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b9b9b><colcolor=#ffffff> 다카미네 히데코 [ruby(高峰, ruby= たかみね)] [ruby(秀子, ruby=ひでこ)] | Hideko Takamine | |
본명 | 마츠야마 히데코 ([ruby(松山, ruby=まつやま)] [ruby(秀子, ruby=ひでこ)]) |
출생 | 1924년 3월 27일 |
일본 제국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現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 |
사망 | 2010년 12월 28일 (향년 86세) |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
신체 | 158cm |
활동 기간 | 1929년 – 2010년 |
부모 | 아버지 히라야마 니시키(平山 錦司) 어머니 히라야마 이소(平山 イ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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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배우.데뷔 이후 1979년 배우 은퇴까지 약 50년 간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로 다나카 기누요, 하라 세츠코와 같이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
활동 당시 일본 영화사의 여제(女帝)라 불리었으며, 모던하고 세련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를 기반으로 당대 일본 거장 감독들인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도요타 시로, 이나가키 히로시,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작품들에 주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5세의 나이로 쇼치쿠 영화사 전속 아역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하는데, 당시 노래, 연기, 춤 3가지가 다 되는 천재 아역 배우, 일본의 '셜리 템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 여배우로 거듭나기까지 이렇다 할 침체기가 없어 당시 일본 영화계에 "아역출신 치고 대 명배우 되는 경우 없다"라는 징크스를 시원하게 깨어버린 대표적인 케이스에 첫번째로 꼽힌다.
연기력도 인정받았으며 "히데코가 100편의 영화를 출연했다면 100명의 여주인공, 100명의 히데코가 있을 뿐이다"[1]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일본영화계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영화로 인생에 데뷔해서 영화로 인생을 은퇴했다"라는 찬사와 평가 그리고 존경을 보여주고 있다.
2. 생애
2.1. 아역부터 열도의 아이돌이 되기까지
1929년 5세의 나이로 쇼치쿠 영화사의 아역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일화가 유명한데 세들어 살던 집주인의 친구인 노데라 쇼이치(野寺正一, 1886-1939)는 쇼치쿠 카마타 스튜디오 소속 배우였는데, 우연히 스튜디오 견학을 간 그날이 마침 노무라 호테이(野村芳亭, 1880-1934) 감독의 작품 <어머니>에 출연할 아역을 선발하는 오디션 날이었다. 5살의 히데코는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길다란 오디션 대기 줄의 마지막에 서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노무라 감독은 히데코를 선택하고 주인공인 카와다 요시코(川田芳子, 1895-1970)의 딸 역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 영화는 2달여 동안 대히트를 치며 흥행에 성공. 이때부터 히데코는 노래, 춤, 연기 삼박자가 다 맞는 천재 아역 배우라는 평가를 받으며 쇼치쿠에서 입지를 다진다.히데코가 13살이 되는 1937년에는 쇼치쿠의 주역 아이돌로서 아역에서 청소년 연기자로 성공적인 입지전환도 이루어낸다. 이때 쇼치쿠는 스튜디오를 카마타에서 오후나로 이전, 대변환의 시기를 겪으면서 질적, 양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스튜디오 이전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이 컸던듯 일부 주력 배우들의 월급지급이 조금씩 밀리기도 해서 소속 배우들과 직원들의 불만이 조금씩 늘어갔다.
히데코는 집안의 모든 수입이 자신에게 달려있던 터라 이런 외부의 변화가 불안하게 느껴졌고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영화 배우에 대한 회의와 부담감 역시 커져가고 있었다. 이에 변화를 모색하던 중 당시 새로 출범한 영화사 PCL[2]로의 이적을 결심하고 1937년 쇼치쿠 퇴사를 발표한다. 당시 PCL로의 이적 조건은 월급 100엔과 도쿄에 주택 제공, 그리고 히데코가 원하는 모든 여학교에 보내준다고 하는 것이었다.[3]
히데코가 PCL로 이적한 1937년, PCL은 도호와 합병해 정식으로 도호 영화사가 출범한다. 도호의 시작과 함께 히데코는 쇼치쿠에서의 인기와 명성을 넘어 본격적인 청춘 스타로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1939년에만 도호에서 주연배우로서 9개의 작품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운다. 히데코의 이름을 딴 <응원단장 히데코>(1940), <차장 히데코>(1941년) 시리즈로 인기몰이를 하는데 <차장 히데코>는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의 오랜 파트너가 되는 나루세 미키오의 감독작이자 히데코가 나루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1941년 구로사와 아키라의 스승인 야마모토 카지로 감독 제작의[4] <말>에서의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이때 구로사와 아키라와 잠시 교제했는데, 이 사실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1975년 아사히 신문에 <나의 직업 일기>라는 연재수필을 발표할 때 알려졌다. 당시 둘의 연애가 딱히 길게 가진 않았던 듯. 히데코도 이때의 교제가 그녀의 인생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는 투로 표현했기 때문에 당시의 반응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후로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 패망 이전, 전시체제 일본에서 개봉된 마지막 영화라는 <북쪽의 세 사람 (北の三人)>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패전이 명백해진 일본 내에서 전쟁 의식 고취와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로 기획 제작되었다. 본토 결전을 염두에 둔 일본의 광기가 사회 전반을 몰아칠 때 나온 셈. 내용은 일본 북쪽의 서로 다른 3개의 항공 기지에서 통신을 담당하는 여성 통신사 3인의 활약을 그린 국뽕 영화로 하라 세츠코, 야마네 히사코와 함께 출연했다. 이 3인은 당대 인기 절정의 여배우들이었지만 같은 도호 소속에, 프로파간다 영화였기에 동시 출연이 가능했다고 한다. 촬영장에서의 분위기도 훈훈했던듯.
이후 일본 육군 특공대원의 무용담을 담은 프로파간다 영화의 촬영을 위해 치바현에 체류하면서 촬영 중간중간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했다. 1945년 8월 15일 히데코는 스자키 항공기지에서의 위문공연을 마치고 난 후 천왕의 옥음방송을 접했다. 그녀의 나이 20살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촬영 중이던 영화 역시 즉시 촬영이 중단되었다.
