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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조선)/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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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좌우명2.2. 용모 및 성격2.3. 개인적 면모2.4. 학문2.5. 문집2.6. 대외 인식2.7. 가족2.8. 인간 관계2.9. 그 외

1. 개요

조선의 학자 조식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이다.

2. 상세

2.1. 좌우명

  • 좌우명은 아래와 같다.

    [ruby(庸信庸謹, ruby=용 신 용 근)]

    (언행은) 미덥고 삼갈 것이며,

    [ruby(閑邪存誠, ruby=한 사 존 성)]

    삿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라.

    [ruby(岳立淵冲, ruby=악 립 연 충)]

    산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으면

    [ruby(燁燁春榮, ruby=엽 엽 춘 영)]

    봄날의 꽃처럼 환히 빛나리라.



2.2. 용모 및 성격

  • 용모와 관련된 기록은 "눈빛이 형형하였다"[1]라는 정인홍의 글 정도만 있을 뿐 구체적인 생김새는 알 수 없다. 참고로 현재 전하고 있는 조식의 영정은 1982년 창전 조원섭이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 성격은 직설적이고 거침없어서 평상시에 시사를 논할 때면 비분강개하기 일쑤였고[2] 스스로도 죽음을 각오하며 저항하고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 평생의 장점이라 평가하였다.[3]
  • 언행에서는 비유풍자에 능했고[4] 농담을 즐겨했다고 한다. 퇴계의 제자인 성재 금난수는 남명이 친구 청향당 이원과 서로 농담하며 놀리는 모습을 보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아래는 그가 비유를 통해 세상을 풍자한 시 한 수.

    [ruby(人之愛正士, ruby=인 지 애 정 사)]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

    [ruby(好虎皮相似, ruby=호 호 피 상 사)]

    호랑이의 가죽을 좋아함과 비슷하여서

    [ruby(生則欲殺之, ruby=생 즉 욕 살 지)]

    살아있으면 죽이려 들지만

    [ruby(死後方稱美, ruby=사 후 방 칭 미)]

    죽은 뒤에는 아름답다고 한다네.



2.3. 개인적 면모

  • 성성자(惺惺子)라고 하는 방울 1쌍을 늘 차고 다녔다. 이는 거동할 때 들리는 방울소리를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5] 조식은 죽을 때 성성자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큰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 성성자와 함께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장도를 늘 차고 다녔는데, 칼자루에는 개요 문단에 나오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검명이 새겨져 있었다. 칼을 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인 경(敬)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인 의(義)를 함께 겸비하고자 하는 남명의 경의협지(敬義夾持) 정신을 엿볼 수 있다.
    • 성성자가 김우옹에게 갔다면 경의검은 강직하고 불같은 성격의 정인홍이 물려받았다. 그 후에는 조식의 종손이 대대로 가지고 있다가 6.25 전쟁 이후에 분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분실 전인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흑백 사진을 기반으로 만든 복제품 경의검남명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 연구에 따르면 경의검은 정인홍에게 전해진 것 외에도 최대 4자루가 더 있었고 크기, 모습, 칼자루의 재질 등도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6] 이 4자루의 경의검 또한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 또한 남명에게는 경의검 이외에도 장검 1자루가 더 있었는데 이것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장교가 가져가서 분실했다고 전한다.
    • 이렇듯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으로 인해 붙여진 조식의 별명이 바로 '선비'이다. 그런 별명처럼 그는 칼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화끈한 를 남기기도 했다. 아래는 관련된 대표적인 시 두 수.
[ruby(全身四十年前累, ruby=전 신 사 십 년 전 루)]
온 몸에 쌓인 사십년 허물[7]

[ruby(千斛淸淵洗盡休, ruby=천 곡 청 연 세 진 휴)]
천섬들이 맑은 물에 씻어 없애리

[ruby(塵土倘能生五內, ruby=진 토 당 능 생 오 내)]
그래도 오장에 티끌이 생기면

[ruby(直今刳腹付歸流, ruby=직 금 할 복 부 귀 류)]
곧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남명집』 권 1, 「욕천(浴川)」[8]
[ruby(离宮抽太白, ruby=리 궁 추 태 백)]
불 속에서 허연 칼날 뽑아내니

[ruby(霜拍廣寒流, ruby=상 박 광 한 류)]
서리같은 그 칼빛 광한전까지 닿아 흐르네.

[ruby(牛斗恢恢地, ruby=우 두 회 회 지)]
견우성 북두성이 뜬 넓디 넓은 곳에서

[ruby(神游刃不游, ruby=신 유 인 불 유)]
정신은 놀아도 칼날은 놀지 않네.
『남명집』 권 1, 「칼자루에 씀(書釼柄)」[9]
  •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하다 의문이 생기면 그것이 다 풀릴 때까지 질문을 했다고 하며 스스로의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기 위한 극기훈련의 차원에서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는 등의 행위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 지리산을 매우 사랑하였다. 일생 동안 12번 올랐는데 58세 때 마지막으로 오른 후에는 「유두류록(遊頭流錄)」[11]이라는 기행문을 짓기도 했고, 61세 때에는 아예 멀리 천왕봉이 보이는 덕산으로 이사하여 이를 예찬하는 시들을 짓기도 했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시 두 수.
    [ruby(春山底處無芳草, ruby=춘 산 저 처 무 방 초)]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만

    [ruby(只愛天王近帝居, ruby=지 애 천 왕 근 제 거)]

    그저 천제(天帝) 계신 곳과 가까운 천왕봉을 사랑해서라네.[12]

    [ruby(白手歸來何物食, ruby=백 수 귀 래 하 물 식)]

    빈 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까나

    [ruby(銀河十里喫猶餘, ruby=은 하 십 리 끽 유 여)]

    은하수처럼 맑은 십리 물 마시고도 남겠네.





    [ruby(請看千石鍾, ruby=청 간 천 석 종)]

    천 석들이 을 보소서!

    [ruby(非大扣無聲, ruby=비 대 구 무 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네.

    [ruby(爭似頭流山, ruby=쟁 사 두 류 산)]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ruby(天鳴猶不鳴, ruby=천 명 유 불 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2.4. 학문

