30 cm에 근접했는데, 영국식 야드파운드법의 1피트가 30.48 cm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3] 기원전 500년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등장할 정도로 이와 비슷한 도구는 많이 있었다.[4] 참고로 이 때는 비가 많이 내려 기청제를 지내야 했을 정도였다.[5] 일본 중앙기상대의 전신격인 기관.[6] 당장 금영측우기부터가 공주 감영에 설치된 것으로, 관찰사급 지방관이 직접 취급하는 물건이다.[7] 본래 대한민국 기상청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2020년 10월 말에 개관한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옮겨졌다.[8] 영화 후반부에 장영실이 아이디어를 고안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세종이 아이디어를 내고 문종이 고안하였다. 영화에서는 역사왜곡 논란을 의식한 듯 명나라 사신을 엿먹이는 자리에서 측우기 모티브를 장영실이 창안한 것으로 에둘러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