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20:41:59

다카미네 히데코

<colbgcolor=#9b9b9b><colcolor=#ffffff> 다카미네 히데코
[ruby(高峰, ruby= たかみね)] [ruby(秀子, ruby=ひでこ)] | Hideko Takamine
파일:apiajlkz4__22557.jpg
본명 마츠야마 히데코 ([ruby(松山, ruby=まつやま)] [ruby(秀子, ruby=ひでこ)])
출생 1924년 3월 27일
일본 제국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現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사망 2010년 12월 28일 (향년 86세)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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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배우
신체 158cm
활동 기간 1929년 – 2010년
부모 아버지 히라야마 니시키(平山 錦司)
어머니 히라야마 이소(平山 イソ)

1. 개요2. 생애
2.1. 아역부터 열도의 아이돌이 되기까지2.2. 10인의 깃발모임 대표 시절2.3. 일본 역사상 첫 프리선언으로 성공한 여배우2.4. 결혼2.5. 은퇴까지의 작품활동2.6. 은퇴 이후 사망까지
3. 출연작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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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배우.

데뷔 이후 1979년 배우 은퇴까지 약 50년 간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로 다나카 기누요, 하라 세츠코와 같이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

활동 당시 일본 영화사의 여제(女帝)라 불리었으며, 모던하고 세련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를 기반으로 당대 일본 거장 감독들인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도요타 시로, 이나가키 히로시,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작품들에 주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5세의 나이로 쇼치쿠 영화사 전속 아역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하는데, 당시 노래, 연기, 춤 3가지가 다 되는 천재 아역 배우, 일본의 '셜리 템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 여배우로 거듭나기까지 이렇다 할 침체기가 없어 당시 일본 영화계에 "아역출신 치고 대 명배우 되는 경우 없다"라는 징크스를 시원하게 깨어버린 대표적인 케이스에 첫번째로 꼽힌다.

연기력도 인정받았으며 "히데코가 100편의 영화를 출연했다면 100명의 여주인공, 100명의 히데코가 있을 뿐이다"[1]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일본영화계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영화로 인생에 데뷔해서 영화로 인생을 은퇴했다"라는 찬사와 평가 그리고 존경을 보여주고 있다.

2. 생애

2.1. 아역부터 열도의 아이돌이 되기까지

1929년 5세의 나이로 쇼치쿠 영화사의 아역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일화가 유명한데 세들어 살던 집주인의 친구인 노데라 쇼이치(野寺正一, 1886-1939)는 쇼치쿠 카마타 스튜디오 소속 배우였는데, 우연히 스튜디오 견학을 간 그날이 마침 노무라 호테이(野村芳亭, 1880-1934) 감독의 작품 <어머니>에 출연할 아역을 선발하는 오디션 날이었다. 5살의 히데코는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길다란 오디션 대기 줄의 마지막에 서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노무라 감독은 히데코를 선택하고 주인공인 카와다 요시코(川田芳子, 1895-1970)의 딸 역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 영화는 2달여 동안 대히트를 치며 흥행에 성공. 이때부터 히데코는 노래, 춤, 연기 삼박자가 다 맞는 천재 아역 배우라는 평가를 받으며 쇼치쿠에서 입지를 다진다.

히데코가 13살이 되는 1937년에는 쇼치쿠의 주역 아이돌로서 아역에서 청소년 연기자로 성공적인 입지전환도 이루어낸다. 이때 쇼치쿠는 스튜디오를 카마타에서 오후나로 이전, 대변환의 시기를 겪으면서 질적, 양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스튜디오 이전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이 컸던듯 일부 주력 배우들의 월급지급이 조금씩 밀리기도 해서 소속 배우들과 직원들의 불만이 조금씩 늘어갔다.