  • 춘추좌씨전』이나 유종원의 글과 같은 고문 문체를 좋아하였다.[14] 다만 시 짓는 것은 본래 가진 뜻을 잃는다 하여서 이를 꺼리며 시황계(詩荒戒)를 지니고 다녔다.[15] 그래도 간혹 절친한 친구들에게서 시를 요청받으면 써서 보내주거나[16] 흥이 올라오면 스스로 새로운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학문하는 순서는 『소학』을 먼저 익히게 하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사서(四書)를 공부하게 했다. 사서 중에서는 『대학』을 특히 중시하여 이 책에 숙달되면 어디로 가든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17] 다른 글을 보기가 쉬워질 것이라 하였다.[18] 반대로 『소학』과 『대학』의 순서를 뛰어넘어 『주역』과 같은 책들을 먼저 공부하는 것을 그르게 여겼고[19]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앞세우면 이를 꾸짖으며 일상생활로부터의 공부에 힘쓰게 했다.[20] 또한 경전의 내용을 분석하거나 강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경전의 내용을 실천하면서 체득-자득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21]
  • 『대학』과 관련해서는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 또는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라는 글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글은 1566년 김해의 산해정에서 잠깐 머무를 때 자신을 찾아왔다가 돌아가려는 정인홍에게 지어서 주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글의 말미에 썼다고 하는 남명의 시만 남아 그 흔적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참고자료
  • 독서를 할 때는 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읽는 타입이었고[22] 열 줄을 한 번에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를 해석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은 시간이 걸려도 그 내용을 전부 파악한 후에야 넘어갔으며[23] 긴요한 부분은 세 번 반복해서 읽고난 후 책에 옮겨 적었다고 한다. 그가 이런 식으로 공부하며 남긴 노트가 바로 『학기(學記)』이다.[24] 자세한 내용은 학기유편 문서 참고.
  • 예법은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구애받지는 않았다. 일례로 혼례에서 『주자가례』의 방식을 대부분 따랐음에도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는 친영만큼은 조선의 풍습이 아니라 하여 행하지 않았다.[25]
  • 사단칠정논변이나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좋아하지 않았다.[26] 이기론에 대해 남긴 기록도 「해관서문답」의 "이목구비가 발하는 것은 성인이나 보통 사람이 같으며, 똑같은 하늘의 이치이다. 그 발함이 선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간 이후라야 욕심이 된다. 다만 인심과 도심의 구별은 형기(形氣)와 의리(義理)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욕이 아니라 인심이라고 하는 것이다"[27]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 후대의 인물이 남명의 이기론을 간접 인용한 것으로는 면우 곽종석[28]이 지은 남명의 묘비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마음이 발하지 않은 것이 성(性)이요, 이미 발하면 정(情)이다. 발함에 사단칠정이 되는데, 여기에는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분수가 있다. 이목구비의 욕망은 모두가 천리(天理)에서 함께 나온 것이다."[29]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곽종석의 글 중 "이목구비의 욕망은 천리에서 함께 나온 것이다" 부분의 출처는 위에서 언급된 「해관서문답」의 내용으로 보이는데, "발함에 사단칠정이 되는데 여기에는 이발과 기발의 분수가 있다" 부분은 출처가 어디인지 현재까지 알 수 없다.
  • 불교에 대해서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그랬듯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고[30], 「단성소」에서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불교가 같으나, 그 이치를 사람의 일에 적용할 때에는 불교가 발디딜 곳이 없으므로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우지 않는다"라 쓰기도 했다.[31] 그러면서도 사적으로는 서산대사사명대사와 교분이 있어서 서신이 오가기도 했고, 지리산을 유람하였을 때 승려들이 관에 부역을 경감해줄 것을 청하는 글을 자신에게 부탁하자 흔쾌히 승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래는 그가 사명대사에게 보낸 시 한 수이다.

    [ruby(花落槽淵石, ruby=화 락 조 연 석)]

    조연(槽淵)[32]의 돌 위에 꽃이 떨어지고,

    [ruby(春深古寺臺, ruby=춘 심 고 사 대)]

    옛 절 축대에는 봄이 깊었소.

    [ruby(別時勤記取, ruby=별 시 근 기 취)]

    이별하던 때를 잘 기억하구려.

    [ruby(靑子政堂梅, ruby=청 자 정 당 매)]

    정당매(政堂梅)[33]푸른 열매가 맺었을 때이니.



  • 내단학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위백양의 『참동계(參同契)』를 즐겨보았고[34] 더 나아가 자신의 학문세계를 응축한 『신명사도』의 명문인 「신명사명(神明舍銘)」에는 아예 주석으로 내단학 관련 요결을 달아놓기도 했다. 다음은 주석 중에 이와 관련된 부분이다.

    '''[ruby(汞靈丹玄珠流珠 易走難持, ruby=홍 영 단 현 주 유 주
이 주 난 지)]'''
홍()은 영단이며 현주인데 유주(流珠)라서 달아나기 쉽고 간직하기 어렵다.[35]

[ruby(晝夜河車不暫停 默契大造同運行, ruby=주 야 하 거 부 잠 정 묵 계 대 조 동 운 행)]
하거(河車)를 밤낮으로 잠시도 멈추지 말고 고요히 천지자연의 질서와 함께 운행하라.

[ruby(但要存心極虛靜 塞兌垂簾默默窺, ruby=단 요 존 심 극 허 정 색 태 수 렴 묵 묵 규)]
요점은 마음을 지극히 비우고 고요히 보존하여 입을 다물고 수렴하여 묵묵히 엿보는데 있다.

[ruby(如龍養珠心不忘 如鷄伏卵氣不絶 如猫守穴神不動, ruby=여 룡 양 주 심 불 망 여 계 부 란 기 부 절 여 묘 수 혈 신 부 동)]
여의주를 보살피듯 마음에서 잊지 말고, 을 품듯 기운을 끊지 말며, 고양이가 쥐구멍을 지키듯 정신을 움직이지 말라.

[ruby(要在心與息常相顧 有一息之放則君喪而走尸其國亡, ruby=요 재 심 여 식 상 상 고 유 일 식 지 방 즉 군 상 이 주 시 기 국 망)]
요점은 마음과 이 서로를 늘 돌아봄에 있다. 한 번이라도 을 놓으면 임금은 죽어 시체만 움직이는 꼴이 되고 그 나라는 망한다.
병오본 『남명집』의 「신명사명」 주석 일부
다만 남명의 이러한 면모가 당시에 매우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이긴 했지만 조선 시대에는 사족 계층을 중심으로 『참동계』와 내단학의 연구를 통해 우주 자연과 인격 수양의 원리를 탐구하려는 기풍이 있었기 때문이다(참고기사). 이러한 흐름과 연결지어보면 남명 또한 그런 기풍을 받아들인 사람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남명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인 곽재우가 말년에 벽곡을 하고 내단학을 수련하면서 그와 관련된 저술들을 지은 일[36]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2.5. 문집

  • 조식의 저작을 모아서 만든 『남명집』은 저술을 즐기지 않았던 그의 성품과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퇴계나 율곡 등의 문집에 비하면 매우 소략한 편이다. 하지만 문집의 판본은 20가지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데 이는 인조반정으로 인한 대북 세력의 몰락 및 잔존한 남명학파의 분화 등과 같은 풍파의 영향이었다. 판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정인홍의 이름 및 그와 관련된 내용, 조선의 주류 성리학에 벗어나는 내용들이 삭제되었다.

