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3 20:03:56

프란츠 카프카

1. 개요2. 일생
2.1. 유년기2.2. 작품 활동2.3. 죽음
3. 사후
3.1. 이스라엘의 주장과 비판
4. 작품 목록5. 여담6. 각종 매체에서의 카프카
6.1. 오규원의 시

파일:external/laflechanegra.files.wordpress.com/franz-kafka.jpg
이름 Franz Kafka[1]
생몰년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
국적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라하(현 체코)
학력 카렐 대학교[2] 법학과 (1901-1905년)

1. 개요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Ich habe kein literarisches Interesse, sondern bestehe aus Literatur, ich bin nichts anderes und kann nichts anderes sein.
필적감정사가 카프카의 필적을 보니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고 한 말에 대한 카프카의 대답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 이었던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쓴 유대인 소설가.

역사적으로 체코 또는 보헤미아 지역에는 혈통이 게르만이든 슬라브든 독일어 화자가 매우 많았다.[3] 이들은 유대인이면서 체코어를 할 줄아는 체코(보헤미아)인이고 독일어를 제 1 언어로 사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인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은 카프카 특유의 사회적 소외감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예술적 감각이 시대를 앞서간 천재 중의 천재로 평가된다. 독어권의 대문호라고 볼 수 있다.

2. 일생

2.1. 유년기

1883년,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4](Hermann Kafka, 1852~1931)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걸핏하면 프란츠에게 고함을 질렀고 마구 때리며 키웠는데, 이는 프란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5] 헤르만이 이런 식으로 아들을 기른 것은, 현실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한 자신과는 프란츠가 매우 달랐는데다가, 세 아들 중 두 명이 일찍 죽고 남은 프란츠에게 건 기대가 크기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를 쓰는 학교 대신, 당시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6]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냈다.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 배경이 여기에 있다.

2.2. 작품 활동

프라하에 보존된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라하에서 직장 생활을 했으며 죽어서도 프라하에 묻힌 '프라하 토박이'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창작 활동을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이 저작 활동을 이어가 영감을 받고 하룻밤 만에 변신을 완성하기도 한다.

말이 적었지만 불친절한 성격은 아니어서 직장에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재정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종종 친절과 선의를 베풀었다. 실제로 노동자 실태 파악을 위해 출장을 다니고, 노동 조건 개선 등에 힘쓰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던 이웃집 소녀를 위해, 여행을 떠난 인형이 쓴 편지라며 자기가 쓴 편지를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7]

생전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평생 전업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글은 돈벌이나 인기몰이 대신 사람과 예술을 위해서만 써야 한단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별도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힘겹게 작가의 꿈을 이어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글만 쓰며 사는 삶을 모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7월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을 한 뒤, 친구와 함께 덴마크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부모님께 편지를 썼는데 프라하를 떠나 독일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향을 묻는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노동 보험 공단은 박봉이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보람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인 짧은 근무 시간 때문에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 회사 홍보나 기업 변호를 주로 맡았다.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하루에 두 번 잠을 잤다는 말.

아인슈타인 평전에 따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프란츠를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생전 카프카가 무명에 가까운 작가였다고 생각하면, 꽤 기적적인 세기의 명사들의 만남인 셈.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만다. 이후 다른 여자들과 여러번 연애를 하나 결국 결혼하지는 못했다. 바우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는데, 카프카가 죽은 후 그가 세계적인 작가가 되자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와 주고 받았던 연애 편지를 모두 공개해 출판했다. 하지만 그에 따라 그녀는 비난까지 덩달아 받았고 생각보단 큰 돈을 받지 못했기에 결국 그녀는 비참하게 살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훗날 카뮈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하고 관련 논문이 쏟아질 정도로 유명해졌지만[8],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생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발표한 작품이 몇 편 없기도 했고. <변신>, <유형지에서>, <>, <실종자>, <시골 의사> 등 걸작들이 가득했으나 그 중 출판된 단편은 극소수였고, 몇몇 평론가들이 소설을 호평하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호평 수준에서 끝났을 뿐 그의 작품을 깊숙이 탐구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그나마 받았던 호평도 시간에 묻혀 잊혀졌다.

