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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 에르제 Hergé | |||
본명 | 조르주 프로스페르 르미[1] Georges Prosper Remi | ||
출생 | 1907년 5월 20일 | ||
벨기에 에퇴르베크[2] | |||
사망 | 1983년 3월 3일 (향년 75세) | ||
벨기에 월뤼웨생랑베르[3] | |||
국적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만화가 | ||
링크 | 공식 사이트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51538><colcolor=#fff> 묘지 | 벨기에 브뤼셀 위클 디에웨그 묘지 | |
신장 | 178cm | ||
학력 | 브뤼셀 생 뤼크 교육원 | ||
활동 | 1926년 ~ 1983년 | ||
부모 | 아버지 알렉시 르미 (1882~1970) 어머니 엘리자베트 뒤푸르(?~1946) | ||
배우자 | 제르멘 키켄스 (1932년 ~ 1977년, 이혼) 파니 로드웰 (1977년 결혼) | ||
종교 | 가톨릭 → 무종교(불가지론)[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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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땡땡 흉상 뒤에 앉아있는 에르제. 1980년대 사진으로 추정 | 오너캐 |
"유럽만화의 최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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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그리는 것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이므로 자연스럽게 예술적인 습성이 생긴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작가는 거의 없지만, 에르제는 그렇게 방대한 작품을 만듦으로서 이것을 완전히 피할 수 있었다."
장 지로 #
벨기에의 만화가. 그의 대표작은 땡땡의 모험 시리즈이다.장 지로 #
그는 유럽만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며, 세계만화사에서도 그의 위상은 일본의 데즈카 오사무, 미국의 윌 아이스너와 같은 인물들과 비교할 수 있다.[5]
2. 생애
2.1. 유년기
(5세 무렵의 에르제의 여장)[6]
(에르제가 어렸을 적에 엽서에 그린 그림)
에르제는 1907년 5월 22일에 벨기에 브뤼셀 외곽의 에퇴르베크(Etterbeek)[7]에서 아버지 알렉시 르미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뒤푸르 부부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이용 기성복을 파는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라는 평범한 벨기에 중산층 배경을 지녔으며 어려서부터 전형적인 벨기에 부르주아식 교육(천주교식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활발하게 활동하기 좋아해서 집에서 물건을 깨는 등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자 어머니가 조용히 있게 하려고 색연필이나 크레파스 같은 그림 도구들을 쥐어주었는데 그게 그림쟁이 인생의 시작이 되었다.
2.2. 청년기
중등 교육기에 가톨릭계 학교인 생 보니파스 학교를 다녔으며 명석하여 전체적으로 성적이 우수하였는데, 자신이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미술만 낮게 나와서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림 그리길 계속했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보이스카우트에 참여하여 단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서 "호기심 많은 여우(Renard Curieux)"라 불릴 정도였으며, 이로 인해 보이스카우트 총지도자의 눈에 들어 학교 스카우트 신문인 Jamais assez에 처음으로 만화를 연재를 시작, 월간지인 벨기에 보이스카우트지에도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1925년에 중등학교를 졸업한 에르제는 천주교 보수계열 신문인 "20세기 신문(르 벵티엠 시에클)"으로 들어가서 정기구독부에 취업해서 업무를 수행하면서 일러스트를 병행했다. 이 때 "풍뎅이 순찰대장 토토르"를 연재했다.
그러다가 에르제의 부모가 에르제를 그림쪽으로 나가게 하려고 생뤼크(Saint-Luc) 학교를 보냈는데, 에르제는 교육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다며[8] 조금 다니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1년간 군대에 있다가 다시 20세기 신문으로 돌아와서 활동했는데, 신문국장인 왈레즈 신부[9]의 눈에 들어왔다. 이 덕에 새로 간행되는 어린이 정기 부수매체인 소년 20세기 편집장을 맡게 되고, "플륍, 네네스, 푸세트, 코쇼네의 모험"을 연재했다. 그리고 국장이 "천주교계 기자로 세계에 선을 행하는 소년 영웅"을 창작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요구를 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10일, "땡땡의 모험" 첫번째 작품인 "소비에트에 간 땡땡"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에 간 땡땡을 연재한 해, 1929년의 에르제)
"땡땡의 모험"은 뜻밖으로 매우 성공적이어서[10] 계속 연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북역 행사를 찍은 사진
이후로 에르제는 콩고에 간 땡땡, 미국에 간 땡땡, 파라오의 시가를 계속 연재하였다. 그리고 1932년, 에르제는 가톨릭 신부 노르베르 왈레즈[11] 신부의 중매를 통해 왈레즈 신부의 비서인 제르멘 키켄스와 결혼한다.
