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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 류 치슈 [ruby(笠, ruby= りゅう)] [ruby(智衆, ruby= ちしゅう)] | Chishū Ryū | |
출생 | 1904년 5월 13일 |
일본 제국 구마모토현 타마나군 타마미즈무라 타치바나 (現 구마모토현 타마나시) | |
사망 | 1993년 3월 16일 (향년 88세)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1cm |
가족 | 배우자 시이노 하나미(1929년 결혼, 1993년 사별) 슬하 2남 2녀 |
학력 | 토요대학 (인도철학 / 중퇴) |
직업 | 배우 |
수훈 | 자수포장(1967년 수상) 욱일소수장(1975년 수상) |
소속 | 쇼치쿠 (1925년 ~ 1954년) |
묘소 | 이즈노쿠니시 죠후쿠지(成福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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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여자 류 치슈가 되고 싶다'라고 요시나가 사유리 씨가 말한 적이 있었다. 웬만한 배우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 옛날, 명배우 모리시게 히사야[1] 씨가 '토라상 시리즈'에 출연해 준 적이 있다. 어느 날, 그와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 나는 시리즈에서 고승 역할로 레귤러 멤버였던 류 치슈 씨에 대해 언급하자, 모리시게 씨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놓으며 "야마다 씨, 저 같은 평범한 배우 앞에서 류 씨 같은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해 나는 조금 놀랐다.
야마다 요지 #[2]
야마다 요지 #[2]
일본의 배우.
2. 생애
2.1. 유년기 ~ 무명 시절
1904년 5월 13일, 구마모토현 타마나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신(淳心)의 직업은 정토진종 본원사파 내조사의 주지승이었다. '치슈'라는 이름은 주지인 아버지가 지은 이름으로, 일본 불교의 법명 전통을 따라 한자 음독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아들을 절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렇게 지었다. 1911년에는 타마미즈 진조오 소학교에 입학했고, 소학교 졸업후에는 구마모토 현립 타마나 중학교(현 타마나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다녔다. #타마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불교계 대학 류코쿠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아버지로부터 강한 권유를 받아서 입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아버지는 오로지 류코쿠대학만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류 치슈는 절을 이을 생각이 없었으며, 대학에 진학할 의지도 없이 매일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이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학비 지원도 중단되었다. 류고쿠대 중퇴 이후에는 토요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 입학한 것은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었고, 교사나 포교사의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대학도 2, 3일밖에 다니지 않았고, 중학교 시절 동창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1925년 2월, 친구의 권유를 받아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의 배우연구소 제1기 연구생에 합격해 입소했다.[3] 후일 류 치슈는 인터뷰에서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후계자 이외라면 어떤 직업이든 좋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일단 구마모토의 본가로 돌아갔지만, 절의 생활은 맞지 않아 다시 상경해 쇼치쿠에 정식 입사했다.[4] 입사 후에는 쇼치쿠 영화의 "큰방 배우(大部屋俳優)[5]"라고 불리며 엑스트라 역이나 단역으로 10년 이상의 긴 무명 생활을 보냈다.[6]
나는 말이 없었다. 구마모토 사투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말수를 적게 만든 원인이었다. 대체로 고향인 구마모토에서는 '남자는 3년에 세 마디'라고 하여 쉽게 말을 꺼내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아버지에게도 '침묵은 금이다. 남자는 쓸데없이 떠들지 마라'고 교육받으며 자랐다. 지금도 남자는 너무 많이 말하지 않는 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내심 믿고 있다.
류 치슈 (배우가 될까 - 내 이력서) #
월급은 고작 25엔이었으며, 말수가 적고 술도 마시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았다.[7] 생활이 어려운 탓에 구마모토로 돌아가 솜을 만드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28년 무성영화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 '젊은이의 꿈'과 '잃어버린 아내'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잃어버린 아내'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으며, 오즈 감독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아 단역으로 자주 캐스팅됐다. 이듬해에는 '학생 로망스 젊은 날'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를 거쳐 1930년 '낙제는 했지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갔다.류 치슈 (배우가 될까 - 내 이력서) #
2.2. 왕성한 활동
동경이야기 (1953년) | 꽁치의 맛 (1962년) |
1925년에 내가 영화계에 입문하고 1927년에 오즈 씨가 감독이 되면서, 나는 무성 영화인 '미인애수'(1931)와 유성 영화인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1937)를 제외한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단역만 맡았고, 1930년 영화 '낙제는 했지만'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후, 나는 그의 전쟁 발발 전 영화 5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만큼 운이 좋았고, 다른 영화에서도 단역으로 몇 장면 출연할 기회를 항상 주었다. 전후에는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중략) 우리는 나이가 같았지만, 함께 여행을 하거나, (그가 매우 좋아하던) 사케를 마셨을 때, 그는 내 친아버지 같았다.