2.2. 10인의 깃발모임 대표 시절
이 시절을 설명하자면 빠질 수 없는게 도호 영화사 노동조합 파업사건인데 이 사건은 아직까지 일본 노동조합 파업 역사상 최대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된다. 히데코는 일본 패전 이후 8개월만에 <명랑한 여자 (陽気な女)>의 주연으로 영화에 복귀하는데 이때는 도호 영화사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일본 영화계를 넘어 일본 노동계가 시끌벅적한 시기였다.당시 도호 영화사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5600여명이었으며 이정도 규모의 노조라면 당시 일본의 어떤 노동조합 규모와 견주어 보더라도 대단한 세력이었다.[5]
1946년 3월 1차 파업은 노사측이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지만 10월의 2차 파업부터는 여파가 심상찮게 몰려들었다. 노조의 다양한 요구로 인해 사측이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도호의 모든 영화촬영현장이 올스톱되었으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영화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현장이 엉망인 상태로 멈춰서니 도호소속 연기자들의 불안감은 가중되었으며, 평소 도호에 불만이 큰 배우들도 이번 기회에 이적이나 독립을 모색해 보는 등 도호영화사 내부는 혼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1946년 11월, "파업에는 반대하지만 도호 사측에도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폭탄선언을 한 도호의 간판 배우 오코치 덴지로의 성명을 필두로 다카미네 히데코, 하라 세츠코, 야마네 히사코, 하세가와 카즈오, 이리에 타카코, 야마다 이스즈 등 도호소속 10명의 배우들이 도호영화사와의 계약해지 및 독립선언을 하여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지는 결정을 내린다. 이 10명의 배우들은 비단 도호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체 연예계에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탑 배우들이라 파장은 엄청났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이 10명의 배우들을 '10인의 깃발모임'이라고 이름붙였는데 일부 배우들은 이 작명에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는 후문도 있다.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이 10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인기나 인지도를 봐도 대표격이었다.[6]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파업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불만이 쌓여가던 중이었지만 도호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쁠 게 없었다고 한다. 그런 히데코가 도호를 나올 생각을 한 이유는 영화 <파계 (破戒)>의 출연무산이 결정적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파계는 일본의 대문호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1945년 도호가 판권을 구입하고 감독을 아베 유타카로 선정했다. 주연은 다카미네 히데코로 이미 캐스팅이 결정된 상태였으나 초기 촬영에 들어간 상태에서 파업의 여파로 촬영이 중단된 것. 히데코는 이 영화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이었는데 캐스팅이 엎어지는 것도 아닌 제작 자체가 중단되고 파업으로 도저히 영화제작이 계속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호영화사가 이 영화제작의 권리를 중간에 쇼치쿠에게 넘겨 버려 다카미네 히데코는 더욱 더 도호영화사 사측의 처사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영화제작권리를 영화사끼리 거래하는 것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제작 중인 영화, 그것도 주연 캐스팅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된 영화를 중간에 다른 영화사에게 팔아버린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쇼치쿠로 넘어간 영화 <파계>는 배우들이 전면 교체되고 대본도 수정되어 제작 완성되었는데 이 영화에서 다카미네 히데코가 맡을 예정이었던 역을 신인 여배우 가츠라기 요코가 맡아 눈부신 연기를 펼치며 일약 대스타로 등극하게 되며 다카미네 히데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감독은 기노시타 케이스케에게 주어졌는데 기노시타도 난처했다고 하지만 다카미네 히데코 입장에서는 더욱 더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7]
도호와의 계약해지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10인의 깃발모임의 수장격이 되어 도호에 대항하는 반란군의 수괴(?)같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히데코를 비롯한 이들 10명은 다른 도호 탈퇴자들을 규합해 신도호(新東宝) 영화제작소[8]를 창립하고 회사의 초대 전속배우로 이름을 올렸다.[9] 처음 신도호에서의 히데코의 행보는 순풍을 타는 듯 했으나 이후 하라 세츠코를 비롯한 10명의 깃발모임 소속 배우들이 잇달아 신도호를 이탈해 프리를 선언하거나 쇼치쿠, 토에이로 이적을 하면서, 신도호도 위기를 맞게 되지만 다카미네 히데코만은 계속 신도호를 지키며 활동을 계속하다 인생 최대의 스캔들을 맞으며 신도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도호를 탈퇴하던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를 위한 공식 팬클럽 같은 '공식 후원회'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일본 연예계에서는 당시 팬클럽이 정식단체 신고까지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정도로 다카미네 히데코의 인기와 이 단체의 규모가 대단했던지 월간지까지 발행하며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월간지 이름은 히데코의 이름에서 따온 'DECO'. 사단은 1950년 당시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오던 연인이 신도호 회사의 임원(당시 신호도의 이사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이 원인으로 이 인물은 공식 후원회의 공금을 유용하고 이것도 모자라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게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히데코는 충격을 받고 신도호와의 계약해지 및 프리선언을 한다. 이 모든 수많은 일들이 단 5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2.3. 일본 역사상 첫 프리선언으로 성공한 여배우
1950년, 도호 및 신도호와의 결별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프리선언을 통해 당시로는 전례없는 소속사 없는 여배우로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5사 협정(五社協定)[10]에 의거해 각 영화사들이 소속 배우들을 임의로 빼가거나 타사의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키는 신사협정이 맺어져 있었다. 이같은 체제에서는 어느 영화사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 배우들이 활동하기엔 제약이 매우 심했다.이런 상황에서 이후 활동을 모색하던 중 다카미네 히데코는 1951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의 첫번째 작품이자 일본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에 원톱 여배우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일본 최초의 장편 '국산 컬러 필름영화'이자 히데코가 쇼치쿠를 떠난 이후 14년만에 쇼치쿠 영화사 작품에 출연한 영화가 되었다. 사실 쇼치쿠도 도호영화사와 동종 업계에서 먹고 사는 회사인지라 히데코의 캐스팅을 달갑지 않게 여겼겠지만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강력한 뜻을 꺾진 못한 듯하다.[11]
같은 해 히데코는 연인과의 스캔들로 인한 여론의 비판, 프리선언이후 불안정한 입지에 맘고생을 하다[12]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로 컴백하며 해당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 출품을 기회로 참석차 프랑스에 출국한 이후 아예 유학을 결정하고 6개월간 파리에서 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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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눈동자 촬영현장에서 히데코 |
1954년 기노시타 감독의 <24개의 눈동자>, <여자의 정원>으로 히데코는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자주연상, 블루리본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로 상을 휩쓸며 그녀의 최대 커리어 정점을 찍었고, 다음해인 1955년에는 나루세 감독의 대표작 <부운>으로 역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자주연상, 블루리본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를 받아 2년 연속 스윕을 지켰다. 괜히 이때를 다카미네 히데코의 최전성의 시기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부운은 동남아시아 영화제에 출품되어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해외에서 이름을 알렸고 24개의 눈동자는 미국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clearfix]
2.4. 결혼
1955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오랜 조감독으로 일해온 마츠야마 젠조와 약혼을 발표하고 한달 뒤 결혼식을 올린다. 이 당시도 유명한 일화로 남는 것이 결혼발표 공식 기자회견. 오늘날 일본에서 연예인 결혼발표 기자회견은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 일본 연예계에서 약혼, 결혼발표는 언론의 폭로성 기사나 가십거리로 취급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연히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결혼 소식이 신문에 날 예정인지도 모르고 당일날 신문을 보고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론의 이런 폭로기사 같은 걸로 뒤통수를 맞는 것이 부당하게 여겨졌지만 일본 언론의 관행처럼 굳어진 터라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이런 당시의 풍조를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터라, 가까운 동료였던 마츠야마 젠조와 다카미네 히데코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던[13] 기노시타 감독은 아예 당시의 유력 신문사 편집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기자회견을 통보한 후 도쿄의 유명 대형 호텔로 두사람을 데려다 기자화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기노시타 감독은 마츠야마 젠조 감독과 다카미네 히데코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취재에 응하게 하고 이날 말고는 일절 언론 취재에 응하지 않도록 막후 조정을 주도했다고. 자연스럽게 결혼은 신문 연예면에 정식 기사로 보도되고 가십성으로 다루어지지 않게 되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연예인 결혼발표 기자회견의 효시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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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없지만 가난하고 아름답게(1961/도호배급) |
결혼식 이후 마츠야마 젠조와 다카미네의 결혼생활은 굴곡없이 평온했다. 나루세 감독,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에도 부지런히 출연했으며 남편이 1961년 처음 메가폰을 잡고 감독데뷔를 한 영화 "이름도 없지만 가난하고 아름답게/名もなく貧しく美しく"에 주연 원탑 여배우로 출연했다. 이 작품은 일본 영화상 처음으로 장애인(청각장애)이 주연으로 설정된 영화인데,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며 겪게 되는 삶의 애환을 다룬 전형적인 최루영화. 다카미네 히데코는 모든 대사를 수화로 표현했으며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신들린 연기로 표현했다고. 평단의 주목과 흥행도 성공하여 이 영화로 또다시 4번째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우주연상, 제5회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남편의 첫 감독데뷔를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2.5. 은퇴까지의 작품활동
남편 마츠야마 젠조 감독의 영화작품에는 열성적으로 참가했으며 제작부장이나 대본 닥터 등으로도 참여하며 부부의 금슬을 과시했다. 그러나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쇼치쿠와의 불화를 이유로 쇼치쿠를 떠나 TV드라마 제작에 뛰어들고, 기노시타를 따라 남편인 마츠야마 젠조 감독도 TV드라마 제작에 참여할때 히데코는 TV쪽으로 활동을 하는 것을 꺼렸다. 오죽하면 남편이 제작한 TV드라마에 출연한 게 도시바 일요극장 2편뿐이라서 남편인 마츠야마 감독이 평생 서운해 했었다는 이야길 할 정도로 TV와는 거리를 두며 영화배우로서의 프라이드를 지켰다. 결혼 이후 1979년 은퇴까지 40여편의 장편영화에 출연했으며 이런 출연빈도는 당시의 다른 젊은 여배우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의 다작활동이었다.1979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사회고발영화인 <충동살인 아들아 (衝動殺人 息子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한 후 은퇴를 발표했다. 원래 해당 배역은 야치구사 가오루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일정상 하차하고 기노시타 감독이 캐스팅에 난항을 겪자, 히데코에게 출연을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가 대타 출연을 부탁받고도 흔쾌히 기노시타 감독의 요청에 응할 정도로 기노시타 감독과 가까움을 인증했다.