2.3. 만화의 전환점: 창과의 만남과 그 이후
(에르제, 제르멘, 창)
파라오의 시가에 이어 에르제는 "극동에 간 땡땡" 시리즈 제작을 기획하면서 독자들에게 악랄한 중국인과 맞서싸우는 땡땡의 활약상을 보여주겠다는 식의 예고를 보냈다. 그러다가 루뱅 대학교 황실 미술관 장학생으로 들어온 중국인 유학생 창총젠[12]을 아는 신부의 주선으로 만나게 되었고, 창과 교류를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서양우월적인 편견에 빠져있었는지 깨닫고 만화의 방향을 예전에 계획했던 것에서 크게 수정하여 동양인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동양인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땡땡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만화를 그릴 때 단순한 슬랩스틱 개그를 나열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좀더 진지한 통찰을 담은 내용을 담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만 푸른 연꽃 편에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언급해서 일본 대사관 측의 항의를 받게 되자, 에르제는 가상의 국가를 내세워서 세태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부러진 귀는 이를 잘 보여주는 만화로, 산 테오도로스와 누에보리코라는 가상의 국가를 내새워 남미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만화 속에 담아내었다. 뒤이어 검은 섬, 오토카 왕국의 지휘봉, 검은 황금의 나라를 연재한다.
2.4. 독일군 점령기
그러다가 1940년, 나치 독일군이 쳐들어와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에르제가 일했던 20세기 신문은 폐간되었다. 따라서 에르제는 직장을 잃게 되었고, 벨기에 내에서 나치에 부역한 신문 르 스와르에 땡땡을 계속 연재하는 것으로 벌어먹고 살게 된다.르 스와르에서 연재하면서 에르제는 자기 만화 스타일에 혁신을 시도하도록 끊임없이 요구를 받게 되는데, 기존의 느리고 긴 만화 전개에서 벗어나서 신문에 수시로 연재하는 동안 장면의 전환을 빠르게, 한편 내용을 압축하여 다루도록 했으며, 이 과정에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 효과들을 만화에 응용했다.
(명료한 선 3인방: 자코브, 판 멜케베커, 에르제)
그리고 그 동안 성악가이자 만화가인 에드가 자코브, 색채를 독특하게 쓰는 것으로 유명한 화가인 자크 판 멜케베커와 같은 들과 교류하면서 미술적 역량을 쌓았고, 이는 명료한 선 양식을 탄탄하게 가꾸는 토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에드가 자코브에게서 영감을 얻어 아독 선장을 창조해 낸 것은 땡땡의 모험 전개에서 큰 혁신을 가져오게 되었다.
2.5. 벨기에 해방 이후: 잡지 땡땡 창간
하지만 독일군 점령기에 친나치 신문에 만화를 그린 것이 벨기에 해방 후에 덫이 되어 에르제는 나치 부역자로 낙인 찍히고 몇 년간 만화 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자코브와 OLAV라는 공동 가명을 사용하여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잡지 땡땡 창간호)
그러다가 레지스탕스 계열 청년실업가 레몽 르블랑이 에르제에게 손을 내밀어 땡땡 잡지를 설립하는데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였고, 에르제는 르블랑의 도움으로 성공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일곱 개의 수정구슬, 태양의 신전을 연재하고 이전에 나치가 20세기를 폐간하면서 중단되었던 만화인 검은 황금의 나라도 이어서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해지자 도피, 달 탐험 계획을 잠정적으로 연재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르멘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2년만에 만화 연재에 복귀, 달 탐험 계획과 달나라에 간 땡땡 연재를 마치고 책으로 출간했다.
2.6. 에르제 스튜디오 설립
(로켓 모형을 자세히 관찰하는 에르제)
에르제는 달 탐험 만화를 계획하면서 더 방대한 고증과 작업이 필요하게 되자 과거의 소규모 어시스턴트 체계(자코브, 멜케베크로 대표되는)에서 벗어나 대규모 인력을 고용할 필요성을 느껴 에르제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코브, 멜케베크와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지만, 자코브는 비록 땡땡 잡지에서 독립했다 해도 후에 다시 에르제의 친구로 지내게 된다. 또한 스튜디오 운영 과정에서 명료한 선을 잘 구현해내는 만화가인 봅 드 무어와 친분을 쌓았고, 이는 "해바라기 사건"과 "노예선"에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2.7. 개인적인 위기
width=6001958년 에르제 스튜디오 모임. 오른쪽에서 4번째 남자가 에르제. 맨 오른쪽의 남자는 에르제의 아버지인 알렉시 르미이며, 그 바로 옆의 여성이 에르제의 2번째 아내가 되는 패니 블라밍크이다.
당시 에르제의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고, 1956년경 무렵부터 스튜디오에 근무하는 컬러리스트인 패니 블라밍크(위 사진 오른쪽 2번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갈등이 심리적으로 큰 동요를 주었는지 당시 에르제는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고 유령이 따라다니는 악몽에 계속 시달려서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결국 스위스로 가서 정신상담치료를 받게 된다. 융의 제자였던 상담치료사는 정신을 온전히 추스리기 위해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말 것을 권했다.
