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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클레멘트 고트발트 Klement Gottwald | |
| |
출생 | 1896년 11월 2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비슈코프 | |
사망 | 1953년 3월 14일 (향년 56세)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프라하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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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63cm |
가족 | 배우자: 마르타 홀루보바[1] 자녀: 마르타 체피츠코바 (1920~1998) |
학력 | -[2]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직업 | 정치인 |
소속 | |
서명 |
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제5대 당수였다.2. 생애
클레멘트 고트발트는 1896년 11월 23일 비슈코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1차대전 참전 전에 목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그 후 1차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오-헝제국군에 3년 간 복무하였으나 비엔나의 병원에 있던 중 탈영하였다. 1차대전에서 오-헝제국이 패배하자 고트발트는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 2년 간 복무한 뒤 공산주의 잡지 Hlas Ľudu[3]의 편집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26년, 고트발트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간부이자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열렬한 스탈린주의자로 스탈린이 주도한 코민테른 정책에 때라 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활동이 금지되자 그는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1년 뒤 독일이 체코를 병합하고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고트발트는 적극적으로 반파시즘 활동을 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3년, 고트발트는 런던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의 대표와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과 함께 국내외 반파시스트 저항을 통합하고 국민 전선을 형성하기로 합의했다.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배한 뒤 체코슬로바키아가 해방되자 고트발트는 모국으로 귀환하였다. 고트발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계 주민을 추방하는 것을 확고히 지지했으며, 민족주의적 수사를 통해 많은 체코인들에게 주류적 신뢰를 얻었으며, 체코 국민들에게 "백산 전투에 대한 최후의 보복, 체코 땅이 체코 국민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라. 우리는 외국인 독일 귀족의 모든 후손을 영구히 추방할 것이다."라고 촉구했다. 그 후 고트발트는 연립정부 체제에서 부총리로 참여하면서 점차 권력 기반을 확장하였다. 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사회 개혁과 산업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전체 득표의 약 38%를 차지하며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고트발트는 총리로 취임하였고, 이후 점차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이 마셜 플랜을 거부해 인기가 떨어지자 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기 어렵다고 판단해 쿠데타를 계획한다. 고트발트는 1948년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공산당이 권력을 잡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하였다. 주요 산업과 은행은 국유화되었고, 농업 집단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다원주의는 폐지되었으며, 공산당 일당 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의 반대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52년에는 당내 반대파를 대상으로 한 정치재판이 열려 루돌프 슬란스키를 비롯한 다수의 고위 간부가 처형되었다. 이러한 숙청은 스탈린 체제의 동구권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1953년 3월, 고트발트는 소련에서 열린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귀국 직후 심장병 발작을 일으켜 3월 14일 프라하에서 사망하였다.[4] 그는 재임 중 사망한 최초의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었다. 사망한 고트발트는 레닌이나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방부 처리된 뒤 영묘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1962년에 개인 숭배가 끝났고 Gottwald의 시신을 전시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화장된 뒤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3. 여담
- 그에 대한 체코인들의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2005년 체코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체코 국민의 26%가 고트발트를 '최악의 체코인'으로 꼽았을 정도다. 참고로 6위부터 2위가 부패 혐의 등으로 당시 체코 국민들에게 욕을 엄청 먹던 체코의 현역 정치인들이었는데 그는 당시 기준으로도 반 세기도 더 전에 사망한 인물인데도 당당하게 1위로 꼽혔을 정도니 체코인들에게 그의 폭정의 트라우마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외동딸 마르타 체피츠코바(Marta Cepicková, 1920~1998)는 1950년부터 1956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알렉세이 체피츠카와 결혼해 딸 3명을 낳았고 본인은 외무부, 국영 노동조합 등에서 일하다가 1956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화보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했다.[5] 1998년 2월 18일 프라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