2.6. 은퇴 이후 사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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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일기(わたしの渡世日記) |
신조문고 출판, 상하권, 2011 |
은퇴발표 이후에도 남편인 마츠야마 감독의 작품에 조감독으로 참가한다던가, TV드라마 각본을 쓰기도 했다. 2003년에는 영화의 성우로도 참여했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정은 숨기지 않았다.
1975년부터 주간아사히지에 <나의 직업 일기(わたしの渡世日記)>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정기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영화계 입문부터 당시 현재까지의 그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회상하는 식으로 에세이를 써냈는데 당시 영화계 관계자들의 이름이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히데코의 젊은 시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의 짧은 교제 시절까지 모두 등장하는지라 주간아사히 판매부수가 연재기간 동안 급속도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에세이 공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정말로 다카미네 히데코가 쓰는 에세이인지 진위를 묻는 문의가 빗발쳐 편집장이 직접 글을 주간지에 올려서 "대필작가를 쓴다면 이런 개성있는 문체가 나오지 않는다." 라며 대필의혹을 단칼에 부인했다고. 이후 단행본으로도 상, 하권에 걸쳐 출판되었다.
1983년 5월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린 회고전 "영화속 결혼/A Marrage in the Movies"에 남편 마츠야마 젠조와 함께 참석했다. 또한 이 방문에서 미국 뉴욕 타임즈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의 인생을 회고했다.
" 제 나이 5살때부터 아역배우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당시 일본엔 아동보호법이라는 것도 없었지요. 지금와서 후회하지 않냐고요? 매일 후회하는 걸요. 배우로 사는게 싫었어요. 5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죠. 그러나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온 건 배우라는 직업적 자부심이었어요. "
" (태평양)전쟁 전 저는 일본제국 육군주둔지를 돌아다니며 위문공연을 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이후 저는 도쿄의 극장들을 돌면서 일본 점령군인 미군들을 상대로 위문공연들을 하고 있더군요. 무대위에서 "You are my sunshine"같은 노래들을 부르면서 말이죠. 당시엔 제가 그걸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뒤에서 미군이 주는 꽃다발, 초콜렛, 레이션 통조림 캔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땐 미군들에게 고맙단 생각뿐이었어요. "
" 저의 연기인생 통틀어 온갖 종류의 영화에 다 출연해 보았습니다. 좋은 영화도, 그렇지 못한 영화도 있었죠. 하지만 그 모든 작품을 하면서 한가지 원칙을 지켜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출연하는 영화가 가족영화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10대 소녀들이 몰래 집을 빠져나와 부모님 모르게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영화 말이죠. "
ㅡ 다카미네 히데코, 1983년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 중
ㅡ 다카미네 히데코, 1983년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 중
1955년 결혼 이후로 한번도 이사하지 않고 한 곳에서만 살았다. 말년에는 기력이 다해 병원 주변의 저택을 알아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듣지 않고 남편과 함께 계속해서 신혼집으로 장만한 집에서 지냈다고. 원래도 집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서 집을 관리하는 게 어려워지자 이사가 아니라 아예 집을 작은 규모로 재건축해서 살 정도로 신혼집 터를 고집했다고 한다.
2010년 12월 28일 폐암으로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는 병원에서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3. 출연 작품
3.1. 영화
연도 | 제목 | 배역 | 감독 |
1929년 | <colcolor=#000><colbgcolor=#B0E0E6> 어머니 (母) | 아역 영화 첫 데뷰 | 노무라 호테이 |
1930년 | 레뷰가의 자매 (レヴューの姉妹) | 하지메 | 시마즈 야스지로 |
거대한 도쿄의 한구석에 (大東京の一角) | 이치로 | 고쇼 헤이노스케 | |
레이진(여인) (麗人) | 아역 | 시마즈 야스지로 | |
아버지 (父) | (정보없음) | 사사키 츠네지로 | |
어머니 - 자매편 (姉妹篇 母) | 유키코 역 | 노무라 호테이 | |
1931년 | 우리 아빠와 엄마가 좋아 (私のパパさんママが好き) | 미츠코 역 | 노무라 가츠히코 |
아름다운 사랑 (美わしき愛) | 오이토의 딸 역 | 니시오 요시오 | |
사랑이여 인류와 함께 하기를[14] (愛よ人類と共にあれ) | 야스오 역[15] | 시마즈 야스지로 | |
폭풍우의 장미 (暴風雨の薔薇) | 코이치 역 | 노무라 호테이 | |
여자는 항상 그 어느 시대에도 (女はいつの世にも) | 타로 역 | 사사키 츠네지로 | |
자매·전후편 (姉妹・前後篇) | 류코 역 | 이케다 유시노부 | |
이치타로야 아이 (一太郎やあい) | 키누 역 | 노무라 호테이 | |
도쿄의 합창 (東京の合唱) | 장녀 미요코 역 | 오즈 야스지로[16] | |
여인의 미소 (麗人の微笑) | 요이치 역 | 노무라 호테이 | |
1932년 | 정열 (情熱) | 미쓰코의 딸 역 | 시미즈 히로시[17] |
7대양, 전세계의 바다 (七つの海 ) | 시미즈 히로시 | ||
즐거운 아가씨 (陽気なお嬢さん) | 미치코 역 | 츠토무 시게무네 | |
하늘에서야 맺어진 사랑[18][19][20] (天国に結ぶ恋) | (정보없음) | 고쇼 헤이노스케[21] | |
불귀 (不如帰) | (정보없음) | 고쇼 헤이노스케 | |
쥐스님 지로키치의 해결방법 (鼠小僧次郎吉 解決篇) | 타로키치 역 | 아키야마 코사쿠 | |
1933년 | 빰을 맞대면 (頬を寄すれば) | 미야코 역 | 시마즈 야스지로 |
요타모노와의 해수욕 (与太者と海水浴) | 토시유키 역 | 노무라 히로마사 | |
1934년 | 동양의 어머니 (東洋の母) | 시즈코의 어린시절 역 | 시미즈 히로시 |
헛디딘 발 (ぬき足さし足) | (정보없음) | 요시무라 고자부로 | |
그날 밤의 여자 (その夜の女) | 시게코 역 | 시마즈 야스지로 | |
1935년 | 어머니의 사랑 (母の愛) | 하루에 역 | 이케다 요시노부 |
영원한 사랑[22] (永久の愛) | 히데코 역 | 이케다 요시노부 | |
1936년 | 신작로:전편 - 아케미노마키 (新道 前篇朱実の巻) | 교코 역 | 고쇼 헤이노스케 |
심작로:후편 - 료타의 책 (新道 後篇良太の巻) | 교코 역 | ||
1937년 | 신부 카루타 (花嫁かるた) | 키쿠에 역 | 시미즈 야스지로 |
꽃다발의 노래 (花籠の歌) | 하마코 역 | ||
남편의 정조[23] (良人の貞操) | 무츠코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
에도토박이 켄짱 (江戸っ子健ちゃん) | 미짱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
구경거리의 왕국 (見世物王国) | 히데짱 역 | 마쓰이 미노루 | |
백장미는 피어나지만 (白薔薇は咲けど) | 꽃집주인 딸 역 | 후시미즈 오사무 | |
아가씨 (お嬢さん) | 실직한 선생님의 딸 역 | 야마모토 사츠오 | |
1938년 | 맞춤법 교실(쓰즈리카타 교시쓰)[24][25] (綴方教室) | 도요타 마사코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토쥬로의 사랑 (藤十郎の恋) | 우에무라 타케유키 역 | ||
무지개 핀 언덕 (虹立つ丘) | 이츠코 역 | 오타니 토시로 | |