그의 장편 소설들은 전부 미완이다. 스스로 상당수 작품을 찢거나 불태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자신의 글을 갈기갈기 찢어 휘날리면서 미치도록 웃다가 경찰들에게 끌려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했지만 의사가 입원이 아닌 안정이 필요할 뿐이라고 하여 강제 입원은 면했다고 한다.

2.3. 죽음

신경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던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결핵으로 요절했다.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는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살았다.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란 지위의 폭력성이 언급될 때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9] 소설 대부분의 절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론도 있으며, <심판>(Prozess) 같은 소설은 대놓고 억압적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여동생들은 나치 정권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카프카는 숨을 거두며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10]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 소설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모두 보존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재출판했다. 현재 프라하 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서점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집필한 <시골 의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카렐교 근처에는 카프카 박물관도 있다.

물론 처음에 출간된 장편들도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초기 판본들은 원문을 브로트가 편집한 형태로 나왔다. 브로트의 말로는 카프카와 나누었던 논의를 더듬어서 수정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이 신빙성과 적합성을 항상 의심했다. 브로트의 사후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고, 다음 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여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의 요구대로 영국 독문학자인 M. 패슬리의 중재 하에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본이 아닌 순수한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의 일이었다.

아무튼 브로트에게 작품 일부가 간 것이 행운인 셈. 카프카는 <>, <소송>,(혹은 심판이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되어 있다) <실종자>(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고쳤다.) 등 총 3편의 장편을 썼으나, <소송>의 경우, 결말은 썼지만 부분적으로 미완, <성>과 <실종자>의 경우 결말이 없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이 3편 중 <성>, <소송>의 주인공의 이름이 K이며, <실종자>에서는 카알 로스만(Karl Roßmann)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는 훗날 작가들의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장편들이 모두 미완이기는 하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평론가들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완벽한 작품으로 카프카의 장편들을 꼽는다.

3. 사후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들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 토마스 만

카프카의 소설은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도 극찬했고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온 장편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도 했고 이 작품은 체코에서 프란츠 카프카 상을 받았다. 현대 문학의 최고봉 중 한 명이라고 불리오는 밀란 쿤데라도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프카에게서 따온 소재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카프카에 대한 연구는 국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사실 이것도 현대의 국가를 소급할 경우에) '체코 문학'의 세부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독문학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독일에서 출판된 <독일 문학사>에도 독일 작가로 기술이 되어 있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기본적으로 작가론 연구에서는 그 작가가 사용한 언어를 기준으로 문학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쓰였는데 어떻게 체코어 문학으로 간주하겠는가?[11]

카프카는 보헤미아 출신이지만 프라하 이주 후 독일계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과 독일계 대학을 나왔다. 게다가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독일 문화권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12] 하지만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므로 '독일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독일어권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편 체코에서는 지금도 체코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 오스트리아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유대인인데다가 독일어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20세기 전반기에 중국계 화교 출신으로, 일제 치하의 한반도 경성에서 활동하며, 일본어로 작품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인 셈. 그나마 한국은 단일민족이라든지 하는 개념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이를 타인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온갖 유럽 민족이 섞인 국가였기도 하다.

3.1. 이스라엘의 주장과 비판

한 술 더 떠 이스라엘에서는 유태인이니까 이스라엘 작가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해외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카프카를 시오니즘으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배천 조씨가 송 태조 조광윤의 손자 조지린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배천 조씨 출신이자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인 조헌을 중국의 위인이라고 우겨대거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네덜란드계 후손이라는 이유로 베토벤을 네덜란드의 음악가라고 우겨대는 거나 다른없다.

