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숭선군파의 역대 종주 | ||||||
1대 숭선군 이징 | → | 2대 동평군 이항 | → | 3대 반양도정 이소 |
조선 인조의 손자 동평군 東平君 | ||
봉호 | 동평군(東平君)[1] | |
본관 | 전주 이씨 | |
이름 | 항(杭) | |
자 | 제보(濟甫) | |
생부 | 숭선군 | |
생모 | 영풍군부인 평산 신씨[2] (永豊郡夫人 平山 申氏, 1639 ~ 1692) | |
부인 | 금성군부인 박혜 (錦城郡夫人 朴蕙, 1659 ~ 1727) | |
자녀 | 2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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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 음력 | 1660년 4월 8일 ~ 1701년 11월 8일 |
양력 | 1660년 5월 16일 ~ 1701년 12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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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인조의 서자 숭선군과 부인 신씨[3]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이다. 동생은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인데, 매우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사실상 동평군이 독자였다.2. 생애
1660년(현종 1년) 4월 8일[4] 숭선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왕이던 현종의 사촌동생이었지만 나이 차이는 아버지와 아들뻘에 가까웠으며[5] 당조카인 숙종보다는 고작 1살 위였다.[6]첫 작호는 동평정(東平正)이었고 나중에 동평군으로 승격했다. 1680년(숙종 6년)에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27세 때인 1687년(숙종 13년)에는 숙종(조선)의 명으로 오늘날의 국립중앙의료원격인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임명받아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을 도맡았다. 이 때 박세채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이 규정에 없는 일이라며 동평군을 파직할 것을 간했다. 그러나 숙종은 당숙인 동평군을 조금 후하게 대해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분노했고, 오히려 박세채의 관직을 삭탈했다.
동평군에 대한 숙종의 신임은 계속 두터워졌다. 1689년부터는 동지사의 정사(正使),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세 차례나 다녀오는 등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당대 뿐 아니라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동평군처럼 정치적, 외교적으로 큰 업무를 맡은 왕실 종친은 별로 없었다. 현대에도 특정 기관의 기관장으로 임명되거나 특정 국가의 특사로 다녀오는 등의 임무는 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측근이 맡을 정도이니 동평군에 대한 숙종의 신임은 상당했던 듯 하다.
그러나 숙종의 신임과는 별개로 다른 신하들에게는 끊임없는 투기와 모함을 받았다. 이를테면 1690년(숙종 16년) 아버지 숭선군이 항년 52세로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공주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묘역 작업을 하던 중 평소 숙종이 동평군을 편애하는 것을 언짢아하던 조정 대신들이 이기양이란 사람을 시켜 동평군이 주변 가옥 수백 호를 철거하고 아버지 묘를 옮기는 행패를 부린다는 터무니 없는 상소를 하여 작업을 멈추는 일이 있었다. 이에 동평군은 신문고를 울려 숙종에게 이 일을 호소했고, 숙종은 경조[7]에 명하여 낭관[8]들에게 잠입수사를 시켰다. 그 결과 이기양의 상소문 내용이 모두 거짓인 게 드러났고, 이기양을 비롯한 연루자들은 모두 체포당해 귀양갔으며 숭선군 묘지 일대 지역은 숭선군 가문이 하사받았다.
3. 역모 모함과 죽음
동평군은 1680년대 초 출궁했던 희빈 장씨가 어머니인 영풍군부인 신씨에게 의탁하면서부터 희빈 장씨와 그 오빠 장희재와 접촉하면서 친분을 다졌다. 그러던 와중 재입궁한 희빈 장씨는 아들을 낳고서는 급기야 왕비가 된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다시 입궁하면서 중전 장씨는 다시 후궁으로 강등당했고, 갑술환국 등의 여파와 인현왕후 사망 관련 논란으로 희빈 장씨는 결국 사약을 받았다.[9] 그리고 장희재의 본처 김작은아기의 폭로로 인해 동평군이 '세자의 모후가 마땅히 중전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장희재를 통해 희빈 장씨에게 전한 것이 들통났다. 장희재와 동평군은 유배를 갔으며, 이윽고 장희재는 참수당했고 동평군은 왕족인 점을 고려해 1701년 11월 8일 사사당했다. 항년 42세.나는 원통함을 안고 땅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황천과 일월이 나의 무죄함을 비추어 줄 것이며 후세에 군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다.
