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0:46:26

모리 오가이

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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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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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모리 오가이
[ruby(森, ruby=もり)][ruby(鷗, ruby=おう)][ruby(外, ruby=がい)][1]|Mori Ōgai
파일:dcaa34cf76c886679ac20a9e6609745a.jpg
본명 모리 린타로 (森林太郎 | Mori Rintarō)
출생 1862년 2월 17일
이와미국 시마네현 츠와노
(現 일본 시마네현 카노아시군 츠와노정)
사망 1922년 7월 8일 (향년 60세)
일본 제국 도쿄부
직업 의사, 군인,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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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학력 <colbgcolor=#fff,#191919>도쿄대학 의학부 (의학 /학사)[2]
활동 기간 1889년 ~ 1922년
묘소 도쿄도 미타카시 젠린지(禅林寺) 츠와노정 에이메이지(永明寺)
장르 소설번역
대표작 무희, 기러기 }}}}}}}}}

1. 개요2. 생애3. 문예인 활동과 주요 작품
3.1. 주요 작품3.2. 주요 번역서
4. 군의관으로서의 행적5. 기타6. 캐릭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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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uploadfile/Amoriougai.jpg
육군 정복을 입은 모리 오가이
일본소설가, 평론가, 의사, 군인. 시마네현의 츠와노(津和野)[3] 출신이다.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근대 일본 소설의 거장, 메이지 정신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이미지가 자아 성찰, 초연함, 반권위적이라면 모리 오가이의 이미지는 경파, 견실함, 권위적으로 서로 이미지가 대조되는 측면도 있다[4][5]. 또한 모리 오가이는 분큐,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살았는데 거의 평생을 메이지 시대 속에 살아갔던 셈이다.

모리 오가이는 필명으로, 문학인이 아닌 군의관으로서는 본명인 모리 린타로(森林太郎)로 활동했다.

오가이라는 필명은 현재의 스미다가와에 있는 시라히게바시(白鬚橋) 부근에 있던 "갈매기가 건너가는 바깥쪽(鷗の渡しの外, かもめのわたしのそと)"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리가 상경한 후 거주하던 센주[6]를 의미한다.#

2. 생애

대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를 맡아온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최하급 무사였다. 모리의 집안은 그다지 명망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쳐내고자, 모리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켜 모리만큼은 자신과 달리 출세하기를 원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 및 할머니의 뜻대로 상당한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부방에 들어가서 사서 오경과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연날리기나 팽이치기 같은 놀이를 할 시간도 없이 공부했다. 공부하다 쉴 때는 집 앞의 정원을 거닐거나 사군자를 쳤다.

1872년 도쿄로 상경하여 의학 서적을 읽기 위하여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관직에 있었던 친족 니시 아마네(西周)[7]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부하여 1873년 현 도쿄 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해당하는 도쿄 의학교에 진학하였다.

나이를 2살 올려 나이를 속여 입학했는데, 이때 모리는 겨우 11세 된 어린아이였다. 동급생들이 적어도 10대 후반은 되는 형누나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와 그 나이에 맞는 왜소한 체격으로 눈에 띄는 편이었다. "꼬맹이(일어로는 ちび. 얕잡아보는 표현이다)"라는 별명이 붙기도 할 정도. 돌아다니는 이야기로는, 남자 선배에게 비역의 대상이 되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8]

19세의 나이로 도쿄 의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는 2020년대에도 깨어지지 않는 최연소 졸업 기록이라고 한다. 졸업 성적은 학부 8등이었다.

