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7:51:22

얀 지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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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체코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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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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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n_Vilímek_-_Jan_Žižka_z_Trocnova.jpg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John Zizka of Trocnov

1. 개요2. 상세3. 후스 전쟁4. 말년과 최후5. 군사적 혁신가6. 여담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1360년[1] ~ 1424년. 체코(당시엔 보헤미아)의 장군이자 후스파의 지도자였던 사람으로, 불패의 명장[2]이자 후스 전쟁영웅.

2. 상세

일명 애꾸눈 지슈카. '지슈카'란 '애꾸눈'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어렸을 때의 싸움으로 인해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전투 중 사고로 남은 쪽도 멀어 장님이 되었음에도, 그 상태로도 지휘를 통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몰락귀족으로서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용병으로 보헤미아 내전, 타넨베르크 전투 등에 참가하면서 지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무렵에 교회의 사유재산 소유를 반대하던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3. 후스 전쟁

1415년에 얀 후스가 화형에 처해지면서, 이 사건의 배후인 교황과 헝가리 왕 지그몬드(=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다. 1419년 지그몬드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고, 또한 이 지방의 토벌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까지 결성되게 되자 얀 지슈카는 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당시까지의 개념을 뒤엎고 농민들을 징용하는 대신 신병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군사운용에서 중세에서 근대적인 사고 방식으로 넘어가는 계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420년에 보헤미아 남부의 성새도시인 타보르를 거점으로, 후스 파 중에서도 최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타보르 파'를 결성하면서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후스 군은 신앙에 기초한 엄격한 군기를 통하여 강대한 군사력을 자랑하였다. 거기에 얀 지슈카의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으로, 신성 로마 제국군은 연거푸 대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고, 1421년에는 지그몬드의 보헤미아 왕 폐위를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4. 말년과 최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Zizka_tabor_statue.jpg
타보르에 있는 얀 지슈카의 동상
이 당시에 그는, 본래 실명한 눈 말고도 성을 공략하던 중 입은 부상으로 다쳤던 한쪽 눈까지 멀어 장님이 되었다. 그럼에도 군을 지휘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후스 파 내부의 온건파와 의견대립을 일으키면서 토벌에 나서는 등 고난의 연속이기도 하였다.

1424년 10월 11일, 얀 지슈카는 모라비아를 공략하던 중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오직 신만이 제거할 수 있는, 필멸자로서는 물리칠 수 없는 자로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애꾸의 불패 영웅은, 결국 적이 아닌 신의 뜻에 의해 사라져갔다. 유언으로 나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내가 죽은 후에도 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시 군사들은 아버지를 잃은 것 같이 슬픔에 통곡했다고 한다.

5. 군사적 혁신가

파일:external/getasword.com/hussite-wagons.jpg
파일:external/www.hexapolis.com/Battle-of-V%C3%ADtkov-Hill.jpg
얀 지슈카는 전술과 전략 모두 완벽했지만, 전쟁사에서 이름을 남기려면 잘 싸우는 걸 넘어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능력도 필요했는데, 단순히 신병기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전쟁을 제시한 혁신가이기도 하다. 우선 타보르 파의 군대는 훈련과 실전을 겪어보지 않았던 군대라서 이대로 가다간 황제의 노련한 군대에게 바로 짓밟힐 확률이 컸다. 하지만 냉병기에 비해 숙련도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던 화약 무기의 특성에 주목하여 핸드 캐논과 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전투가 시작되면 전투 마차를 이용해 방어진을 짜서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고 근거리에서는 플레일 등의 농기구와 유사한 무기를, 원거리에서는 핸드 캐논, 석궁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전법으로 훈련이 덜 된 농민병들이 기사와 용병으로 대표되는 프로 군인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거기에 신앙과 체코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엄격한 군기확립과 독전대 운용을 통해 군대가 지휘를 무시한 공격과 이탈을 하는 등의 돌발행동들을 제한했다.
농민병, 전투 마차, 화약 무기, 엄격한 군율, 신앙심과 체코 민족의식에 의한 높은 사기 등의 요소 하나하나에 전례와 유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요소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완성시킨 점이 지슈카가 지닌 비범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군사적 재능에 의지하지 않는 승리의 방정식을 창조함으로써 모든 시력을 잃은 뒤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그의 군대는 계속 무적을 자랑했습니다. 그야말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니시 코이치 - 소녀전쟁 9권