류 치슈 #
1936년에 개봉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대학은 좋은 곳'에 출연해 처음으로 주연급 역할을 맡았고, 같은 해 9월에 개봉한 오즈의 첫 유성 영화 '외아들[8]'에서 주인공의 스승 오쿠보 선생님 역을 맡았다. 이 작품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무명에서 벗어나 유명 배우가 됐고, 오즈 사단의 필수적인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참고로 당시 류 치슈는 32세였는데, 할아버지 역을 맡았다. 영화 제작 당시 오즈가 류 치슈에게 "류씨, 노인 역을 해 본 적이 있나요? 한번 해보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류 치슈 #
'외아들'에서 처음으로 나이든 할아버지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 젊은 나이에 자주 노인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별명이 '일본의 할아버지'였다. 류 치슈는 후일 인터뷰에서 "노인 역할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노인이 되는 방법만으로 하나의 연극이 성립하고, 그 이상으로 특별히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의외로 편한 면도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류 치슈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9]는 '아버지가 있었다(1942)'이다. 이 작품 이후 모든 오즈 야스지로 연출작의 주연이나 조연으로 출연해 오즈의 페르소나적 존재가 됐으며, 하라 세츠코와 함께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얼굴'이라고 불렸다. 크레딧상으로는 25편에 출연했지만, 무명 시절의 논크레딧 출연도 포함하면, 거의 모든 오즈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10] '만춘(1949)', '무네카타 자매들(1950)', '초여름(1951)', '동경이야기(1953)', '동경의 황혼(1957)', '피안화(1958)', '안녕하세요(1959)', '가을햇살(1960)', '꽁치의 맛(1962)' 같은 오즈의 걸작들에 출연해 일본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쇼와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에서 선량하고 인자한 소시민적인 아버지를 자주 연기했다. 대부분의 오즈의 작품에서 담담하고 평온한 인물들을 연기했으며, 온갖 세상만사를 받아들이고 달관한 자애로운 아버지를 매우 잘 표현했다. 이러한 류 치슈의 연기는 오즈의 작품 세계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오즈는 류 치슈에게 너무 감정을 담거나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말고, 여러 번 같은 대사를 반복하게 했다고 한다. 류 치슈는 후일 인터뷰에서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되는 것 같지만, 왜 그것이 선택되었는지는 끝까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 류 치슈는 긴 경력동안 '일본의 아버지상'을 일관되게 연기해 왔다. 그를 상징하는 아버지 캐릭터는 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동경이야기'의 주인공 히라야마 슈키치가 대표적이다. 또 소박하고 인자한 아버지 캐릭터로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전후 쇼와 시대 일본 아버지의 상징이자 국민 아버지의 반열에 올랐다.[11]
신기하게도 대감독님들이 종종 나를 출연시켜 주셨다. 시미즈 히로시, 시마즈 야스지로, 요시무라 코자부로, 기노시타 케이스케, 시부야 미노루, 오바 히데오, 이나가키 히로시, 치바 야스키, 오카모토 키하치, 오즈 야스지로, 야마다 요지… 이 거장들이 그것도 반복적으로 나를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영화의 좋고 나쁨은 결국 책(각본)과 감독으로 결정된다. 뛰어난 감독은 나쁜 책을 잡지 않고 자신이 쓰는 사람들이다. 그런 감독들의 작품에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축복받았다.
