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3 14:59:07

다니자키 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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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학창시절2.2. 문단에 데뷔2.3. 결혼생활과 스캔들2.4. 관서 이주 이후2.5. 말년
3.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주요 작품4. 평가5. 그 외

1. 소개

谷崎 潤一郎(たにざき じゅんいちろう)

생몰년도는 1886년~1965년.

일본소설가. 흔히 일본 탐미주의(耽美主義) 소설의 대가로 꼽힌다. 말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 명단에 올라간 적도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높은 편이다. 실제로 1년만 더 살았어도 노벨문학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니라 다니자키에게 돌아갔을 거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2. 생애

2.1. 학창시절

1886년 7월 24일, 도쿄도 주오구에서 태어났다. 5남 3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맏형이 태어난 지 3일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호적에 장남으로 올라갔으며 그래서 이름도 '준이치로(潤一郎)'가 되었다. 다니자키는 어머니 쪽의 성으로, 그의 아버지인 쿠라 고로(倉五郎)가 유복한 상인이었던 다니자키의 외조부 큐에몬(久右衛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어머니인 세키(関)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다니자키는 1892년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유모와 한시라도 떨어지는 것을 꺼릴 정도로 응석받이였던 탓에 출석일수가 모자라 첫 해부터 유급을 하고 만다. 하지만 다음 해에는 학년 수석으로 2학년에 진급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897년에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미 훨씬 전에 사망한 외조부의 사업을 이어받은 다니자키의 아버지가 상업에 능하지 못하여 사업이 부진하였기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진학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큰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던 중 여러 학생들과 함께 '학생구락부(学生倶楽部)'라는 문학잡지를 자체 발간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2.2. 문단에 데뷔

1908년 도쿄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3년 뒤인 1911년 학비를 미납하여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다니자키는 문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1910년 제 2차 '신사조(新思潮)'에 소설 『문신(刺青)』, 『기린(麒麟)』과 희곡 『탄생(誕生)』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 때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1911년 『소년(少年)』등의 작품이 발표된 이후 소설가 나가이 가후(永井 荷風)[1]에게 격찬을 받으면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탐미주의적인 작품을 써 나가면서 '악마주의 작가'로 불리며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2.3. 결혼생활과 스캔들

1915년, 29세였던 다니자키는 9살 아래의 이시카와 치요(石川 千代)와 혼인하게 된다. 이듬해인 1916년에는 장녀 아유코(鮎子)가 태어났고, 1918년에는 조선, 만주를 거쳐 중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한다. 당시 그의 조선 기행문은 <일본 작가들이 본 근대 조선>[2]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결혼 직후 다니자키는 자신의 기준으로 지나치게 정숙하고 순종적이었던 아내 치요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결혼한 이듬해였던 1916년 아내 치요의 여동생이었던 당시 14세의 소녀 세이코(せいこ)[3]의 양육을 맡게 되면서 점차 세이코에게 빠져들게 된다. 다니자키는 어머니 세키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활달하면서 남성에 대해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을 좋아했던 것이다. 다니자키는 점차 세이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내인 치요와의 사이는 악화되어 갔다.

그런데 이 때 다니자키의 친우였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사토 하루오(佐藤 春夫)는 다니자키에게 냉대받던 치요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곧 사랑으로 발전하면서 삼각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아내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다니자키는 사토에게 자신의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이것을 문단의 동료들과 여러 인사들에게 연하장으로 널리 알린다. 그러나 막판에 결심을 바꾸어 이 약속의 이행을 거절하는데, 격분한 사토는 다니자키와 절교하게 된다. 이것이 '오다와라 사건(小田原事件)'[4]이라 하여 일본 문단 내의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이다.[5] 실연당한 사토는 꽁치의 노래(秋刀魚の歌)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치요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둘은 1926년 화해하게 되고, 1930년 다니자키가 치요와 이혼한 뒤 사토는 치요와 재혼하면서 이 약속은 이행되게 된다.[6][7]사토와 치요 사이에 태어난 아들 마사야(方哉)의 이름은 다니자키가 지어주었다. 또한 사토의 조카인 동양사학자 다케다 류지(竹田龍児)와 다니자키의 딸 아유코가 결혼한다.