2.6. 대외 인식

  • 대일강경론자였다.[37] 이는 한때 김해에서 살았던 경험[38]과 그의 중장년기에 일어난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면모는 왜구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단성소」의 내용과 일본왜구를 방비할 대책을 묻기 위해 제자들에게 출제한 글짓기 문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앞에서 언급한 글짓기 문제의 일부분으로, 이와 같은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과 우환의식은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신속하게 의병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전략)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중략)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의 나라 장수를 죽이고, 나쁜 마음을 품고서 우리 임금의 위엄을 모독하였다. 제포를 자신들에게 돌려달라는 것은 조정의 의사를 시험하는 것이고, 대장경을 30부 인출해 가겠다는 것은 반드시 얻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를 한번 우롱해본 것이다. 손뼉을 치면서 뺨을 튀기거나 지팡이를 잡고서 눈을 부라리며 "기필코 그 모가지를 뽑아버리겠다(必拔爾之項)!" 라고 말하면 비록 삼척동자일지라도 그것이 공갈하는 것인 줄 알게 된다.

    헌데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는 재상과 장수들이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저들의 허세에 벌벌 떨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어찌 '상중이어서 정사를 논하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있는가? 이런 때에 적을 제압하자는 주장도 적의 공격을 막는 계책도 없단 말인가. 송나라한기처럼 (서하의) 원호가 보낸 사신의 목을 도성 문밖에서 베기를 청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에게 예물을 주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중략)

    오늘날 역관들이 임금의 명을 전하는 것은 그 옛날 사신들이 외국에 나가 국가의 일을 전임하는 것과 같다. 왜인들이 우리 조정의 의도를 알고자 하여 (역관들에게) 끝없이 쌓일 정도의 이며 서각, 진주 등을 뇌물로 뿌리면, 역관들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전내시들에게 (왜인들이 뿌린 뇌물을) 나누어주니, 조정 대신들이 용상 앞에서 (왜구들에 대처할 방안을) 적극 논의하여도 그 기밀들이 이미 오랑캐들에게 새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 일개 역관이나 내시같은 천한 무리들의 (뇌물을 받고 기밀을 누설하는) 행위를 금하지 못하는데 어찌 외부의 교활하고 흉악한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으리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왜적들이 이 나라에 들어와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니는 것이 이미 늦었으니[39] (이 나라가) 그들의 침략에 곤욕을 치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허나 임금이 화를 벌컥 내며 위엄을 더하려 하면 "변방의 오랑캐를 도발해서 괜한 일을 일으킨다"라 하고, 역관의 목을 베어 기밀을 누설한 죄를 다스리고자 하면 "온건한 말로 대응하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이러하니 왜적들에 대응할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요, 또한 그들을 방비할 대책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내 이에 대한 계책을 (그대 제자들에게서) 듣고자 한다.



2.7. 가족

  • 남명의 부친 조언형은 단천군수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제주목사로 임명되었을 때 병을 이유로 벼슬을 고사하였다가 이 일을 빌미로 그를 눈엣가시로 본 훈구파 대신들에게 참소당하여 삭탈되었다. 조언형은 1526년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아들인 남명이 조정에 그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서 복관되었다. 조언형의 묘갈문은 자식인 남명이 썼고[40]친필은 현재 경상국립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 조언형의 외삼촌은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게 죽은 조지서이다.
    • 야담집인 『연려실기술』에서는 『기재잡기』를 인용하여 조언형과 관련된 일화를 하나 전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조언형은 죽마고우였던 강혼연산군에게 아부하는 등의 행태를 매우 혐오했는데, 중종반정 이후 함경도 단천군수로 부임해 있을 때 강혼이 상관인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단천을 순시하러 나오자 밤중에 그를 찾아가 크게 꾸짖고 다음 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남명의 성정이 이러한 부친에게서 온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41]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야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일이 1507~1508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조언형이 과거에 합격한 1504년으로부터 불과 3~4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조언형은 1520년에 단천군수로 있었다고 확인되며, 결정적으로 이 이야기에 나온 강혼은 그보다 한해 전인 1519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위와 같은 사건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된다.
  • 남명의 어머니 인천 이씨는 1476년에 태어나 1545년 김해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외조부는 조선 전기 4군을 개척한 최윤덕의 둘째 아들 최경손(崔敬孫)이다.[42] 최경손의 사위 이국은 처가인 통천 최씨 가문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입었을 때 가족을 데리고 삼가현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그곳에서 남명이 태어났다.
  • 아내로는 본부인인 남평 조씨와 부실인 은진 송씨가 있었고,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 본부인인 남평 조씨는 김해의 재지사족인 충순위 조수(曺琇)의 딸이다. 남명보다 한 살 위인 1500년생이고, 23세 때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남명이 모친의 3년상 이후 합천으로 거처를 옮기려 할 때 자신은 김해에 남아있겠다고 하여서 계속 그곳에 살다가 1568년에 사망했다.
    • 부실인 은진 송씨는 송린(宋璘)의 딸이다. 1532년생으로 18세에 남명의 부실이 되어 3남 1녀를 얻었고 1610년에 사망하였다. 아들인 조차석이 대부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숙부인으로 봉해졌다.
    • 남평 조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맏아들 조차산(曺次山, 1536~1544)은 불과 9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아들의 죽음에 남명은 "차산이 죽은 6월 11일이 되면 해마다 길게 통곡한다"[43]라거나 "집도 아들도 없는 모습이 스님과 같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구름이 내 모습과 같구나"[44] 라는 시들을 지으며 회한을 토로했다. 차산은 남명이 당시 살고 있던 김해 집 뒷산인 돗대산에 묻혔는데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돗대산을 아이의 이름인 '차산' 또는 '조차산'으로도 불렀다고 전해진다.
    • 남평 조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은 만호 김행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다. 이 딸들은 훗날 외조부인 남명의 중매로 김우옹과 곽재우에게 시집갔다.
    • 부실 송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로는 52세 때 얻은 조차석과 57세 때 얻은 조차마, 60세 때 얻은 조차정(1560~1645)이 있었다. 둘째딸은 훗날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신도(1554~1595)에게 시집갔다.
  • 조차산이 죽은 후에는 외조카이준민을 유독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병풍를 써서 그에게 주기도 하였고 이준민의 사위 조원[45]이 급제했을 때에도 그의 칼자루에 를 지어 써주었다.