류 치슈 (배우가 될까 - 내 이력서) #
긴 커리어 동안 300편이 넘는 영화와 90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한 엄청난 다작 배우였다. 세계적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로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야마다 요지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레귤러 캐릭터 '고젠사마'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기네스북에도 공인 기록으로 인정 받았을 정도로, 쇼와 시대의 일본을 대표하는 장수 인기 시리즈인데, 류 치슈는 전 46편 중 45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이 시리즈에서 주지승으로 등장했는데, 상냥한 할아버지상을 매우 잘 연기해 '국민 할아버지'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12]류 치슈 (배우가 될까 - 내 이력서) #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한 명인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작품에도 상당히 많이 출연했다. 주연 작품은 별로 없지만 조연으로서는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류 치슈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오즈 감독의 작품에 많이 나오는 인상을 주지만, 편수로 따지면 기노시타 작품이 사실 많이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노시타의 대표작인 '24개의 눈동자(1954)'에도 출연했으며, '육군(1944)',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1951)', '바다의 불꽃(1951)' 등에도 출연했다.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기노시타 감독의 특징이기도 한 서정적인 작풍으로 선량한 서민으로 묘사되는 연기를 펼쳤다.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 | 타마유라 (1965년) |
1960년대부터는 TV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했다. NHK 연속 TV 소설 '타마유라(1965)'에 주연을 맡아 처음으로 TV 출연을 했다. 이 작품은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로 각본을 집필한 드라마다. 1967년에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을 수여받았고, 1975년에는 욱일소수장을 수훈했다.
2.3. 말년
파도의 쟁반 (1983년) | 꿈 (1990년) |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 그만둬야 할지, 언제 은퇴해야 할지 요즘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현역'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좋군요. 아주 힘이 나네요. 게다가, 이 일 외에,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류 치슈, 1989년 #
노년이 되어서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1983년에는 닛폰 테레비 스페셜 드라마 '파도의 쟁반'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당시 나이가 79세였다. 이 작품은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문화청 예술제 대상을 수상했다. 1987년에는 83세에 NHK 드라마 '오늘 아침의 가을'에 주연을 맡아 역대 최고령 주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드라마 각본가인 무코다 쿠니코(向田邦子), 쿠라모토 준(倉本聰)[13], 야마다 타이치(山田太一)는 류 치슈를 높게 평가해서, 자신들의 작품에 자주 캐스팅했다.류 치슈, 1989년 #
말년에는 서구권 감독들의 작품에도 종종 출연했는데, 폴 슈레이더 감독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미시마 - 그의 인생(1985)'과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 극영화 '이 세상 끝까지(1991)'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 두 감독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추종자로 유명하다. 1990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꿈'에 노인 역으로 출연했다.
말년까지 평생 현역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다가, 1993년 3월 16일, 오후 2시 13분 향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연예계를 은퇴했던 하라 세츠코가 류 치슈의 장례식을 극비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유작은 1992년 개봉한 '남자는 괴로워 토라지로의 청춘(男はつらいよ 寅次郎の青春)'이다.
류 치슈의 장남 토우루는 주간문춘(1993년 4월 1일)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입원한 이후 여러 번 '지금 키노시타(케이스케) 감독과 토노 에이지로 씨, 미토 미츠코 씨와 함께 아마쿠사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 호출받고 있으니 가야 한다'고 반복하셨습니다. 아마도 '꽃피는 항구'(1943년, 쇼치쿠)의 로케이션을 떠올리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도 또 '가야 한다'고 하시기에, 결국 '감독에게 부탁해서 촬영을 연기해 달라고 하니까 괜찮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3. 출연 작품
평생 3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다작 배우였기 때문에, 밑에 있는 작품들은 그의 모든 출연 작품이 아닌 일부분이다. 류 치슈가 출연한 모든 영화들은 이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필모그래피를 보면 알겠지만 당대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감독들의 작품에 상당히 많이 출연했다.