1879년에 아버지가 미나미아다치군 소속 의사가 되어 그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센주로 거처를 옮겨, 이후 킷세이도(橘井堂) 의원을 개업했다. 이 무렵 모리는 도쿄 의학교에 재학하며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1881년에 졸업한 후에는 하숙집에서 나와 센주에 살게 되고 이때부터 의사로서 아버지와 함께 의료 활동에 종사한다. 이 무렵의 경험은 소설 〈임상 기록(カズイスチカ)〉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모리 오가이는 일본 육군 군의관이 되었고, 1884년 독일의 의학과 위생 제도를 배워오기 위해 독일 유학을 명 받고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의학 이외에도 문학미술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겪은 체험이 그가 소설가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모리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 이전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문학과에 지원하고 싶어 할 정도로 의사보다는 문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 가업을 잇는 차원에서 제2지망인 의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

이때 특히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괴테의 "체념(resignation) 철학"을 모리는 일평생 지침으로 삼았는데, "주체와 대상간의 억압적인 분리를 극복하는", 그리고 "단념하는 것이 괴롭고 불만스러울지라도 그에 맞서는 태도로서의 태연함을 견지하는" 괴테식 체념을, 모리 본인의 삶에서 맞닥뜨린 여러 고뇌와 굴욕에 대응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참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필한 소설의 주제로도 곧잘 다루었다.[9] 그리고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를 일역하여 출판하였고,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 5가지를 본인의 작품에 인용하였다.

한편, 그의 대표작 무희(舞姫)도 이곳에서 독일 여자와의 연애 경험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10]

이러한 독일 유학 경험 덕분에 독일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독일어로 이루어진 연설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유학 이후에도 독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어서, 독일에서 출간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간 서적이 모리의 책장에 꽂혀 있곤 하였다고 한다. 세계화 시대에 앞서 서양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위한 교량을 놓아준 문인들 중의 한 명인 것이다.

본명인 '린타로'를 독일 사람들이 발음하기 매우 힘들어했기에 독일 유학 시절에는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점이 훗날 자식들에게 오토, 마리, 후리쓰, 안느 등의 서양식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을 붙여 주게 된 것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888년 귀국한 후 군의 학교 교관으로 재직했다. 이때는 주로 유럽 문학 번역과 평론 등에 치중했다. 1889년 번역 시집 오모카게(於母影)를 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근대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90년 '무희(舞姫)'를 시작으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다. 청일전쟁 도중 1개월 동안 조선 부산에 체재하였는데, 그때 쓴 일기도 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 부임했다가 1896년 일본에 귀국했다.

이후 1899년 6월에는 소장 계급에 상당하는 군의감이 되었고, 이때 현재의 기타큐슈시에 속한 코쿠라(小倉) 주둔 육군 제 12사단 군의부장으로 좌천된다. 창작 활동 및 번역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으로 동료들과 상사들에게 본업인 군 생활에 소홀하다는 의혹의 시선을 받은 것. 그리고 이는 "모리가 군의관의 품위에 맞지 않는 작품 활동을 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시구로 타다노리(石黒忠則)등의 책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리는 코쿠라로 좌천되었다.[11] 하지만 모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2]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다시 군의계 중심으로 복귀한다.[13]

이 시기에 모리는 후쿠오카 니치니치신문(福岡日日新聞)에 〈오가이는 누구인가(鷗外漁史[14]とは誰ぞ)〉라는 소논문을 투고하였다. 그 내용의 골자는 "도쿄의 여러 신문, 여러 잡지 등에서 오가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화살이 꽂혀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가이라는 이름은 이곳[15]에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가이는 여기에서 죽었다."다.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 츠와노 번에서 도쿄로 상경한 이래로 독일 유학, 복무를 위한 이동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도쿄를 떠나 일하며 지낸 적이 없었던 모리에게 코쿠라 좌천은 큰 충격과 깊은 좌절을 안겨 준 것이었다.

1902년 3월 제 1사단 군의부장으로 발령받아 도쿄로 되돌아온 뒤 1904년에서 1906년까지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였고, 1907년에는 중장에 상당하는 육군 군의총감에 올라 군의관의 최고봉인 육군성 의무 국장이 된다. 또 같은 해에는 제 1회 문부성 미술 전람회의 서양화 부문 심사 위원 주임을 맡기도 했다.