2.8. 인간 관계

  • 이윤경, 이준경 형제와는 한양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로 지냈다. 동생인 이준경은 어릴 때부터 "나는 장차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대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조식이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묻자 이준경은 "자네는 산골 바위 틈 움막에서 말라 죽을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훗날 동고 이준경은 재상이 되고 조식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지는 않았어도 평생 출사는 하지 않았으니 결국에는 이준경의 말처럼 되어버린 셈. 이후에도 이준경은 연말이 되거나 조식이 아플 때면 달력이나 을 챙겨주었고, 진덕수가 쓴 『심경』 같은 성리학 관련 서적을 보내주기도 했다.
  • 대곡 성운[46]과는 한양의 장의동에 살았던 10대 때 이웃으로 만나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대곡은 남명을 종산(鍾山) 또는 종산노인(鍾山老人)이라 칭하기도 했고[47] 남명이 죽은 후에는 그의 제문묘갈문, 추도시를 지었다.
  • 그밖의 지기들로는 성수침, 성제원[48], 이희안, 신계성[49], 김대유[50], 송인수[51], 성우[52], 곽순, 이림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성우와 곽순을 떠올릴 때면 늘 눈물을 흘리고 목이 막힐 정도로 오열하며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고[53]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삼족당 김대유가 죽을 때 가난한 자신에게 해마다 곡식을 보내주라고 자식들에게 유언하자 이를 거절하면서도 그의 뜻에 감사하는 를 써서 답했다고 한다.
  • 서경덕의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도 친분이 있었다. 처음 대면했을 때 거친 복장을 하고 찾아온 토정을 극진히 대우하면서 농담도 주고받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제법 죽이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54] 하루는 이지함이 그의 제자 고청 서기와 함께 남명을 찾아왔는데, 마침 남명이 외출 중이었다. 이때 두 사람은 남명의 거처가 화려한 모습을 보고는 진흙이 묻은 신발로 방안 곳곳을 밟아 책망하는 뜻을 보였다. 뒤에 남명이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필시 이지함과 서기 두 사람의 짓이리라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55]
  • 제자 약포 정탁과의 일화 한 토막. 문안을 온 정탁이 돌아가려 할 때, 남명은 그에게 한 마리를 주어 타고 가게 했다. 어리둥절한 정탁에게 남명은 "그대는 과 성격이 너무 급해. 그건 굼뜨게 행동하여 앞날을 멀리 기약하는 것만 못한 것이라네" 라고 말해주었다. 즉 처럼 빨리 내닫기보단 소처럼 느리더라도 묵묵하면서 꾸준하길 바라는 뜻에서 준 선물이었던 것.[56]
  • 회재 이언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두 사람의 출처관이 서로 다른 것도 있었고[57], 결정적으로 남명의 절친한 벗들인 송인수와 곽순 등이 화를 당한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이 사화에 항거하기는 커녕 추관(推官)으로서 사림파를 심문하였기 때문이었다.[58] 훗날 이언적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아들인 이전인이 유배지로 찾아와 학문에 대한 문답을 나누고 이를 「관서문답」[59]이라는 책으로 엮었는데, 여기에는 회재 부자가 남명의 처신에 대해 논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남명은 「해관서문답」[60]이라는 글을 지어 대응하였다. 남명 사후에 공개된 이 「해관서문답」은 훗날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 그리고 이언적의 후손들끼리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 후배인 고봉 기대승과도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단칠정논변 자체에 비판적이었던 남명이 논변의 당사자였던 기대승을 좋게 인식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기대승도 남명을 "무딘 자를 흥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울 만하나 학문은 법도를 따르지 않는 병통이 있다"[61]라고 평한 것 등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 조식과 기대승의 관계에 대해 제 3자들이 남긴 기록으로는 율곡 이이와 그의 제자 사계 김장생의 글들이 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기록하였고[62], 김장생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쓴 편지정철의 행록 등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험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63] 대곡 성운이 지은 남명의 행장(또는 묘비문)[64]이 그 근거라고 했다.
    • 허나 김장생의 기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남명의 행장은 『대곡집』에서 찾을 수 없고, 정철의 행록에서 언급한 조식의 묘비문에도 기대승이 직접 언급된 내용이 없다. 묘비문에서 굳이 비슷한 뉘앙스로 쓰인 기록을 찾자면 남명의 사람 보는 안목에 대한 일화로 거론된 어느 익명의 인물에 대한 남명의 평가[65]가 있기는 한데, 그 사람이 기대승이라는 확증 또한 없다.
      다만 남명의 묘비문에서 지목된 이 익명의 인물이 기대승이 아니냐는 의심 자체는 그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인데, 정철의 아들이자 송익필-김장생의 문인인 기암 정홍명은 이러한 설이 나도는 것에 괴이함을 표하는 기록을 남겼다.[66]
    • 그리고 김장생은 위의 편지 및 정철의 행록에서 진주에서의 옥사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남명은 하종악 처의 옥사에 대해서 분명하고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하여 마음에 불만을 품고 제자들로 하여금 하종악의 집을 부숴 버리게 하고 그 처(함안 이씨)를 다른 읍으로 쫓아냈다"[67] 라거나, "이정이 그 마을(덕산)에 기와집을 지었는데, 남명은 옥사에서 이정의 견해가 자신과 같지 않자, 이정이 하씨 집안의 뇌물을 받아서 지방관에게 그 옥사를 늦추게 했다고 의심하여 (덕산에 있는) 이정의 기와집을 헐어버렸다"[68]는 내용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글도 기대승에 대한 언급과 마찬가지로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 먼저 하종악의 집을 훼가한 것은 남명의 문하인 각재 하항이지만 이것을 남명이 사주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고, 덕산에 있던 이정의 집이 훼가되었다는 것 또한 사건과 관련된 1차 사료들에는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2.9. 그 외

  • 그가 태어난 외조부 이국의 집터는 풍수를 보는 지관으로부터 "어느 해에 여기서 태어나는 아이는 성현이 될 것"이라 점지받은 명당이었다고 한다. 지관이 말한 그 해에 그 집에서 외손자인 남명이 태어나자 외조부는 "조씨 집안이 창성하겠다"며 내심 아쉬워했다고 한다.
  • 김해 생활의 막바지인 40대 중반 전후로 개인적인 아픔들이 잇달았다. 44세 때에는 맏아들인 차산을 잃었고, 45~47세 때에는 모친상을 당한 것 이외에 송인수, 성우, 곽순, 이림 등 절친한 친구들이 을사사화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사망했다.
  • 61세 때 산청으로 이주한 후 산천재 뜰 앞에 매화나무 1그루를 심었다. 남명매(南冥梅)라고도 하는 이 매화나무는 [age(1561-01-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으며, 이미 고사한 정당매, 원정매(元政梅)와 함께 '산청 3매'로 부른다.
  • 국내에 그의 호인 남명에서 이름을 따온 도로인 남명로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자 48세~61세 때까지 살았던 합천군남명로이고, 남은 한 곳은 그가 61세 때부터 사망하는 72세 때까지 살았던 산청군남명로이다. 두 곳의 남명로 모두 조식과 관련된 유적들이 있다는 것 또한 공통점.


[1] 『내암집』 권 12, 「남명조선생행장(南冥曺先生行狀)」, 선생은 기상이 맑으면서 드높았고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서 바라보면 속세의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先生氣宇淸高。兩目炯燿。望之知其非塵世間人物。).[2]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이달 14일(1572년 음력 1월 14일), 선생의 병이 더욱 심해졌다.....(중략).....그리고 당시의 일을 논하다가 감정이 복받쳐 올라 주먹을 꽉 쥐셨는데 평상시의 모습과 같았다(是月十四日 先生病甚......又極論時事 慷慨扼腕 有如平日).