초콜렛과 군인 (チョコレートと兵隊) | 시게코 역 | 사토 다케시 | |
1939년 | 아름다운 출발 (美はしき出発) | 나츠코 역 | 야마모토 사츠오 |
딸의 단 한가지 소원 (娘の願ひは唯一つ) | 히데코 역 | 사이토 토라지로 | |
랏파에서 온 흰 빰의 선생님 (ロッパの頬白先生) | 히데요 역 | 아베 유타카 | |
추신구라[26] (忠臣蔵) | (정보없음) | 타키자와 에이스케 | |
히구치 이치요[27] (樋口一葉) | 미도리 역 | 나미키 교타로 | |
우리는 교관입니다 (われ等が教官) | 히데코 역 | 이마이 타다시 | |
그날 전야에 벌어진 일 (その前夜) | 오츠 역 | 오기하라 료 | |
하나츠미 일기 (花つみ日記) | 시노하라 에이코 역 | 이시다 타미조 | |
신펜탄게사젠세키간노마키 (新篇丹下左膳 隻眼の巻) | 오하루 역 | 나카가와 노부오 | |
1940년 | 응원단장 히데코 (秀子の應援團長) | 히데코 역 | 치바 야스키 |
산들바람 아빠와 함께[28] (そよ風父と共に) | 히데코 역 | 야마모토 사츠오 | |
초롱꽃 (釣鐘草) | 유미코 역 | 이시다 타미조 | |
에노켄의 손오공 (エノケンの孫悟空) | 공주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
1941년 | 어제 사라진 남자 (昨日消えた男) | 시노자키 역 | 마키노 마사히로 |
말[29] (馬) | 오노다 이네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
아와노 오도리코 (阿波の踊子) | 오히카리 역 | 마키노 마사히로 | |
여학생 기록 (女学生記) | 카마타 사치코 역 | 무라타 다케오 | |
차장 히데코[30] (秀子の車掌さん) | 오코마 역 | 나루세 미키오 | |
1942년 | 무사시보 벤케이 (武蔵坊弁慶) | 우시마카와루 역 | 와타나베 구니오 |
희망의 푸른하늘 (希望の青空) | 히데코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
기다리고 있던 남자 (待って居た男) | 오유키 역 | 마키노 마사히로 | |
부계도 (婦系図) | 타에코 역 | ||
1943년 | 아편전쟁[31] (阿片戦争) | 레이란 역 | 마키노 마사히로 |
사랑의 세계: 산고양이와 미의 이야기 (愛の世界 山猫とみの話) | 오다기리 토미 역 | 아오야기 노부오 | |
하나코 씨 (ハナ子さん) | 치요코 역 | 마키노 마사히로 | |
효로쿠의 꿈이야기 (兵六夢物語) | 이상한 처녀 역 | 아오야나기 노부오 | |
젊은 날의 기쁨 (若き日の歓び) | 다카무라 유코 역 | 사토 타케시 | |
1944년 | 할머니[32] (おばあさん) | 마루코 역 | 하라 겐키치 |
산샤쿠 사고헤이 (三尺左吾平) | 오묘 역 | 이시다 타미조 | |
1945년 | 승리의 그날까지[33][34] (勝利の日まで) | 크레딧 없음(소실) | 나루세 미키오[35] |
북쪽의 세 사람[36] (北の三人) | 마츠모토 요시에 역 | 사예키 기요시 | |
1946년 | 명랑한 여자 (陽気な女) | 요코 역 | 사에키 기요시 |
우라시마 타로의 후예 (浦島太郎の後裔) | 아카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37] (明日を創る人々) | 크레딧없음(우정출연) | 야마모토 카지로 세키가와 히데오 구로사와 아키라[38] | |
밤의 영주 (或る夜の殿様) | 타에코 역 | 기누가사 사다노스케 | |
도호 쇼보트 (東宝ショウボート) | 구두닦이 소년 역 | 센키치 타니구치 | |
1947년 | 도호와 함께한 1000일[39] (東宝千一夜) | 다카미네 히데코 본인 | 나카무라 후쿠[40] |
대에도의 귀신 (大江戸の鬼) | 오나츠 역 | 하기와라 료 | |
별과 함께 사랑을[41] (愛よ星と共に) | 시라카와 하루에 역 | 아베 유타카 | |
행복으로의 초대 (幸福への招待) | 시이나 히사 역 | 치바 야스키 | |
1948년 | 사랑진단서 (愛情診断書) | 아키에 역 | 와타나베 구니오 |
마치코로부터 핀 꽃 (花ひらく 真知子より) | 마치코 역 | 이치카와 곤 | |
365일의 밤 (三百六十五夜) | 고마키 란코 역 | 이치카와 곤 | |
무지개를 품은 처녀 (虹を抱く処女) | 아키코 역 | 사예키 기요시 | |
1949년 | 봄의 장난 (春の戯れ) | 오하나 역 | 야마모토 카지로 |
굿바이 (グッド・バイ) | 키누코 역 | 시마 코지 | |
긴자의 캉캉무스메 (銀座カンカン娘) | 아키 역 | ||
1950년 | 처녀 보물 (処女宝) | 마킨 역 | 시마 코지 |
세설 (細雪) | 타에코 역 | 아베 유타카 | |
무네카타 자매들[42] (宗方姉妹) | 마리코 역 | 오즈 야스지로[43] | |
전쟁의 화마를 넘어 (戦火を越えて) | (정보없음) | 세키가와 히데오 | |
사사키 코지로 (佐々木小次郎) | 나미 역 | 이나가키 히로시 | |
1951년 | 물에 비친 여자의 모습 (女の水鏡) | 나에코 역 | 하라 겐키치 |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44][45] (カルメン故郷に帰る) | 릴리 카르멘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우리집은 즐거워 (我が家は楽し) | 토모코 역 | 나카무라 노보루 | |
1952년 | 아침의 파문 (朝の波紋) | 아츠코 역 | 고쇼 헤이노스케 |
도쿄의 보조개 (東京のえくぼ) | 교코 역 | 마츠바야시 슈에 | |
이나즈마(번개) (稲妻) | 기요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
순수한 카르멘 (カルメン純情す) | 릴리 카르멘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1953년 | 여자라는 이름의 성: 마리 이야기 (女といふ城 マリの巻) | 마리 역 | 아베 유타카 |
여자라는 이름의 성: 유코 이야기 (女といふ城 夕子の巻) | 마리 역 | ||
굴뚝이 보이는 곳 (煙突の見える場所) | 히가시 센코 역 | 고쇼 헤이노스케 | |
내일은 어디에 (明日はどっちだ) | 히카리 역 | 하세베 케이지 | |
기러기 (雁) | 오타마 역 | 토요타 시로 | |
1954년 | 두번째 키스 (第二の接吻) | 시즈코 역 | 시미즈 히로시 |
여자의 정원 (女の園) | 요시에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24개의 눈동자[46][47] (二十四の瞳) | 오이시 히사코 역 | ||
이 넒은 하늘의 어딘가에[48] (この広い空のどこかに) | 야스코 역 | 고바야시 마사키 | |
1955년 | 부운[49][50] (浮雲) | 유키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철새는 언제 돌아가는가 (渡り鳥いつ帰る) | 마치코 역 | 히사마츠 세이지 | |
먼 구름 (遠い雲) | 후유코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입맞춤 : 제3부 여자끼리 (ちづけ : 女同士) | 아키코 역 | 나루세 미키오[51] | |
1956년 | 어린 아이의 눈 (子供の眼) | 키요코 역 | 가와가시라 요시로 |
아내의 마음 (妻の心) | 키요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
흐르다 (流れる) | 가츠요 역 | ||
1957년 | 구름의 묘비석보단 하늘이 있는 곳으로 (雲の墓標より 空ゆかば) | 사치 역 | 호리우치 마나오 |
길들여지지 않는 여자 (あらくれ) | 오시마 역 | 나루세 미키오 | |
기쁨도 슬픔도, 지나가는 세월 (喜びも悲しみも幾歳月) | 키요코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바람앞 등불 (風前の灯) | 유리코 역 | ||
1958년 | 잠복근무 (張込み) | 사다코 역 | 노무라 요시다로[52] |
무법자 마츠오의 일생 (無法松の一生) | 료코 역 | 이나가키 히로시 | |
1960년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53] (女が階段を上る時) | 케이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娘・妻・母) | 카즈코 역 | ||
후에후키강[54] (笛吹川) | 오케이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1961년 |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55] (名もなく貧しく美しく) | 아키코 역 | 마츠야마 젠조[56] |
인간의 조건: 5,6부 (人間の條件) | 피난민 여성(크레딧기제) | 고바야시 마사키 | |
아내로서 여자로서 (妻として女として) | 미호 역 | 나루세 미키오 | |
영원한 사람 (永遠の人) | 사다코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1962년 | 여자의 자리 (女の座) | 요시코 역 | 아오야기 노부오 |
산하 (山河あり) | 이노우에 키시노 역 | 마츠야마 젠조 | |