히데코는 집안의 모든 수입이 자신에게 달려있던 터라 이런 외부의 변화가 불안하게 느껴졌고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영화 배우에 대한 회의와 부담감 역시 커져가고 있었다. 이에 변화를 모색하던 중 당시 새로 출범한 영화사 PCL[2]로의 이적을 결심하고 1937년 쇼치쿠 퇴사를 발표한다. 당시 PCL로의 이적 조건은 월급 100엔과 도쿄에 주택 제공, 그리고 히데코가 원하는 모든 여학교에 보내준다고 하는 것이었다.[3]

히데코가 PCL로 이적한 1937년, PCL은 도호와 합병해 정식으로 도호 영화사가 출범한다. 도호의 시작과 함께 히데코는 쇼치쿠에서의 인기와 명성을 넘어 본격적인 청춘 스타로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1939년에만 도호에서 주연배우로서 9개의 작품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운다. 히데코의 이름을 딴 <응원단장 히데코>(1940), <차장 히데코>(1941년) 시리즈로 인기몰이를 하는데 <차장 히데코>는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의 오랜 파트너가 되는 나루세 미키오의 감독작이자 히데코가 나루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1941년 구로사와 아키라의 스승인 야마모토 카지로 감독 제작의[4] <말>에서의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이때 구로사와 아키라와 잠시 교제했는데, 이 사실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1975년 아사히 신문에 <나의 직업 일기>라는 연재수필을 발표할 때 알려졌다. 당시 둘의 연애가 딱히 길게 가진 않았던 듯. 히데코도 이때의 교제가 그녀의 인생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는 투로 표현했기 때문에 당시의 반응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후로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 패망 이전, 전시체제 일본에서 개봉된 마지막 영화라는 <북쪽의 세 사람 (北の三人)>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패전이 명백해진 일본 내에서 전쟁 의식 고취와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로 기획 제작되었다. 본토 결전을 염두에 둔 일본의 광기가 사회 전반을 몰아칠 때 나온 셈. 내용은 일본 북쪽의 서로 다른 3개의 항공 기지에서 통신을 담당하는 여성 통신사 3인의 활약을 그린 국뽕 영화로 하라 세츠코, 야마네 히사코와 함께 출연했다. 이 3인은 당대 인기 절정의 여배우들이었지만 같은 도호 소속에, 프로파간다 영화였기에 동시 출연이 가능했다고 한다. 촬영장에서의 분위기도 훈훈했던듯.

이후 일본 육군 특공대원의 무용담을 담은 프로파간다 영화의 촬영을 위해 치바현에 체류하면서 촬영 중간중간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했다. 1945년 8월 15일 히데코는 스자키 항공기지에서의 위문공연을 마치고 난 후 천왕의 옥음방송을 접했다. 그녀의 나이 20살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촬영 중이던 영화 역시 즉시 촬영이 중단되었다.

2.2. 10인의 깃발모임 대표 시절

이 시절을 설명하자면 빠질 수 없는게 도호 영화사 노동조합 파업사건인데 이 사건은 아직까지 일본 노동조합 파업 역사상 최대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된다. 히데코는 일본 패전 이후 8개월만에 <명랑한 여자 (陽気な女)>의 주연으로 영화에 복귀하는데 이때는 도호 영화사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일본 영화계를 넘어 일본 노동계가 시끌벅적한 시기였다.

당시 도호 영화사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5600여명이었으며 이정도 규모의 노조라면 당시 일본의 어떤 노동조합 규모와 견주어 보더라도 대단한 세력이었다.[5]

