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하펠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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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감독 | ||||
31대 | 28대 | |||
클럽 감독 | ||||
44대 |
오스트리아의 前 축구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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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 |
본명 | 에른스트 프란츠 헤르만 하펠 Ernst Franz Hermann Happel | |
출생 | 1925년 11월 29일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빈 | |
사망 | 1992년 11월 14일 (향년 66세) / 오스트리아 티롤주 인스브루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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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8cm | |
직업 | 축구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SK 라피트 빈 (1942~1954) 라싱 클뢰브 드 파리 (1954~1956) SK 라피트 빈 (1956~1959) |
감독 | SK 라피트 빈 (1959~1962 / 수석 코치) ADO 덴 하흐 (1962~1969)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게일스 (1967)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9~1973) 세비야 FC (1973~1974) 클뤼프 브뤼허 KV (1974~1978) 네덜란드 대표팀 (1977~1978) KRC 하럴버커 (1979) 스탕다르 리에주 (1979~1981) 함부르크 SV (1981~1987) FC 티롤 인스브루크 (1987~1991) 오스트리아 대표팀 (1992) | |
국가대표 |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2년 1월 부터 동년 1992년 11월 까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상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위대했던 감독. 여러 클럽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려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중에 하나에 속한다. 최초로 4개국에서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었으며[1] 1970년과 1983년에 각각 페예노르트와 함부르크 SV에서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여 최초로 두 개 이상의 클럽에서 빅 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 되었다.[2] 그 외에도 클뤼프 브뤼허 KV의 역사상 최초의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도 이끌어냈다.[3] 또한 202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끝난 시점을 기준으로, 챔피언스 리그[4]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해본 단 4명의 선수 중 1명이다.[5]
2. 개인사 및 배경
에른스트 프란츠 헤르만 하펠(Ernst Franz Hermann Happel)은 1925년 11월 29일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카롤린 네히바(Karoline Nechyba)의 혼외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보헤미아 출신이었다. 하펠이 태어난 지 1년 후인 1926년 12월 28일, 그의 어머니는 프란츠 요제프 하펠(Franz Josef Happel)과 결혼했고, 그가 에른스트를 의붓아들로 입양했다. 프란츠 하펠은 195cm의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역도 선수였으며, 빈 9구 알저그룬트 (Alsergrund)에서 '잘츠부르거호프(Salzburgerhof)'라는 커다란 정원이 딸린 술집을 운영했다. 에른스트는 자신의 친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하지만 부모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결국 1939년에 이혼했다. 에른스트는 4살 때부터 보헤미아 출신인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부모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의 외할머니는 빈 15구 루돌프스하임퓐프하우스 (Rudolfsheim-Fünfhaus)의 마이젤마르크트라는 시장에서 과일, 소시지, 야채 가게를 운영했다.
하펠은 축구 이외에도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대학에서 학문적 경력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결국 축구를 선택했다.
3. 축구인 생활
에른스트 하펠의 타계 2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2012년, ORF 방영.)
3.1. 선수
라피트 빈 시절의 모습.
에른스트 하펠은 1938년에 라피트 빈의 유소년팀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942년에 선수로 데뷔했으나, 18세가 되자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에 징집되어 동부전선인 벨라루스에 파병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곧 라피트 빈의 주전 선수가 되었다.
주장 프란츠 빈더 밑에서 하펠은 1946년 전쟁 후 첫 오스트리아 리그와 컵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빈은 전후 오스트리아의 첫 두 대회를 모두 제패했다. 이 시기 라피트 빈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시즌당 평균 80만 명의 관중이 경기를 보러 왔다.
하펠은 곧 팬들의 인기를 얻었으며, 스토퍼[6] 포지션에서의 자신감, 볼 감각, 태클 기술과 전술적 성숙함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친구들과 팬들은 그를 '아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와 닮은 터키 배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의 뛰어난 플레이 능력 덕분에 '마법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1947년 9월 14일, 하펠은 오스트리아가 라이벌 헝가리를 4-3으로 이긴 경기에서 국가대표로 처음 출전했다. 이후 발터 나우슈 감독 밑에서 그는 대표팀의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펠은 1951년 젠트로파컵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라피트 빈은 SS 라치오를 5-0으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고, SK 아드미라 빈와 우승컵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이 오스트리아 팀 간의 대결에서 하펠은 90분에 결승골을 넣어 3-2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는 하펠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자, 라피트 빈의 마지막 국제 대회 우승이 되었다.