1916년 육군에서 퇴역한 이후에는 현 도쿄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제실박물관장 겸 도서관장, 제국 미술원장 등을 역임하다 1922년결핵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3. 문예인 활동과 주요 작품

창작, 번역, 평론 등 그 활동의 폭이 매우 넓은 편이었다. 그는 또한 문학 뿐 아니라 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오모카게(於母影)와 즉흥시인(即興詩人) 등의 번역시는 일본 근대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극문학 번역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소설은 청춘기 그의 경험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에서,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한 소설,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등을 다룬 소설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국내 번역서로는, 각기 '청년', '기러기', '아베일족', '모리오가이 단편집'이라는 타이틀의 중단편집이 출간되어 있다. 나쓰메 소세키에 버금가는 작가임에도 한국에는 번역현황이 열악하다. 전술한 중단편집들은 모두 수록작이 겹쳐서 실상 번역된 작품수가 얼마 안된다.

아무래도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작품 활동은 겸업 차원에서 해 나갔다 보니, 호흡이 긴 작품을 남기기에는 힘에 부치는 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고는 한다. 실제로 모리 오가이가 남긴 소설 중에는 장편 소설이 없다.

이외에도 일기를 꾸준히 썼고, 널리 알려진 일기는 독일 유학 시절에 썼던 "독일일기(独逸日記)"다. 모리는 기록으로 남기면 나중에 불편해질 내용은 일기장에 적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유학 시절 연애 상대였던 엘리제라는 독일인 여성과 동거했을 텐데도 독일일기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다.

간결체에 가까운 군더더기 없는 문체이면서도 절제되고 세련된 문체를 주로 사용했다.

정보, 비행기, 업적, 성병 등의 한자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모리 오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독일어 서적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단어다.

3.1. 주요 작품

  • 무희(舞姫)(1890년)
  • 물거품의 기록(うたかたの記)(1890년)
  • 아씨의 편지(文づかひ)(1891년)
  • 마수(魔睡)(1909년)
    두뇌 명석하고 어느 논쟁에서든 칼같이 명쾌한 결론을 내어 논쟁 상대를 발라 버리는, 하지만 여행 준비를 하다가 몇 가지 준비물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허술한 면도 있는 법학과 교수인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다. 무희를 비롯한 오가이의 다른 현대 소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오가이의 분신격 인물로 간주되고는 한다.
    어느 날, 주인공의 아내는 어떤 의사에게서 마사지 치료를 받으러 내원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사지를 하기 전에 마수(魔睡) 시술을 한다. 마수란 마법에 걸린 것처럼 깊게 빠지는 잠을 뜻한다. 서양에서 최면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1800년대 후반에 서양에 유학을 떠났던 일본인 유학생 등에 의해 최면술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최면술이라고 부르기 전에 마수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소설에서의 의사가 주인공의 아내에게 건 것이 최면술이라고 여겨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의사가 그녀에게 마수를 건 이후 구체적으로 그녀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는 소설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당시의 장면은 주인공의 아내 시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윽고 귀가한 아내는 주인공에게 "의사가 나에게 마수를 걸었고, 그래서 나는 깊은 잠에 빠진 후 치료를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마친 아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주인공도 자신의 방에 들어가는데, 이때부터 주인공은 "나는 원래부터 자제력이 강한 사람으로, 성욕이라고는 거의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아내가 마수에 빠진 후 그 의사 앞에서 허리띠를 풀고, 그 의사 앞에서 자신의 하얀 피부를 드러내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하다."라는 등의 망상을 시작한다. 급기야는 주인공은 "젠장."이라고 욕설까지 내뱉은 후 망상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 작품이 발표된 거의 직후 모리는 아래에 서술되는 "비타 섹슈얼리스"를 발표하는데, 다분히 관능적인 소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의사의 이름이 당시에 실존했던 의사의 이름과 거의 같았기에 당시 일본 수상은 모리가 그 의사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자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고, 결국 모리는 수상 앞으로 불려가 한 소리 듣기도 하였다.
  • 비타 섹슈얼리스(ヰタ・セクスアリス)(1909년)
    제목의 뜻은 라틴어인 vita sexualis를 일본어로 표기한것으로 성생활을 의미한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이타세쿠스아리스'다. 작품의 내용은 시즈카라는 이름의 철학자가 자신의 성 생활에 대하여 탐구하는 내용으로 요시와라 유곽과 같은 환락가가 등장한다. 당시 높으신 분들로부터 "이 작품은 포르노그래피와 다르지 않다"는 혹평을 받으며 이 작품이 연재된 문예지 《스바루(スバル)》는 발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여타 모리 오가이의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내용이 유독 이례적인 편.
    도입부에 나쓰메 소세키가 깜짝 등장한다. 자그마치 본명으로 나온다.
  • 닭(鶏)(1909년)
    코쿠라에서 복무하던 시절에 집필한 단편 소설 중 하나로, 일명 '코쿠라 3부작' 중 한 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의 주인공도 모리의 오너캐로 간주되고는 한다. 주인공이 근무하게 된 시골 마을에서의 주인공의 일상 이야기인데, 마을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나쁜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 사례를 들면, 어떤 주민은 자신의 닭을 주인공이 키우는 닭들 사이에 몰래 섞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닭을 키우도록 하는데, 그 정도로는 또 모자랐는지 주인공의 닭이 낳은 달걀을 자신의 닭이 낳은 것이라고 우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주민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저러한 방식 또한 그들의 생활 방식이다"라고 여기어 그들을 존중하기까지 한다.
  • 청년(青年)(1910년)
  • 기러기(雁)(1911년)
  • 임상 기록(カズイスチカ)(1911년)
  • 햐쿠모노가타리(百物語)(1911년)
  • 아베 일족(阿部一族)(1913년)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에 감명받은 후 에도 시대 구마모토번을 배경으로 창작한 소설이다. 내용은 의외로 주군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냉소적인 해석이다.
  • 사카이 사건(堺事件)(1914년)
  • 산쇼다유(山椒大夫)(1915년)
  • 최후의 한마디(最後の一句)(1915년)
  • 타카세부네(高瀬舟)(1916년)
    병든 동생을 안락사시킬지 고민하는 형의 이야기이다. 라이트 문예 소설 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 7권에서 언급기도 하였다.