1946년 3월 1차 파업은 노사측이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지만 10월의 2차 파업부터는 여파가 심상찮게 몰려들었다. 노조의 다양한 요구로 인해 사측이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도호의 모든 영화촬영현장이 올스톱되었으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영화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현장이 엉망인 상태로 멈춰서니 도호소속 연기자들의 불안감은 가중되었으며, 평소 도호에 불만이 큰 배우들도 이번 기회에 이적이나 독립을 모색해 보는 등 도호영화사 내부는 혼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1946년 11월, "파업에는 반대하지만 도호 사측에도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폭탄선언을 한 도호의 간판 배우 오코치 덴지로의 성명을 필두로 다카미네 히데코, 하라 세츠코, 야마네 히사코, 하세가와 카즈오, 이리에 타카코, 야마다 이스즈 등 도호소속 10명의 배우들이 도호영화사와의 계약해지 및 독립선언을 하여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지는 결정을 내린다. 이 10명의 배우들은 비단 도호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체 연예계에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탑 배우들이라 파장은 엄청났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이 10명의 배우들을 '10인의 깃발모임'이라고 이름붙였는데 일부 배우들은 이 작명에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는 후문도 있다.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이 10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인기나 인지도를 봐도 대표격이었다.[6]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파업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불만이 쌓여가던 중이었지만 도호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쁠 게 없었다고 한다. 그런 히데코가 도호를 나올 생각을 한 이유는 영화 <파계 (破戒)>의 출연무산이 결정적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파계는 일본의 대문호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1945년 도호가 판권을 구입하고 감독을 아베 유타카로 선정했다. 주연은 다카미네 히데코로 이미 캐스팅이 결정된 상태였으나 초기 촬영에 들어간 상태에서 파업의 여파로 촬영이 중단된 것. 히데코는 이 영화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이었는데 캐스팅이 엎어지는 것도 아닌 제작 자체가 중단되고 파업으로 도저히 영화제작이 계속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호영화사가 이 영화제작의 권리를 중간에 쇼치쿠에게 넘겨 버려 다카미네 히데코는 더욱 더 도호영화사 사측의 처사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영화제작권리를 영화사끼리 거래하는 것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제작 중인 영화, 그것도 주연 캐스팅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된 영화를 중간에 다른 영화사에게 팔아버린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쇼치쿠로 넘어간 영화 <파계>는 배우들이 전면 교체되고 대본도 수정되어 제작 완성되었는데 이 영화에서 다카미네 히데코가 맡을 예정이었던 역을 신인 여배우 가츠라기 요코가 맡아 눈부신 연기를 펼치며 일약 대스타로 등극하게 되며 다카미네 히데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감독은 기노시타 케이스케에게 주어졌는데 기노시타도 난처했다고 하지만 다카미네 히데코 입장에서는 더욱 더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7]

도호와의 계약해지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10인의 깃발모임의 수장격이 되어 도호에 대항하는 반란군의 수괴(?)같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히데코를 비롯한 이들 10명은 다른 도호 탈퇴자들을 규합해 신도호(新東宝) 영화제작소[8]를 창립하고 회사의 초대 전속배우로 이름을 올렸다.[9] 처음 신도호에서의 히데코의 행보는 순풍을 타는 듯 했으나 이후 하라 세츠코를 비롯한 10명의 깃발모임 소속 배우들이 잇달아 신도호를 이탈해 프리를 선언하거나 쇼치쿠, 토에이로 이적을 하면서, 신도호도 위기를 맞게 되지만 다카미네 히데코만은 계속 신도호를 지키며 활동을 계속하다 인생 최대의 스캔들을 맞으며 신도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도호를 탈퇴하던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를 위한 공식 팬클럽 같은 '공식 후원회'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일본 연예계에서는 당시 팬클럽이 정식단체 신고까지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정도로 다카미네 히데코의 인기와 이 단체의 규모가 대단했던지 월간지까지 발행하며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월간지 이름은 히데코의 이름에서 따온 'DECO'. 사단은 1950년 당시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오던 연인이 신도호 회사의 임원(당시 신호도의 이사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이 원인으로 이 인물은 공식 후원회의 공금을 유용하고 이것도 모자라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게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히데코는 충격을 받고 신도호와의 계약해지 및 프리선언을 한다. 이 모든 수많은 일들이 단 5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2.3. 일본 역사상 첫 프리선언으로 성공한 여배우

1950년, 도호 및 신도호와의 결별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프리선언을 통해 당시로는 전례없는 소속사 없는 여배우로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5사 협정(五社協定)[10]에 의거해 각 영화사들이 소속 배우들을 임의로 빼가거나 타사의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키는 신사협정이 맺어져 있었다. 이같은 체제에서는 어느 영화사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 배우들이 활동하기엔 제약이 매우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후 활동을 모색하던 중 다카미네 히데코는 1951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의 첫번째 작품이자 일본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에 원톱 여배우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일본 최초의 장편 '국산 컬러 필름영화'이자 히데코가 쇼치쿠를 떠난 이후 14년만에 쇼치쿠 영화사 작품에 출연한 영화가 되었다. 사실 쇼치쿠도호영화사와 동종 업계에서 먹고 사는 회사인지라 히데코의 캐스팅을 달갑지 않게 여겼겠지만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강력한 뜻을 꺾진 못한 듯하다.[11]

