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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하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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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사토 하루오
[ruby(佐藤春夫, ruby=さとう はるお)]|Haruo Satō
파일:Haruo_Sato_01.jpg
본명 사토 하루오 ([ruby(佐藤春夫, ruby=さとう はるお)])
출생 1892년 4월 9일
일본 제국 와카야마현 히가시 무나군 신구시
사망 1964년 5월 6일 (향년 72세)
도쿄도 분쿄구 세키구치
직업 소설가, 시인,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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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학력 <colbgcolor=#fff,#191919>신궁제1심성소학교 (졸업)
와카야마현립 신궁중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문학과 / 중퇴)
부모 아버지 사토 토요타로
어머니 사토 마사시로
배우자 이시카와 치요코 (1930년 결혼 - 1964년 사별)
자녀 아들 사토 마사야 (1932년 - 2010년)[1]
장르 소설번역수필, 단가
등단 바람 (1908)
}}}}}}}}} ||

1. 개요2. 생애
2.1. 학창시절2.2. 문인들과의 만남2.3. 오다와라 사건2.4. 쇼와 시대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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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소설가.

2. 생애

2.1. 학창시절

와카야마현의 의사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사토 가문은 의사 가문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아버지인 토요타로는 9대째로 의사 가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토요타로는 문학에도 큰 관심을 두어 마사오카 시키의 밑에서 사숙을 하기도 했었다.

하루오는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때 문예지 '메이세이'에 투고한 단가 '바람'이 입선하여 등단하였다. 이 시기쯤 아버지는 병원을 일시적으로 폐원하고 홋카이도에서 농장 일을 시작하였다.

1910년에 졸업 후, 상경하여 같은 동인인 호리구치 다이카쿠와 함께 제일고등학교의 시험을 준비했지만 중도 포기하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과 예과에 함께 입학한다. 당시 교수로 재직 중이던 소설가 나가이 카후의 가르침을 받으며 단가, 서정시, 경향시, 소설 등 작품을 집필하였다.

1912년, 만성 불면증을 앓게 되었고 이듬해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중퇴한다. 이때부터 산문시도 쓰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혔다.

2.2. 문인들과의 만남

1917년, 요코하마로 거주지를 옮겨 전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병을 앓는 장미', '여름의 풍경' 등 여러 작품이 입선하였으며 에구치 칸, 쿠보 칸자부로 등과 문예지 '별자리'를 창간하였다.

에구치 칸에게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소개받은 것도 이 시기다. 아쿠타가와의 출판 기념식인 '라쇼몬의 모임'에서는 개회사를 읽어주는 등, 그와 우정을 쌓기 시작하였다.

1920년,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로 귀향한 뒤, 4개월에 걸쳐 중국대만을 여행한다. 이때 대만에 거주하는 지인의 소개로 인류학자인 모리 우시노스케를 알게 된다.

2.3. 오다와라 사건

1921년, 친구이자 같은 문인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자신의 부인인 이시카와 치요코에게 애정을 못 느끼고 그녀의 여동생 세이코를 흠모하자 하루오는 버림받은 치요코를 동정하게 된다.

그리고 동정은 어느 새 사랑으로 변질되었고 이를 안 다니자키는 자신이 세이코와 혼인하게 되면 자신의 부인인 치요코를 하루오에게 양도하겠다는 맹세를 적은 연하장을 주변 인사들에게 널리 배포하였고 문예지에도 이를 기재하였다.

그런데 세이코가 다니자키와 혼인하려 하지 않았고 이에 이 약속은 막판에 불발되고 말았다. 물론 사토는 격분하여 다니자키와의 교우 관계를 단절하였고 1922년, '꽁치의 노래'라는 시를 쓰며 치요코와 맺어지지 못한 것에 서글퍼했다.

그러나 1926년, 둘은 극적으로 화해에 성공하였고 1930년에 다니자키가 치요코와 이혼하였고 치요코는 하루오와 재혼하면서 약속은 지켜졌다. 하루오는 치요코에게서 장남인 사토 마사야를 얻었는데 이는 다니자키가 지어준 이름이다.
파일:하루오 치요코-1.jpg
1933년, 장남 마사야의 오미야 참배 기념 사진[2]

2.4. 쇼와 시대

1929년, 호세이대학 예과 작문부의 강사로 재직하던 중 교가를 작사하였다. 이후 계속 출강하였으나 1933년, 장남의 탄생 이후 사직하였다.

1935년, 아쿠타가와상의 전형 위원 11명 중 한 명으로 낙점되었으며 일본문학진흥회의 이사로 선임된다. 신인이던 다자이 오사무를 알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1946년, 여러 문예지 창간에 도움을 주며 전국 각지로 여행을 다녔다. 이듬해에는 일본예술원의 회원이 되는 등, 문학인으로서의 경지에 도달했다. 모교인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출강하며 '근대 일본 문학의 전망'이라는 강좌를 개설했다.

1950년대에는 아쿠타가와상의 위원으로서, 그리고 작사가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번역의 일도 놓치지 않았다.

1960년, 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이듬해에 아쿠타가와상 위원직을 사임했다.

1964년,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시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5월 6일 저녁, 아사히 방송의 '일주일 자서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20일 방송 예정분을 자택의 서재에서 녹음하던 중 '나는 다행히...'라는 말을 끝으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향년 72세몰. 동년에 개최된 1964 도쿄 올림픽에서 그가 작년에 작사한 '올림픽 도쿄 대찬가'가 불려졌는데 끝내 이를 보지는 못했다.

3. 여담



[1] 이름은 어머니의 전 남편이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지어줬다.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철학과 심리학 전공으로 전과하였다. 이후 동 대학원의 심리학 전공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명예 교수직을 받기도 했다. 재직 당시 행동 분석학을 연구하였으며 일본 심리학계의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2] 오른쪽부터 하루오, 장남 마사야, 아내 치요코, 아내와 전 남편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이의 딸 다니자키 아유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