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17:02:44

덕수궁 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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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운교 / 홍교
德壽宮 雲橋 / 虹橋
위치 경희궁 방면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궐외각사 방면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건축시기 경희궁 방면 1902년 (창건)
/ 철훼시기 미상 (1908년 8월 추정)
궐외각사 방면 1902년 (창건)
/ 철훼시기 미상 (1914년 이후 추정)
1. 개요2.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2.1. 여담2.2. 매체에서
3. 궐외각사와 연결했던 운교

[clearfix]

1. 개요

덕수궁에 있었던 육교이다. ‘운교(雲橋)’ 또는 ‘홍교(虹橋)’로 불렸다. ‘운교’는 ‘구름(雲) 다리(橋)’란 뜻이고, ‘홍교’는 ‘무지개(虹) 다리(橋)’란 뜻으로, 홍예(虹蜺)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2개였다. 하나는 서북쪽에 위치했으며 경희궁을 잇는 다리였고, 다른 하나는 서남쪽에 있었으며 의정부 청사를 잇는 다리였다. 이렇게 궁궐 안팎을 연결하는 육교를 놓은 것은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문서에서는 두 다리를 함께 다룬다.

2.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파일:서대문 운교.png
<colbgcolor=#e3ba62>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A].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자료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1898년(광무 2년) 9월 7일 자 《매일신문[2] 기사에 건립 계획이 나와있다.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 상림원 뒤부터 서궐(경희궁) 개양문까지 구름다리를 놓고 흥화문 앞부터 홍릉[3]까지 철로[4]를 놓는다 하더라[5]
그러나 1902년(광무 6년) 8월 23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는 공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또한 개화기한국에 있었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쓴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도 운교 건설 소문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아 1898년(광무 2년)에는 계획만 짰고, 공사는 이 무렵부터 진행한 듯 하다.
경운궁 안에서 서궐까지 어로를 새로 지으려는데, 홍교를 새로 설치해서 그 아래로 전차가 지나다니게 하고 오늘부터 짓기 시작한다더라[6]
《더 코리아 리뷰》에 따르면, 그해 10월에 운교를 이미 다 지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공사 기간은 대략 1달에서 2달 정도인 듯하다.#

폴란드 출신 러시아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한 말에 따르면, 한국인 신문균과 규마(kiuma)가 건축했다고 한다.# 그는 운교에 대해 한국 건축 중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평하면서도,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세웠으며, 나라의 회계장부에 공공이익작업에 쓴 돈이라 비밀스럽게 적은 액수가 어디에 쓰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비판했다.#

이 운교를 왜 지었는지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다만, 몇몇 기록을 통해 추론해보자면, 대한제국 정부에서 고종 즉위 40년[7]을 기념하여 대규모 칭경예식을 계획했고 그 행사의 일환으로 군대 사열식인 관병식을 거행하려했는데 그 관병식을 경희궁에서 열 예정이었기 때문에,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편하게 드나들기 위해 지은 듯하다. 당시 경희궁은 건물 몇 채 있는 것 빼고는 허허벌판이었고[8], 그래서 관병식을 개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사정 상 칭경예식을 여러 번 미루다 결국 영원히 치르지 못했다. 그래도 운교는 남았고, 고종이 간간히 경희궁 황학정에 활쏘러 갈 때 이용했다.

현재는 없으며 언제 철거했는지 확실하게 모른다. 일본인 오다 쇼고(小田 省吾)는 책 《덕수궁사》에서 1908년(융희 2년)에 헐었다고 적었는데,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같은 해 8월까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그 이후에 없앤 듯 하다.#

2.1. 여담

  • 1902년(광무 6년) 11월 12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다리가 러시아 공사관 경내를 침범했다하여 공사관 측에서 다리 한가운데에 철책을 세우고 통행을 막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리 길이 막히다.

    새문(돈의문)[9] 안에 새로 건설하는 홍교의 건축공역을 이미 다 마쳤는데 그 자리가 모 나라 공사관[10]의 조계지 경계를 지나간다하여 해당 공사관에서 못다니게 하고 홍교 중간을 철책으로 가로막았다는 설이 있더라.[11]

2.2. 매체에서

파일:미스터 션샤인 육교.png
<colbgcolor=#e3ba62> 〈미스터 션샤인〉 촬영장 션샤인랜드에 재현해놓은 운교[12].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다.
2018년 tvN에서 방송한 〈미스터 션샤인〉에 경운궁경희궁을 잇는 운교가 등장했다. 다만, 세트장(선샤인랜드) 공간 문제로 인해 실제로는 약 1.1 ~ 1.2km나 떨어진 종로 보신각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나왔다.

