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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익(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하재익
河在翼[1]으로 등재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성도(聖道)
출생 1883년[2] 9월 15일
경상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3] 79번지)
사망 1922년 5월 4일[4] (향년 38세)
경상남도 진주군 자혜의원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월암리 망월마을
본관 진주 하씨[5]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하재연·하승현 부자는 각각 큰형과 장조카이다.

2. 생애

1883년 9월 15일 경상도 함양군(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79번지에서 아버지 하석모(河錫模, 1846 ~ 1886.6.6.)[6]와 어머니 진주 강씨(1844 ~ 1918.11.25.)[7]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8일 함양군 위성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던 정순길(鄭淳吉), 윤보현(尹普鉉), 정순귀(鄭淳貴), 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되자, 김한익(金漢益)은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4월 2일에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장조카 하승현이 시위에 참가하여 3천 명의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그러던 중 김한익이 체포되자, 하승현은 그를 구하기 위해 윤영하(尹榮夏)와 함께 헌병분견소 정문을 박차고 돌진하다가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하재익은 큰형 하재연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발사한 권총 3발이 명중하여 중상을 입었고, 여독이 심해 진주군 자혜의원에 입원해 치료했지만 완치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4일에 사망했다. 유해는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월암리 망월마을에 안장되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진양하씨대동보 7권 398쪽에는 河[2] 진양하씨대동보 7권 398쪽에는 1884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 빨치산 남도부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음력 4월 8일[5] 양암공파(陽菴公派) 28세 재(在) 항렬.[6] 자는 순흠(順欽).[7] 강윤통(姜胤通)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