3.1. 영화
연도 | 제목 | 배역 | 감독 |
1928년 | <colcolor=#000><colbgcolor=#B0E0E6> 젊은이의 꿈 (若人の夢) | 미상 | 오즈 야스지로 |
잃어버린 아내 (女房紛失) | 미상 | ||
1929년 | 학생 로망스 젊은 날 (学生ロマンス 若き日) | 학생 | |
대학은 나왔지만 (大学は出たけれど) | 카페의 손님 | ||
1930년 | 낙제는 했지만[14] (落第はしたけれど) | 큐대생 핫토리 | |
그 날 밤의 아내 (その夜の妻) | 경찰 | ||
1932년 | 태어나기는 했지만 (大人の見る絵本 生れてはみたけれど) | 영사기를 돌리는 부하 | |
청춘의 꿈은 어디에? (青春の夢いまいづこ) | 시마자키 쇼고 | ||
1933년 | 도쿄의 여인 (東京の女) | 기자 | |
비상선의 여자 (非常線の女) | 경관 | ||
지나가는 마음 (出来ごころ) | 배의 손님 | ||
1934년 |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母を恋はずや) | 핫토리 | |
부초이야기 (浮草物語) | 마을 사람 | ||
1935년 | 동경의 잠자리 (東京の宿) | 경관 | |
1936년 | 대학은 멋진 곳 (大学よいとこ) | 아마노 | |
외아들 (一人息子) | 오오쿠보 선생님 | ||
1937년 | 우러러보니 존귀한[15] (仰げば尊し) | 사이토 토지로 | |
바람속의 아이들 (風の中の子供) | 순경 | 시미즈 히로시 | |
인기선수 (花形選手) | 타니 | ||
1939년 | 형과 누이동생 (兄とその妹) | 우츠미 세이자부로 | 시미즈 야스지로 |
오인의 남매 (五人の兄妹) | 장남 켄이치로 | ||
1940년 | 후유키 박사의 가족 (冬木博士の家族) | 사에키 박사 | 오바 히데오 |
1941년 |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戸田家の兄妹) | 쇼지로의 친구 | 오즈 야스지로 |
미카헤리의 탑 (みかへりの塔) | 쿠사마 선생 | 시미즈 히로시 | |
머리 장식핀 (簪) | 노무라 타케시 | ||
사쿠라의 나라 (櫻の國) | 타카시 소이치 | 시부야 미노루[16] | |
1942년 | 아버지가 있었다 (父ありき) | 호리카와 슈헤이 | 오즈 야스지로 |
1943년 | 꽃피는 항구 (花咲く港) | 노 우교쿠 | 기노시타 케이스케 |
1944년 | 육군 (陸軍) | 토모스케 | |
1945년 | 격멸의 노래 (撃滅の歌) | 카와카미 코조 | 사사키 야스시 |
1946년 | 세련된 방랑자 (粋な風来坊) | 야마모토 초고로 | 마키노 마사히로[17] |
1947년 | 셋방살이의 기록 (長屋紳士録) | 타시로 | 오즈 야스지로 |
1948년 | 바람 속의 암탉 (風の中の牝雞) | 사타케 카즈이치로 | |
살아 있는 화상 (生きている画像) | 마츠무라 쿠니토 | 타니시무기 후토시 | |
손을 잡는 아이들 (手をつなぐ子等) | 마츠무라 쿠니토 | 이나가키 히로시 | |
1949년 | 숲의 석송 (森の石松) | 히게마타 | 요시무라 코자부로 |
만춘 (晩春) | 소미야 슈키치 | 오즈 야스지로 | |
1950년 | 무네카타 자매들 (宗方姉妹) | 무네카타 타다치카 | |
1951년 | 초여름 (麦秋) | 코이치 | |
젬마 (善魔) | 토바 료엔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 (カルメン故郷に帰る) | 교장 선생님 | ||
소년기 (少年期) | 아버지 | ||
바다의 불꽃 (海の花火) | 카미야 타로헤이 | ||
우리 집은 즐거워 (我が家は楽し) | 우에무라 코사쿠 | 나카무라 노보루 | |
이노우치 우루와시 (命美わし) | 이무라 소키치 | 오바 히데오 | |
1952년 | 오차즈케의 맛 (お茶漬の味) | 히랴야마 타다시로 | 오즈 야스지로 |
통곡 (慟哭) | 분조 | 사부리 신 | |
파도 (波) | 친구 소노다 | 나카무로 노보루 | |
청춘의 자식 (息子の青春) | 우에무로 야스조 | 고바야시 마사키 | |
1953년 | 동경이야기 (東京物語) | 히랴야마 슈키치 | 오즈 야스지로 |
연애편지 (恋文) | 다나카 기누요 | ||
너의 이름은[18] (君の名は) | 카네다 슈조 | 오바 히데오 | |
두더지 골목 (もぐら横丁) | 슈코우간 주인 | 시미즈 히로시 | |
1954년 |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 요리사 | 시마 코지 |
24개의 눈동자 (二十四の瞳) | 남선생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청춘 로맨스 시트 푸른 풀밭에 앉다 (青春ロマンスシート 青草に坐す) | 신조 케이사쿠 | 노무라 요시타로 | |
1955년 | 달이 떠오른다[19] (月は上りぬ) | 아사이 모키치 | 다나카 기누요 |
살아 있는 모든 것 (生きとし生けるもの) | 엔도 노인 | 니시카와 카츠미 | |
불멸의 십구 (不滅の熱球) | 후지모토 사다요시 | 스즈키 히데오 | |
마이 퍼스트 러브 어페어 (野菊の如き君なりき) | 노인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1956년 | 조춘 (早春) | 오노다 키이치 | 오즈 야스지로 |