사망하기 한달 전, 병석에 있었을 때인 1572년 음력 1월 14일의 모습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기록을 바꾸어서 이야기하자면, 남명은 평상시에 시사를 논하다가 자주 비분강개하였다는 뜻이 된다.
[3]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김)우옹에게 이르기를, "내 평생에 장점이 하나 있으니, 죽음을 각오하며 저항하고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謂宇顒曰。吾平生有一長處。抵死不肯苟從。汝尙識之。)"[4]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비유를 잘 하여 사물에 끌어다 연결시킴이 명쾌하고 평범하지 않았다. 또한 뛰어난 기상이 크게 드러난 곳이 있어 해학적이고 조롱하며 풍자하는 말을 섞기도 했다(長於譬諭。引物連類。明爽不凡。亦有英氣太露處。雜以諧謔嘲諷之言。)"[5] 이는 조식만의 독창적인 수양 방법은 아니었다. 주희의 스승인 연평 이통(延平 李侗, 1093~1163)이 방울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성찰했던 전례가 있다.[6] 그 예로 경의검 2자루의 손잡이를 각각 상아와 물소뿔로 만들어서 그 색이 흰색과 검은색으로 서로 달랐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1939년에 경의검 3자루를 본 권도용의 기록에 따르면 칼의 크기가 조금씩 다르고 2자루의 손잡이에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7] 판본에 따라서는 사십년(四十年)이 아닌 오십년(五十年)이라 기록된 문집도 있다.[8] 1549년 거창감악산에 놀러갔다가 포연(鋪淵)이란 곳에서 목욕을 하며 지은 시이다. 이곳에 이 시를 새긴 빗돌이 있다.[9] 외조카 이준민의 사위인 조원이 급제했을 때 그의 칼자루에 써준 시이다.[10] 남명이 병풍에 정호를 그려넣은 것과 관련하여서, 그가 정이보다 정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을 연구한 논문이 있다.[11] 원문번역문[12] 지리산 여기저기를 돌아봤는데, 다른 좋은 곳들도 많이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드높은 천왕봉이 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덕산에 들어와 산다는 의미이다.[13] 동양학자 조용헌은 남명의 이 시를 번개, 『옥추경』 등과 연결지어 도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관련 칼럼 01, 02, 03[14] 『내암집』 권 12, 「남명조선생행장(南冥曺先生行狀)」, 『춘추좌씨전』과 유종원의 글을 읽기를 즐겼고 기이하고 고상한 글을 짓기를 좋아하였으며, 세상에서 유행하는 문장을 꺼렸다(讀書喜左柳文字。製作好奇高。不屑爲世體。)[15] 『남명집』, 「서문」, 항상 시황계를 가지고 다니며 시는 사람의 뜻을 공허하게 만들어 배우는 사람의 큰 병통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常持詩荒戒。以爲詩人意致虛曠。大爲學者之病。故旣不喜述作。)[16] 『남명집』 권 2, 「답성청송서(答成聽松書)」, "요청한 사언시는 화답해서 보내네. 일찍이 시를 읊조리는 것은 다만 어떤 곳에 집착하다가 본래 가진 뜻을 잃는데(玩物喪志) 가장 좋은 것이고, 나에게는 매번 교만해지는 죄를 더하는 것이라 여겨서 음풍농월을 그친 것이 근 수십년이 되었네. 지금 다행히도 멀리서 (시를 지어달라는) 명을 받으니 비록 간이나 허파를 나눈들 아까움이 없는데 하물며 편지에 몇 글자 쓰는 것이 무에 대수이겠는가?(所索四言詩和上。嘗以哦詩。非但玩物喪志之尤物。於植每增無限驕傲之罪。用是廢閣諷詠。近出數十載。今幸蒙有遠命。雖分肝肺。在所不惜。矧此片紙尺字乎。)"[17] 『남명집』 권 2, 「김효원에게 답하는 편지(答仁伯書)」, "(『소학』에 나오는) 쇄소응대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익숙하여 (공부가) 6분(60%)에 달하였으니, 이제는 『대학』을 보면서 1~2년간 틈틈이 『성리대전』을 탐구하시게. 늘 『대학』 하나에만 출입하면 연나라로 가든 초나라로 가든 끝내는 본가에 돌아와 머무를 것이니, 성현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집에서 벗어나지 않네(洒掃應對。幼稚習慣事也。已向六分路頭。於今直把大學看。傍探性理大全一二年。常常出入大學一家。雖使之燕之楚。畢竟歸宿本家。作聖作賢。都不出此家內矣。)"[18] 『남명집』 권 2, 「송파자에게 보임(示松坡子)」, "고금의 학문하는 사람들은 『주역』의 공부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이는 사서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사서를 정독-숙독하여 참된 학문이 쌓이고 힘을 씀이 오래되면 도에 상달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주역』을 궁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다만 『대학』은 모든 경전들의 강령이니, 이 책을 읽고 융회관통할 수 있다면 다른 책들을 보기 쉬워질 것입니다(古今學者。窮易甚難。此不會熟四書故也。學者須精熟四書。眞積力久。則可以知道之上達。而窮易庶不難矣⋯⋯但大學。群經之綱統。須讀大學。融會貫通。則看他書便易。)"[19]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늘 뜻이 같은 선비들과 개탄하며 "오늘날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늘 육상산의 학문이 간략한 것을 위주로 함에 병통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공부에 있어서는 먼저 『소학』, 『대학』, 『근사록』을 읽음에 힘쓰지 않고 『주역』과 『역학계몽』을 먼저 읽으며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차례를 구하지 않고 반드시 성명의 이치를 앞장서 말하고자 한다. 이러하니 그 나쁜 풍속이 육상산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常與同志之士慨然曰。今之學者。每病陸象山之學以徑約爲主。而其爲自己之學。則不先讀小學,大學,近思而做功。先讀周易,啓蒙。不求之格致誠正之次序。而又必欲先言性命之理。則其流弊不但象山而止也。)[20] 『내암집』 권 12, 「남명조선생행장(南冥曺先生行狀)」, 늘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명의 이치를 고담준론하는 것을 들으시면 이를 꾸짖어 그치게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학문을 하는 기초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부를 시작하는 선비 중에 간혹 부모형제에게는 잘 하지 못하면서 천도의 오묘한 점을 탐구하려 드는 이가 있는데, 그게 무슨 학문이며 또한 무슨 습관이란 말인가?(每聞初學高談性命之理。未嘗不呵止之曰。爲學初不出事親敬兄之間。始學之士。或不能於其父母兄弟。而遽欲探天道之妙。此何等學也。何等習也。)"[21]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학문을 할 때에는 지엽적인 것은 버리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실제적이고 실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경전의 내용을 강론하고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헛된 일과 빈 말은 실천궁행하는데 이롭지 않다고 여겨서였다(其爲學也。略去枝葉。要以得之於心爲貴。致用踐實爲急。而不喜爲講論辨析之言。蓋以爲徒事空言。而無益於躬行也。)[22]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책상을 닦고 책을 열면 몸과 마음을 책에 두고 묵묵히 읽으며 사색하였다. 입으로 소리내어 글을 읽지 않았기에 방 안이 사람 없는 듯 고요했다(拂床開卷。心眼具到。默觀而潛思。口不作吾伊之聲。齋房之內。寂然若無人。)[23]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독서를 할 때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해석하지 않고, 간혹 열 줄을 읽어 내리다가 스스로에게 절실한 곳이 있으면 그 내용을 전부 파악한 후에야 지나가면서 공부를 독실히 했다(其讀書。不曾章解句釋。或十行俱下。到切己處。便領略過。其用功之篤也。)[24]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독서를 하다가 긴요한 부분을 찾으면 반드시 세 번 반복한 후에 그 내용을 책에 옮겨적었으니, (그 책의) 이름을 『학기(學記)』라 하였다(每讀書。得緊要語言。必三復已。乃取筆書之。名曰學記。)[25] 『무민당선생문집』 권 5, 「남명선생언행총록」, 선생은 혼인· 상례· 장례· 제사의 예법을 모두 『가례』를 따랐는데 그 요점만 취하고 세세한 절목들은 구태여 합치시키지는 않았다. 혼례는 신부의 집에 가서 혼인하는 것이 나라의 풍속이어서 친영은 행하지 않았다(先生婚姻喪葬祭祀之禮。皆倣家禮。取其大意。其節文不求盡合。於昏禮則以國俗行禮於婦家。不得行親迎一節。)[26] 『남명집』 권 2, 「여오어사서(與吳御史書)」, "입으로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에 (내가) 어찌 남들보다 뒤처지겠소. 그러나 (그에 대해) 기꺼워하면서 말하고 싶지가 않을 뿐이오(口欲談理。豈下於衆人乎。猶不肯屑有辭焉。)"[27] 『남명집』 권 2, 「해관서문답」, 耳目口鼻之發。雖聖人亦同。同一天理也。流於不善而後。方可謂之欲也。但有人心道心之別者。有形氣義理之間已。故不曰人欲。曰人心。[28] 1898년에 후산 허유와 함께 진주 청곡사에서 『남명집』 의 교열을 맡기도 했다.[29] 『면우집』 권 149, 「남명조선생묘지명(南冥曺先生墓誌銘)」, 如以心之未發爲性。已發爲情。而其發也四端七情。有理發氣發之分。旋曰耳目口鼻之欲。同出於天理。[30] 일례로 문인인 부사 성여신이 단속사에 있던 서산대사의 『삼가귀감』 목판과 사천왕상을 불태우자 행동이 과격했다며 훈계만 했을 뿐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31] 이 말이 불교에 대한 비판이었음에도 『명종실록』에서 「단성소」 부분의 기사를 적은 사관은 "석가모니의 학설에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 있겠느냐"며 조식을 비판했다. 기록의 출처는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 『남명집』 권 4, 「행장(行狀)」[32] 산청군 단성면에 있던 단속사 밑을 흐르는 개울 이름[33] 단속사지 앞에 심어져 있던 매화나무. 고려 말에 강회백이 심었는데,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인 것에서 정당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령이 640여 년에 이르렀지만 2014년에 완전히 고사하였고, 현재는 옆에 후계목을 심어서 관리하고 있다.[34]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참동계』를 보는 것을 자못 즐겨서 "(내용 중에) 매우 좋은 곳이 있으니 학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頗喜看參同契。以爲極有好處。有補於爲學。).[35] 이 부분은 남송~원나라 초기의 인물 유염(兪琰)이 지은 『참동계』의 주석서 『참동계발휘(參同契發揮)』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36] 이와 관련된 흔적으로는 곽재우의 문집에 실린 조식잠(調息箴)과 양생명(養生銘), 그리고 친필 유묵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조식잠과 양생명은 곽재우가 지은 것이고, 친필 유묵의 내용은 원나라 때의 도사 진치허가 지은 『상양자금단대요(上陽子金丹大要)』의 「금단묘용장(金丹妙用章)」 마지막 부분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이외에도 곽재우의 문집에는 「영회(詠懷)」를 비롯하여 그가 내단수련에 침잠한 흔적을 간접적으로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다.[37] 이러한 인식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논문 01, 02[38] 부산포제포에 설치된 왜관 이외에도, 낙동강 수로 주변에는 한양으로 상경하던 왜인들이 묵은 소왜관(小倭館)들과 그들이 가져온 물화를 저장한 창고인 왜물고(倭物庫)라는 곳이 있었다. 