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희구(希九) |
| 출생 | 1866년 11월 29일 |
| 경상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1] 64번지) | |
| 사망 | 1940년 7월 26일 (향년 73세) |
| 경상남도 함양군 |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398호 |
| 본관 | 진주 하씨[2] |
| 가족 | 배우자 정한숙 |
| 상훈 | 2006년 대통령표창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독립유공자 하승현은 장남, 독립유공자 하재익은 둘째 남동생이다.
2. 생애
1866년 11월 29일 경상도 함양군(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64번지에서 아버지 하석모(河錫模, 1846 ~ 1886.6.6.)[3]와 어머니 진주 강씨(1844 ~ 1918.11.25.)[4]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3월 28일 함양군 위성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던 정순길(鄭淳吉), 윤보현(尹普鉉), 정순귀(鄭淳貴), 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되자, 김한익(金漢益)은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4월 2일에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장남 하승현이 시위에 참가하여 3천 명의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그러던 중 김한익이 체포되자, 하승현은 그를 구하기 위해 윤영하(尹榮夏)와 함께 헌병분견소 정문을 박차고 돌진하다가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둘째 남동생 하재익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발사한 탄환을 맞고 부상을 입었고, 진주군 자혜의원으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40년 7월 26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도천마을 북쪽 금당곡에 안장되었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20년 5월 15일 유해가 배우자 동래 정씨 정한숙(1918 ~ 1996.10.7.)[5]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