폭풍 (嵐) | 미즈사와 노부지 | 이나가키 히로시 | |
순애 (殉愛) | 아키타 에이조 | 스즈키 히데오 | |
1957년 |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 스기야마 슈키치 | 오즈 야스지로 |
구름의 묘표보다 하늘에 가면 (雲の墓標より 空ゆかば) | 요시노 코에몬 | 호리우치 마나오 | |
얼굴 (顔) | 하세가와 형사 | 오노에 타츠오 | |
1958년 | 피안화 (彼岸花) | 미카미 슈키치 | 오즈 야스지로 |
무호마츠의 일생 (無法松の一生) | 유우키 쥬조 | 이나가키 히로시 | |
이터널 레인보우 (この天の虹) | 카게야마 나오지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1959년 | 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하야시 케이타로 | 오즈 야스지로 |
부초 (浮草) | 아이자노의 남편 | ||
폭설 (風花) | 야키치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석춘조 (惜春鳥) | 코조의 아버지 겐이치로 | ||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 (私は貝になりたい) | 코미야 | 하시모토 시노부 | |
1960년 | 가을햇살 (秋日和) | 미와 슈키치 | 오즈 야스지로 |
봄의 꿈 (春の夢) | 아츠미 신이치로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방황하는 왕비 (流転の王妃) | 키노시타 카에키 | 다나카 기누요 | |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悪い奴ほどよく眠る) | 노나카 | 구로사와 아키라 | |
대보살 고개 (大菩薩峠) | 츠쿠에 단조 | 미즈미 켄지[20] | |
딸 아내 어머니 (娘・妻・母) | 공원의 노인 | 나루세 미키오 | |
1961년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小早川家の秋) | 농부 | 오즈 야스지로 |
인간의 조건 제5, 6부 (人間の條件 第5・6部) | 피난민 장로 | 고바야시 마사키 | |
호인호일 (好人好日) | 오제키 토오루 | 시부야 미노루 | |
세계대전쟁 (世界大戦争) | 에바라 | 마츠바야시 슈에 | |
1962년 | 꽁치의 맛[21] (秋刀魚の味) | 히라야마 슈헤이 | 오즈 야스지로 |
여자의 자리 (女の座) | 이시카와 킨지로 | 나루세 미키오 | |
오긴 (お吟さま) | 미나미보 무네히로 | 다나카 기누요 | |
1963년 | 단게 사잔 (丹下左膳) | 구가쿠 | 우치카와 세이이치로 |
1964년 | 먼로같은 여자 (モンローのような女) | 겐시로 | 시부야 미노루 |
꿈의 하와이에서 봉오도리 (夢のハワイで盆踊り) | 토야마 고조 | 타카모리 류이치 | |
1965년 | 무와 당근[22] (大根と人参) | 야마키 히가시요시 | 시부야 미노루 |
붉은 수염 (赤ひげ) | 노보루의 아버지 | 구로사와 아키라 | |
1966년 | 표류 (暖流) | 시마 야스히데 | 시부야 미노루 |
1967년 | 청춘의 바다 (青春の海) | 야마자키 겐지 | 니시무라 쇼고로 |
로컬 라인 러브 (喜劇団体列車) | 히다카 토모조 | 세가와 마사하루 | |
일본의 가장 긴 하루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 스즈키 간타로 | 오카모토 키하치 | |
1968년 | 육탄 (肉弾) | 헌책방의 할아버지 | |
폭풍우를 만나다 (嵐に立つ) | 오오키 코사쿠 | 하세 카즈오 | |
1969년 ~ 1992년 |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23] (男はつらいよシリーズ) | 고젠사마 | 야마다 요지 |
1970년 | 가족 (家族) | 카자미 겐조 | |
1971년 | 사내대장부 골목대장 (男一匹ガキ大将) | 해운사의 스님 | 무라노 테츠타로 |
1972년 | 고향 (故郷) | 이시자키 센조 | 야마다 요지 |
1973년 | 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蔵) | 타쿠앙 소호 | 카토 타이 |
1974년 | 모래그릇 (砂の器) | 키리하라 코쥬로 | 노무라 요시타로 |
1975년 | 구형의 황야 (球形の荒野) | 후쿠류지 주지스님 | 사나다가 마사히사 |
1978년 | 성직자의 비 (聖職の碑) | 카타기리 후쿠타로 | 모리타니 시로 |
1982년 | 해협 (海峡) | 아쿠츠 사이츠구 | |
1984년 | 장례식 (お葬式) | 주지 | 이타미 주조 |
1985년 | 도쿄가[24] (Tokyo-Ga) | 다큐멘터리 | 빔 벤더스 |
소레카라 (それから) | 나가이 사토시 | 모리타 요시미츠 | |
미시마 - 그의 인생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 주지 | 폴 슈레이더 | |
1986년 | 키네마 천지 (キネマの天地) | 코사토모 씨 | 야마다 요지 |