같은 해 히데코는 연인과의 스캔들로 인한 여론의 비판, 프리선언이후 불안정한 입지에 맘고생을 하다[12]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로 컴백하며 해당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 출품을 기회로 참석차 프랑스에 출국한 이후 아예 유학을 결정하고 6개월간 파리에서 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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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눈동자 촬영현장에서 히데코
이 6개월의 해외체류 이후에 히데코는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그녀의 영화배우 인생 최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때의 활약상은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작품들로 대표되는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함께한 17편의 장편영화,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의 12편 작품들은 그녀의 연기인생중에서도 가장 평가와 주목을 받는 영화들이며 나루세, 기노시타 감독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54년 기노시타 감독의 <24개의 눈동자>, <여자의 정원>으로 히데코는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자주연상, 블루리본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로 상을 휩쓸며 그녀의 최대 커리어 정점을 찍었고, 다음해인 1955년에는 나루세 감독의 대표작 <부운>으로 역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자주연상, 블루리본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를 받아 2년 연속 스윕을 지켰다. 괜히 이때를 다카미네 히데코의 최전성의 시기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부운은 동남아시아 영화제에 출품되어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해외에서 이름을 알렸고 24개의 눈동자는 미국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clearfix]

2.4. 결혼

1955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오랜 조감독으로 일해온 마츠야마 젠조와 약혼을 발표하고 한달 뒤 결혼식을 올린다. 이 당시도 유명한 일화로 남는 것이 결혼발표 공식 기자회견. 오늘날 일본에서 연예인 결혼발표 기자회견은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 일본 연예계에서 약혼, 결혼발표는 언론의 폭로성 기사나 가십거리로 취급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연히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결혼 소식이 신문에 날 예정인지도 모르고 당일날 신문을 보고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론의 이런 폭로기사 같은 걸로 뒤통수를 맞는 것이 부당하게 여겨졌지만 일본 언론의 관행처럼 굳어진 터라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런 당시의 풍조를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터라, 가까운 동료였던 마츠야마 젠조와 다카미네 히데코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던[13] 기노시타 감독은 아예 당시의 유력 신문사 편집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기자회견을 통보한 후 도쿄의 유명 대형 호텔로 두사람을 데려다 기자화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기노시타 감독은 마츠야마 젠조 감독과 다카미네 히데코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취재에 응하게 하고 이날 말고는 일절 언론 취재에 응하지 않도록 막후 조정을 주도했다고. 자연스럽게 결혼은 신문 연예면에 정식 기사로 보도되고 가십성으로 다루어지지 않게 되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연예인 결혼발표 기자회견의 효시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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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없지만 가난하고 아름답게(1961/도호배급)
당시 언론에서는 워낙에 언론을 기피하는 기노시타 케이스케인데다 뜬금없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하는 이야기가 마츠야먀와 히데코의 결혼발표인게 엉뚱하기까지 해서 "정말로 기노시타 감독이 전화를 했나?", "정말 히데코가 결혼을 한대?"라고 난리법석을 떨며 취재시도를 했었다고.

결혼식 이후 마츠야마 젠조와 다카미네의 결혼생활은 굴곡없이 평온했다. 나루세 감독,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에도 부지런히 출연했으며 남편이 1961년 처음 메가폰을 잡고 감독데뷔를 한 영화 "이름도 없지만 가난하고 아름답게/名もなく貧しく美しく"에 주연 원탑 여배우로 출연했다. 이 작품은 일본 영화상 처음으로 장애인(청각장애)이 주연으로 설정된 영화인데,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며 겪게 되는 삶의 애환을 다룬 전형적인 최루영화. 다카미네 히데코는 모든 대사를 수화로 표현했으며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신들린 연기로 표현했다고. 평단의 주목과 흥행도 성공하여 이 영화로 또다시 4번째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우주연상, 제5회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남편의 첫 감독데뷔를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2.5. 은퇴까지의 작품활동

