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02:35:51

덕수궁 정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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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81호 82호 83호
덕수궁 석조전 서관[A] 덕수궁 정관헌[A] 창경궁 대온실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정관헌
德壽宮 靜觀軒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수량 / 면적 1동 지상 1층, 지하 1층, 바닥면적 297.1㎡
건축시기 1897년 ~ 1901년 사이 (창건)
설계자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 (추정)
파일:정관헌.png
<colbgcolor=#e3ba62> 정관헌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00428.22019200729i1.jpg
정관헌 동측면
파일:덕수궁_정관헌.jpg
정관헌 야경[3]
1. 개요2. 용도3. 역사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colbgcolor=#e3ba62> 정관헌 영상
덕수궁에 있는 양관, 덕홍전함녕전의 북쪽 언덕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어진 황궁인 만큼 경내에 여러 채의 서양식 건물, 즉 양관(洋館)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정관헌이다.

다만, 정관헌은 다른 양관들과 달리 한국 전통 가옥의 일부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러시아 제국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4]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관(靜觀)'은 '조용히(靜) 바라본다(觀)'라는 의미이다.

2. 용도

건물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의견이 있다. 그 중 고종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카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진 관련 기사만 나온다. 1901년(광무 5년) 2월에 태조 이성계의 준원전 본 어진을 이곳에 모시라는 기록을 시작으로##[5], 고종순종초상화[6]를 보관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순종실록부록》의 기사도 1912년에 여기 있던 어진들을 중화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7]

실록보다 더 기사량이 많은 《승정원일기》에는, 어진 외에도 신하들을 접견한 것과## 봉심[8]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정관헌이 애당초 카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다만, 전용카페는 아니더라도 황실에서 생활 공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제기된다. 1920년 5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자규(子規)야[9] 우지마라 주인(主人) 일흔[10] 덕수궁(德壽宮)을 백량동작생황진[11]이 옛이야기가 아니로구나〉에서는 정관헌을 '고종이 아기였던 영친왕과 함께 여름 더위를 잊던 곳'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1915년 덕수궁 실측 자료인 〈덕수궁 원안〉에 따르면, 내부에 서양식 욕실이 설치되었으며, 지하층에는 조리시설을 갖춘 주방이 딸려 있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일상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건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정관헌은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종 시대에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확실하게 기록된 일은 1902년(임인년) 어진과 예진의 모사 작업이다.

어진 모사는 숙종 대에 시작되어 영조·정조 시대를 거치며 10년마다 시행되는 관례가 되었다. 어진을 모사하는 장소로는 정조 대의 창덕궁 서향각, 철종 대의 창덕궁 희정당이 대표적이다.

서향각은 창덕궁 내 왕실의 서재로, 임금이 독서와 학문 연구를 하며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기록을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희정당은 본래 정무를 보는 공간이었지만, 왕이 일상을 보내며 서재로도 활용한 곳이었다.

정조를 계승하려는 의식이 강했던 고종은 1874년(갑술년) 자신의 어진을 서향각에서 모사했으며, 1864년(갑자년)부터 1873년(계유년)까지 왕실의 책보를 같은 곳에 봉안했다. 이를 고려하면, 고종 역시 덕수궁에 서향각과 같은 공간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역할을 한 건물이 바로 정관헌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덕수궁의 건물 중 즉조당석어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은 1897년(건양 2년) 이후에 신축되었고, 1901년(광무 5년) 작성된 태조 어진의 정관헌 봉안 기록을 고려하면, 1897년과 1901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2]
파일:일제강점기 정관헌.png
<colbgcolor=#e3ba62> 일제강점기 정관헌[13]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비었고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많은 전각들을 허물었다. 그럼에도 정관헌은 살아남았다. 다만, 관람객들을 위한 찻집, 카페로 쓰이면서 본래 내부와 외부가 분리된 구조였지만 벽채를 없애서 연회장처럼 만들었다.

1919년 고종승하한 후, 덕수궁은 한동안 비어 있었다.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며 많은 전각을 철거했으나, 정관헌은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후 찻집과 카페로 활용되면서, 원래 내부와 외부가 분리된 구조였던 건물의 벽체가 철거되어 개방형 연회장처럼 바뀌었다.
파일:1977년 정관헌.jpg
파일:1998년 정관헌.jpg
<colbgcolor=#e3ba62> 1973년 덕수궁 휴게실로 쓰이고 있는 정관헌 <colbgcolor=#e3ba62> 1998년 정관헌에서 다과회를 연 모습
8.15 광복 이후 한동안 '덕수궁 휴게실'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으며,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주최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비롯해 각종 모임과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1977년 개봉한 윤정희 주연의 영화 〈야행〉에는 카페로 운영 중이던 정관헌의 내부 모습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현재와 달리 칸마다 쇼윈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현대식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은 정관헌을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 전체가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되고 있어 영역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지정이 해제되었다.

4. 구조

이 포스팅을 참조. 자세하게 정리를 잘 해놓았다.

5. 여담

  • 건물 동남쪽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관헌 촉각 모형이 있다.
  • 문화재청에서 2006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에 한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동절기는 오후 4시 30분까지) 정관헌 내부를 시민에게 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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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2020년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행사 영상
대한제국 관련 문화 행사를 많이 연다. 2010년부터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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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를 개최한 10년 간 시민 2만명이
참관했다는 내용을 다룬 2018년 9월 28일 자 YT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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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중들에게 고종카페로 알려져서 그런지, 스타벅스[14]에서 시민들에게 명사들의 강연 프로그램과, 커피간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를 2009년부터 매년 가을에 이곳에서 진행한다.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이 직접 만든다고 한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이동에 이름이 같은 '정관헌'이란 카페가 있다. 실제로 덕수궁 정관헌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며 카페 분위기도 이에 걸맞게 클래식한 것이 특징이다.##

[A] 2008년 6월 23일 지위 박탈, 사적 124호로 통합.[A] [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린다. 근대기 서울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5] 저 당시 역대 임금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베껴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6] 당시 순종황태자였기에 그의 초상화는 어진이 아닌 예진(睿眞)으로 불렸다.[7] 단, 《순종실록부록》은 일제가 만들었고, 일제강점기고종(이태왕)순종(이왕)의 동정을 다뤘기에 《조선왕조실록》으로 보기엔 힘들다. 더군다나 조선 시대를 다룬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일제의 이왕직에서 펴낸 것이기에 정식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8] 奉審. 왕명으로 왕실사당이나 무덤, 초상화 등 여러 시설과 물건들을 관리하고 점검하던 일.[9] 두견새.[10] '잃은'의 당시 표기법.[11] 柏粱銅雀生黃塵. "잣나무 서까래 구리로 만든 새는 누런 먼지만 내고 있네"라는, 당나라 시인 왕발(650 ~ 676)의 시 〈임고대편(臨高臺篇)〉에 등장하는 구절로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12] 당시 역대 임금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복제본을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1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4] 2009년 문화재청과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맺고 현재까지 다양한 문화재 보호활동을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