3.2. 주요 번역서

  • 오모카게(於母影)(1889년)
  • 즉흥시인(即興詩人)(1901년)[16]
  • 파우스트(1913년)[17]
    모리는 군의총감으로서 복무하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 단 3개월 만에 본작의 제1부 번역을 마쳤다.

4. 군의관으로서의 행적

문학가로서의 그는 매우 뛰어났지만, 군의관으로서는 일본군각기병 환자 증가를 부르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일본군은 비타민 B1 결핍으로 생기는 각기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독일 유학파로 육군 군의관의 높은 자리에 올랐던 모리 오가이는 당시 의학계의 주류였던 각기병 병원균설을 지지했다. 사실 각기병은 전통적인 대처 방법으로 보리, 메밀 국수 등을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퍼져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타민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원인 자체는 몰랐지만, 보리에는 비타민 B 성분이 들어있으며 경험적으로 이걸 먹으면 각기병이 나아진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모리 오가이는 이를 당시 최선진 의학이었던 독일 의학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보리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의 독일 의학계를 맹신한 것에 더하여, 모리는 평소부터 부하들에게 자상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상관이었기에 부하들이 맛없다고 먹기 싫어 하는 보리밥을 병영식으로 삼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보리밥 배식 금지령을 내린 것이기도 하다. 모리의 이러한 명령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육군에서만 25만명의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고 이 중 약 2만 8천여명이 사망했다. 후술할 이유로, 이 환자 및 사망자는 거의 총원 육군이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그 상황을 참지 못한 러일전쟁 당시의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이 군의부의 의견을 깔아 뭉개고 흰쌀밥을 혼식으로 바꿨다. 완전 편성된 사단 1개(평시 상비 사단 2개)분이 각기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엉망인 징병 제도로 인해 당시 동원 인력의 1할만을 채우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있어서 1개 완편 사단의 병력이 전사도 아니고 질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극히 심각한 사태였다.