하지만 에르제는 만화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 없었고, 개인적인 고뇌를 승화시킨 "티베트에 간 땡땡"을 그려내면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낸다. 티베트에 간 땡땡에 나오는 땡땡의 악몽, 끝없이 펼쳐진 설산은 에르제의 당시 심리적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에르제는 이를 신의와 우정을 통해 극복해낸다는 이야기로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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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제는 땡땡의 모험을 영화로 제작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1960년에 그 계획을 실현한다. 벨기에의 장피에르 탈보(Jean-Pierre Talbot)라는 배우를 땡땡 역으로 출연시켜 1961년에 Tintin and the Golden Fleece를, 1964년에 Tintin and the Blue Oranges를 개봉한다. 그러나 영화에 몰두하면서 아내와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어 별거하고 결국 이혼, 훗날 파니 블라밍크와 결혼했다.
2.8. 말년
1980년대에 에르제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빈혈 증세가 발생했는데, 뒤늦게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간은 지속적으로 수혈을 받아야했다.(창과 재회하여 대화를 나누는 에르제)
그로부터 1년뒤, 에르제는 창과 다시 만났다.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였지만, 에르제는 창을 만나 껴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이 장면은 TV로 생중계 되었다.
그리고 1983년 3월 3일, 에르제는 일 주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숨을 거두었다.
3. 기타
- 2007년에는 100세 생일을 맞아 그의 얼굴과 땡땡이 20유로 벨기에 기념화폐의 모델로 선정됐다. 에르제의 자화상이 왼쪽, 초상화 오른쪽에는 땡땡의 그림이 있다. 동전의 밑면에는 에르제의 서명이 그려져 있다.출처
3.1. 가족관계
그의 모호한 가족 기원 문제는 그의 심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 연구자들과 땡땡주의자들의 키배용 떡밥이 되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점화시킨 사람이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인데, 에르제가 가족의 비밀로 인한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작품에 반영되어있다고 주장했다.[13]그는 에르브 스프링겔의 연구를 인용하여, 에르제의 할머니 마리 드위뉴는 어느 귀족집에서 메이드로 일했다가 쌍둥이(에르제의 아버지와 숙부)를 임신했고, 배관공과 서류상 결혼을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어느 귀족집의 후원을 받아 길러졌으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정체를 함구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관련정보(영어)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알고보니 그 귀족이 몬테네그로 왕실과 관련이 있었더라는 것이었다. 에르제와 몬테네그로의 왕들
티스롱은 이를 토대로 에르제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는다고 할아버지의 정체에 대해 환상을 가졌고, 자기가 왕의 후손일 지도 모를 거라는 상상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기원이 될 동유럽 왕정국가에 대한 환상을 가졌고, "오토카 왕국의 지휘봉" 편은[14] 이러한 심리적 문제를 크게 부각시킨 작품이라고 보았다.
아버지 알렉시 르미는 옷가게 점원이었는데, 쌍둥이 동생인 레옹 르미가 있었다.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바로 뒤퐁과 뒤뽕 형사의 모델이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뒤푸르는 가정주부로 플란데런계였다, 심성이 여려서 전쟁 상황을 견뎌내지 못했고, 특히 에르제의 동생이자 군인인 폴 르미를 늘 걱정하다가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다가 일찍 별세했다. 이런 신경병리적 증상을 옆에서 지켜본 에르제는 땡땡의 모험에서 정신병 기믹을 가진 인물[15]들을 만들어 낸다.
다섯 살 터울 동생 폴 레옹 콩스탕 르미는 직업군인이었지만 그림 그리는데에 역시 소질이 있었다. 특히 말 그리기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서 후에 에르제의 그림에 이런저런 조언들도 해줬다.
결혼을 일찍 할 뻔했다. 12세부터 17세까지, 꽤 오래 사귄 여자친구 마리루이즈 판 퀴첨(줄여서 말루)이 있었는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밀루의 모델. 판 퀴첨의 아버지가 빅토르 오르타 아래에서 일하는 건축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말루의 아버지는 에르제가 가능성이 없어보인다고 관계를 끊으라고 엄포를 놔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내는 왈레즈 신부의 비서였던 제르멘 키켄스였는데 성향이 맞지 않아서 40대 무렵에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고 스튜디오의 컬러리스트였던 파니 블라밍크와 살림을 차렸다. 후에 이혼하고 파니 블라밍크와 재혼.