남편 마츠야마 젠조 감독의 영화작품에는 열성적으로 참가했으며 제작부장이나 대본 닥터 등으로도 참여하며 부부의 금슬을 과시했다. 그러나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쇼치쿠와의 불화를 이유로 쇼치쿠를 떠나 TV드라마 제작에 뛰어들고, 기노시타를 따라 남편인 마츠야마 젠조 감독도 TV드라마 제작에 참여할때 히데코는 TV쪽으로 활동을 하는 것을 꺼렸다. 오죽하면 남편이 제작한 TV드라마에 출연한 게 도시바 일요극장 2편뿐이라서 남편인 마츠야마 감독이 평생 서운해 했었다는 이야길 할 정도로 TV와는 거리를 두며 영화배우로서의 프라이드를 지켰다. 결혼 이후 1979년 은퇴까지 40여편의 장편영화에 출연했으며 이런 출연빈도는 당시의 다른 젊은 여배우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의 다작활동이었다.

1979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사회고발영화인 <충동살인 아들아 (衝動殺人 息子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한 후 은퇴를 발표했다. 원래 해당 배역은 야치구사 가오루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일정상 하차하고 기노시타 감독이 캐스팅에 난항을 겪자, 히데코에게 출연을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가 대타 출연을 부탁받고도 흔쾌히 기노시타 감독의 요청에 응할 정도로 기노시타 감독과 가까움을 인증했다.

2.6. 은퇴 이후 사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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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일기(わたしの渡世日記)
신조문고 출판, 상하권, 2011
은퇴발표 이후에도 남편인 마츠야마 감독의 작품에 조감독으로 참가한다던가, TV드라마 각본을 쓰기도 했다. 2003년에는 영화의 성우로도 참여했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정은 숨기지 않았다.

1975년부터 주간아사히지에 <나의 직업 일기(わたしの渡世日記)>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정기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영화계 입문부터 당시 현재까지의 그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회상하는 식으로 에세이를 써냈는데 당시 영화계 관계자들의 이름이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히데코의 젊은 시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의 짧은 교제 시절까지 모두 등장하는지라 주간아사히 판매부수가 엣이 연재기간 동안 급속도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에세이 공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정말로 다카미네 히데코가 쓰는 에세이인지 진위를 묻는 문의가 빗발쳐 편집장이 직접 글을 주간지에 올려서 "대필작가를 쓴다면 이런 개성있는 문체가 나오지 않는다." 라며 대필의혹을 단칼에 부인했다고. 이후 단행본으로도 상, 하권에 걸쳐 출판되었다.

1955년 결혼 이후로 한번도 이사하지 않고 한 곳에서만 살았다. 말년에는 기력이 다해 병원 주변의 저택을 알아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듣지 않고 남편과 함께 계속해서 신혼집으로 장만한 집에서 지냈다고. 원래도 집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서 집을 관리하는 게 어려워지자 이사가 아니라 아예 집을 작은 규모로 재건축해서 살 정도로 신혼집 터를 고집했다고 한다.

2010년 12월 28일 폐암으로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는 병원에서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3. 출연작



긴자의 캉캉무스메 (1949). 전후를 대표하는 동명의 히트곡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1950). 자신이 예술가라고 착각하는 동시에 나름대로 도쿄에서 돈을 많이 벌어 고향 시골 마을로 금의환향한 스트리퍼 '카르멘' 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영화는 일본 최초의 컬러 필름 영화

일본의 국민영화라고 불리는 24개의 눈동자 (1954). 작은 섬마을의 소학교 여교사로써 20여년간 제국주의 일본과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잘 보여주는 영화. 최루영화의 대표. 나루세 미키오와의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기노시타 케이스케와의 영화인 이 두 가지 영화가 사실 그녀의 연기폭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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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운 (1954). 전후의 안좋은 경제상황에서 찌질한 유부남 잘못 만나서 점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결국 젊은나이에 객사하는 여주인공 역할. 결혼은 1954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조감독인 마츠야마 젠조('흐트러지다(1964)' 각본에도 참여)와 했다.

파일:external/www.geocities.jp/takaminehionnaga1ssss.gif
여자가 계단을 올라갈 때 (1960). 긴자의 마담 역. 다카미네는 나루세 감독과 무려 15편의 영화를 같이 찍었다. 주로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 의해 망가지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나루세 영화에서 주로 했다.