김해는 소왜관이 설치된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부산포왜관이 소속된 이웃 고을 동래부에서는 왜인들과의 밀무역이 성행하는 폐단이 있었고, 지척에는 왜구들이 성했던 대마도가 있었다. 조식은 대마도를 특히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해에서 합천으로 거처를 옮긴 후인 1552년 친구 성수침에게 보내는 에서 자신이 사는 남부 지방을 두고 "대마도와 가까운 바닷가요 남극노인성이 뜨는 끝자락(馬之島海 老人之角)"이라 표현하기도 했다.[39] 나라의 기강이 엉망이 된지 이미 오래되어서 진작부터 왜적들이 이 나라를 휩쓸고 다녔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 「단성소」에서 을묘왜변 등의 변란이 일어난 것을 두고 "변방에 이 생겨 여러 대부들이 제 때 밥도 먹지 못하지만, 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20년 전에 일어날 일이었으나, 전하의 뛰어난 용맹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지 하루 저녁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40] 이 묘갈문을 본 남곤은 남명의 문장이 고문의 법도에 맞고 정자(程子) 집안 조상들이 전기를 쓰는 방식이라고 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묘갈문이 쓰여진 가정 7년은 1528년인데 남곤은 그보다 1년 전인 152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41] 『연려실기술』 권 9, 「중종조고사본말」[42] 『규암선생문집』 권 2, 「유인이씨묘갈명(孺人李氏墓碣銘)」, 충무위 이국은 부인(남명 어머니)의 아버지이고, 할아버지는 의성현령을 지낸 이유이며, 증조부는 울주사 벼슬을 지낸 이양이다. 어머니(남명의 외할머니)는 최씨로 소윤 최경손의 딸이다. 최경손의 부친은 좌의정 최윤덕이다(忠武衛諱菊。寔夫人之考。王父。義城縣令怞。曾王父。蔚州事穰。妣曰崔氏。少尹敬孫之女。少尹考。左議政崔潤德。)[43] 『무민당선생문집』 권 5, 「남명선생연보」, (차산은) 9년을 살았다. 과거에 기르는 개가 먹을 것으로 다투자 한탄하면서 "진씨 집안에서는 많은 개들을 같은 우리에 두어도 그러지 않았는데 우리집 개는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마음에 부끄럽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산해정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가마를 탄 벼슬아치가 그 앞을 지나갔다. 그 위세가 심히 성대하여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은 다투어서 (그 풍경을) 보면서 감탄하였지만 차산은 홀로 이를 가벼이 보며 "장부의 일이 어찌 벼슬에 있으랴" 하였다. 선생은 차산을 아끼고 사랑하였지만 그가 요절하자 애통해하였다. 선생이 (차산의 요절에 대해) 지은 시가 있으니 "매년 길게 통곡하는 날은 6월 11일"이라 하였다(生九歲。嘗畜犬爭食狺然。忽悵然曰陳氏百犬共牢。吾犬則不然。於心實有愧焉。又嘗與羣兒同學於山海亭。一日有乘軺者過前。威儀甚盛。羣兒爭觀歎羡。次山獨藐視之曰丈夫事業。豈在此也。先生奇愛之。及其夭也。先生痛惜之。嘗有詩曰每年長痛哭。六月十一日。).[44] 『남명집』 권 1, 「아들을 잃고(喪子)」, 집도 아들도 없는 모습이 중과 같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구름이 내 모습과 같네. 어쩔 수 없이 보낸 한 평생, 남은 삶을 돌아보니 머리엔 어지러이 흰 눈이 내렸네(靡室靡兒僧似我。無根無蔕我如雲。送了一生無可柰。餘年回首雪紛紛。).[45] 여류 시인으로 유명한 이옥봉의 남편이기도 하다.[46] 우계 성혼의 부친인 청송 성수침의 사촌동생으로, 을사사화 때 친형인 성우(成遇)가 연루되어 죽자 평생을 충청도 보은 속리산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문인으로는 미수 허목의 외조부이자 유명한 시인이요 호걸이었던 백호 임제가 있다.[47] 이는 1558년 남명을 만나러 해인사에 가는 동주 성제원에게 보낸 대곡의 시 제 2수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1557년 남명, 대곡, 동주 세 사람은 다음해 한가위에 해인사에서 만나기로 약조하였는데, 그 시기가 되었을 때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대곡은 동주에게 이 시를 지어 건네주었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 시를 본다면, 2수의 "종산이 만약 몸소 밭가는 늙은이 안부 묻거든(鍾山若問躬耕叟)"이란 구절은 "남명(종산)이 해인사에 오지 못한 대곡(몸소 밭가는 늙은이)의 안부를 동주에게 묻는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에서 언급된 종산은 남명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48] 성운과는 친척지간이다. 성운을 만나러 속리산에 온 남명과 대면하였고, 헤어지면서 보은현감 벼슬을 그만두고 다음 해에 남명과 다시 만날 것을 약조하였다. 약속대로 성제원은 벼슬을 그만둔 후 1558년 8월 해인사에서 남명과 재회하였고, 이듬해인 1559년에 별세했다.[49] 밀양의 선비로 호는 송계(松溪). 동고 이준경과는 6촌지간으로, 사람들은 그를 남명 조식, 황강 이희안과 더불어 영중삼고(嶺中三高) 또는 영남삼고(嶺南三高)라고 불렀다. 친구인 남명을 두고 '눈 내린 하늘의 차가운 달과 같은 기상(雪天寒月底氣像)'이라 평한 바 있고, 사후에는 남명이 그의 묘비문을 지어주었다. 밀양의 예림서원과 김해의 신산서원에 제향되었다.[50] 김일손의 조카로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남명은 청도의 수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김대유를 두고 "경세제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평생 한 점의 흠결이 없었다"라 평하며, 김일손과 비교하여 "평범하게 살다 죽었기에 사람들을 견문으로 놀래킨 것은 간혹 그의 숙부보다 못하다. 하지만 요즘 선비들의 논의로 기준을 삼으면 조카(김대유)가 숙부보다 낫다"고 썼다.[51] 조식의 어머니인 인천 이씨의 묘갈문을 지어줄 정도로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 참고로 송인수의 형인 송구수의 증손자가 바로 우암 송시열이다. 즉 송시열에게 규암 송인수는 종증조부인 셈. 이런 까닭에 송시열은 송인수의 시장(諡狀: 어떤 인물의 시호를 청하기 위하여 그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과 신도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52] 成遇, 1495~1546. 대곡 성운의 둘째 형으로 자는 중려(仲慮)이다. 제릉참봉을 역임하던 중 진복창의 모함으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고문치사하였다. 그의 죽음은 성운이 속리산에 은거하는 계기가 되었다.[53] 『무민당선생문집』 권 5, 「남명선생언행총록」, 참봉 성우와 사간 곽순과의 교류 또한 깊었는데, 두 사람이 을사사화 때 죽자 그들을 떠올릴 때면 늘 눈물을 흘렸다(與成參奉,郭司諫交契亦厚。二人死於乙巳。每念之未嘗不流涕。)[54] 『토정유고(土亭遺稿)』 하권, 선생(토정)이 패랭이에 거친 베옷을 입고 걸어서 남명을 뵙고자 했다. 모시는 사람이 들어가 이를 알리자, 남명이 계단 아래로 내려와 선생(토정)을 맞이하여 들이고 극진히 대우했다. (토정)선생이 "어찌 (저 이지함이) 야인이나 나무꾼이 아님을 아시고서 이리 지극히 대하십니까?" 라 하자, 남명은 "그대의 풍골을 내 어찌 모르리오" 라 하였다. (토정)선생께서 "저는 추위와 굶주림을 잘 버티고, 바위틈 같은 험한 곳에 머물며 수일간 먹지 않아도 별 탈이 없습니다" 라 하시자, 남명이 "그대의 타고난 품성이 이와 같은데 어찌 신선의 학문을 배우려 하지 않소?"라 장난스레 말했더니 (토정)선생이 몸가짐을 바로하며 "(남명)선생께선 어찌 이리 사람을 가볍게 보십니까?" 라 대꾸했다. 이에 남명이 웃으며 그에게 사과했다. 천문을 잘 보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새벽 (토정)선생의 집을 찾아와 "점차 희미해져가던 소미성의 정기가 지난 밤에 홀연히 사라져서 그대에게 재앙이 있을 것 같았기에 특별히 문안을 여쭈오"라 하자, (토정)선생은 "아, 내가 어찌 소미성을 감당하겠소. 필시 남명 조처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오"라 말씀하셨다. 오래지 않아 남명께서 돌아가셨다(先生着蔽陽子。服麤布衣。徒步而求見曹南溟。侍者入告。南溟卽下階迎入。待之甚敬。先生曰。何知非野人樵夫。而迎接至此耶。南溟曰。子之風骨。吾豈不知乎。先生自言性能耐寒耐飢。或寄宿巖石之間。數日不食。別無他恙。南溟戱之曰。稟氣如此。何不學仙。先生斂容曰。先生何輕人若是。南溟笑而謝之。有一善觀象者。一日晨叩先生之門曰。邇來少微星精薄已久。去夜星忽沈精。於君有災。故特來爲問耳。先生曰。噫。吾何敢當是應。必於南溟曹處士有災也。未幾。南溟亦卒。)[55] 『고청선생유고』, 「행장(行狀)」, 토정과 함께 남명 조선생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때 남명은 외출 중이었다. (남명의) 서재와 방석이며 깔개 등이 화려한 것을 보고는 마음에 꺼려서 진흙이 묻은 신발로 밟아 조롱하며 책망하는 뜻을 보였다. 남명이 (외출하고) 돌아와 (방이 어지럽혀진 광경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필시 이지함과 서기 두 사람이 이곳을 지나갔으리라"고 하였다(又與土亭訪南冥曹先生於家。時南冥小出。見其齋居几席宏麗華睆。心惡之。以泥鞋蹋之。示嘲責之意。南冥歸而見之。笑曰。必李,徐二子過此也。)[56] 『덕천사우연원록』 권 3, 「문인」, 선생이 (정탁에게) 소 한 마리를 주어 타고 가게 했다. 이 그 뜻을 깨닫지 못하자, 선생은 "그대의 말과 성격이 너무 급하니, 이는 굼뜨게 행동하여 (앞날을) 멀리 기약하는 것만 못한 것이라네" 라고 말씀하셨다. 선생께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공이 강가에 나와 선생을 맞이하며 제자의 예를 깊이 지켰다(先生贈一牛以騎去。公未解其意。先生曰。君辭氣太敏。不如用遲鈍而致遠。先生赴召時。公出迎江上甚執弟子之禮。)[57] 이언적이 남명을 헌릉참봉에 천거한 적이 있었으나 남명은 이를 거절하였고, 또 이언적이 경상감사가 되어 남명과 만나고자 하였을 때에도 "상공(相公)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을 때 내가 안강을 찾아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는 편지를 보내며 거절하였다.[58] 남명과 같은 이유로 이언적을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율곡 이이가 있다. 다만 이언적은 추관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사림을 심문하기는 하였으나 연루된 이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 편이었다.[59] 「관서문답」 원문 01, 02(영인본)[60] 「해관서문답」 관련 참고자료, 「관서문답」과 「해관서문답」 관련 논문[61]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1567) 11월 17일 무진 첫번째 기사[62] 『석담일기』 상권, 「융경 6년 임신(1572)」, 젊었을 적에 조식이 를 보고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시사(時事)를 그르치리라" 말하였고, 대승 또한 조식을 유자(儒者)로 여기지 않으며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승이 조식의 과실을 말한 까닭에 조식의 학도들은 대승을 미워하였다(少時曺植見之曰。此人得志。必誤時事。大升亦以植爲非儒者。兩不相許。大升言植過失。故植之學徒惡之。)"[63] 『송강별집(松江別集)』 권 4, 「행록(行錄)」, (남명은) 또 "기대승의 예전 언행이 지극히 흉악하여 나는 항상 반드시 그가 나랏일을 그르치리라고 생각했는데, 훗날 과연 생각한 대로였다"라고 이야기했다(且言奇大升從前言行極凶悖。吾常以爲必誤國事。後來果然矣。)

