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8:35:23

바츨라프 1세(보헤미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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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체코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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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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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4대 공작
바츨라프 1세
Václav I
파일:바츨라프 1세(보헤미아 공작).jpg
제호 체코어 바츨라프 1세
(Václav I)
라틴어 벤체슬라우스
(Venceslaus)
출생 907년
사망 935년 9월 28일 (향년 28세)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921년 ~ 935년
자녀 즈브라슬라프?
형제 볼레슬라프 1세, 스피티흐네프, 프리비슬라바 체스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 3명
아버지 브라티슬라프 1세
어머니 스토도르의 드라호미라
1. 개요2. 행적3. 성인이 되다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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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4대 공작.

사후에 성인으로 공경받았으며 체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1]

2. 행적

907년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1세와 스토도르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볼레슬라프 1세, 스피티흐네프, 프리비슬라바 체스카 등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스토호프(Stochov)의 언덕 요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할머니 루드밀라가 손자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성 안뜰 모퉁이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성 바츨라프 참나무'는 현재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참나무로 일컬어지며 스토호프 마을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전설>(이하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는 어린 시절 부데치(Budeč) 요새로 보내져 할머니 루드밀라의 양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라틴어로 작성된 시편을 익혔고, 슬라브 서적도 탐구했다고 한다. 915년경 보헤미아 공작에 취임한 브라티슬라프 1세는 장남 바츨라프의 이발 의식을 프라하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거행하면서, 베로나의 주교 노테리우스 2세를 초빙했다.

921년 2월 13일, 브라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후 바츨라프 1세가 공작에 선임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드라호미라와 할머니 루드밀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공국의 권력과 바츨라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두 여성과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러던 921년 9월 15일, 루드밀라가 테틴 언덕 요새에서 드라호미라의 시종인 투나(Tunna)와 고몬(Gommon)에 의해 베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훗날 이 베일은 성녀로 추앙된 루드밀라의 상징이 되었고, 드라호미라는 기독교도를 잔혹하게 죽인 이교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드라호미라가 이교도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본다.

드라호미라는 루드밀라를 살해한 뒤 바이에른 성직자들을 추방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빌미삼아 922년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기록상에는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925년 즈음에 성년이 된 바츨라프 1세는 루드밀라의 유해를 테틴 언덕에서 프라하로 이송하고, 드라호미라에게 추방된 사제들을 불러들였으며, 어머니 드라호미라를 추방하고 어머니를 추종한 인사들의 준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뒤이어 코우르짐의 통치자 바츨라프 또는 라드슬라프와 맞붙어 승리했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곳을 계속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2] 이후 930년경에 성 비투스 성당을 세우고, 여전히 이교도가 많은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고자 성직자들의 선교 활동을 후원했다.