4. 여담

  • 키네마 준보 2014년 올타임 베스트 발표에서 여배우 1위로 꼽혔다.# 그 전 2000년도 키네마 준보 “20세기의 영화 스타”에서도 독자 선정 부분 여배우 1위로 뽑혔다.
  • 다나카 기누요와는 달리 영화 이외의 출연은 극도로 꺼렸다. 다카미네는 기노시타 케이스케감독 사단 영화인으로 꼽히는데, 기노시타 감독이 1970년대 TV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 때에도 관련 프로그램에 절대 출연하지 않았다.[14] 아주 가끔 출연하는 TV프로그램도 주로 토크 방송이나 문화 관련 예능이어서 TV와 영화와의 대립구도가 뚜렷했던 시기 일본영화계에서는 다카미네 히데코에 대한 반감이 그리 없었다. 오히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에 대해 영화판을 배신한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정도였다. 여전히 일본 영화계에서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일본 영화를 상징하는 명배우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앞 문단에서도 서술했지만 수필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첫 저서로 출판한 수필집은 1953년 파리에 6개월간 체류한 것을 수필로 써낸 “파리에서 혼자 살아보기/巴里ひとりある記”. 이후 수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다. 또 인도, 이집트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여행기, “부엌의 오케스트라” 등의 요리책도 썼다. 본인은 인기 여배우라 다들 좋게 평가해주시는 거라고 겸손해 했지만 주변인들과 출판,언론사들의 평가는 다방면에 걸쳐 박식하고 필력도 뛰어났다고. 아역때부터 배우라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항상 시나리오와 독서를 게을리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남편인 마츠야마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항상 같이 붙어 있으면서 구술작업을 도와주고 남편의 시나리오 필사도 하면서 필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1976년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이 주관하는 에세이스트 클럽 상도 수상했다. 일반인과 똑같은 조건에서 심사하여 수상한 것이라고 하니 문필력도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 특이하게도 현재는 화가, 고미술, 골동품 수집가로 더 이름이 알려졌는데 시작은 1950년대 길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득달같이 모여드는 팬들을 피해 골동품 수집가게로 피신했는데 거기서 고미술품들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로도 관련한 서적들을 계속 접하면서 공부를 이어나갔다고. 그리고 계속해서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홍보하는 활동으로 정부 포상 및 감사장도 받았다. 이후 말년에 공공미술관에 자신이 수집했던 고미술품들을 모두 기증하는 선행으로도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 남편과 같이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왔을때 남편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비춰졌을 정도로 헤비 스모커였다고. 처음 담배를 배운 것은 22살, 영화 <별과 함께 사랑을>에 출연하기 위해 흡연을 배웠고 그때부터 흡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 흡연을 계속했으며 사망할때의 사인은 폐암이었다.
  • 남편과의 금슬이 좋았지만 자녀를 보지는 못했다. 말년에 들어 주간문춘의 편집자이자 에세이스트인 사이토 아키미와 교우를 맺었고 죽기 1년 전 사이토 아키미를 양녀로 입적했다고 한다. 사이토 아키미는 이 인연으로 아직까지도 다카미네 히데코에 관한 에세이나 평전, 서적들을 출판하고 있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다카미네 히데코가 출연한 NHK대담방송
  • NHK TV대담프로에 기노시타 감독과 둘이 출연하면서 "기노시타 감독님의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도 단 한번도 키스 씬이나 정사신이 없었어요.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 작품에서는 그런게 일상이었는데."라며 농담을 해서 시청자들과 기노시타 감독을 웃겼다.[15] 또한 유독 연하의 남자와 러브라인을 타거나 부부 연기를 많이 했는데 특히나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에서 그런 캐스팅이 많았다며 기노시타 감독에게 "연하배우랑 엮어주어 고맙습니다."라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고.
  • 이누가미 일족/영화로 널리 알려진 이치카와 곤 감독과는 끈끈한 의리로 유명한데, 이치카와 곤 감독이 조감독 수련 시절 히데코의 집에 하숙을 들어 산 적이 있었다. 이전에 히데코가 영화 촬영차 교토에 단기 체류를 해야 할때 이치카와 곤 감독의 집에 잠시 머문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인연이 생겼다는 것. 이후 이치카와 곤 감독이 도쿄로 상경해 도호영화사에서 조감독 수련생활을 할때 히데코가 흔쾌히 자기 집 빈 방에 머물라며 하숙을 권했다고 한다. 1년 남짓 머물면서 많이 친해진듯. 이후 에세이에서 이치카와 곤 감독을 "전우", "곤짱"이라고 친근하게 칭하기도 했으며 도쿄 올림픽 기록영화 제작파동 사건때에는 앞장서서 이치카와 곤 감독을 옹호하기도 하는 등 의리를 과시했다고 한다. 때문에 다카미네 히데코는 우정이나 의리를 중시 여기는 "의리파"라는 평가가 영화계 내에서는 많아서 후배 영화인들에게도 많은 인기가 있었다고.
  • 같은 시대 일본 대표 여배우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하라 세츠코도호로 이적해 한솥밥을 먹기 시작할 때에는 히데코가 먼저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내성적인 성격인 하라 세츠코도 히데코와는 친하게 지냈다고.