둘이서 걸었던 여럿 봄과 가을들 (二人で歩いた幾春秋) | 토라에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
방랑기 (放浪記) | 후미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
어슬렁어슬렁거린 이야기 (ぶらりぶらぶら物語) | 코마코 역 | 마츠야마 젠조 | |
1963년 | 여자의 역사 (女の歴史) | 노부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1964년 | 흐트러지다 (乱れる) | 레이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나는 비록 한톨의 보리알일지라도 (われ一粒の麦なれど) | 노리코 역 | 마츠야마 젠조 | |
1965년 | 로쿠죠 유키야마 츠무기 (六條ゆきやま紬) | 로쿠죠 이네 역 | |
1966년 | 뺑소니 (ひき逃げ) | 쿠니코 역 | 나루세 미키오 |
1967년 | (속)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다운 아버지와 아들[57] (続・名もなく貧しく美しく 父と子) | 아키코 역 | 마츠야마 젠조 |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華岡青洲の妻) | 오쓰구 역 | 마쓰무라 호조 | |
1969년 | 귀신이 사는 여관 (鬼の棲む館) | 카에데 역 | 미스미 겐지 |
1973년 | 황홀한 사람 (恍惚の人) | 아키코 역 | 도요타 시로 |
1976년 | 스리랑카의 사랑과 이별 (スリランカの愛と別れ) | 자카란타 부인 역 | 기노시타 케이스케 |
두사람의 이다 (ふたりのイーダ) | 기쿠에 역 | 마츠야마 젠조 | |
울면서도 웃는 날 (泣きながら笑う日) | 유키코 역 | 마츠야마 젠조 | |
1979년 | 충돌살인 아들아 (動殺人 息子よ) | 유키에 역 배우은퇴작품 | 기노시타 케이스케 |
4. 수상
<rowcolor=#FFFFFF> 날짜 | 시상식명 | 수상 부문 | 작품 |
1954년 | |||
2월 | 제9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여우주연상 | 24개의 눈동자 여자의 정원 악의 즐거움 |
2월 | 제5회 블루리본상 | 여우주연상 | 24개의 눈동자 여자의 정원 이 넒은 하늘의 어딘가에 |
1955년 | |||
2월 | 제10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여우주연상 | 부운 |
2월 | 제29회 키네마 준보 | 여우주연상 | 부운 |
1956년 | |||
미상 | 제3회 동남아시아 영화제[58] | 여우주연상 | 부운 |
1957년 | |||
2월 | 제12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여우주연상 | 기쁨도 슬픔도 지나가는 세월 길들여지지 않는 여자 |
1961년 | |||
2월 | 제16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여우주연상 | 영원한 사람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
미상 | 제5회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 여우주연상 |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
1962년 | |||
3월 | 제12회 예술선장 문부대신상 | 여우주연상 | 영원한 사람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
1965년 | |||
8월 | 제17회 로카르노 영화제 | 여우주연상 | 흐트러지다 |
1975년 | |||
미상 | 제21회 일본 영화인 단체연합 | 근속공로상 | 없음[A] |
미상 | 1975년 서훈 | 감수포장 | 없음[A] |
1976년 | |||
미상 | 제24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쇼 | 에세이스트 클럽상 | 나의 직업 일기 |
1994년 | |||
미상 | 제4회 일본 영화 비평가 대상 | 골든 글로리상 | 없음[A] |
1996년 | |||
4월 | 제19회 일본 아카데미상 | 회장 공로상 | 없음[A] |
2010년 | |||
2월 | 제65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특별상(사후) | 없음[A] |
2011년 | |||
3월 | 제6회 오사카 시네마 페스티벌 | 특별상(사후) | 없음[A] |
4월 | 제56회 일본 영화의 날 기념식[65] | 특별공로장(사후) | 없음[A] |
4월 | 제34회 일본 아카데미상 | 회장 특별상(사후) | 없음[A] |
12월 | 제29회 영화의 날 기념 골든그로스상 | 특별공로상(사후) | 없음[A] |
5. 여담
다카미네 히데코가 부른 긴자의 캉캉무스메 주제곡 |
- 출연 영화의 주제곡을 직접 불러 음반을 내기도 했다. 긴자의 캉캉무스메 주제곡을 불러 노래실력도 보통이 넘는것을 인증했다.
- 다나카 기누요와는 달리 영화 이외의 출연은 극도로 꺼렸다. 다카미네는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사단 영화인으로 꼽히는데, 기노시타 감독이 1970년대 TV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 때에도 관련 프로그램에 절대 출연하지 않았다.[69] 아주 가끔 출연하는 TV프로그램도 주로 토크 방송이나 문화 관련 예능이어서 TV와 영화와의 대립구도가 뚜렷했던 시기 일본영화계에서는 다카미네 히데코에 대한 반감이 그리 없었다. 오히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에 대해 영화판을 배신한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정도였다. 여전히 일본 영화계에서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일본 영화를 상징하는 명배우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앞 문단에서도 서술했지만 수필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첫 저서로 출판한 수필집은 1953년 파리에 6개월간 체류한 것을 수필로 써낸 “파리에서 혼자 살아보기/巴里ひとりある記”. 이후 수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다. 또 인도, 이집트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여행기, “부엌의 오케스트라” 등의 요리책도 썼다. 본인은 인기 여배우라 다들 좋게 평가해주시는 거라고 겸손해 했지만 주변인들과 출판,언론사들의 평가는 다방면에 걸쳐 박식하고 필력도 뛰어났다고. 아역때부터 배우라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항상 시나리오와 독서를 게을리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남편인 마츠야마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항상 같이 붙어 있으면서 구술작업을 도와주고 남편의 시나리오 필사도 하면서 필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1976년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이 주관하는 에세이스트 클럽 상도 수상했다. 일반인과 똑같은 조건에서 심사하여 수상한 것이라고 하니 문필력도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 특이하게도 현재는 화가, 고미술, 골동품 수집가로 더 이름이 알려졌는데 시작은 1950년대 길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득달같이 모여드는 팬들을 피해 골동품 수집가게로 피신했는데 거기서 고미술품들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로도 관련한 서적들을 계속 접하면서 공부를 이어나갔다고. 그리고 계속해서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홍보하는 활동으로 정부 포상 및 감사장도 받았다. 이후 말년에 공공미술관에 자신이 수집했던 고미술품들을 모두 기증하는 선행으로도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 남편과 같이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왔을때 남편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비춰졌을 정도로 헤비 스모커였다고. 처음 담배를 배운 것은 22살, 영화 <별과 함께 사랑을>에 출연하기 위해 흡연을 배웠고 그때부터 흡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 흡연을 계속했으며 사망할때의 사인은 폐암이었다.