국사무쌍 (国士無双) | 선인 | 호사카 노부히코 | |
1988년 | 마루사의 여자 2 (マルサの女2) | 전직 승려 | 이타미 주조 |
1990년 | 꿈 (夢) | 노인 | 구로사와 아키라 |
1991년 | 이 세상 끝까지 (Bis ans Ende der Welt) | 모리 노인 | 빔 벤더스 |
1992년 | 반짝 이끼 (ひかりごけ) | 재판장 | 쿠마이 케이 |
3.2. 드라마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역 |
1965년 | <colbgcolor=#B0E0E6><colcolor=#000> 연속 TV 소설 타마유라 (たまゆら) | 나오키 요시히코 | |
1969년 | 고독의 메스 (孤独のメス) | 하마 | |
1970년 | 사나이는 배짱 (男は度胸) | 카노 마사노 | |
1971년 | 초밥집 켄짱 (すし屋のケンちゃん) | 할아버지 | |
1972년 | 나는 사나이다! (おれは男だ!) | 코바야시 겐노스케 | |
1973년 | 이거! 사나이다 (おこれ!男だ) | 키리노 겐지로 | |
1975년 | 마쓰모토 세이초 시리즈 먼 접근 (松本清張シリーズ・遠い接近) | 야마오 노부하루의 아버지 | |
1976년 | 연속 TV 소설 불의 나라에 (火の国に) | 조경주 요시노 코헤이 | |
1978년 | 부랑운 (浮浪雲) | 시부사와 노인 | |
1979년 | 연선지도 (沿線地図) | 마츠모토 킨조 | |
1980년 | 행복 (幸福) | 쿠라타 유조 | |
대하드라마 사자의 시대 (獅子の時代) | 노승 | ||
1981년 | 세키가하라 (関ヶ原) | 쿠니모토 슈사이 | |
1982년 | 나가라에바 (ながらえば) | 류키치 | |
1983년 | 파도의 쟁반 (波の盆) | 야마나미 코사쿠 | |
북쪽 고향에서 '83 겨울 (北の国から'83冬) | 사와다 마츠키치 | ||
1985년 | 겨울맞이 채비 (冬構え) | 오카다 케이사쿠 | |
1986년 | 신부 인형은 잠들지 않는다 (花嫁人形は眠らない) | 젠키치 | |
1987년 | 오늘 아침의 가을 (今朝の秋) | 코조 |
4. 수상
<rowcolor=#FFFFFF> 날짜 | 시상식명 | 수상 부문 | 작품 |
1948년 | |||
2월 | 제3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남우연기상 | 손을 잡는 아이들 |
1951년 | |||
2월 | 제6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남우연기상 | 이노우치 우루와시 바다의 불꽃 |
2월 | 제2회 블루리본상 | 남우조연상 | 이노우치 우루와시 우리 집은 즐거워 |
1967년 | |||
미상 | 1967년 서훈 | 자수포장 | 없음[A] |
1970년 | |||
2월 | 제25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남우조연상 | 가족 |
1975년 | |||
미상 | 1975년 서훈 | 훈사등 욱일소수장 | 없음[A] |
1985년 | |||
미상 | NHK 컵 | 방송문화상 | 없음[A] |
1987년 | |||
미상 | 일본문학진흥회 주최 | 키쿠치 칸상 | 없음[A] |
제11회 야마지 후미코 영화상 | 영화공로상 | 없음[A] | |
1988년 | |||
미상 | 도쿄도청 주최 | 도쿄도 문화상 | 없음[A] |
텐스이초 주최 | 텐스이초 명예읍민 | 없음[A] | |
1990년 | |||
2월 | 제41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특별상 | 없음[A] |
미상 | 공익재단법인 카와키타 기념영화문화재단 주최 | 카와키타상[33] | 없음[A] |
구마모토현청 주최 | 구마모토현 근대 문화 공로자 | 없음[A] | |
1994년 | |||
2월 | 엘란도르상 | 특별상 | 없음[A] |
3월 17일 | 제17회 일본 아카데미상 | 회장특별상 | 없음[A] |
5. 여담
오즈 야스지로(뒤에 있는 인물)와 류 치슈 |
류 치슈 "촬영 전에 전원이 모여서, 대사 연습을 하는 거예요. 각본에 높낮이를 써서 음표처럼 외우는 거죠.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OK가 되지 않으니까, 이제 필사적으로 외웠죠(웃음). (중략) (오즈가) 배우를 도구로만 본 것은 아니군요. 설명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 대사나 움직임이 무엇 때문에 있는지, 이쪽은 모릅니다(웃음).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즈구미(오즈 사단)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가 말이죠, "선생님, 여기는 어떤 기분인가요?"라고 물으면, "기분 없음"이라고 말하셨죠(웃음)" #
"오즈 영화에서는 '생각하는 머리'가 아니라 '이해하는 머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연출을 가급적 이해하고 그대로 연기하는 것이 작품에 기여하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나름대로의 해석이나 표현은 방해가 됩니다." #