[1] 야마다 요지 영화감독/평론가[2] Photo Chemical Laboratory. 도호 영화사의 전신[3] 이후 히데코는 당시 예술전문학교라는 성격을 띤 명문사학 문화학원(文化学院) 으로 입학하는데 PCL로 이적한 후에도 워낙 바쁜 출연 일정으로 출석일수를 맞출 수가 없어 결국 1년을 조금 넘기고 학교와 논의 끝에 자퇴하게 된다.[4]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때 조감독[5] 파업의 규모와 강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1948년도에 발생한 3차 파업은 참가규모가 꽤 커서 일본 경찰(당시엔 경시청 예비대)이 출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 육군제1기병사단 소속 1개 소대와 장갑차,전차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을 정도로 파업강도가 극심했다. 이들 파업가담자들은 도쿄의 도호영화사 스튜디오 및 촬영세트 전부를 점거하고 격렬히 저항하다 겨우 진압되었다. 이과정에서 양측의 피해도 극심했으며 이후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 군정당국은 일본의 노동세력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6] 사실 이 10명의 배우들은 하라 세츠코가 얼굴마담 역할을 해주길 바랬으나 하라 세츠코가 언론에 나설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다카미네 히데코가 젊은 나이에 할 말은 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이런 보도가 나온 배경이기도 했다.[7] 이 영화로 기노시타 감독은 생애 첫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을 수상한다.[8] 1년뒤 주식회사로 정관변경 및 신도호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신고, 이때 도호를 탈퇴하고 신도호에 합류한 배우들이 10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도호는 직격탄을 맞았고 휘청였다. 오늘날 도호의 위상을 생각하면 당시는 도호의 명운이 걸린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듯.[9] 신도호의 창립으로 인해 당시 5개 회사로 나뉘어있던 일본영화업계는 6개로 재편되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10] 당시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형 영화사들인 쇼치쿠, 도호, 신도호, 다이에이, 토에이가 1953년도에 구두로 맺은 협정으로 사실상 시장 교란이었으나 이후 일본에 TV가 도입되고 영화시장이 급속도로 쇠락하며 위의 영화사들도 배우들을 묶어두는 영화사 전속계약에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사 전속제도에 기반한 스타시스템은 붕괴되었다. 5사 협정을 주도했던 다이에이 영화사가 1971년 부도하자 이 5사 합의 역시 같은 해 소멸되었다[11] 이 때문인지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 못지 않게 기노시타 감독과의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12] 특히 도호의 집요한 보복이 히데코를 괴롭혔다. 히데코는 이후 도호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고 위치 덕분에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도포는 10인의 깃발모임 이외에도 도호를 탈퇴한 배우들과 감독, 스태프들을 블랙리스트로 올려 도호와 관련된 영화엔 발도 못붙이게 하는 등 치졸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히데코 역시 아예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13] 기노시타 감독이 둘 사이에서 다리를 놨다는 후문도 있다.[14] 심지어 기노시타 감독의 조감독 출신 감독인 남편 마츠야마 젠조가 제작하는 TV드라마에도 출연을 꺼렸다.[15]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는 12편,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는 17편의 영화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