- 남편과의 금슬이 좋았지만 자녀를 보지는 못했다. 말년에 들어 주간문춘의 편집자이자 에세이스트인 사이토 아키미와 교우를 맺었고 죽기 1년 전 사이토 아키미를 양녀로 입적했다고 한다. 사이토 아키미는 이 인연으로 아직까지도 다카미네 히데코에 관한 에세이나 평전, 서적들을 출판하고 있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다카미네 히데코가 출연한 NHK대담방송 |
- NHK TV대담프로에 기노시타 감독과 둘이 출연하면서 "기노시타 감독님의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도 단 한번도 키스 씬이나 정사신이 없었어요.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 작품에서는 그런게 일상이었는데."라며 농담을 해서 시청자들과 기노시타 감독을 웃겼다.[70] 또한 유독 연하의 남자와 러브라인을 타거나 부부 연기를 많이 했는데 특히나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에서 그런 캐스팅이 많았다며 기노시타 감독에게 "연하배우랑 엮어주어 고맙습니다."라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고.
- 이누가미 일족/영화로 널리 알려진 이치카와 곤 감독과는 끈끈한 의리로 유명한데, 이치카와 곤 감독이 조감독 수련 시절 히데코의 집에 하숙을 들어 산 적이 있었다. 이전에 히데코가 영화 촬영차 교토에 단기 체류를 해야 할때 이치카와 곤 감독의 집에 잠시 머문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인연이 생겼다는 것. 이후 이치카와 곤 감독이 도쿄로 상경해 도호영화사에서 조감독 수련생활을 할때 히데코가 흔쾌히 자기 집 빈 방에 머물라며 하숙을 권했다고 한다. 1년 남짓 머물면서 많이 친해진듯. 이후 에세이에서 이치카와 곤 감독을 "전우", "곤짱"이라고 친근하게 칭하기도 했으며 도쿄 올림픽 기록영화 제작파동 사건때에는 앞장서서 이치카와 곤 감독을 옹호하기도 하는 등 의리를 과시했다고 한다. 때문에 다카미네 히데코는 우정이나 의리를 중시 여기는 "의리파"라는 평가가 영화계 내에서는 많아서 후배 영화인들에게도 많은 인기가 있었다고.
- 일본 영화인들에게도 "의리파" 영화인으로 존경받게 된 사연이 앞 문단에도 언급되었던 1965년(쇼와 40년) 이치카와 곤 감독이 맡은 도쿄 올림픽(1864년) 공식 기록 영화(Tokyo Olympiad)와 얽힌 도쿄올림픽 기록영화 파동사건이다. 당시 이치카와 곤 감독은 1964 도쿄 올림픽을 주제로 한 다큐멘타리 기획영화 제작을 의뢰받고 169분짜리 영화를 만들어 1965년 3월 8일 시사회에서 발표하는데 이때 영화의 성격을 놓고 한바탕 일본 사회가 들썩거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일본 정부 내각 부총리이자 올림픽 담당 대신 고노 이치로와 문부담당대신 아이치 기이치가 시사회 직후 "이게 대체 무슨 기록영화냐?" , "올림픽 다큐멘터리를 만들랬더니 아예 전혀 다른 성격의 영상물아니냐" 라며 혹평을 했고 공식 다큐멘터리 영화로 인정할 수 없으며 다른 영상 기록물을 새로 만들겠다는 발표를 한다.
- 거기다 아이치 기이치 문부대신은 지원중단도 발표했으며 도쿄올림픽 기록영화로 추천할 수 없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이에 각급 학교에서 단체 관람도 중지되었으며 공식 영화 배급사인 도호에서는 이치카와 곤 감독에게 재편집까지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화계 역시도 "왜 정치권이 창작자의 기획의도와 예술성을 무시하냐" 라고 반발하는 등 사태는 심각하게 돌아갔다.
- 사태는 다카미네 히데코의 참전으로 뜻밖의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3월 18일, 히데코는 일본 "도쿄신문"에 사설기고문을 통해 당시 내각부총리 고노 이치로에게 대놓고 실명비판을 내놓았다.
" 이치카와 곤 감독의 작품이 도쿄올림픽의 오점이라며 막말을 해대는 것은 내각부총리(고노 이치로)라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
ㅡ 다카미네 히데코, 도쿄신문 사설기고문중
ㅡ 다카미네 히데코, 도쿄신문 사설기고문중
- 당장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여배우가, 그것도 유력 신문 사설기고문을 통해 일본 내각부총리 급의 정치인을 대놓고 실명비판한 것은 일본 역사상 처음 있는 있이었다. 당장 자민당 정치권에서 "어딜 감히!"라는 대응이 나왔으며 문화계에서는 히데코를 지지하는 인터뷰가 쏟아졌다. 당시 고노 이치로는 이케다 파의 지지로 사토 에이사쿠의 일본 총리 취임, 야쿠자와의 유착설로 인해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낙마한 터라 정치적 부담이 큰 상황이었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신문 사설을 통해 항의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고노 이치로 부총리에 직접 면담을 요구,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정치권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의까지 했으며 "이치카와 곤 감독을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해보라!"라며 3자 대면까지 강경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 결국 고노 이치로는 백기를 들었고, 이치카와 곤 감독과 3차례 만남을 통해(이중 2차례는 다카미네 히데코가 동석까지 했다) 도쿄올림픽 기록영화 제작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치키와 곤 감독은 곤경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도쿄올림픽 기록영화 파동사건은 당시 일본 문화계에서는 정치권이 문화계에 가한 탄압으로 인식되었기에 일본 영화계는 히데코가 총대를 매고 앞장서서 탄압을 막아준 일에 매우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또한 이치카와 곤 감독도 후일 "히데코가 앞장서 주지 않았다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라며 무척이나 고마워했다고 한다.[71]
- 위 사건과 더불어 일본 영화계에서 다카미네 히데코를 존경하는 또 다른 일화가 일본TV "경품규제안" 신설 사건이다. 일본에 TV가 도입되고 여러 민영TV방송국들의 과도한 경쟁이 심화되면서 1970년 후지테레비의 한 시청자 퀴즈쇼 프로에서 무려 1000만엔 상당의 아파트가 1등 상품으로 등장한 사건이 생겼다. 당시 일본TV 방송 프로그램의 경품사례에 비추어서도 매우 과도한 규모의 상품이었으나 민영TV 방송국들의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자극적인 소재가 연일 도마에 오른 터였다. 이같은 1등 상품을 놓고 시청률 경쟁이 격화하는 것에 언론도 비판을 시작하였고 결국 일본 정치권도 규제방향을 놓고 개입하기에 이른다.
- 일본 정치권도 개입을 선언한 이후 1971년(쇼와46년) 2월 10일, 일본 국회인 중의원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다카미네 히데코[72]를 참고인 증인으로 출석시켜 일본 민영TV 방송들의 선정성 및 폭력성을 규제하는 법안에 대해 물었다. 이 위원회에 히데코는 출석해 거침없이 소신발언을 했다.
" TV프로에서 폭력물이나 에로물등이 저속한 표현에 속할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것보다 TV 퀴즈쇼에서 과도한 상품을 받거나 심지어 해외여행 경품을 받아 여행을 가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런게 오히려 가장 저속한 문화풍토를 조성하는 게 아닌가요? "
ㅡ 다카미네 히데코, 1971년 일본 중의원 방송통신위원회 청문회 참석발언중
ㅡ 다카미네 히데코, 1971년 일본 중의원 방송통신위원회 청문회 참석발언중
- 당시 일본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에서 자본 및 물량공세를 벌이는 TV산업를 곱지않은 눈으로 보고있던 터라 히데코의 이같은 발언을 반겼고, 언론 역시도 TV방송국들의 과도한 경쟁을 비판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일본 공정경쟁위원회 및 민간방송연맹[73][74][75]은 TV 프로그램에서 경품규제안을 신설하고 100만엔이 넘는 경품을 금지시키게 되었다.