3.1.1.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하펠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오스트리아는 스코틀랜드를 1-0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5-0으로 이기고 8강에 진출했고, 거기서 개최국 스위스와 맞붙었다.월드컵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이 나온 경기인 '로잔의 더위전'에서 오스트리아는 7-5로 승리했다. 그러나 하펠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가 6-5로 앞선 상황에서 그는 엉덩이로 공을 멈춰 세워 패스했는데, 이것이 거의 스위스의 동점골로 이어질 뻔했다.
준결승에서 서독에 6-1로 패배했을 때 하펠은 비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독일의 표준 전술에 대응하지 못해 그와 골키퍼 발터 제만은 경기 후 독일 선수들에게 매수당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3위 결정전에서 당시 현 챔피언 우루과이를 꺾고 3위를 차지했지만, 하펠과 제만은 매수 의혹에 너무 분노해 빈으로 돌아오는 축하 행사에서 미리 내렸고, 이후 3년 넘게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출전하지 않았다.
3.1.2. 파리 생활과 라피트 빈 복귀
수많은 해외 이적 소문 끝에 하펠은 1954년 실제로 라피트 빈을 떠나 RC 파리로 이적했다. 그러나 1956년에 다시 고향 클럽으로 복귀해 유러피언컵에서 활약했다.1956년 라피트 빈은 당시 유럽 최고의 팀이었던 레알 마드리드 CF와 맞붙었다. 레알 원정에서 2-4로 패했지만 이어서 열린 빈에서의 홈경기는 하펠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라피트 빈이 3-0으로 앞섰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의 1골로 추격하며 다시 승부는 원점이 되었고, 여기서 점수가 더 이상 나지 않아 세 번째 경기가 열렸다. 당시에는 원정골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라피트 빈은 마드리드에서 열린 결정전에서 2-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오스트리아는 브라질, 잉글랜드, 소련과 같은 조에 속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하펠은 잉글랜드와의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클럽 라피트 빈이 신속하게 50번째 국가대표 출전을 기념해 감독에게 명예 배지를 전달했다. 하펠은 출전했고 오스트리아는 잉글랜드와 2-2 무승부로 월드컵을 마쳤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하펠은 현역에서 은퇴했다.
3.2. 감독
1965년 ADO 감독시절의 모습.
1970년 유러피언컵 우승 당시의 모습.
3.2.1. 첫 감독 경력: 라피트 빈과 ADO 덴 하흐
은퇴 직후 하펠은 라피트 빈의 스포츠 디렉터가 되어 로베르트 쾨르너 감독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이 두 시즌 동안 라피트 빈은 리그 우승과 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유러피언컵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다.1962년 하펠은 네덜란드의 ADO 덴 하흐에서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신임 감독으로서 그는 선수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초기 훈련 중 비가 심하게 내리자 선수들이 새 감독을 시험하려고 훈련을 거부했다. 하펠은 선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음료수 캔을 골대 구석에 올려놓은 뒤, 페널티 박스에서 그것을 맞춰 떨어뜨리고 선수들에게도 같은 도전을 요구했다. 성공한 선수만 샤워를 할 수 있게 하여 결국 모든 선수가 비 속에서 훈련을 마쳤다.
하펠의 감독 스타일은 "프레싱"과 "전체적인 공격"에 기반했다. 그는 뛰어난 체력을 가진 선수들에게 "상대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고 상대를 쉬게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감독으로서 과묵한 성격 때문에 "침묵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펠의 지도 아래 ADO는 강등권 후보에서 우승 후보로 성장했다. 1963년, 1964년, 1966년에 네덜란드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마침내 1968년 ADO와 함께 첫 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 그의 팀은 네 번째 시도 만에 아약스를 컵 결승에서 2-1로 물리쳤다.
3.2.2. 페예노르트와 세계 정상
1969년, 하펠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감독직을 옮겼다. 로테르담에서도 그는 빠르게 적응했고 오늘날까지 위대한 감독 전설로 남아있다. 프란츠 하실이라는 빈 출신이자 前 라피트 빈 선수도 하펠 감독의 요청으로 페예노르트에 영입되었다.이 시기에 하펠은 미헬스처럼 유동적이고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토탈풋볼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미헬스는 포메이션에서 많은 공격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페예노르트에 온 하펠은 달랐다.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길 원했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축구가 실현된다면 꼭 스타팅 라인업에 공격수의 수가 많지 않더라도 높은 위치에서 여러 명의 선수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수의 수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앙 공격수를 한 명으로 줄이고 미드필더의 수를 늘렸다. 두 명의 미드필더로는 필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안정적으로 경기를 지배하기 위해 미드필더를 세 명으로 늘린 새로운 포메이션을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쓰이는 4-3-3 포메이션의 탄생이었다.
