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상시 | |
조선 예문춘추관대학사 한상질 韓尙質 | |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출생 | 1350년 |
사망 | 1400년 |
본관 | 청주 한씨 |
자 | 중질(仲質) |
호 | 죽소(竹所) |
고려조 관직 | 형조판서 (1390) 우상시 (1390) 예문관제학 (1390)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절제사 (1390) |
조선조 관직 | 양광도관찰출척사 (1393) 경상도관찰출척사 (1397) 예문춘추관대학사 (1397) |
조부 | 한공의(韓公義) - 호부상서 |
부친 | 한수(韓脩) - 판후덕부사 |
동생 | 한상경(韓尙敬) - 영의정부사 서원부원군 |
배우자 | 초배: 창화군부인 경주 이씨[1] 재배: 청풍 송씨 송신의(宋臣議)[2]의 딸 |
아들 | 한기(韓起) - 사헌부감찰 증 영의정 |
손자 | 한명회(韓明會) - 영의정 상당부원군 |
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한수의 아들, 개국공신 3등 한상경의 형, 한기의 아버지, 한명회의 조부.2. 활동
청주 사람으로 성품이 총명하면서 민첩했고 1370년대에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성적이 좋았으며, 1374년에는 대군의 시학이 되었다.1390년 4월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있을 때 대간들이 이색을 탄핵했다가 탄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두 사직했고 공양왕이 그들을 좌천해 수령으로 삼자 이전의 직책을 그대로 주라고 상소했지만 거절당했다.
우상시에 임명되었다가 5월에는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고 6월에 천추절과 함께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1392년에 예문관 학사를 지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화령, 조선 중에서 국호로 선택할 국호를 정하게 했다.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이 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니, 임금이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은혜를 사례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그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소. 삼가 본부(本部)에서 지금 성지(聖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앞서 가게 하오."
임금이 감격해 기뻐하여 한상질에게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려 주고, 경내(境內)에 교지를 내렸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소. 삼가 본부(本部)에서 지금 성지(聖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앞서 가게 하오."
임금이 감격해 기뻐하여 한상질에게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려 주고, 경내(境內)에 교지를 내렸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1393년에 첨서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 서북면(양광도) 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1400년에 사망해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