- 같은 시대 일본 대표 여배우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하라 세츠코가 도호로 이적해 한솥밥을 먹기 시작할 때에는 히데코가 먼저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내성적인 성격인 하라 세츠코도 히데코와는 친하게 지냈다고.
[1] 야마다 요지 영화감독/평론가[2] Photo Chemical Laboratory. 도호 영화사의 전신[3] 이후 히데코는 당시 예술전문학교라는 성격을 띤 명문사학 문화학원(文化学院) 으로 입학하는데 PCL로 이적한 후에도 워낙 바쁜 출연 일정으로 출석일수를 맞출 수가 없어 결국 1년을 조금 넘기고 학교와 논의 끝에 자퇴하게 된다.[4]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때 조감독[5] 파업의 규모와 강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1948년도에 발생한 3차 파업은 참가규모가 꽤 커서 일본 경찰(당시엔 경시청 예비대)이 출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 육군제1기병사단 소속 1개 소대와 장갑차,전차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을 정도로 파업강도가 극심했다. 이들 파업가담자들은 도쿄의 도호영화사 스튜디오 및 촬영세트 전부를 점거하고 격렬히 저항하다 겨우 진압되었다. 이과정에서 양측의 피해도 극심했으며 이후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 군정당국은 일본의 노동세력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6] 사실 이 10명의 배우들은 하라 세츠코가 얼굴마담 역할을 해주길 바랬으나 하라 세츠코가 언론에 나설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다카미네 히데코가 젊은 나이에 할 말은 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이런 보도가 나온 배경이기도 했다.[7] 이 영화로 기노시타 감독은 생애 첫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을 수상한다.[8] 1년뒤 주식회사로 정관변경 및 신도호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신고, 이때 도호를 탈퇴하고 신도호에 합류한 배우들이 10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도호는 직격탄을 맞았고 휘청였다. 오늘날 도호의 위상을 생각하면 당시는 도호의 명운이 걸린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듯.[9] 신도호의 창립으로 인해 당시 5개 회사로 나뉘어있던 일본영화업계는 6개로 재편되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10] 당시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형 영화사들인 쇼치쿠, 도호, 신도호, 다이에이, 토에이가 1953년도에 구두로 맺은 협정으로 사실상 시장 교란이었으나 이후 일본에 TV가 도입되고 영화시장이 급속도로 쇠락하며 위의 영화사들도 배우들을 묶어두는 영화사 전속계약에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사 전속제도에 기반한 스타시스템은 붕괴되었다. 5사 협정을 주도했던 다이에이 영화사가 1971년 부도하자 이 5사 합의 역시 같은 해 소멸되었다[11] 이 때문인지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 못지 않게 기노시타 감독과의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12] 특히 도호의 집요한 보복이 히데코를 괴롭혔다. 히데코는 이후 도호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고 위치 덕분에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도호는 10인의 깃발모임 이외에도 도호를 탈퇴한 배우들과 감독, 스태프들을 블랙리스트로 올려 도호와 관련된 영화엔 발도 못붙이게 하는 등 치졸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도호 파업당시 노조 소속 및 비노조 감독,작가,스태프들을 1부 제작부, 2부 제작부 이런 식으로 구분한답시고 차별했다. 히데코 역시 아예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13] 기노시타 감독이 둘 사이에서 다리를 놨다는 후문도 있다.[14] 다소 장황한 제목만큼이나 영화 내용이나 길이도 장황하고 지루해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4시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 전반부:일본편, 후반부:미국편 이렇게 나눠서 발표된 탓에 관객들이 몰입하기도 더 힘들었다. 거기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이다![15] 남자아이 역할을 맡았다. 똑순이 김민희가 아역활동당시 남자아이 역할을 맡은걸 상상하면 이해될듯[16] 다카미네 히데코와 오즈 감독과의 첫번째 작품[17] 미조구치 겐지가 한마디로 “천재”라고 부른 당대 일본 영화계의 거장 중 한 명이다.[18] 1932년 일본 가나가와현 사카타야마에서 발생한 남여 동반 자살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이 남녀는 젊은 나이에 남자는 도쿄 명문대 교복을, 여성은 값비싼 기모노를 입고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기에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실시하였고 결국 이 두 남녀는 집안의 반대로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비관해 독극물을 먹고 동반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19] 그러나 이 사건은 한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비극적 순애보에서 단 하루만에 엽기적인 사건으로 변모하는데, 유족이 오기 전 두사람의 시신을 인근 절에 임시로 안치하고 있다가 여성의 시신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이 입고 있는 옷들이 주변에 널려진 채로 시신만 사라진 것이다. 당장 언론들은 엽기적인 시신탈취시건이라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고 경찰도 발칵 뒤집힌채 대대적인 시신 수색을 실시하여 이틀만에 주변 해안가에서 발견했다. 범인은 화장터의 직원으로 지목되었다.[20] 이 사건 이후 사카타야마는 동반자살 사건이 끊이질 않아 사건이 발생한 1932년 한해만 무려 20쌍의 남녀가 동반자살로 사망했으며 1935년(쇼와10년)까지 동반자살(자살미수도 포함) 숫자가 무려 200명을 넘겼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남녀가 수은을 마시고 자살한 것이 주요한 문제로 지목되어 일본내 일부 지자체에서는 아예 영화상영금지 조처가 취해졌다.[21] 헤이노스케 감독은 촬영 로케 스카우트 여행중에 사카타야마에서 동반자살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다음날 쇼치쿠 회사로부터 '당장 이 사건을 영화화'하라고 하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남녀 주연배우인 다케우치 료이치와 기와사키 히로코를 데리고 해당 사건이 발생한 장소로 간 헤이노스케 감독은 아예 그 동반자살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주연배우들의 스틸 사진도 촬영하는 기행까지 벌이게 되는데 사람 죽은 장소에서 영화 홍보용 스틸사진을 찍는다는게 내키지가 않았지만 쇼치쿠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감독이 그 정도였으니 해당 주연배우 2명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영화흥행은 앞서 서술한 여러 가지 문제로 그닥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당연한게 주연배우 2명과 조연 5명 동원, 무려 15일만에 영화촬영을 끝냈다고 한다. 초스피드로 찍은 셈인데 당시 언론이 사랑 때문에 남녀가 동반자살을 했다고 대서특필해대니 거기에 영합하여 마케팅을 하려고 한 쇼치쿠가 얼마나 삽질을 했는지 알수 있다.[22]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쇼치쿠는 스튜디오를 가마타에서 오후나로 이전한다. 이 영화는 실질적으로 가마타 스튜디오에서 찍은 마지막 쇼치쿠 영화이며 쇼치쿠에서도 "아듀 가마타" 라는 광고문구로 흥행마케팅에 동원했다.[23] 이 작품부터 히데코는 쇼치쿠를 나와 PCL로 이적했다. 이후 PCL와 도호가 합병하며 히데코는 도호 소속 여배우가 되었다.[24] 이 영화는 초등4학년이 일본어 문법을 배우며 느낀점을 아이의 시선으로 쓴 에세이집을 영화화한 것이다. 1930년대 일본 근대화 물결속에서 교육에서도 일종의 문맹퇴치,언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학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당시 일본정부의 지원도 한몫했다. 이 수필을 쓴 도요타 마사코를 주인공으로 히데코가 동명의 주인공을 연기했다. 이 수필집은 베스트셀러에도 올랐지만 실제로 도요타 마사코는 별로 돈을 벌지 못했으며 학교 졸업 이후 고등교육을 이어가지 못하고 공장에 여공으로 취업하였고 이후 태평양 전쟁을 맞이했다.[25] 영화발표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와 히데코가 분한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도요타 마사코간의 분쟁이 일어나는데 영화 '맞춤법 교실' 촬영현장을 방문한 도요타 마사코가 나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카미네 히데코가 여공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증언하며 문제가 발생했다. 