이 부분은 김장생이 쓴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똑같이 쓰여져 있다.
[64]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행장(行狀)'이라 쓰여 있고(此說見於成大谷所製南冥行狀), 편지와 같은 내용이 일부 실린 정철의 행록에는 행장 대신 '묘비문(碣文)'이라 쓰여 있으므로(此說見於成大谷所製南溟碣文) 이와 같이 쓴다.[65]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글재주는 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음험하고 (타인을) 시기질투하며 어진 이를 원수보듯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공(조식)이 이 사람(선비)을 만났는데 (모임에서) 물러나온 후 벗들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사람됨을 알겠더군. 외모는 당당하고 듬직해보이나 속으로는 남을 해칠 마음을 품고 있어. 이 사람이 벼슬을 얻어 자신의 뜻을 펼치면 착한 사람들이 위태로울 것일세!(又有士子。有文才未第。其人陰猜媢嫉。仇視賢人。公偶見於群會中。退而語友人曰。吾察於眉宇之間。而得其爲人。貌若坦蕩。中藏禍心。如使得位逞志。善人其殆乎。)"[66] 『기암집』 권 12, 「만술(漫述)」, 성대곡이 지은 「남명행록」에 이르길, 공(조식)이 두류산을 유람할 때 어느 소년을 만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소년은) 음험하고 남을 시기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마치 원수 보듯 하는 것이 뒷날 뜻을 얻으면 선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 라 말하였다고 한다. 후인들이 간혹 기고봉을 (남명이 언급한 어느 소년이라고) 지목하며 의심하는데, (지목된 대상이 기대승이라고 의심하는) 그 근거가 뭔지 모르겠으니 참으로 괴이하다!(成大谷作南冥行錄。有云公遊頭流時。遇一少年。語人曰。陰猜猖嫉。仇視善人。後日若使得志。善類赤矣。後人或疑其指奇高峯。而不知何所據也。可怪。)