하펠의 로테르담 생활은 놀라운 시작을 보였다. 첫 해인 1969-70 시즌에 네덜란드 구단 최초로 유럽 챔피언스컵을 차지했다. 당시 16강에선 전 시즌이었던 1968~69 시즌 페예노르트의 라이벌 아약스를 꺾고 우승한 AC 밀란에게 1~2 차전 통합 2:1로 이겼고, 결승전에서는 셀틱을 연장 117분 끝에 2-1로 꺾었다.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 후 하펠은 로테르담과 함께 세계 클럽 챔피언십도 차지했다. 하펠은 페예노르트를 2년 더 이끌며 네덜란드 리그에서 한 번의 우승과 두 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73년에 네덜란드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고,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너무 많은 승리는 규율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너무 친구가 되었다. 함께 고통받고, 울고, 웃고, 이기는데, 이런 관계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안 된다."
3.2.3. 벨기에에서의 도전
1973-74 시즌에 하펠은 스페인 2부 리그 팀 세비야 FC로 갔다가, 1975년 벨기에의 FC 브뤼허로 이적했다. 여기서 그는 다시 세계 최고의 팀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3시즌 동안 그는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두 번의 유럽 대회 결승에 진출했다.하펠의 팀은 1976년 UEFA컵 결승에서 리버풀에 3-4로 패했다. 그러나 1977년 더블을 달성한 후 1978년 FC 브뤼허는 다시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에 올랐다.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의 92,000명에 달하는 관중 앞에서 하펠의 팀은 다시 리버풀과 맞붙었고, 이번에도 영국 팀이 1-0으로 승리했다.
1977년 벨기에 리그 우승 당시의 모습.
3.2.4. 네덜란드 대표팀과 월드컵 결승
1978년 네덜란드 국대 감독 시절의 모습.
1977년 8월,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는 하펠을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과 본선을 위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지만, 하펠은 국대 감독직과 FC 브뤼허 감독직을 병행하기로 했다. 1977년 10월 예선 경기 때는 그가 FC 브뤼허 경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거나,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가 이해충돌을 우려해 얀 즈바르트크라위스가 대신 팀을 이끌었다. 네덜란드는 북아일랜드, 벨기에, 아이슬란드가 포함된 예선 그룹에서 승점 1점만 잃고 1위를 차지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하펠의 네덜란드는 스코틀랜드를 3-2로 꺾고 이란을 3-0으로 물리치며 조 2위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서독, 이탈리아, 그리고 자신이 선수 시절에 마지막으로 참가한 후 20년만에 월드컵에 진출한 오스트리아와 맞붙었다. 하펠은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5-1로 대파하며 네덜란드를 결승에 올려놓았다.
결승전에서 하펠의 팀은 개최국 아르헨티나와 맞붙었다. 경기 종료 직전 1-1 동점인 상황에서 네덜란드의 로프 렌센브링크가 빈 골문을 앞에 두고 포스트를 맞추는 아찔한 장면이 있었다. 결국 아르헨티나가 연장전에서 3-1로 승리했다. 하펠은 "준" 세계 챔피언이 되었지만, 고국에서는 여전히 "뵐드마스타"[7]라고 불렸다.[8] 그래도 그는 역대 월드컵을 통틀어 월드컵에서 타국의 국가대표팀을 지휘하여 월드컵 결승까지 올라본 단 둘 뿐인 외국인 감독이기도 하다.[9]
여담으로 네덜란드 여왕 율리아나의 초대 연회에 기다려야 했을 때, 그는 약간 초조해하며 11살에 불과한 어린 빌럼알렉산더르 왕자에게 "할머니가 언제 오시나요? 저는 시간이 없으니 카지노에 가야 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3.2.5. 함부르크 SV에서의 전성기
1978년 2월, 함부르크 SV는 1978-79 시즌을 위해 하펠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DFB는 그에게 독일 감독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우리는 자격증을 취득한 감독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였다.최종적으로 하펠은 1981년 여름, 알코올 문제로 해고된 브란코 제베츠와 임시 감독 알렉산다르 리스티치의 후임으로 함부르크의 감독이 되었다. 함부르크 시절 그는 헨슈테트-울츠부르크에 살았다. 하펠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오스트리아 독일어 억양과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어가 섞인 독특한 혼합 언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첫 시즌에 하펠은 펠릭스 마가트, 만프레드 칼츠 등을 축으로 함부르크의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동시에 UEFA컵 결승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에서 IFK 예테보리에 0-1, 0-3으로 패했다. 두 번째 시즌에도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이번에는 유러피언컵에도 도전했다. 1983년 아테네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미셸 플라티니와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가 있는 유벤투스 FC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함부르크 역사상 최고의 성과로 남아있다. 하펠은 1987년까지 독일에 머물렀으며, 마지막 해에는 DFB-포칼 우승도 차지했다.
