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3:38:17

호조 마사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실
미다이도코로
호조 마사코
北条政子
파일:Hojo_Masako.jpg
<colbgcolor=#021f70> 출생 1157년
사망 1225년 8월 16일 (향년 69세)
재임기간 미다이도코로
1192년 ~ 11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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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21f70> 본명 마사코(政子)[1]
법명 안뇨인(安養院)
통칭 아마미다이(尼御台)[2]
아마쇼군(尼将軍)[3]
부모 친부 호조 도키마사
친모 이토 스케치카의 여식
형제자매 오빠 호조 무네토키
남동생 호조 요시토키
이복남동생 호조 도키후사
남동생 아와노쓰보네
여동생 도키코
배우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1177년 무렵 결혼) }}}}}}}}}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 헤이안 시대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인물.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아내. 이즈 반도호족이었던 호조 토키마사이다. 당대의 명칭은 미다이(노)도코로(御台所),[4] 아마미다이(尼御台), 아마쇼군(尼将軍) 등으로 불렸다.

2. 생애

기록을 보면 상당한 여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 지역으로 유배당한 요리토모가 집도 절도 없이 자기 아버지에게 의탁하러 오자 한눈에 "이 남자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시 시대상 여자로선 생각하기 힘든 행동력[5]으로 아버지가 교토에 올라간 사이 요리토모를 잽싸게 낚아채고 큰 딸인 오히메를 낳았다.[6] 이후 아버지 도키마사는 타이라 가문이 알까 두려워 마사코를 당장 시집 보내려고 하자, 밤 중에 몰래 빠져나와 요리모토가 있는 산 너머 절로 달려갔다. 도키마사는 낭패란 것을 알았지만, 타이라 가문의 세도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 여겨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사위가 된 이상 팔은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었기에 호조 가문이 비축한 상당한 군사력과 지원이 요리토모를 뒤따랐으며, 이것이 요리토모의 세력 재건에 핵심적인 힘이 되었다.

시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형에게 팽당해 도망치는 와중에 그와 헤어져서 체포, 가마쿠라로 압송된 시즈카 고젠을 보고 마사코는 유명 예능인이 모처럼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왔으니 돌아가기 전에 츠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춤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병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던 시즈카는 결국 억지로 춤을 봉납하게 된다. 그런데 시즈카는 이 자리에서
しづやしづしずのをたまきをくり返し 昔を今になすよしもがな
吉野山峯の白雪ふみ分て 入りにし人の跡ぞ恋しき
시즈[7]여 시즈 시즈의 실꾸리를 다시 감듯이 옛날을 지금으로 되돌렸으면[8]
요시노 산봉우리 흰 눈을 헤치고 들어가신 이의 자취가 그리워라

라며 요시츠네와의 사랑을 노래했다. 주변 사람들은 신에게 바치기에 이만한 공연이 없다고 상하 모두 감동해 마지 않았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간토 지방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행사에서 감히 역적을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며 격노했는데, 이때 마사코가 막아서서[9] 이렇게 말한다.
나리께서 죄인으로 유배형에 처해져 이즈에 칩거하셨을 적, 저는 나리와 연모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호조 님[10]께서 당시 정세를 두려워하셔서 몰래 저를 가두셨습니다. 그런데도 전 나리를 만나고 싶은 나머지 칠흑같은 밤중에 장대비를 맞으며 나리 곁으로 달려갔지요. 그런가 하면 이시바시 산 전투[11]에서 하시리유 신사에 도망가 있을 적에는 나리의 생사를 알 수가 없어서 매일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을 생각하니, 지금 시즈카 고젠이 요시츠네가 예전에 사랑해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야말로 정절을 굳게 지키는 열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춤사위의 겉모습도 멋졌지만 저는 그 속에 움직이던 감정에도 감사하고 싶습니다. 정말 매혹적입니다. 거꾸로 상을 주시는 게 마땅하지요.

이에 요리토모는 결국 마지못해 입고 있던 옷을 벗어[12] 시즈카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된 일화이다.[13]

남편 요리토모의 사후 카마쿠라 정권의 고케닌,御家人,[14]들은 막부의 실권을 둘러싸고 개싸움 내전에 돌입, 숙청과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막부 초기의 숙청 전쟁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가문은 초대 쇼군외척 가문이자 카마쿠라 막부의 최대 투자자였던 호조 가문이었고, 이 당시 호조 가문의 실권자[15]는 아마미다이(尼御台) 마사코와 그녀의 동생 싯켄(執權)[16] 호조 요시토키였다. 한편 이 숙청 전쟁 과정에서 초대 쇼군의 직계 혈통마저 멸문지화를 겪었는데, 요리토모의 핏줄을 잇는 직계[17]는 물론 카와치 겐지의 방계[18]로부터도 쇼군을 배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쇼군의 보좌직에 불과했던) 싯켄을 세습하던 호조 가문의 영향력이 막부에서 점점 커지게 되었다.[19]

한편 이 시기 교토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고토바 상황은, 막부의 실권을 움켜쥔 요시토키가 차기 쇼군 문제로 사사건건 자신과 충돌함에 따라서 요시토키에게 불만을 품게 되고, 조큐 3년(1221년)에 이르러서는 싯켄 요시토키 토벌령[20]을 내리기까지에 이른다. (조큐의 난) 이때 비구니 쇼군(尼将軍) 소리를 듣는 거물 정치인이었던 마사코는, 고토바 상황이 요시토키 한 사람을 넘어 바쿠후 체제 자체를 위협[21]한다며 죽은 남편 요리토모의 은혜를 입은 자는, 조정의 잘못된 칙령을 두려워 말고 일어나 싸우라는 식으로[22] 관동무사(坂東武者)들을 선동해[23] 군을 일으킨다. 이후 막부군은 조정군을 분쇄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지켜냈다.

