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4 10:41:35

권도용

파일:권도용.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호중(浩中) / 추범(秋帆)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77년 2월 10일
경상도 함양군 병곡면 우항리
(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우루목마을)
사망 1963년 10월 3일[2]
경상남도 함양군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우루목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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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도용은 1877년 2월 10일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서 부친 권재모(權在模)와 모친 진주 하씨 하수(河壽)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 권씨 33대손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산청군 단성면에서 일가를 일구었다. 그러다가 부친이 병곡면 도천리[3]에 거주하는 진주 하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면서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정착했다. 권도용은 어려서부터 한학에 뛰어나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어지러운 정세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한문공부에 매진했다. 이후 곽종석의 문인이 되었으며, 경전(經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탐독하였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후에는 한문교사로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3년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의 후임으로 경남일보 2대 주필로 취임하여 언론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4월 2일부터 6월 20일경까지 함양군 지곡면 정치리에서 유생 박재룡과 같이 조선독립선언서·독립충고문·조선독립가·조선독립경포서·조선독립책선문(朝鮮獨立責善文)등을 제작하여 진주에 거주하는 강대익(姜大翼)과 김형권(金亨權)에게 의뢰하여 각각 20여부씩을 배포했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동년 9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지역유림들을 규합하기 위한 경남유림대회 취지문을 직접 작성했으며, 1922년 2월 안의면 교복동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한다는 문서를 제작 배포하다 검거돼 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산청군 문산재에서 후학들을 양성했으며, 1963년 10월 3일 함양군 병곡면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도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복야공파 황(鎤)계 33세. 족보명은 권도용(權道容).[2] 안동권씨대동세보에는 1963년 음력 8월 12일(양력 9월 29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3]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하승현·하재연·하재익, 빨치산 남도부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