"오즈 영화에서는 '생각하는 머리'가 아니라 '이해하는 머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연출을 가급적 이해하고 그대로 연기하는 것이 작품에 기여하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나름대로의 해석이나 표현은 방해가 됩니다." #
-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의 구도를 굉장히 중요시 했다. 대표적인 일화로 1947년 '셋방살이의 기록' 촬영 당시, 오즈는 머리가 움직이면서 구도가 무너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머리의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 연기하도록 류 치슈에게 지시했다. 그래서 류 치슈가 오즈에게 "그러면 좀 부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라고 항의하자, 오즈는 "네 연기보다 영화의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 좌우명은 "춘풍여재(春風如在)"이다. 또 "남자는 말하지 마라. 울지 마라. 흰 이빨은 일생 동안 세 번정도 보여주면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 그래서 커리어 내내 우는 연기는 거부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태생의 남자가 우는 일은 거의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즈 야스지로가 딱 한 번 류 치슈에게 만춘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게 울부짖는 연기를 주문했는데, 이때만큼은 류 치슈도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오즈의 연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 애처가로 유명했다. 매번 '나는 마누라의 말을 듣고 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년에 반려자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심적 스트레스가 발생하기도 했다. 2개월 후 류 치슈는 암이 발병했고, 의사가 권하는 수술도 '나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이윽고 그대로 조용히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
일본 최초 국산컬러필름 영화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에 출연한 류 치슈 |
- 쇼치쿠 전속배우였으나 후일 쇼치쿠를 사직하고 프리로 일한 배우이다. 그러나 주연 비중이 아닌 배우였음으로 쇼치쿠가 아닌 타사 영화사 출연시에도 불이익은 그다지 없었으며 업계에서도 적이 없었기에 따르고 존경하는 후배들도 일본 영화계에 많은 편이다. 후배 영화인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고. 재능있는 영화 후배인들이 당시에 일본 영화계의 병폐였던 5사 협정(五社協定)[39]때문에 피해라도 입은 사례가 있으면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사석에서 5사 협정의 불합리함에 대해 유독 격정적으로 비판을 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한다. 평소 온화한 성품에 그런 강직한 비판을 하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 전후 오즈 야스지로가 연출한 모든 작품의 촬영 감독을 맡은 아츠타 유하루(厚田雄春)는 류 치슈에 대해 "스태프에게는 조명 담당이 없기 때문에, 로케이션에서 큰 레프를 메는 것은 항상 조수입니다. 그럴 때 도와준 것이 류 치슈씨입니다. 오즈구미(오즈 사단)의 촬영이라고 하면 수당 생각 없이 따라와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신혼 시절의 류 치슈 부부 |
- 완강하게 구마모토 사투리(구마모토벤)를 고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주연 제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투리는 류 치슈를 상징하는 소박하고 겸허한 캐릭터를 나타내는 일부가 됐다. 실제로도 성실한 사람이었고, 오즈 영화의 등장하는 아버지 캐릭터가 자신 그 자체였다고한다. #
- 친한 배우로는 히모리 신이치(日守新一), 카와무라 레이키치(河村黎吉)가 있다. 연 1회 페이스로 3명이서 하코네의 여관에 묵었다.
