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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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 이노우에 야스시 | 미우라 아야코 | 아베 코보 | 다카무라 고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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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와 슈헤이 | 시마자키 도손 | 나카하라 츄야 | 고바야시 잇사 | 세리자와 고지로 | |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
<colbgcolor=#000> 이노우에 야스시 [ruby(井, ruby=ゐノ)][ruby(上, ruby=うへ)][ruby(靖, ruby=やすし)]|Yasusshi Inoue | |||
본명 | 이노우에 야스시 (井上靖)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07년 5월 7일 | ||
일본 제국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정 | |||
사망 | 1991년 1월 29일 (향년 83세) | ||
도쿄도 주오구 국립암센터 | |||
직업 | 소설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 <colbgcolor=#fff,#191919>하마마츠사범학교부속소학교 (고등과 / 졸업) 누마즈중학교 (졸업) 제4고등학교 (졸업)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 중퇴)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 / 학사) | |
활동 기간 | 1936년 – 1991년 | ||
묘소 | 시즈오카현 이즈시 | ||
부모 | 아버지 이노우에 하야오 어머니 이노우에 야에 | ||
배우자 | 이노우에 후미 (1935년 결혼) | ||
자녀 | 장남 이노우에 슈이치 차남 이노우에 타쿠야 장녀 이노우에 이쿠요[1] 차녀 이노우에 카코[2] | ||
장르 | 소설 | ||
데뷔작 | 선데이매일 소설 (193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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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2. 일생
1907년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 정(旭川町, 지금의 아사히카와 시)에서 태어났다. 이노우에 집안은 시즈오카 현(靜岡縣) 이즈(伊豆) 유이가하라(湯ヶ島, 지금의 이즈 시) 지역에서 대대로 의원 일을 하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이노우에 하야오(井上隼雄) 역시 군의관으로 1908년 한국에 종군한 적이 있다고 한다.[3]그는 1912년부터 이즈의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1930년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金澤市) 제4고등학교 이과를 졸업하고, 본명과 글자만 다르고 발음이 비슷한 '이노우에 야스시(井上泰)'라는 필명으로 호쿠리쿠 4현(北陸四縣)[4] 지역의 시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동인시집 『일본해시인』(日本海詩人)에 작품을 투고하며 작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法文學部)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2년 뒤에 중퇴하고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했던 1936년에 『센터 마이니치』에 투고한 소설이 입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그리고 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 오사카(大阪) 본사에 입사해 학예부(學藝部)에 배속되었다. 중일전쟁에 소집되어 입대했지만 이듬해에 의병제대하고 복직했다. 이때 그의 부하로 근무했던 인물로는 『하얀거탑』이나 『화려한 일족』으로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 야마사키 도요코(山崎豊子)가 있다.
패전 뒤에는 학예부 부부장을 맡아 바둑의 혼인보전(本因坊戰)이나 쇼기 명인전(名人戰) 운영도 맡았다. 1950년 소설 투우(鬪牛)로 제22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신문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전업작가로써 활동하면서[5] 9월에는 일본문예가협회(日本文芸家協會) 회원이 되었다.
이후 「이사(姨捨)」, 『덴표의 용마루』, 『돈황』, 『누란』, 『요도 부인의 일기』, 『풍도』, 『오로시아 국 취몽담』, 『누카타 여왕』, 『혼인보 유문』(本覚坊遺文), 『풍림화산(風林火山)』, 『공자』, 『푸른 이리』 등 주로 동아시아 대륙의 역사를 무대로 하는 역사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밖에도 암벽등반을 주제로 한 『빙벽』이나, 이즈에서 할머니 손에 자라났던 시절을 그린 『시로방바』, 『아스나로 이야기』, 『내 어머니의 연대기』와 같은 잔잔한 사소설도 있는데, 『내 어머니의 연대기』는 치매에 걸린 이노우에 야스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신의 심경을 담고 있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은 한국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의 소설 가운데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이 풍도(風濤)이다.[6] 검푸른 해협이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된 이 소설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소재로 하면서도 한반도의 고려를 무대로 고려인인 충렬왕과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해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본래는 몽골 제국 치하의 고려에 미군정하의 일본의 현실을 빗대어 냉전 시기 미국의 군사기지화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려 했던 작품이었음에도 한국에 번역되었을 때는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인지도를 얻었고,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갖고 있던 은근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7] 『돈황』이나 『누란』의 경우는 실크로드를 무대로 한 소설로 누란의 미녀나 로프누르 호, 서하 문자 등의 이국적인 소재가 등장한다. 다만 이노우에 야스시 본인은 저 소설을 집필하고 세월이 흘러 1979년에서야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취재팀을 따라 소설의 무대인 간쑤성의 실크로드 지역을 방문했다.
1991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를 집전한 것은 똑같이 역사소설로 유명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였다.
3. 이모저모
일본 펜클럽 회장을 맡고 있었을 무렵에는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자주 거론되었을 정도로 문학적인 성취를 인정받으며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각색되었고, 일본 국내는 물론 중국과의 합작도 있다. 2007년에 일본 NHK 대하드라마 풍림화산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마침 그 해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2009년에 중국의 티엔 주앙주앙 감독으로 오다기리 조, 매기 큐 주연으로 제작된 영화 랑재기(狼災記)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집 누란에 실려 있는 '늑대가 된 무장'이라는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1년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내 어머니의 인생'이 16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소개되었다.러브라이브! 스쿨 아이돌 페스티벌의 쿠니키다 하나마루[8]의 사이드 스토리에서 하나마루의 대사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시로밤바가 언급된다.
[1] 혼인 이후 우라시로로 성을 바꾸었다.[2] 혼인 이후 구로다로 성을 바꾸었다.[3] 다만 이노우에 야스시 본인은 아사히카와가 아닌 이즈를 자신의 진정한 고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평소 그는 출생지는 아사히카와이지만 출신지는 이즈라고 소개하고는 했으며, 「나의 자기 형성사」(私の自己形成史) 속의 '자연과의 분방한 생활'에서 자신이 소년 시대를 보낸 원적지 이즈를 진정한 의미의 자신의 고향이라고 소개하고 "여기(이즈)에서 나라고 하는 인간의 근저가 되는 것은 모두 만들어졌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사후에 묘소도 이즈에 마련되었다(다만 그의 기념관은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 소재하고 있다).[4] 과거 일본 5기 7도의 하나인 호쿠리쿠도 지역에 속한 4개 현 즉 니가타 현(新潟県) - 도야마 현(富山県) - 이시카와 현(石川県) - 후쿠이 현(福井県).[5] 아사히 신문에 재직하던 중 단편소설 사이고사쓰로 등단한 마츠모토 세이초는 신문사와 창작을 겸업하던 중 1956년 5월 31일 47세로 퇴사를 결정하는데, 그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조언이었다고 한다.[6] 7세기 덴무 천황의 임신의 난을 다루고 있는 누카타 여왕도 백제 멸망과 왜의 백제 부흥군 지원, 그리고 백제 유민들의 왜국 망명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다.[7] 당연하지만 고려가 일본 원정을 달갑게 주도한 것도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임진왜란이나 일본 식민 지배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졌다는 것.#[8] 이노우에 야스시와 같은 시즈오카 현 출신으로 독서를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