동평군의 유언
동평군의 유언
4. 복권
1864년(고종 1년) 7월 10일에 고종이 그의 신원을 복권시켰다.5. 가족 관계
- 부 : 숭선군(崇善君, 1639 ~ 1690)
- 모 : 영풍군부인 평산 신씨(永豊郡夫人 平山 申氏, 1639 ~ 1692)
- 누나 : 이효순(李孝順, 1659 ~ ?)
- 동생 : 이철순(李哲順, 1661 ~ ?)
- 동생 : 이희순(李喜順, 1663 ~ ?)
- 동생 :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
- 동생 : 이종순(李終順, 1667 ~ ?)
- 정부인 : 금성군부인 박혜(錦城郡夫人 朴蕙, 1659 ~ 1727) - 박세장(朴世樟)의 딸
6. 대중매체
숙종의 당숙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에서인지, 역대 장희빈 사극에 등장하는 동평군은 주로 숙종 역 배우들보다 나이가 많은 중견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는데 이는 재현 오류이다. 비슷한 경우로, 인현왕후의 계모인 풍창부부인 조씨는 실제 장희빈과 동갑인 1659년생으로, 의붓딸인 인현왕후와 고작 8세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나이 지긋한 배우들이 연기했었다. 그나마 2013년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젊은 또래 배우들인 유아인과 이상엽이 캐스팅되어,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는 당숙과 당조카라는 외모를 잘 재현했다.- 이상엽(아역 : 곽동연) - 2013년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1] 봉호는 생모의 본관지인 황해도 평산의 별호인 동양(東陽)에서 유래했다.[2] 장렬왕후의 큰언니인 조수임의 딸로, 장렬왕후의 조카이다. 따라서 동평군에게 장렬왕후는 적조모임과 동시에 외이모할머니가 된다.[3] 장렬왕후 조씨의 조카딸. 신혼 초기에 시어머니인 귀인 조씨가 효명옹주의 시녀 중 하나인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들이자, 시어머니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이러시는 거라며 이모한테 달려가 하소연을 한 것이 정말 뜻밖에도 김자점과 귀인 조씨, 그리고 효명옹주 모녀 내외의 역모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 인물로 유명하다.[4] 양력 5월 16일[5] 이는 동평군의 아버지 숭선군이 인조의 늦둥이라서 그런 것이다. 당시 인조나이 44세[6] 특히 숙종의 누나이자 현종의 장녀인 명선공주와도 고작 1살 아래인 연년생이다. 참고로, 장희빈은 동평군보다 1살 위이다.[7] 京兆. 서울과 서울의 행정을 담당한 한성부의 별칭.[8] 郞官. 각 관아의 실무책임자인 정랑과 좌랑을 통틀어 이르는 말.[9] 자진했다는 설도 있긴 하나 이덕수의 언급, 희빈 장씨 사후 숙종의 그녀에 대한 태도, 심지어 친아들 경종마저도 연산군과는 달리 왕이 되고서도 생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한 것 외에 친모에 대한 어떠한 옹호나 변호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순순히 자진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강제로 사약을 받고 사망한 것이 유력하다.[10] 1988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인현왕후》에서는 김춘택역을, 2002-03년작인 김혜수 주연의 장희빈에서는 남구만을 연기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뒤인 2013년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장렬왕후의 6촌 친척인 조사석 역으로 나왔다.[11] 1981년 MBC 여인열전에서는 숙종을 연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