기독교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거의 수도사처럼 살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고 과자를 굽는 일을 했으며, 죄수들을 해방시키고 교수대를 허물었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또한 언젠가 동생 볼레슬라프 1세에게 공작위를 넘겨주고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길 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은 훗날 성인이 된 그를 미화하고자 창작된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가 집권할 무렵, 보헤미아는 세 세력 사이에 끼여 있었다. 동쪽에는 유럽 전역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던 마자르족이 있었고, 북쪽에는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는 슬라브 부족들[3]이 있었으며, 서쪽엔 독일 왕국에 속한 바이에른이 있었다. 보헤미아 공국은 스피티흐네프 1세 때부터 마자르족 및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마자르족이 바이에른 등지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추방한 뒤, 어머니가 추방했던 선교사들을 불러들이고 바이에른과 화해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29년, 독일왕 하인리히 1세가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을 정벌했을 때, 어머니가 속한 스토도르족의 수도 브란덴부르크가 함락되었다. 그후 하인리히 1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 함께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글로마코베족을 공격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뒤이어 하인리히 1세와 아르눌프가 프라하로 진격하자, 바츨라프 1세는 두 사람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 해 초여름, 바츨라프 1세는 독일 왕국에 매년 공물을 바치고 독일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는 대가로 그들이 보헤미아를 파괴하지 않고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는 보헤미아 공국이 소 120마리와 은 500 흐리브니아를 806년부터 비정기적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핀 카를로만에게 바쳤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카롤루스 대제 시기엔 보헤미아 공국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코스마스가 잘못 기술했다며, 실제로는 바츨라프 1세 시대부터 독일 왕국에 공물을 바쳤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 양이 코스마스의 기록과 같은 지는 불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동생 볼레슬라프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축일인 9월 27일에 형 바츨라프를 볼레슬라프 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다음날 아침, 바츨라프 1세가 아침 예배를 하러 교회에 갔다가 귀가하던 중 볼레슬라프와 마주치자 덕담을 건넸다.
"네가 어제 우리를 잘 섬겼으니, 신께서 너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볼레슬라프가 외쳤다.
"오늘 나는 당신을 이렇게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검을 빼들어 형의 머리를 가격했다. 바츨라프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형제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볼레슬라프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것을 빼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이 뒤이어 바츨라프를 살해했다. 10세기 중반에 고대 슬라브어로 작성된 <성 바츨라프의 생애>에서는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바츨라프와 볼레스와프 형제가 아침에 미사를 드리러 가던 중 길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볼레슬라프가 검을 빼들어 바츨라프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츨라프가 이를 막고 볼레슬라프를 쓰러뜨렸다. 이때 볼레슬라프의 측근인 투자(Tuža)가 달려들어 바츨라프의 팔을 때렸다. 바츨라프는 교회에 숨기 위해 달려갔지만, 교회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뒤따라 달려온 볼레슬라프의 부하들이 그를 검으로 난자해 살해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귀족 므스티니(Mstiny)를 포함해 바츨라프와 함께 있던 인사들 역시 이날 피살당했으며,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은 곧장 프라하로 달려간 뒤 바츨라프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산 채로 블타바 강 깊은 곳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이때가 벌어진 해는 문헌 기록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60년대까지는 929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 역사 기록들과의 대조를 통해 935년에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살인 동기 역시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볼레슬라프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형제를 살해했다고 기술되었고, 몇몇 학자들은 바츨라프 1세가 막대한 공물을 독일 왕에게 바치는 굴욕을 감수한 것에 대해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볼레슬라프를 충동질했으리라 추정한다.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를 기독교화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인 것에 대한 이교도들의 반발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는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성관계를 맺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동생과 귀족들의 강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낳기 위해 어느 여인과 동침해 즈브라슬라프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추종자들의 아이들까지 죽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 역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성인이 되다

바츨라프 1세를 살해하고 공작위에 오른 볼레슬라프 1세는 938년에 형의 유해를 볼레슬라프에서 프라하의 성 비투스 교회로 이장시켰다. 이에 대해 형을 살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랬다는 설과 교황청에게 프라하 교구를 바이에른 주교구에서 독립시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970년경, 바츨라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레겐스부르크에서 거행한 성찬식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았고, 그가 살해당한 9월 28일을 축일로 지정했다.

4. 평가

바츨라프는 기독교적 미덕을 지닌 성자이자 프르셰미슬 왕조 및 체코의 상징으로서, 오늘날까지 체코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1929년 7월 29일 프라하의 성 바츨라프 대성당 개관식에서 성 바츨라프 천년기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성인 공경은 고대 슬라브어로 작성된 연대기를 통해 슬라브족이 거주하는 영역 전체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나중에는 러시아 정교회까지 그를 성인으로 받들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에서 활약했던 제1 체코슬로바키아 소총병 연대는 처음 창설한 뒤 1년 반 동안 '성 바츨라프 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 체코의 국권을 상징하는 성 바츨라프 왕관(Svatováclavská koruna)의 이름도 그에게서 유래했다.[2]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전투 도중 사상자가 많이 생기자 코우르짐의 통치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전진했을 때, 바츨라프의 이마에 십자가 형태를 띤 환상이 생겨났다. 코우르짐의 통치자는 그걸 보자마자 무기를 멀리 내던지고 바츨라프 1세의 발 앞에 몸을 던지며 "하느님께서 표창을 내려 도움을 베푸시는 사람을 이길 자가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3] 드라호미라가 속한 스토도르족이 여기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