2.4. 관서 이주 이후

다니자키는 1923년 관동 대지진을 겪고 난 뒤, 지진을 두려워하여 일가족 모두와 함께 그때까지 지진에서 안전하다고 알려진 관서지방으로 이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교토에 있다가 나중에는 고베로 옮겨 거주하게 된다. 하지만 70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후 다니자키는 도쿄로 돌아가는 일 없이 계속해서 관서지방에서 거주하게 된다. 관서지방 이주 직후 다니자키 준이치로 초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이 1924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처제 세이코를 모델로 한 소녀 나오미를 맡아 기르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길러 이상적인 여인으로 삼으려 하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도리어 자신을 가지고 노는 나오미에게 휘둘리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 세계는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을 경계로 해서 서양의 미를 동경하던 것에서 점차 일본적인 소재와 전통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어가게 된다. 1928년 연재하기 시작한『만지(卍)』와『여뀌 먹는 벌레(蓼喰ふ虫)』가 그것이다.『만지(卍)』는 레즈비언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얽히고 섥힌 연애관계를 다룬 소설인데, 모든 내용이 여주인공의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는 가운데 교토 방언을 유려하게 구사하였고, 관서지방 상류 사회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점에서 그의 문학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30년 아내 치요와 이혼한 다니자키는 1931년 후루카와 도미코(古川 丁未子)와 재혼하지만, 그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리타 마쓰코(森田 松子)와의 관계가 깊어져서 도미코와 별거, 마쓰코와 동거하는 관계가 된다. 결국 다니자키는 1934년 도미코와 이혼하고, 1935년 마쓰코와 재혼하게 된다. 다니자키는 17살이나 어린 마쓰코를 숭배에 가까운 대상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그의 여인숭배적인 생각은 『맹인 이야기(盲目物語)』, 『춘금초(春琴抄)』 등에서 잘 묘사된다.

이후 다니자키는 일본 전통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는데, 그가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의 현대어역(譯)[8]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시기(1935년)의 일이다. 다니자키 역(譯) 겐지 이야기는 1939년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이후에도 새로 번역하고 여러 차례 다듬는 등 다니자키는 겐지 이야기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1942년부터 다니자키는 『세설(細雪)』을 연재하기 시작하나, 이것이 '전시 시국에 맞지 않는 내용'이라 하여 군부로부터 발간을 정지당하게 된다. 이후 1944년 사가판(私家版) 즉 자비출판으로 상권을 찍어 친구와 지인들에게 배부하였지만 이것도 군부에 의해 금지당하게 되었고, 『세설(細雪)』 전권이 완성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인 1948년에야 가능했다.『세설(細雪)』은 관서 지방에 거주하는 상류층 네 자매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다니자키의 작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잔잔한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네 자매의 모델은 세 번째 아내인 마쓰코의 자매들이라고 한다.

2.5. 말년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패전 이후 고혈압증에 시달리며 한때 작품활동을 중지했지만, 1951년 『다니자키 신역 겐지 이야기(潤一郎新訳源氏物語)』를 발표하였고, 말년에도 그의 탐미주의적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열쇠(鍵), 1956』, 『미친 노인의 일기(瘋癲老人日記), 1962』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식지 않는 왕성한 창작열을 선보였다.

그는 1958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으며, 1960년에 또다시 노벨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는데 이때는 최종 후보 5명 중의 하나로 들어가기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965년 7월 3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향년 79세.

3.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주요 작품

  • 『문신(刺青)』(1910)[9]
  • 『소년(少年)』(1911)
  • 『작은 왕국(小さな王国)』(1919)
  • 『치인의 사랑(痴人の愛)』(1925)[10]
  • 『여뀌 먹는 벌레(蓼喰ふ虫)』(1929)
  • 『만지(卍)』(1931)[11]
  • 『맹인 이야기(盲目物語)』(1932)
  • 『슌킨 이야기(春琴抄)』(1933)
  • 『세설(細雪)』(1949)[12]
  • 『소장 시게모토의 어머니(少将滋幹の母)』(1950)[13]
  • 『열쇠(鍵)』(1956)[14]
  • 『미친광이 노인 일기(瘋癲老人日記)』(1962)

4. 평가

다니자키의 소설은 탐미주의 문학의 극치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소설에는 아름답고 강인하면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여성과, 그 여성에 대해 마조히즘적인 숭배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는 남성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에는 곳곳에서 여성의 발에 밟히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페티시즘, 즉 풋잡이 등장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이러한 마조히즘적 성향은 다니자키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어 그의 인생 내내 여성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관동 대지진을 기점으로 해서 관서로 이주한 뒤에 쓰여진 작품과 그 이전에 쓰여진 작품의 작풍이 나뉘는데, 대개『치인의 사랑(痴人の愛)』을 그 분기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스스로 전기 작품들을 저평가해서 '자신의 작품으로서 인정하기 싫은 것들이 많다'고까지 하면서 전기 작품들을 흑역사 취급했고 이 때문에 전기 작품들이 저평가를 받아왔지만, 그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전기 작품들의 의의가 발굴되면서 현재는 이러한 평가는 보류되고 있는 추세이다. 다니자키 문학의 근간이 되는 여성숭배, 마조히즘, 페티시즘, 어머니에 대한 동경이 근친상간적인 애욕으로 이어지는 오이디푸스 증후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묘사 등 대부분의 내용이 전기 작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작품들의 경우 일본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경우가 많으며, 특히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이 많다. 그러나 전기 작품에서 보여준 탐미주의, 마조히즘, 잔학성, 에로티시즘, 여성숭배적인 성형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다니자키 문학에서 일관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니자키는『겐지 이야기(源氏物語)』의 현대어 번역자로서도 유명한데, 그의 번역은 요사노 아키코(与謝野 晶子)의 번역과 함께 겐지 이야기 현대어역의 양대 고전으로 불릴 정도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번역은 고전문학의 전문가인 국문학 교수들의 조언과 감수를 통해 번역된 것으로 상당히 정확도가 높으며, 특히 원문의 느낌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리는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재창작한 것으로서 문학적 가치가 높다.