그리고 자식은 없었는데, 그의 생애를 연구한 전기작가들은 사실상 성불구여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고 있다. 에르제 전기를 쓴 피에르 아쉴랭은 에르제가 어렸을 때 종기 때문에 적외선 치료를 받다가 사고로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른 전기작가인 브누아 페테르스는 에르제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년 시절에 친족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실제로 에르제는 소년시절을 '우울 그 자체'라고 언급하곤 하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길 극도로 꺼렸고, 친구한테도 편지로 어린 시절을 아무리 지워버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서 안타깝다는 투의 이야기를 했다. 단 40대 후반에 자식을 입양할 생각을 했는데 아내 패니가 반대해서 입양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다. 관련자료(영어)
3.2. 성격
사교성 좋고 유머 감각이 있고 영민했다. 이런 성격으로 보이스카웃 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행과 산책, 등산과 같은 외부활동을 활발히 하고 다니는 외향성이 있었다고 한다. 마이클 파의 연구서적에 따르면 하루에 7시간 내내 트래킹을 하고 다녔다고.하지만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매우 완고해서 여기에 협력했던 다른 만화가들[16]과 의견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땡땡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로 엄청난 자부심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땡땡 개정판에 큰 공헌을 한 도움 작가들 이름은 한 줄도 실리지 못하게 해놔서 작가들과 관계가 험악해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 만화책을 누군가가 이어그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자신이 그리지 않은 땡땡은 땡땡이 아니라면서.[17]
3.3. 경제상황
에르제는 땡땡의 모험으로 성공하기 이전에, 그림을 그려서 월 200달러(약 20만원)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현대에서 말하는 '커미션' 같은 것이라고 봐도 된다. 그리고 성공한 이후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스루무스티(Ceroux-Mousty)의 전원주택에서 살게 되었다.3.4. 카메오
땡땡의 모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카메오로 매편마다 등장한다.#3.5. 논란
대표작 땡땡의 모험의 초기작에서 벨기에의 식민지 콩고에 대해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으로 묘사했고 타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묘사했다. 이후 성향이 바뀌고 이 문제점들을 인정한다고 여러번 밝히고 여러 판본을 수정했다.4. 주요 작품
5. 외부 링크
[1] 그의 필명인 에르제는 본명인 조르주 르미의 첫 글자를 거꾸로 한 RG를 프랑스어식으로 읽은 것이다.[2] 네덜란드어식으로 '에테르베이크(Etterbeek)'.[3] 네덜란드어식으로 '신트람브레흐츠볼뤼버(Sint-Lambrechts-Woluwe)'.[4] 에르제는 가톨릭 신자로 길러졌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에르제의 가톨릭 신앙은 그가 도덕경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면서 쇠퇴하여 불가지론자가 되었다.[5] #[6] 당시 유럽의 가정에서는 아이를 여장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마초로 유명한 헤밍웨이조차 어렸을 때 여장을 당했고 이를 흑역사로 여겼다고 한다.[7] 여담으로 에르제와 더불어 고전 만화기의 양대산맥을 형성한 만화가인 앙드레 프랑캥도 이곳 출신이다.[8] 특히 누드화 그리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실제로 에르제는 생전에 스스로 인체묘사에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나리오 저술에 많은 공을 들였다.[9] 이 양반은 무솔리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당시에는 유럽의 종교계 인사들이 파시스트가 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많았다.[10] 이는 에르제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면, 소비에트에 간 땡땡 편이 끝나자 20세기 신문사 측에서 북역에서 땡땡과 밀루가 귀환하는 것을 코스프레 해서 그대로 보여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마지 소비에트에 간 땡땡 마지막 장면 처럼 북역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경찰이 동원되었다.[11] 1884~1952. 반공·친파시즘 성향으로 보수우익이었고 나치를 지지하는 통에 벨기에 침략에도 긍정적인 기사를 쓰게 했다. 결국 2차 대전 이후 나치 협력자로 4년 동안 복역하고 20만 프랑 벌금까지 내면서 몰락했고 이후 암으로 죽었다.[12] # 중국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장충런. 그가 썼던 로마자 표기로 그대로 옮기면 창총젠(Chang Chongjen)이 된다.[13] 이 주장은 '땡땡과 에르제의 비밀(Tintin et le secret d'Herge)'이라는 서적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세르주 티스롱의 저서 '가족의 비밀'이 국내에 출간되었는데 여기서도 사례로 나와 있음.[14] 여담으로 이 만화의 배경인 실다비아의 인구는 64만 2,000명이고 수도 클로우에 12만 명이 거주하는데 기묘하게도 2000년대 몬테네그로와 몬테네그로의 수도인 포드고리차 인구와 비슷한 수치이다.[15] 미치광이 독약을 맞은 인물들이라거나, 예언자 필리풀루스 등.[16] 에드가 자코브나 자크 판 멜케베커가 대표적인 사례.[17] 단, 땡땡 외의 작품은 예외인 듯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퀵과 플륍크로, 요한 드 무어가 이어서 그렸는데 이름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