- 2015년 가와가나현에서 '류 치슈 사진회고전'이 열렸다. #
오즈 야스지로를 존경한 빔 벤더스가 오즈에게 헌정한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에 인터뷰 출연을 했다. 이 작품에서 빔 벤더스가 배우로서의 류 치슈의 존재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주연 작품을 하루에 두 편 본 어느 날을 내레이션과 함께 "한 배우에게 그날만큼 존경심을 품은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 다큐에서 류 치슈는 오즈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 국내에서는 '류 지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류 치슈가 올바른 표기다.
- 류 치슈를 인터뷰 한 적이 있는 일본의 편집자 아라이 토시키는 "부드럽고 자연체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배우의 정수란'이라고 물어도 '호호호' 하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죠."라고 말했다. #
-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감독 스오 마사유키는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아 있는 배우로서 류 치슈를 꼽았다. 스오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나이가 들면 류 치슈 같은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2023년 6월부터 7월까지 교토 문화 박물관 필름 시어터에서 '사후 30년 영화배우 류 치슈 특집'이 열려 그의 대표작들을 상영했다. #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일본 영화, 연극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배우.[2] 발언 전문[3] 나중에 류 치슈는 인터뷰에서 대학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선발위원들에게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4] 아버지가 사망해서 귀향해 잠깐 주지직을 이었다. 다음 해 1월 형에게 주지 자리를 양보했다.[5] 무명 배우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6] 당시 대학생부터 연극청년, 경관, 형사, 권투선수, 영화 스카우트맨 등 여러가지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악역도 맡았다.[7] 말이 없어서 선배들이 류 치슈에게 시미즈 히로시 감독과 이야기해보라고 조언했다. 류는 시미즈 감독에게 "날씨가 좋네요"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야. 바빠죽겠는데"라고 혼났다고 한다.[8] 후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대표작 동경이야기(1957) 등에서 볼 수 있는 "부모와 자식"을 그리는 테마의 원점이 되는 작품.[9] 커리어 첫 주연작은 1937년 개봉한 '우러러 보니 존귀한'이다.[10] 류 치슈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다.[11] 오즈의 페르소나 중 한 명인 하라 세츠코는 착한 딸/며느리 이미지로 유명했다.[12] 그가 사망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인터뷰에서 이웃집 할아버지가 사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해준 시리즈다.[13] 대표작 북쪽 고향에서.[14] 첫 번째로 크레딧을 받은 영화[15] 첫 주연작[16] 오즈 야스지로의 제자다.[17] 18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쇼와 시대 일본 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이 됐다.[18] 2부, 3부에도 출연했다.[19] 오즈 야스지로가 각본에 참여한 영화[20] 아들을 동반한 검객 시리즈로 유명하다.[21]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이다.[22] 오즈 야스지로 사후 기념 영화[23] 한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의 출연.[24] 오즈 야스지로를 경애하는 빔 벤더스가 오즈에게 헌정한 다큐멘터리 영화[A] 류 치슈 개인에게 수여한 상들이다.[A] [A] [A] [A] [A] [A] [A] [33] 예술 문화의 발전에 엄청난 공적을 남긴 개인·단체에 대해 수여하는 공로상.[A] [A] [A] [A] [38] 오즈 야스지로 170cm, 류 치슈 171cm[39] 당시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형 영화사들인 쇼치쿠,도호,신도호,다이에이,토에이가 1953년도에 맺은 협정이다. 말이 신사협정이지 이건 마피아 혹은 조직폭력조직이나 할법한 카르텔 협정이고 엄연히 시장교란,조작행위이다. 더군다나 이 협정이라는 게 5개 영화사 사장들이 모여서 각서같은 기록으로 남긴 것도 아닌 구두로 맺은 협정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에 TV가 도입되고 영화시장이 급속도로 쇠락해져가는 상황에 위의 5개 대형 영화사들도 배우들을 묶어두는 영화사 전속계약에 힘을 못쓰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사 전속제도에 기반한 스타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이후 5사 협정을 주도했던 다이에이 영화사가 1971년 부도처리되고 소멸하자 이 5사 합의 역시 같은해에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