막부는 교토로 쳐들어가 고토바 상황을 오키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난에 가담했던 공경귀족, 무사들을 모두 참수하는 등 엄격하게 처벌했다. 또 참수한 귀족들에게 몰수한 영지는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포상으로 내렸다. 이후 마사코는 조정을 감시하기 위해 교토에 막부 기관인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설치했다. 이후 로쿠하라탄다이는 행정, 사법을 총괄하는 조정과 막부의 최고기관이 되었다.[24]

1225년 마사코는 과로로 사망했다. 다음 해 요리토모의 직계 혈통이 끊긴 가마쿠라 막부는 요리토모 여동생의 아들 후지와라노 요리츠네를 교토로 불러 쇼군으로 세우고, 요리토모의 손녀 다케노 고쇼[25]를 그와 혼인시켰다. 그러나 고쇼가 아이를 사산하고 산후병으로 사망하면서 요리토모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이후 마사코의 동생 호조 요시토키를 필두로 한 호조 가문 싯켄 정치가 일본을 좌지우지하게 되는데 호조 가문은 사실 칸무 헤이시의 일족이다.[26]

3. 평가

일본 3대 악녀로 꼽히기도 하지만[27] 모략이 판치는 중세 일본의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난세 속에서 남편 요리토모의 유지를 이어 관동의 거친 무사들을 조정하고 가마쿠라 막부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도 있다. #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로 싯켄 호조 씨에 대한 미화가 많이 들어갔다고 평가되는 《아즈마카가미》는 호조 마사코를 중국 전한(前漢)의 여후(呂后)나 일본 신화의 진구 황후(神功皇后)의 환생으로 비유하며, 일본의 왕업의 기틀을 지키도록 신이 내려준 옹호라고 칭송한다. 천태종 승려 지엔(慈円)은 《구칸쇼》에서 마사코의 권세를 가리켜서 "여인이 이룬 일본국"이라고 평가하였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는 "이 일본국은 희씨국(姫氏国)이라 하여 여자가 다스려야 하는 나라라고 한다"며 호조 마사코부터 히미코(卑弥呼), 나라 시대(奈良時代)의 겐메이 천황(元正天皇)이나 고켄 천황(孝謙天皇) 등의 고사를 들고 있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나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의 《난태평기(難太平記)》에서도 가마쿠라 막부를 주도한 마사코의 평가는 높다.

사실상 호조 마사코가 없었다면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하는) 카와치 겐지의 부활[28]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며, 바쿠후 체제, 그리고 일본사도 어찌 바뀌었을지 모른다.