모리 오가이가 소속되었던 일본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에서는 이미 1884년 잡곡밥이 각기병 방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여 식단에 혼식을 넣어 각기병을 예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기까지 했듯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이미 이때부터 극심했던데다가, 이 방식을 시행했던 해군 군의총감 타카키 카네히로(高木兼寛)[18]영국 유학파였기 때문에 육군 군의관인데다 독일 유학파였던 모리 오가이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병력 수만 명이 각기병으로 사망한 참사가 벌어졌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사실 비타민의 존재와 각기병의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기 이전이어서 모리 오가이로서는 과학적 근거에 의한 치료를 하려 했다는 옹호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비록 당시로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기는 했으나, 이미 경험과 임상례로 증명된 예방책을 지나치게 합리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가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과학만능주의 내지 과학적 회의주의를 신봉하다가 덫에 걸렸다고 볼 수도 있다.[19][20]

모리 오가이는 비타민의 존재가 밝혀진 뒤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려 들지 않았다. 모리 오가이가 워낙 고집을 부린 덕분에 일본 육군의 군의부가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 B의 부족이며 이의 예방을 혼식 등 식단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인정한 시기는 그가 죽고 난 1923년이었다. 정작 본인은 을 매우 좋아하다보니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의관으로서 공훈도 있다. 그는 일본 위생학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리고 당시 일본 의학계에 깔린 봉건적 구습을 씻어 버리는 것을 목표로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함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명시된, 의사로서의 사명과 윤리는 어기지 않았고 인체실험 및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느 부하가 포로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자고 건의하자 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다.[21]

모리는 전장에서 여성을 강간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작품에서 드러내기도 했다. "쥐 언덕(鼠坂)"이라는 소설에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현지 여자를 강간한 후 살해한 기자가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작품 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민간인 및 포로에게 각종 야만적인 만행을 저질렀는데, 모리는 그러한 일본군에 몸담고 있었으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의 대상 중 일부였던 무고한 민간인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을 소설을 통해 드러냈던 것이다.