상술하던 대로 카프카의 유품을 관리하던 브로트와 사귀던 여성 에스터 호페(1906~2007)와 이스라엘이 브로트가 공개하지 않은 카프카의 여러 유품 및 친필 원고의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여 국제적인 논쟁이 된 바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1988년 소더비 경매에서 198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위에 나오듯이 심판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진)<소송> 친필 원고를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이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자 이를 인정하지 않아서 독일과 논란을 빚기도 했다. 낯짝 참 두껍네

텔아비브 도서관장 다비드 블룸버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인 카프카(...)의 자료는 언제는 시오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배척하더니 이스라엘이 소장하는 게 옳다는 말을 하다가 당시 뉴욕 도서관장에게 개소리라며 카프카 본인이 그런 유서라도 남겼냐고 까이기도 했다. 국제 도서관계에서도 카프카를 유태인으로 알아도 유태인의 자랑이라는 것도 참 어이없으며 대체 그의 소설 어디에서 유태인에 대한 걸 자랑하더냐? 반론이 쏟아졌다. 거기 한술 더 떠, 이스라엘은 브로트가 이스라엘에 카프카의 모든 것을 기부한다고 했다고 주장하지만 호페는 생전 브로트의 유서를 공개하며 자신에게 상속권을 넘겼다고 반론했다. 호페가 죽고 나서 호페의 딸들이 계속 주장하던 와중인 2012년 10월, 이스라엘 법원은 카프카의 모든 유품은 이스라엘이 가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호페의 유족들은 항소하며 계속 맞서고 있다. 당연하지만 세계 곳곳으로 퍼진 유품을 소장한 측도 어이가 없다면서 개무시하고 있다. 미국조차도 이 판결에 대하여 무시하고 있으며 미국 내 유태인들도 골수 시오니스트가 아닌한 비난하거나 무시한다.

영국의 작가 윌 셀프는 데일리 미러 지에서 "이스라엘이 카프카를 시오니즘의 성자로 둔갑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카프카 본인이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라고 말하며 카프카를 자국의 작가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행태를 비판했다.

소설 어디에서도 유태인 찬양과 관련된 것은 절대 보이지 않는 소설들을 썼던 카프카를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출신을 이유로 그를 시오니즘 성자로 만든다는 국제적 비난과 비웃음과 외면을 당하고 있으며, 그를 이스라엘 작가로 간주하는 국가는 오로지 이스라엘 뿐이다. 국제 정치에서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는 대다수의 중동 아랍 국가들도 죽은 사람의 국적을 위조하는 것이냐고 비난하고 카프카가 평생을 살던 체코에서도 "뭐? 이스라엘 작가라고? 그가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게 있기나 했냐? 차라리 독일인이거나 체코인이라고 해!"라며 비웃고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 유럽에서도,미국이나 다른 대륙에서조차 그의 국적에 대하여 유태인계 체코 작가 아니면 체코 거주 유태인계 독일 작가로 책에 떡하니 서술하지 이스라엘 작가라고 쓴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왜? 유태인이라면 말러라든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라든지 멘델스존도 있는데 이들까지 이스라엘 음악가라고 하지 그러냐?" 라고 다른 분야에서까지 비웃음을 듣고 있다. 해당 유태인 음악가들도 핏줄이 유태인이다뿐이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유태교를 믿지않고 유태인이라는 자각도 없었던 카프카랑 똑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4. 작품 목록

추가바람

5. 여담

  •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가 노동자용 안전모를 만들었으며, 당시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던 카프카는 이 일로 1912년에 미국 안전 협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고 알려져 있으나, 어떤 증거자료도 없어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체코 출신의 또 다른 유명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도 카프카처럼 체코어가 아닌 다른 언어(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체코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그에 반해 쿤데라는 체코어를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모국어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 쿤데라는 처음에는 체코어로 소설을 썼었으나, 1970년 이후부터는 그의 책의 출판이 금지되었고,[13]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 줄곧 프랑스어로 집필하고 있다. 외국에서 번역할 때에도 프랑스어판을 원본으로 여긴다. 그렇게 체코어의 명성은 더욱 어둠 속으로...
  • '카프카'라는 성씨의 본 의미는 '검은 까마귀'를 뜻하는 체코어 단어인 Kavka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Kafka와 거의 같은 발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kavka가 가리키는 것은 일반적인 까마귀 보다는 작으며 비둘기 정도의 크기인, 목 부분이 회색으로 칠해진 까마귀의 일종으로, 서울에서 까치 보기가 쉽듯이 프라하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성씨는 당시 카프카가 유대계의 독일어 구사자라는 상황 속에서도 체코 지역에서 별 차별 없이 사는 데 도움이 되었던 존재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의 명성 때문인지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이름이기도 하며, 예를 들어 만화가 이우일은 고양이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 민음사에서 출판한 ‘변신, 시골의사’, 전영애 씨 번역은 비추한다[14].