4. 대중매체에서



[1] 당시 일본 여성들에겐 성씨가 없었다는 설이 일반적이기에 "호조 마사코"라는 명칭은 현대 일본의 작명법으로 끼워맞춘 역사적 용어에 불과하다.사실 마사코(政子)라는 이름도, 남편의 죽음으로부터 19년 뒤 켄포 6년(1218년) 종3위의 품계를 받기 위해 조정에 이름을 제출할 때, 부친의 이름 도키마사(時政)에서 한글자를 따와 마사코(政子)라 보고한 것을 기원으로 본다. 그 이전의 성명은 불명.[2] 출가한 부인이라는 뜻.[3] 비구니 쇼군.[4] 다이진(大臣)이나 쇼군(将軍)아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전근대 시절의 관습을 살려 의역하자면 대부인(大夫人)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5] 남편 요리토모가 정실부인인 자기 대신 (亀の前, 카메노마에)을 끼고 돌며 외도를 벌이자, 첩실이 살던 저택을 싸그리 개박살내버리기도 했다.[6] 오오히메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겐페이 전쟁 때 오히메가 6살 때, 키소 요시나카의 아들 요시타카와 정략결혼한다. 이후 요시나카가 몰락 후 요리토모에게 사망하자 요리토모는 훗날 화근이 될 요시타카를 죽일려고 하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오히메가 꾀를 내어 요시타카를 시녀로 변장시켜 탈출시킨다. 하지만 격분한 요리토모가 추적자를 보내서 결국 요시타카는 죽고 오히메도 요시타카가 죽었다는 소식에 시름시름 앓는다. 마사코 입장에서 딸이 몇달이나 병석에서 일어나질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요시타카를 죽인 무사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서,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뒤로 몰래 오오히메와 상의하지 않고 요시타카를 살해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며 요리토모를 몹시 갈궜고, 마침 스스로도 당황해하던 차에 그 무사를 죽이면 오오히메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요리토모는 황급히 애꿎은 토나이 미츠즈미를 참수했지만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오히메는 요절하게 되는데 일부 요리토모나 겐페이전쟁을 다루는 만화나 소설에서는 이 사건이 시즈카 고젠 사건(갓 태어난 요시츠네의 자식을 죽인 사건. 이때도 마사코가 요리토모를 말렸다.)과 같이 마사코가 요리토모와 반목되게 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7] 옷감인 '시즈'와 시즈카 자신을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8] 이 노래 자체는 '이세모노가타리'의 노래를 차용한 것이다.[9] 본인도 이즈로 유배 온 요리토모에게 반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자 야반도주까지 감행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시즈카에게 크게 공감했던 것.[10] 마사코의 아버지 호조 토키마사를 말한다.[11] 요리토모가 헤이케에 대항해 거병한 이후의 첫 전투. 요리토모는 이 전투에 대패해서 동굴로 숨기까지 했다.[12] 당시의 예능인들에게는 공연 주최자가 입고 있던 귀한 옷을 벗어서 포상을 주었다.[13] 호조 집안을 다소 미화하는 편인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요리토모의 비정한 모습을, 마사코의 인정많은 모습을 자주 그리고 있다. 비극적인 오히메 사건에서도 사위 요시타카를 죽였다면서 요리토모를 다그쳤고, 시즈카를 불러내 공연을 연 것도 냉혹한 요리토모에게 어필해 구명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러한 호조 집안에 대한 미화의 일부로 해석된다.[14] 가마쿠라 막부 시대 쇼군과 주종 관계에 있던 무사를 뜻하는 말로, 점차 무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15] 숙청 전쟁 과정에서 마사코와 요시토키 남매는 그들의 친아버지이자 호죠 가문의 원래 당주였던 싯켄 토키마사마저 제거하기에 이른다.[16] 막부재상[17]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포함한 요리토모의 직계자손의 죽음에는 배후에 호조 가문이 있다는 가설이 유행하면서, (호조 가문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마사코는 덩달아 친정집을 위해 친자식들과 손자를 죽인 악녀의 별명을 얻게 된다.[18]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등 카와치 겐지의 유력 인사들은 요리토모 대에 이미 권력다툼, 토사구팽, 숙청을 겪은 경우가 많았고, 요리토모의 마수로부터 살아남은 이들도 초대 쇼군 사후 벌어진 권력 다툼에서 모조리 참살당했다.[19] 사실 그렇다고 호조 가문이 오래 간 것도 아니었다. 달리 보면 겐지와 마찬가지인 셈. 차이점은 겐지의 경우 같은 겐지를 죽였지만 호조 역시 겐지를 죽였다는 것(...)과 그로 인해 자신들의 힘이 빠졌다는 것. 어차피 호조의 힘 역시 겐지였으므로 겐지를 죽인 것은 곧 자신의 힘을 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20] 인센(院宣) : 상황이 내리는 선지.[21] 고토바 상황의 목적이 요시토키 개인의 제거(최근 학설)였는지, 막부 체제 자체의 타도(통설)에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이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관련 연구로는 나가무라 요시토모(長村祥知, 2016)를 참조.[2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은혜는 산과 바다와 같다. 조정을 토벌하라. 떠날 자는 떠나라."[23] 당시 관서의 무사들은 조정의 토벌군으로 막부를 토벌하러 쳐들어오고 있어 막부의 무사들 중에는 미우라당(三浦党)처럼 호조가문의 패권에 불만을 가진 고케닌도 있었고, 상황의 칙령에 반해 요시토키를 비호하다가 자기마저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24] 그러나 토지를 몰수당한 공가 무사들은 생존을 위해 세토(瀨戶) 내해(內海)에서 해상 무장 세력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고려 등 이웃 국가들에 왜구가 들끓게한 결과를 초래하였다.[25] 2대 쇼군 요리이에의 딸이다.[26] 물론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헤이케와는 세부 분파가 다르다. 그러나 아무튼 둘 다 칸무 헤이시의 혈통이며, <<태평기>>에서도 호조 가문을 타이라 씨라고 칭한다.[27] 주로 에도 시대에 유학의 영향으로 이런 평가가 많이 나왔다. 미토학의 관점에서 편찬된 《대일본사》나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라이 산요 등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에 남편의 막부를 지킨 공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두 아들(요리이에, 사네토모)의 비명횡사와 시댁(가와치 겐지)의 멸망을 방조하고 친정(호조 씨)이 가마쿠라 막부를 장악하도록 한 것이나, 남편의 다른 부인들에 대해 보인 질투도 "부인으로서의 인륜을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이 일면서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나 요도도노(淀殿)과 같은 악녀로 보는 평가도 나오게 된다.[28] 카와치 겐지는 헤이케(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주축으로 하는 이세 헤이시)와의 다툼에서 멸문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외척 호조 가문의 도움으로 부활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열지만, 서로 싸우고 그 호조씨의 득세로 3대를 못넘기고 결국 멸문한 것은 아이러니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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