5. 기타

  • 일본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모리 오가이는 뛰어난 소설가로서 매우 잘 알려져 있으나, 문학사 관련 서적에서 그의 군의관 시절의 실책이 나와 있는 책은 거의 없기 때문에 모리 오가이를 뛰어난 소설가로서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실책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군의관일 때는 당연히 그의 본명인 '모리 린타로'를 사용했는데, 그래서 둘이 동일인물인지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 문인으로서의 자신과 군인으로서의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했다고 한다. 하루는 문단의 친구가 군복을 입고 정거장에 있던 모리 오가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자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22]
  • 잠을 짧게 자는 편이었다. 지인들에게 "2시간 잔 거면 많이 잔 거다"라고 말했을 정도.
  • 논쟁광이었다. 모리의 이러한 점이 당시 일본 의학에 존재했던 봉건적 분위기를 타파하는 데에 이바지했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
  • 군인으로서 자긍심이 높아서 산책할 때도 항상 군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딸 안느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자니, 아이들이 "우와, 중장이 걷고 있네" 라며 몰려들었다. 당시는 러일 전쟁 직후라 군인이 어린 아이들에게 영웅처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뽐내는 얼굴로 서 있던 모리 오가이의 옷깃의 녹색 단추를 보고는 한 아이가 "뭐야, 군의관이잖아" 라고 김 샜다는 듯이 말했고, 다른 아이들도 그 말을 듣고는 그대로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심한 모리 오가이는 집에 돌아올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23]
  • 세균학을 주로 전공했던 탓에 결벽증에 걸려 과일조차도 끓이거나 데쳐서 먹어야만 했고, 남이 들어갔던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도 매우 꺼렸다고 한다. 다니구치 지로도련님의 시대에 보면 모리 오가이는 업무가 끝난뒤 입욕을 습관화하지 않고 한숨 자고나서 온몸에 데운 물에 적신 깨끗한 수건으로 온몸을 닦았는데 다도를 하듯 흐트려지지 않고 경건하게 하고 면도를 하고 책을 새벽까지 읽는 습관을 가졌다.
  • 탈아입구 광풍이 불던 시절의 독일 유학파였던 탓에 서양 문화를 매우 동경했고, 심지어 아이들 이름조차도 서양식으로 지었다. 그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오토(於菟=Otto), 첫째 딸의 이름은 마리(茉莉=Marie), 둘째 아들의 이름은 프리츠(不律=Fritz), 둘째 딸의 이름은 안느(杏奴=Anne), 그리고 셋째 아들 이름은 루이(類=Louis)였다. 심지어 그의 손자 중 하나의 이름도 그가 지었는데 유리아(由利亞=Julia). 즉 차례대로 풀네임을 말하자면, 모리 오토, 모리 마리, 모리 프리츠, 모리 안느, 모리 루이, 모리 유리아. 그의 장남도 그런 성격을 이어 받았는지, 장남 오토의 자식들은 각각 막스 (真章=Max), 톰 (富=Tom), 레오 (礼於=Leo), 한스 (樊須=Hans), 그리고 죠지 (常治=George)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훌륭한 DQN네임이다.
  • 군의관 시절에 벌인 각기병 대책 관련 병크에도 불구하고 군의 총감까지 승진하고 있던데는 육군내 조슈 군벌의 대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적어도 독일 유학시에는 유학 제한 연령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의 압력으로 인해 유학갈 수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논의가 추정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진실처럼 통용되게 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를 그렇게 존경하고 그처럼 소설을 쓰고자 갈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강조했던 모리 오가이에 비해, 아쿠타가와는 개인성과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등, 소설로 하려고 했던 일이 너무나도 판이했고, 실제로 만난 적도 별로 없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존경해왔던 모리 오가이 식의 소설은 현대 일본 문학에는 생명력을 다했다는 평가이지만, 아쿠타가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특징.
  • 다자이 오사무 또한 모리에게 감화된 작가이다. 모리가 번역한 독일 소설 "여인의 투쟁"에 대해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꼭 읽어 보라. 한 번 읽어 본 적 있다면 또 한 번 읽어 보라."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다자이의 생전 바람에 따라 사후 모리의 묘소의 맞은편에서 오른쪽에 다자이의 묘소가 마련되었다.
  • 박경리김용옥과의 일본에 대한 관점에 대한 논쟁 중에서, '일본의 문화는 야만'이라고 주장하면서 근현대 소설 중에서 모리 오가이의 작품이 그나마 읽을 만하다고 언급했다.
