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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1대 공작 소베슬라프 2세 Soběslav II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소베슬라프 2세 (Soběslav II) |
출생 | 1128년 | |
사망 | 1180년 1월 29일 (향년 51~52세)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173년 ~ 1178년 | ||
아내 | 폴란드의 엘즈비에타 | |
형제 | 블라디슬라프, 마리 체스카,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 |
아버지 | 브르제티슬라프 2세 | |
어머니 | 아들레타 아르파도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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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21대 공작.2. 행적
1128년경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1세와 헝가리 왕자 알모스의 딸 아들레타 아르파도브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1148년 블라디슬라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제2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한 틈을 타 보헤미아 공작위를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블라디슬라프 2세의 동생으로서 형을 대신해 나라를 이끌고 있던 디에폴트 1세에게 패배하고 생포된 뒤 프르짐다 성에 투옥되었다. 1150년 탈옥에 성공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궁정에서 지냈다.1161년, 소베슬라프 2세는 용병대를 고용한 모라비아로 진군해 올로모우츠를 점령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진압에 착수했지만 여의치 않자 협상하고 싶다며 그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이에 응해 프라하로 갔다가 체포된 뒤 프르짐다 성에 또다시 투옥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1172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자신의 아들 베드르지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수도자 신분이 되었다. 이에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들인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등은 1173년 9월 베드르지흐를 몰아내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황제의 승인 없이 계승이 이뤄졌으니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보헤미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는 소식에 진노해 베드르지흐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베드르지흐는 감히 황제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이에 응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조치를 무효로 처리하고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회수한 뒤 올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드르지흐를 공작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무산되었고, 그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소베슬라프 2세가 석방된 뒤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공작이 되자마자 자신을 그동안 학대했던 간수 콘라드 슈투름을 참수했다.
1176년, 소베슬라프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요구에 따라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에 보헤미아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는 레냐노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를 대주교의 직위에서 면직시켰고, 이로 인해 아달베르트의 삼촌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와 갈등을 벌였다.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도 아달베르트를 옹호했다. 이에 소베슬라프 2세는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기로 하고,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와 연합한 뒤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군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2차례 공격해 하인리히 2세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하인리히 2세는 도망치던 중 사망했고, 오스트리아 전역이 보헤미아군에게 황폐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약탈당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소베슬라프 2세를 파문했다.
1178년,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와 협력해 자신의 봉신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피해를 입힌 소베슬라프 2세에게 분노해 그를 폐위시키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또다른 구성원인 베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까지 베드르지흐를 도왔다. 소베슬라프 2세는 로데니체 전투에서 이들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뒤이은 프라하 성벽 인근의 노베메스토 전투에서 참패해 해외로 망명했다. 베드르지흐는 자신이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동생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 공작에 선임해, 올로모우츠가 속한 모라비아 전역에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게 했다.
1179년, 소베슬라프 2세는 베드르지흐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슈바벤으로 간 틈을 타 군대를 끌어모아 프라하로 쳐들어갔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르지흐는 독일에서 용병대를 모집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도중에 소베슬라프 2세의 매복 공격을 받고 패배했지만 콘라드 2세의 구원군과 합세한 뒤 다시 공세를 개시해 프라하 인근에서 소베슬라프 2세를 격파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망쳐 재기를 꾀했지만 1180년 1월 9일에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3세의 딸 엘즈비에타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엘즈비에타는 소베슬라프 2세 사후에 루사티아 변경백 콘라드 2세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