3. 궐외각사와 연결했던 운교

파일:경운궁 남쪽 운교.png
<colbgcolor=#e3ba62> 궐외각사와 연결했던 운교[13]
경운궁 서남쪽에 있었던 육교로, 경운궁과 궐외각사를 연결하던 다리였다.

궐외각사는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주요 관청들로, 행정 편의를 위해 일반적으로 임금이 머무는 궁궐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고종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을 거처로 삼았는데, 경운궁은 원래 궁궐로 쓰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14] 궐외각사가 멀리 있었다. 그래서 고종은 경운궁 근처에 궐외각사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부지로 쓰려고 경운궁 남쪽에 있던 독일공사관 터를 사들였다.

그 후 1901년(광무 5년) ~ 1902년(광무 6년)에 중화전을 짓기 위해 경운궁 영역을 남쪽으로 넓히는 공사를 했다. 그러면서 당초 궐외각사 부지로 쓰려던 땅까지 궁역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기존 경운궁 남쪽 궁장을 따라 나있는 길이 있었는데, 궁역을 넓히면 그 길을 폐쇄해야 했던 것. 경운궁 남쪽 길은 각국 외교공관 직원들과 정동에 살던 서양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기 때문에,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 폐쇄 계획을 발표하자 심한 반발이 생겼다. 각국 공사들은 반대 의견을 냈고, 이에 고종은 경운궁 남쪽 길을 없애지 않기로 했다. 대신 궁역에 포함시키려했던 구 독일공사관 터와 경운궁 본궁 사이에 육교를 놓아 서로 연결시키고, 다리 밑에 길을 놓아 통행에 지장이 없게 했다. 그렇게 지은 것이 서남쪽 운교이다. 운교 건설로 인해, 고종은 경운궁 영역 남쪽 방향 확장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때 확장한 궁장을 따라 만든 새 길이 바로 현재 덕수궁 돌담길 산책로이다.
파일:경운궁 확장 전후.png
<colbgcolor=#e3ba62> 경운궁 남쪽 궁장 확장 전(왼쪽)과 확장 후 길의 변화(오른쪽)
파일:운교 방향.png
운교 구조[A]
지금은 없으며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듯 하다. 현재 덕수궁 서남쪽 궁장에 옛 운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파일:운교 흔적.png
<colbgcolor=#e3ba62> 운교 흔적[16]

[A] 사진 출처 - 문화재청.[2]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는 다른 신문이다.[3]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이 아닌, 청량리에 있었던 홍릉이다.[4] 서울전차 노선을 말한다.[5] 원문: 경운궁 북문 근쳐로브터 셔궐 ᄀᆡ양문 ᄭᆞ지 구름다리를 놋코 흥화문압 브터 홍릉 ᄭᆞ지 텰로를 놋ᄂᆞᆫ다ᄒᆞ더라[6] 원문: 慶運宮內로셔 西闕內ᄭᆞ지 御路를 新築ᄒᆞᄂᆞᆫᄃᆡ 虹橋를 新設ᄒᆞ야 其下로 電氣車가 來往케ᄒᆞ고 今日붓터 始設ᄒᆞᆫ다더라[7] 고종이 1863년에 즉위했으니 1902년이 햇수로 40년이 된다.[8] 1860년대 중반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 건물 대부분을 헐어다 자재로 썼다.[9] 돈의문은 다른 한양도성 대문들과 달리, 조선 초에 몇 번에 걸쳐 새로 지었기 때문에 '새문'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10] 모 나라가 러시아 제국이다. 해당 국가의 실명을 밝힐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듯 하다.[11] 원문: 橋成路阻 新門內新設ᄒᆞᄂᆞᆫ 虹橋의 建築工役이님의 告竣ᄒᆞ얏ᄂᆞᆫᄃᆡ 該基址가 某國公舘의 租界地段으로 犯入ᄒᆞ얏다고 該公舘에셔 通行치못ᄒᆞ게ᄒᆞ고 虹橋中間을 鐵索으로 橫斷ᄒᆞ얏다ᄂᆞᆫ 說이 有ᄒᆞ더라[12] 사진 출처 - 충청남도.[13] 사진 출처.[14] 원래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집과 민가였던 곳을, 임진왜란 후에 잠시 행궁으로 사용한 것이 경운궁 역사의 시작이다. 광해군 때는 소성대비의 유폐소였고, 인조 즉위 직후에는 건물 2채를 뺀 나머지를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몇 백 년간 방치했던 이었다. 다시 궁궐로 기능하기 시작한 건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머물면서부터였다.[A] [16] 사진 출처 - 카카오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