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인베르니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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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
이탈리아의 前 축구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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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조반니 인베르니치 Giovanni Invernizzi | |
출생 | 1931년 8월 26일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알바이라테 | |
사망 | 2005년 2월 28일 (향년 73세) 이탈리아 밀라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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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미상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아우다체 아비아테그라소 (?~1945 / 유스) 인테르나치오날레 (1945~1949 / 유스) 인테르나치오날레 (1949~1950) → 제노아 (1950~1951 / 임대) 인테르나치오날레 (1951~1952) → 트리에스티나 (1952~1953 / 임대) → 우디네세 (1953~1954 / 임대) 인테르나치오날레 (1954~1960) 토리노 (1960~1961) 베네치아 (1961~1962) 칼초 코모 (1962~1964) |
감독 | 인테르나치오날레 (?~1970 / 유스) 인테르나치오날레 (1970~1973) 타란토 (19731974) 브린디시 (1974~1975) 피아첸차 (1976) | |
국가대표 | 1경기 0골 (이탈리아 / 1958) |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인테르에서 주로 활약한 미드필더로, 선수 시절에는 인터 밀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감독으로서도 인테르를 이끌며 1970-71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1971-72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인테르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클럽맨'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선수와 감독, 스카우터로서 거의 평생을 인테르에 헌신했다. 별명으로는 로비올리나(Robiolina)가 있다.[1]
2. 선수 경력
2.1. 클럽
인베르니치는 아우다체 아비아테그라소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1945년 카를로 카르카노에 의해 발굴되어 인테르의 유스팀에 합류했다. 그는 1950년 4월 30일 토리노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데뷔를 했으나, 1군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제노아, 우디네세, US 트리에스티나 등에 임대되었다.1954-55 시즌에 인테르로 복귀한 그는 곧 팀의 주전 자리를 꿰찼고, 팀의 주장까지 맡게 되었다. 인터 밀란에서 그는 총 141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으며[2], 특히 중원에서의 안정적인 볼 배급과 조직력으로 팀의 중심 역할을 했다. 엘레니오 에레라가 인테르 감독으로 부임한 1960년까지 인테르에서 활약하다가 토리노로 이적했다. 이어서 베네치아를 거쳐 코모에서 1964년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2.2. 국가대표
인베르니치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으로 단 한 경기 출전한 기록이 있다. 1958년 벨파스트에서 북아일랜드와의 1958 월드컵 예선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패배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또한 이탈리아 U-21 대표팀으로 4경기를 뛰었다.3. 감독 경력
3.1. 인테르
인베르니치는 감독 경력을 인테르에서 시작했으며, 1960년대 중반부터 인테르 유소년팀 프리마베라를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유소년 선수 육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인테르의 미래 인재 발굴에 큰 역할을 했다. 1970년 11월, 에리베르토 에레라가 시즌 5라운드 후 경질되자 1군 감독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에레라가 배제했던 베테랑 선수들인 잔프랑코 베딘, 자이르 다 코스타, 마리오 코르소 등을 팀에 복귀시키며 선수들의 지지를 얻었다.특히 1970-71 시즌, 그는 인테르를 이끌어 리그 11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밀란에 6점 뒤져 있던 상황에서 마지막 라운드에서 역전 우승에 성공했으며, 인베르니치 체제에서 인테르는 23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했다. 그의 인테르는 공격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축구로 총 25경기에서 18승 6무 1패의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1971-72 시즌에는 리그에서는 5위에 그쳤지만, 유럽 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유러피언컵에서 인터 밀란은 총 9경기에서 3승 3무 3패의 기록을 세우며,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는 아약스에 패배했다. 1972-73 시즌 중에는 선수단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인테르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조반니가 거둔 인테르에서의 총 기록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115경기 59승 31무 25패(승률 51.3%)였다.
1971-72 시즌에는 리그에서는 5위에 그쳤지만,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며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는 아약스에 패배했다. 1972-73 시즌 중에는 선수단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인테르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3.2. 기타 클럽
인테르를 떠난 후 인베르니치는 1973-74 시즌과 이듬해 초반까지 타란토를 지도했고 1974-75 시즌 중반에는 브린디시를 지도했다. 타란토에서는 세리에 B 38경기 11승 17무 10패의 기록을 세웠으며, 브린디시에서는 11경기 동안 승리 없이 5무 6패로 부진했다. 마지막 감독 경력은 1976년 피아첸차에서였으나, 선수단 관리 문제와 부진한 성적으로 경질되었다. 피아첸차에서는 총 16경기에서 7승 6무 3패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다시 인테르로 돌아와 스카우터로 활동했다. 이후 축구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조반니는 2005년 2월 28일 밀라노 폴리클리니코 병원에서 암으로 7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4. 지도 스타일 및 업적
인베르니치는 자신이 선수로 뛰었던 클럽에서 감독으로서도 성공을 거두며 인테르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선수들과의 관계 형성에 뛰어난 감독이었으며, 특히 베테랑 선수들의 경험과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는 훈련 중 전술적 세부 사항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선수들의 특성에 맞는, 유연한 전술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가장 큰 업적은 1970-71 시즌 인테르를 이끌어 스쿠데토를 차지한 것과 다음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이다. 특히 첫 시즌에서의 성과는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시즌 중반에 팀을 맡아 23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끌며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인베르니치의 가장 큰 장점은 선수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능력이었다. 엘레니오 에레라의 엄격한 체제에서 벗어나, 그는 선수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책임감을 주었다.[3] 그의 인터 밀란은 당시 이탈리아 축구의 전형적인 카테나치오 스타일에서 벗어나 좀 더 공격적이고 유동적인 축구를 선보였으며, 이는 1970년대 초 이탈리아 축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5. 둘러보기
[1] 조반니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치즈 제조업체 인베르니치 가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는 그가 알바이라테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의 뿌리는 아비아테그라소에 있었으며, 치즈 제조업체는 발사시나(Valsassina) 지역의 전혀 다른 인베르니치 가문이었다.[2] 정규 리그 경기만 계산했을 때의 기록이며, 컵 대회 등을 포함하면 더 많은 경기에 출전했다.[3] 이러한 코칭 스타일의 변화는 아약스에서 엄격한 리누스 미헬스에서 보다 자유로운 스타일의 슈테판 코바치로 감독이 교체되었을 때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코바치는 미헬스의 토탈 풋볼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선수들에게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베르니치 역시 에레라의 전술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선수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다. 흥미롭게도 두 감독은 1972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서로 맞붙었으며, 코바치의 아약스가 인베르니치의 인테르를 2-0으로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