이러한 면에서 그는 징병제의 군대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제시했고 더 나아가서 근대적인 전쟁의 개념을 만들어낸 인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6. 여담

체코수도 프라하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지슈코브'가 있다. 오늘날 체코에서는 한국이순신 장군처럼 구국영웅으로 존경받는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징기스칸 4에서는 PK에서 추가된 시나리오 4(1370년 서역을 출발한 늑대)에서 등장하며, 1360년 출생설을 반영해서 시나리오 4에서는 1375년에 등장하는데 어쩐 일인지 루스 대공국(모스크바 공국)에 등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가끔 폴란드에서 등용되는 경우도 있다.[3]정치 52 / 무력 87 / 지력 74에 내정 특기는 등용, 전투 특기는 기동, 연사, 화공, 복병을 소유하고 있으며 병과 적성은 보병/궁병/기병/수군 순으로 A/A/A/E인 A급 무장이며, 사위로 삼아서 후계자 후보로 삼아도 좋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얀 지슈카는 궁기병에 최적화된 장수이며, 궁기병을 편성할 수 없을 때는 보병 궁수로 편성하면 된다.[4] 역사적 행적에 견주어 보면 좀 더 높게 평가되었어도 좋을 무장이다. 또한 얼굴도 가공장수 얼굴을 공유하여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애꾸눈'은 구현되지 않았다.
  • 후스 전쟁을 무대로 삼은 '오니시 코이치'의 만화 소녀전쟁에서도 주요 캐릭터로 등장. 단지 영리한것만이 아닌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도 갖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 라이트 노벨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도 시대가 겹쳐 언급된다. 베네치아가 보내준 군사 전문가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흥미를 느낀 주인공이 그를 만나고 싶어하지만 군사전문가가 그를 만난다면 다른 서방세력의 도움을 받을수 없다고 충고하여[5] 그만둔 적이 있다. 다만 작가가 주인공의 맹우가 될 것이라 언급했으니 만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소설 시점이 1421년인데 이는 얀 지슈카가 죽기까지 얼마 안 남은 시점이라는 것이 문제다. 향후 진행 방향을 봐야 할듯. 그러던 중 144화에서 교황이 드라가시스에게 십자군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가 드라가시스와 만날 가능성이 생겼..으나 십자군 참전을 거절하여 if로 남았다.
  • 사신소년에서 카이만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후스 전쟁의 영웅'. 작중 취급이 안 좋은 정도를 넘어 최악인 수준인데 사용자인 카이만부터가 스토리나 표절 등 여러 논란이 있었고 이걸 무마하기 위해 캐릭터 컨셉을 설명충과 개그캐로 바꿔버려 전투 장면에서의 활약상이 거의 없고 심지어 기술조차 사용한적이 없다. 이후 이경호가 회수해 사용하는것으로 나온다.


[1] 1374년이라는 설도 있음.[2] 전술적 또는 일시적 후퇴 제외.[3] 폴란드, 체코, 러시아, 발트 지역을 게임에서 서루시로 묶어서 서루시 문화로 등록된 얀 지슈카가 서루시 일대에서 등장한다. 그의 조국인 체코(보헤미아)가 구현되지 않았는데 실제 역사에 비춰보면 폴란드에 등용되는 게 그나마 역사에 부합한다. 용병 자격이었지만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측으로 참전하기도 했고.[4] 유럽 지역이라 노궁병이나 장궁병을 쓸 수 있다면 더 좋다.[5] 앞에서 말 했듯 그는 당시 이단이던 후스파 신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