  • 모리 오가이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요절한 차남 후리츠[24]를 제외한 4명의 자식들이 모두 모리 오가이에 관한 수필 내지 회고록 등을 썼다. 이 중에서 장녀인 마리(森 茉莉 : 1903년~ 1987년)가 쓴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와 차녀인 안느(小堀 杏奴 : 1909년 ~ 1998년)가 쓴 '만년의 아버지(晩年の父)'가 유명하다.
  • 모리 마리의 회상록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마리가 "파파, 놀아 줘, 놀아 줘!"라고 하면 모리는 피우던 담배를 놓아버리고서 마리에게 "그래!"라고 따뜻하게 대답하고서는, "마리는 훌륭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마리는 "아빠도 훌륭해! 아빠가 도둑질을 해도 훌륭해!"라고 말했다. 물론 모리가 도둑질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리가 어떠한 일을 해도 훌륭한 아버지인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의미다.
    또, 어린 마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으면, 모리가 티슈로 마리의 눈물을 닦아주고서 마리의 눈물이 묻은 티슈를 햇볕에 비추어 보이면서 마리에게 "자, 이걸 보렴. 눈물 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동글동글하지?"라며 슬픈 마리를 달래주기도 하였다.
  • 모리 오가이는 장녀인 마리를 끔찍이 여겼는데, 마리가 16세가 될 때까지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혀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리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마리는 최고, 마리는 최고, 눈도 최고, 눈썹도 최고, 코도 최고...”라고 주문을 외는 듯이 말하곤 했다. 그야말로 딸바보. 사실 모리는 마리가 아주 어릴 때 마리를 잃을 뻔했다. 마리가 5살이던 시절, 당시 일본 전역에 창궐했던 백일해에 감염되었다가 간신히 나았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번역된 수필집 <홍차와 장미의 나날>에서 마리는 '파파가 내게 남겨준 것들은 대부분 머릿속에서 존재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 자녀들에게 전반적으로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반면 아내인 모리 시게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양육 방식을 선호했다. 자녀들은 모리를 친근하게 "파파(パッパ)"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우에노 동물원에 자녀들과 함께 놀러가거나 자녀들을 데리고 도쿄의 유명한 소바 전문점에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쿄에 초청 받아 대접 받은 식사에서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캐러멜을 몰래 군복 안에 숨기고 귀가하여 자녀들에게 기념품으로 건네주기도 하였다. 자택의 서재에서 소설을 쓰고 있거나 응접실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등 집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따금 어린 자녀들이 불쑥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모리는 자녀들을 혼내기는커녕 응, 왔어? 하며 무릎 위에 앉히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 자녀들이 어릴 적 밤에 화장실 가기를 무서워하면, 모리가 화장실에 함께 가 준 후 뒤처리까지 도와주었다고 한다.
  • 장녀 모리 마리는 1957년 수필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로 데뷔한 뒤 장편 소설 『달콤한 꿀의 방(甘い蜜の部屋)』, 『연인들의 숲(恋人たちの森)』 등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올렸다. 『달콤한 꿀의 방(甘い蜜の部屋)』은 3부로 나뉘어 10년에 걸쳐 연재되어 1975년에 완결되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연재되던 중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음란한 여자보다도 그녀는 남자라는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실로 기이하다!' 라는 말을 하며 '관능적인 대걸작'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할복 자살하였고(미시마 사건) 결국 이 소설의 2부까지밖에 읽지 못하였다.
  • 만쥬[25]를 얹은 오차즈케, 일명 만쥬 차즈케(饅頭茶漬け)를 좋아했다고 한다. 둘째 딸 코보리 안느의 회고록에 따르면, 모리 오가이는 청결하게 씻은 하얀 손으로 만쥬를 4등분하여 오차즈케에 얹어 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 단것을 매우 좋아했다. 동시대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와의 공통점 중 하나다.[26] 다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특히 "은 영양이 풍부하다"며 단팥을 좋아했는데, 단팥빵을 최초로 만들어냈다고 전해지는 제과점 키무라야(木村屋)의 단팥빵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27]
  • 머리가 컸다. 어린 시절 만났던 모자 장수가 그의 머리가 너무 커서 보자마자 폭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녀 마리의 수필 '아버지의 모자'의 첫 문장도 "우리 아버지는 머리가 참 컸다"다.