여기서 정홍명이 언급한 「남명행록」은 앞서 김장생이 신경진이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남명의 행장과 마찬가지로 성운의 문집에 없는 글이다. 이 행록이 『대곡집』에 수록된 남명의 묘갈문을 이르는 것인지, 아니면 묘갈문과 약간 내용이 다른 행록이 따로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는 불명.
[67] 『사계유고』 권 3,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냄(與辛用錫慶晉李玉汝)」, 南冥以不能明白痛治。不平於心。使其門徒。毁撤宗萼之家。逐其妻于他邑。

같은 사람이 지은 정철의 행록에는 남명의 冥을 溟으로, 하종악의 악(蕚)을 이체자인 萼이라 표현한 것 외엔 위의 글과 똑같이 적혀있다.
[68] 『사계유고』 권 3,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냄(與辛用錫慶晉李玉汝)」, 又與李楨交契深厚。曾約同居德山洞。李公造瓦屋于洞裏。南冥以李於河家獄事。所見不同。疑李受河家賂。而緩其獄於差官。卽毁撤李家。

같은 사람이 지은 정철의 행록에는 남명의 冥을 溟으로, 위의 편지글 가운데 疑李受河家賂에서 '하씨 집안(河家)'이란 부분이 빠진 것을 제외하면 위의 글과 똑같이 적혀 있다.
[69] 鄭師賢. 초명은 '鄭思賢'. 조식의 매부이자 그 문하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그가 1555년에 죽었을 때 조식은 "젊었을 때 문장의 성취는 미진하였으나, 그 부친의 업은 넉넉히 할 수 있었다"라는 묘갈문을 썼다. 정사현의 부인 즉 조식의 여동생도 죽은 남편을 정성껏 애도하다가 세상을 떴고, 이후 나라에서 정려비를 내렸다.[70] 寸이 番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다.[71] 문익점의 동생인 문익하(文益夏)의 아들이 문가용(文可容)이고, 문가용의 딸은 남명의 증조부 조안습(曺安習)과 결혼하여 남명의 조부 조영(曺永)을 낳았다. 따라서 문익점은 남명의 증조모에겐 종조부가 된다. 참고로 문익하의 또 다른 아들인 문가학(文可學)은 조선시대 때 도사로 활동하다가 역모제에 휘말려 거열되었다.[72] 이 중 「목면화기」는 20세기에 편찬된 『강성록(江城錄)』이란 책에 실려있다. 참고로 『삼우당실기』에도 제목이 같은 「목면화기」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이 지었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와 『강성록』에 수록된 두 「목면화기」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처음과 끝 부분은 문장까지 복붙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거의 비슷하나 목화의 도입과 문익점의 공로에 대해 서술한 중간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남효온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두껍에 담아왔다고 소개했는데, 조식은 씨앗을 주머니(囊橐)에 숨겨왔다고 기록하면서 남효온의 글에는 보이지 않는 중국인 노파나 승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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