문예적 관점에 대한 견해차이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서신으로 자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물론 험악한 소리가 오고 간 것은 아니고 둘은 친한 사이인데다가 준이치로는 류노스케를 선배 취급했고 류노스케도 '다니자키 군' 이라고 부르는 사이였다.

5. 그 외

아직 만 7세였던 1894년 2월 11일, 노즈 시즈다케(野津鎮武)라는 군인에게 납치당해 범해질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일이 그가 만년에 쓴『유소시대(幼少時代)』(1955)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는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어린 소년에 대한 성애(性愛)또한 마찬가지였다. 여담이지만 이 노즈 시즈다케라는 인물은 청일전쟁 참전 이후 1896년 한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하였으며, 제 1차 한일협약(1904) 체결 이후 한국의 군부 고문으로 초빙되기도 했으며(당시 계급은 중좌(中佐 = 중령)였음),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에도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한국과 악연이 많은 인물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탐정소설에 관심을 가져 여러 단편들을 쓰기도 했으며, 이 작품들은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에게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 소설들은 『범죄소설집(犯罪小説集)』으로 출간되기도 했으며,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영화에 관심을 보여 영화사에 소속되어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각본을 스스로 담당하기도 했다. 그가 각본을 담당한 첫 영화인 'アマチュア倶楽部(아마추어 클럽)'에서 다니자키는 자신의 가족들을 대거 출연시켰는데, 자신의 처제이자 내연 관계에 있던 세이코가 처음으로 발탁되어 주연을 맡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다니자키의 아내 치요, 딸 아유코가 엑스트라를 맡기도 했다.

일본 문단에서는 역시 탐미주의적 소설가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가장 잘 이해한 작가라고 평가하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의 문학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태평양 전쟁에 진 직후의 풍경을 두고 미시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 남자가 백인 남자에게 졌다고 인식해 맥이 풀려 있을 때, 이 사람(다니자키 준이치로)은 혼자서 일본 남자가 거대한 유방과 거대한 엉덩이를 가진 백인 여자에게 졌다고 즐거워하는 관능적 구도로 패전을 바라보았다.

또한 미시마 유키오는 1958년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다니자키상이 제정되어,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가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다니자키상을 받은 작가들 가운데 가장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에서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다니자키 역을 맡은 배우의 변태스러움과 문호로써의 진지함을 넘나드는 연기가 은근히 절륜하다. 다만 사토 하루오와 있었던 아내 양도 사건은 아예 빠지고 언급도 되지 않아서 왜곡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1] 처음에는 자연주의 문학으로 데뷔하였으나, 이후 탐미주의 소설로 전향하였다. 국내에는『묵동기담』이 번역되어 있다.[2] 이한정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과 미즈노 다쓰로 교토조형예술대 강사가 공동으로 엮은 책으로 2009년에 소명출판에서 출간. 다니자키 외에도 구니키다 돗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노시타 모쿠타로, 나카지마 아츠시1891년부터 1941년까지 열세 명의 일본 작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쓴 소설과 수필들이 번역, 수록됐다.[3] 예명 하야마 미치코(葉山 三千子)로 1920~1930년대 영화배우로 활동하였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의 여주인공 나오미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으며, 상당히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장수하였는데, 1996년에 만 94세로 사망하였다.[4] 당시 다니자키가 오다와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5] 식민지 조선의 문학 잡지에까지 실렸을 정도의 센세이션이었다.사실 지금 봐도 엄청난 일이긴 하다 원산의 한 여학교에서는 아예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던 다니자키가 쓴 기행문을 빼버리기까지 했다나.[6] 사토와 재혼하기 전에 치요는 역시 다니자키와 아는 사이인 오오츠보 스나오(大坪 砂男)라는 남자와 밀통했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다니자키의 강요로 낙태했다는 추측이 있다.[7] 참고로 본명은 와다 로쿠로(和田 六郎)인 오오츠보 스나오는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전후파 5대 추리소설가 중 하나로 꼽은 단편 작가이며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와다 슈(和田 周)의 아들, 즉 그의 손자가 바로 그 유명한 우로부치 겐이다!![8] 겐지 이야기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장편 대하소설로, 헤이안 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도 고문을 깊게 공부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문을 독해할 수 없다. 따라서 많은 현대어역이 나와 있으며, 이 중 한국에 번역된 김난주 역의 겐지 이야기는 세토우치 자쿠초(瀬戸内 寂聴)의 현대어역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9] 여담으로 사무라 히로아키가 학교 축제에서 이 작품을 동인지로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만화가를 지망하게 되었다고.[10] 2013년 시공사에서 '미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11] 문학동네에서 번역될 때는 한자를 그대로 읽어서 제목이 『만(卍)』이다. 『소장 시게모토의 어머니』와 합본.[12] 전권 발매 기준[13] 『만지』와 합본으로 2012년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판되었다.[14] 1992년에 한영사에서, 그리고 2013년 창작과 비평에서 다시 번역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