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1 09:40:40

이시애

1. 개요2. 생애3. 같이보기

1. 개요

李施愛
(? ~ 1467)

조선의 무관이자 이시애의 난의 주도자. 이인화의 아들, 이원경(李原景)[1]의 손자.

2. 생애

함경도 길주 사람으로 1458년 경흥진 병마절제사, 1460년 경흥부사, 1461년 첨지중추원사, 1463년 판회령부윤을 지냈다.

세조와 정난 공신들의 전횡으로 민심이 사나웠다. 게다가 호패법을 강화해 함길도 사람들이 불만을 품자 선동한 후 1467년 이시합과 함께 반란을 모의해 절도사를 자칭해 난을 일으켰다. 영리하게도 강효문이 황기곤, 신숙주, 한명회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서신을 조선 조정에 보내 자중지란을 유도하고 강효문을 추격해 때려 죽이고 함길도 방면을 각개격파해 나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시애가 일으킨 난임을 알게 되자 구성군 이준을 보내 이시애를 토벌하게 했으며 6월 24일 토벌군인 강순이 나무를 벌채해 안에 목채, 밖에 녹각성을 설치하고 농성했다. 이시애는 1만 6천여 명을 이끌고 포위했지만 강순의 군사가 분발하면서 공략에 실패한다.

8월 4일 거산역동의 결전에서 토벌군 어유소가 반란군의 좌측을 무너뜨리자 토벌군의 총공세로 반란군이 무너졌다. 이시애는 도망갔고 이준의 군사가 마운령을 넘어 영제원에서 진을 치자 이시애는 단천에 주둔했다. 결국 허유의 계책으로 부하인 이주, 이운로 등에게 유인되어 이시합과 함께 붙잡혀 압송돼 음력 8월 12일 거열형을 당했다.

3. 같이보기



[1] 원나라의 동녕부동지로 몽골 이름은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 공민왕 19년(1370년) 이성계가 우라산성을 칠 때 이성계에게 저항하려다 "내 조상은 원래 고려인입니다"라며 항복해 고려에 귀순한 사람. 제1차 요동 정벌 당시 요양을 지키고 있던 처명에게 이성계를 대신해 항복을 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