6. 캐릭터화

의사라는 점 또는 군인이라는 점, 린타로라는 본명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1] 모리 오가이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일본의 신자체 규정이 시행되기 전이라 鴎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체 규정으로도 鷗는 鴎가 아닌 鷗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다. 현재는 森 鷗外, 森 鴎外 표기를 병행하기도 한다.[2] 1873년 당시 '도쿄의학교'라는 명칭이된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877년 '도쿄카이세이대학'과 '도쿄의학교'가 합병되어 일본 최초의 대학인 '도쿄대학'이 설립이 되어 졸업은 '도쿄대학'이라는 명칭으로 했다. 이듬해인 1878년 '도쿄대학'에 학사 학위 수여권이 부여되었고, 모리는 1881년 졸업하였다. 1885년 도쿄법학교와 통합되었고, 1886년에는 공부대학교와 통합되고 제국대학령의 반포로 인해 '제국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890년에는 도쿄농림학교가 통합되었고 1897년에 교토제국대학이 설립되어 명칭 중복을 해소하고자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후 1947년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61년 만에 '도쿄대학'으로 환원되었다. 1886년 이전의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 현재의 도쿄대학을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3] 현재 시마네현 카노아시군 츠와노정[4] 둘 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격에 참가했던 노기 마레스케자살에 충격을 받고 그 영향을 받은 소설을 썼다. 덧붙여 노기 마레스케는 메이지 덴노의 부음을 듣고 죽은 것.[5] 나츠메 소세키는 『마음』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자살과 선생의 자살을 연관시켰으며, 모리 오가이는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썼다.[6] 오늘날의 아다치구아라카와구의 경계에 있는 지역. 오늘날에는 기타센주와 미나미센주로 나뉘었다.[7] 사상가, 교육자, 관료로, 모리와 마찬가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 집안 출신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간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서양의 지식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에 기여했다. mechanical art를 기술이라고 번역하기를 최초로 제안한 인물이다.[8] 모리는 도쿄 의학교 주변의 하숙집에서 통학했다고 하는데, 그 일을 당한 것은 기숙사에서의 일이라고 하므로 이야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래도 "모리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당한 것인지, "기숙사에서 생활하지는 않았으나 기숙사에 강제로 끌려가" 당한 것인지의 여지는 있으므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9] 이러한 "괴테식 체념"은 동양에서 통용되는 체념과는 다른 개념이다. 현실의 부조리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 개인이, 동양식 체념을 따른다면 그저 "난 여기까지구나" 하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불만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으로 삭히지만, 괴테식 체념을 따른다면 "그래, 현실은 이렇고 난 여기까지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 하고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모리가 지은 소설 〈기러기(雁)〉의 여주인공 오타마의 대사 중 "저, 이제부터 씩씩해질 거예요."가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러한 괴테식 체념이 드러나는 것이다.[10] 실제로 모리 오가이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엘리제라는 독일인 여성이 그를 쫓아 따라와 모리와 결혼하려다가 모리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엘리제는 1개월 만에 도로 귀국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본인이 외국인과 연애 및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사회적 풍조가 있었고, 이에 더하여 모리의 집안 사람들은 모리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모리의 입신양명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우려하였기에 반대가 심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모리가 이 연애 경험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 〈무희〉가 당시 일본 사회에 엄청난 파격을 불러올 정도였고, 그 영향으로 오늘날의 일본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렸겠는가.[11] 이는 다시 도쿄로 돌아와 승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2] 일본 육군 원수로서 육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히 일본 육군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으며 내각총리대신까지 맡아 정계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막후 실세였다.[13] 야마가타에게 총애를 받기 이전까지는 코쿠라 좌천 이후의 승진은 꿈에도 꿀 수 없었다고 한다.[14] 漁史(ぎょし, 교시)는 문인 등이 자신의 필명 뒤에 붙이는 일종의 호칭격 접미사다.[15] 코쿠라[16] 안데르센의 소설 'Improvisatoren'의 번역서. 국내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17] 괴테파우스트의 번역서이다.[18] 1888년 일본 최초 박사 수여자중 한 명, 다양한 섭취 방법을 사용해 각기병을 예방한 공적을 인정받아 후일 모리는 받지 못한 귀족인 남작 작위를 받았다.[19] 그런 입장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지 않은 경험에 근거한 판단은 유사의학에 불과하기 때문에 먼저 근거를 가져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20] 21세기 현대의학에서도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르지만, 일단 효과가 있고 뚜렷한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처방하는 약들이 상당수 있다.[21] 다만 청일전쟁에서 여순 전투 직후 학살을 목격하기는 했다.[22] 모리 오가이는 중장 계급에 해당하는 군의 총감이었다.[23] 일본어 위키백과 및 여러 웹 사이트 교차 참고. 딸 안느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고 한다.[24] 不律. 독일어로 쓰면 프리츠(...)[25] 화과자의 일종으로 달콤한 소가 들어 있는 퍽퍽한 과자다.[26] 나쓰메 소세키는 딸기잼을 대량구매하여 쌓아 놓고 퍼먹었다고 한다.[27] 덕분에 각기병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데도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다. 팥에는 티아민이 풍부하여 팥을 먹으면 각기병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