HSV 감독 시절의 모습.
3.2.6. 오스트리아로의 귀환과 생애 마지막
1990년 방송 인터뷰 영상.
생애 말년인 1992년 대표팀 감독시절 모습. 폐암을 앓았던 탓인지 너무 수척해져 있다.
1987년 하펠은 FC 슈바로프스키 티롤의 감독으로 고국에 복귀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주로 지구력과 근력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런 훈련 방식은 효과를 보여 1989년과 1990년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 1989년 ÖFB컵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 초, 하펠은 드디어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철주야 활동하던 하펠은 결국 폐암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골초였던 탓에 이것이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3.2.7. 사망 후 유산
하펠이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된지 불과 11개월 후이자 67세 생일을 보름 앞둔 1992년 11월 14일 에른스트 하펠은 인스브루크 대학병원에서 폐암으로 인해,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오스트리아와 유럽 축구계에 큰 슬픔을 안겼다. 그의 사망 나흘 후 독일과의 경기에서 오스트리아 팀은 추모의 의미로 그의 모자를 90분 동안 감독석에 놓았다. 두 팀은 검은 완장을 착용했고 묵념 시간을 가졌다. 하펠 사후에 오스트리아 축구 연맹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빈과 오스트리아의 최대 경기장인 프라터슈타디온을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으로 개명했다. 이 경기장은 최대 53,808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 홈구장으로 유로 2008 결승전도 이곳에서 진행됐다.1989년 2월 27일, 하펠은 신설된 '축구 오스카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는 오스트리아 총리 프란츠 브라니츠키로부터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은메달을 수여받았다. 1997년에는 로테르담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Ernst Happelstraat)가 지어졌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의 '20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하펠은 빈의 헤르날저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빈에서 특별히 헌정한 '명예 묘지'로 지정되었다.
선수로서도 하펠은 1953년 세계 선발팀에 뽑혔으며,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에 의해 20세기 가장 중요한 100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4. 성격
감독으로서 그는 엄격한 훈련과 규율을 중시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에른스트 주니어는 아버지가 함부르크 동물원에서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모든 아이에게 사인을 해주었던 일화를 전했다.언론과의 관계는 복잡했다. 그는 기자들을 "시인들"이라고 부르며, 기술적인 질문에는 짧지만 사실적인 대답을 했으나, 사적인 질문에는 "그건 관심 없는 일이다!"라고 대답하며 피했다. 기자회견에서 그의 발언은 몇 초 안에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4.1. 리누스 미헬스와의 라이벌리
리누스 미헬스는 강력한 권위와 리더십, 뛰어난 언변을 갖추고 있어 ‘장군’이라는 말로 수식되고는 했다. 선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표현했으며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또한 "프로축구는 전쟁과 같다. 너무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패배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는 등 세상과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알렸다. 간혹 선수들과 함께 장난을 치는 유명한 일화들도 있지만, 이것들 역시 선수들과의 세밀한 소통과 팀 케미스트리 상승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권위를 사용하고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이에 반해 하펠은 말로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다. 하펠은 매우 과묵했지만 뚜렷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단어 하나로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었고,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선수들을 이끌었다. 그가 독일어밖에 할 줄 몰라 선수들과 네덜란드어로 소통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독일어로도 소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가 선수들에게 한 가장 유명한 말이 “말하고 싶으면 진공청소기 판매원이 되라, 나는 축구선수만 필요하다“, “말 그만하고 축구나 해!”였을까? 대신 하펠은 현장에서 더욱 선수들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다. 훈련에 더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며, 과거에 기술적으로 높은 클래스의 선수였던만큼 선수들 개개인을 직접 지도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할애했다. 첫 훈련에서, 골대 크로스바 위에 병 몇 개를 올려놓고 축구공을 차서 병들을 모두 맞추어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말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냈던 셈이다.