6. 각종 매체에서의 카프카

6.1. 오규원의 시

제목은 카프카, 내용 자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적인 시이다. 공식적으로는 1987년 오규원이 출판한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처음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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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15]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16] 1000원
에리카 종[17]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18]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애초에 내로라하는 저술가들의 이름에다 가격을 매기고 그것을 메뉴마냥 나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충격적인데 그들 중에서도 특히 문학가들은 싸구려로 취급되는 데서 이 시는 문학이 현대에서 얼마나 찬밥을 받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미친 제자로 표현한 것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장 비싼 1200원짜리 학자 4명은 철학자 내지는 사상가이고, 그 다음 1000원짜리 두 명은 근대(20세기 후반) 문학 작가고, 그보다도 싼 800원짜리들은 20세기 초반 이전 문학가이다.


[1] 체코식으로는 프란티셰크 카프카(František Kafka)[2] 당시에는 카를 페르디난트 대학교로 불렸다.[3] 실제로 나치 독일체코를 병합할때 내세운 명분이 바로 이 보헤미아 지역에 속한 주데텐란트 때문이었다.[4]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야코프 카프카(Jacob Kafka)라는 축산업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원래는 체코어를 모어로 사용했으나, 유대인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독일어를 학습하여 사용한다. 병역을 끝마친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고, 이후 율리 뢰비(Julie Löwy)라는 부유한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아내의 자산을 바탕으로 그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가게는 곧 번성하여 그의 가정 역시 부유해졌다.[5] 때문에 문학사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그러면 헤르만 카프카가 자주 언급된다.[6] 프라하의 약 10퍼센트 정도의 지배 계층만 사용했다고 한다.[7]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키다리 아저씨[8] 수잔 손탁은 이런 상황에 대해 카프카가 집단적으로 폭행당하고 있다며 비판했다.[9]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보면 양육 방식부터 시작해서 원망이 가득하다.[10] Max Brod, 1884~1968. 이스라엘 건국을 도우면서 시오니즘 찬양과 팔레스타인 학살을 찬양하는 글을 쓰면서 이스라엘 바깥에서 매장당하고 오로지 친구였던 카프카의 소설을 발굴하여 알린 사람으로만 알려졌다. 노엄 촘스키나치에게 당한 유태인이 나중에 팔레스타인에서 나치처럼 구는 경우로 브로트를 언급하기도 했다.[11] 러시아 출신 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노문학이 아닌 영문학으로 분류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12] 보헤미아가 오래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부속 왕국으로 있었던 만큼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에도 1945년까지 주데텐란트는 독일계 주민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코의 일부 지역은 독일어권 지역이었다.[13] 이후 22년만인 2006년, 체코에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다시 출간되었다.[14] ‘그 모든 것은 정말이지 고달픈 헤아림이니 이따금씩은 명석한 두뇌가 스스로에게서 느끼는 기쁨이 계속 헤아려 나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거기서 나는 평화의 단잠을, 채워진 욕구의 그리고 자기 집을 소유한다는 도달된 목표의 단잠을 잔다... 나를 따라올 기분을 내가 일으켜놓게 될 것은 정말이지 틀림없이 진정한 적은 아닐 것이다.’역자 해설에서 덧붙인 카프카의 문체는 간결하고 사실적이라는 말과 다르게 꽤 늘어지고 복잡하게 번역된 편.[15] 미국의 시인, 역사학자.[16] 프랑스의 시인.[17] 미국의 소설가.[18]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