당장 영화사와 다카미네 히데코는 발끈했고 히데코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가 도요타 마사코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허위사실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강경하게 나섰다. 이후 도요타 마사코가 맞대응하지 않아 이후로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당시 10대 나이의 다카미네 히데코가 내용증명까지 보내며 본인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강단있고 한성격 한다는 걸 짐작케 하는 일화이다.[26] 당시 출연진이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 터라 개봉전후 입소문을 탔다. 오코치 덴지로,하세가와 가즈오,구로카와 야타로를 비롯, 하라 세츠코와 다카미네 히데코까지 출연했으며 심지어 하라 세츠코는 출연분량이 적은 단역이었다.[27] 일본의 여성 문학가 히구치 이치요(본명-호적상:히구치 나츠)의 생애를 영화화한 작품. 일본 근대시대 1930년대에 소설가로 등단, 20세 초 불과 1년동안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을 쏟아내며 일본 문학계에 충격을 던진다. 오죽하면 이때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발표시기를 "기적의 14개월"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일본 문학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촉망받는 신진 소설가로 한창 활동하려는 찰나 폐결핵으로 급사했다.[28] 나루세 미키오가 각본을 썼다. 이 작품으로 다카미네 히데코와 나루세 미키오가 영화에서 첫 인연을 가진다.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활약한다.[29] 이 영화의 조감독을 맡은 구로사와 아키라와 이시기 잠시 교제했었다고 이후 히데코가 신문 기고 수필을 통해 밝혔다. 히데코는 당시 이때 교제가 잠시 이루어졌으며 그녀 인생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후로 구로사와 감독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30] 나루세 미키오감독 작품 첫출연작[31] 중국의 아편전쟁을 주무대로 한 역사극이다. 하라 세츠코와 히데코가 자매로 나온다. 세츠코는 아이란, 히데코는 레이란 자매로 분해 아편전쟁으로 인해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대규모 군중촬영 및 특수효과 촬영이 동원되었으며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모두 일본인 배우들이 연기했다. 때문에 약간 어색한 장면들도 자주 등장한다. 당시는 일본과 영국이 2차 세계대전중이라 서로 교전국이기 때문에 영국인 역할을 하는 일본 배우들을 모두 분장으로 처리해야 했다.[32] 히데코가 도호이적 후 쇼치쿠 영화에 출연한 작품. 당시 일본의 스튜디오 소속제가 전쟁중 다소 느슨해진 탓에 쇼치쿠 출연이 가능했다고 한다.[33] 일본의 전쟁선전영화이다. 당시 도호 소속 배우들이 총출동-이라 쓰고 끌려나왔다고 읽는다- 했다. 헐리우드 뮤지컬 스타일로 시종일관 몸개그로 관객을 웃기는 코미디물이다. 주로 일본제국 해군들에게 전시오락영화로 상영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한다.[34] 영화 처음 15분분량 필름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이는 일본 패망 이후 미 군정(GHQ)에 의해 오리지널 필름을 비롯해 모든 필름이 파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5] 원래는 도호 소속 이마이 마사시 감독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일본 제국은 이마이 감독을 징병해 전쟁터로 끌고가 버렸다. 졸지에 도호영화사는 나루세 미키오감독에게 작품을 맡겼다. 나루세 감독이 어떤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지는 알수 없지만 그리 즐겁지는 않았을 것이다.[36] 역시 전쟁선전영화로 제작되었다. 일본 제국 치하 마지막 개봉상영영화 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전역에 8월 5일 개봉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37] 영화내용이 영화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다는 일종의 노동운동 영화이다. 실제로도 당시 도호영화사는 파업쟁의중이었으며 도호의 모든 영화제작이 중단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사실 영화사 노조원들이 파업을 정당화하고 정당성을 홍보하는 일종의 선전영화라고도 볼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다 파업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어서 공동감독중 한사람이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나중 크레딧을 거부했다.[38] 구로사와 감독은 이후 이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을 거부했다.[39] 이 작품부터 도호를 탈퇴하고 신도호에 출연한다.[40] 가명이며 실제로는 이치카와 곤 감독이다.[41] 이 작품부터 히데코는 흡연을 시작했다. 영화에 흡연장면이 포함되어 있어 흡연을 배웠는데 결국 평생 금연하지 못했다고 한다.[42] 다카미네 히데코가 오즈 야스지로감독작품에 처음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다. 이외로 히데코는 오즈 감독과의 협업이 별로 없다.[43] 오즈 감독이 쇼치쿠가 아닌 다른 영화사에서 감독한 첫번째 작품이다. 신도호가 쇼치쿠에게 꽤 공을 들여 오즈 감독을 모셔왔다고 한다.[44] 일본 최초 국산컬러영화[45]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의 첫작품이다.[46] 키네마 준보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텐 선정(6위)[47] 히데코의 영화 커리어 정점을 이 영화로 찍었다. 당해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 블루리본상 여우주연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일본 최고의 여배우임을 인증했다.[48] 1년뒤 히데코와 결혼을 발표하는 마츠야마 젠조가 각색을 담당했다.[49] 키네마 준보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텐 선정(3위)[50] 1954년에 이어 2년 연속 일본 정상의 여배우임을 확인했다.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 및 여우주연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그녀의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임을 다시금 확인했다.[51] 영화가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이다. 3부 감독연출을 나루세 감독이 맡았다.[52] 노무라 호테이 감독의 아들이다. 1929년 노무라 호테이 감독의 "어머니" 영화에 5세 아역으로 데뷔하고 29년만에 호테이 감독의 아들이 감독하는 작품에 히데코가 출연한 셈이다![53] 히데코가 직접 자신의 의상 선정 및 코디를 담당했다고 한다.[54] 이 작품에서 다카미네 히데코는 18세 소녀부터 85세 할머니까지 연기해야 했기에 자신의 캐스팅 조건에 도호영화사 소속 헤어분장 전문가인 고바야시 시게오를 데려오는 파격적인 조건을 달았다. 쇼치쿠가 불편해했음은 당연하지만(경쟁사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기에) 다카미네 히데코 주연에 기노시타 감독의 요구에는 어쩔수 없이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55] 일본 영화 역사상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주인공으로 설정된 첫 영화이다. 히데코는 이 영화에서 대사 전체를 수화를 통해 표현했다. 이를 위해 전문수화사에게 몇달동안 수화를 배워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56] 히데코의 남편인 마츠야마 젠조의 첫 정식감독 데뷔작이다.[57]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영화의 후속편이다.[58] 이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로 개명[A] 다카미네 히데코 개인에게 수여한 상들이다.[A] 다카미네 히데코 개인에게 수여한 상들이다.[A] [A] [A] [A] [65] 일본영화제작자연맹 - 쇼치쿠,도호,토에이,카도카와(기업) 4개 영화사가 구성한 영화업계 단체이다 -이 주관하는 기념일[A] [A] [A] [69] 심지어 기노시타 감독의 조감독 출신 감독인 남편 마츠야마 젠조가 제작하는 TV드라마에도 출연을 꺼렸다.[70]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는 12편,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는 17편의 영화를 찍었다.[71] 이로 인해 이치카와 곤 감독은 해외판 편집권도 보장받게 되었고 공동 저작권 권리역시도 보장받게 되었다.[72] 당시엔 결혼후 법적이름인 마츠야마 히데코로 정식 출석[73] 일본 민방련/JBA-THE JAPAN COMMERCIAL BROADCASTERS ASSOCIATION[74] 당시에는 NAB-전일본상업방송협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75] 일본 국영방송 NHK를 제외한 일본의 모든 민영방송국이 소속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