리더십 외에 전술적 접근법에서도 미헬스와 하펠의 성향은 차이를 보였다. 미헬스는 경기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유형이라면 하펠은 거기에 더해 경기 도중의 변화를 잘 체크하고 유연하게 계획을 수정할 줄 아는 유형이라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미헬스의 아약스와 하펠의 페예노르트에서 모두 뛰어본 테오 판 다위펜보데는 이 두 거장에 대해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며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에서는 하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했다.
“미헬스는 게임 시작 시 전술적 계획을 개발하는 데 탁월했으며 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펠은 달랐습니다. 하펠은 경기에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었고 우리가 플레이하는 동안 그것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펠이 미헬스보다 게임을 훨씬 더 잘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미헬스와 하펠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토탈 풋볼을 선보였다. 보통 토탈 풋볼이라고 하면 전자의 것을 의미하지만, 하펠의 전술 또한 토탈 풋볼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하는데, 이 시대에 미헬스의 아약스와 네덜란드가 구사한 토탈풋볼은 오늘날 많은 팀들이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토탈풋볼과는 형태가 달랐다. 어느 정도 포지션의 틀 안에서 토탈 플레이를 요구하는 현대 축구와 다르게, 이 당시 처음 등장한 토탈풋볼의 개념은 필요하다면 포지션의 틀도 자주 부수며 진정한 의미의 토탈 플레이를 추구했다. 말 그대로 선수들을 임의의 위치에 갖다놓아도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시대에 따라, 감독에 따라 토탈풋볼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토탈풋볼은 특정 감독이 사용하는 특정 형태를 갖춘 개념이 아니다. 전술의 형태부터 아이디어, 기조까지 폭넓게 포괄하는 개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토탈풋볼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그 형태만큼 많이 바뀌어왔지만, 최대한 많은 시대를 아우르는 의미는 아마 ‘포지션 등의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위치, 모든 역할,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하는 행위 또는 사상’이 아닐까 한다. 여러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플레이한다는 의미처럼, 여러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맞춰서 쓰일 수 있다.
그 중에서 미헬스가 구사한 전술로서의 토탈풋볼을 살펴보면, 이 토탈풋볼은 시스템 자체가 함유하고있는 근본적인 한계(극한으로 훈련되어있는 선수단이 필요하다는 높은 제한 조건, 체력적인 한계, 역습 허용 시 드러날 수 있는 큰 불안감, 선수의 주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비판 등), 그리고 당시의 토탈풋볼을 파훼하기 위해 등장한 몇 가지 수단으로 인해 그 형태 그대로 보편화되기는 어려웠다. 대신 토탈풋볼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전 세계 축구에 뿌려졌으며 이후 전술의 현대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축구 전술도 토탈풋볼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넓은 의미로 이 철학적인 근간 자체를 토탈풋볼이라고 부른다.
전술로서의 토탈풋볼을 보면, 오히려 현대 축구 전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것은 하펠의 페예노르트였다. 미헬스의 팀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한 스위칭으로 인해 팀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포지션의 틀을 부수는 것이 불필요해보이기도 한다. 하펠의 팀은 현대의 기준에서 선수의 포지션을 과하게 벗어나지 않고 적절한 토탈 플레이를 구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3-3 시스템에서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수행하는 역할이나, 3명의 미드필더로 수월하게 진행하는 빌드업, 양 풀백의 오버래핑, 윙어의 컷-인 플레이, 전방에서부터 시작되는 압박 등은 현대의 전술 트렌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미헬스와 하펠이 만들어낸 토탈풋볼. 그 당시의 토탈풋볼은 하펠이 핵심 아이디어의 일부를 제공했을지라도 분명 미헬스가 완성한 결과다. 그런데, 이 토탈풋볼의 가치가 단순히 그 시대의 지배력만이 아닌, 그 이후의 축구까지 이어지는 영향력에서 더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 시대의 토탈풋볼은 어떠한가? 우리 시대에서 토탈풋볼이 지니는 가치는 좁은 의미로서 특정 전술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우리는 한 시대를 지배한 토탈풋볼 전술이 아닌, 축구 자체를 재정립한 토탈풋볼 철학이 가진 영향력으로 토탈풋볼의 의미를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펠도 토탈풋볼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결과로 발전한 현대 축구의 형태는 둘 중 누구와 더 가깝나? 오늘날 미헬스의 전술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은 없지만 하펠과 유사한 전술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미헬스의 아약스보다 하펠의 페예노르트가 남긴 유산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제한 없이 더 광범위하게 통한 것, 시대를 앞서나간 것은 하펠의 토탈풋볼이다. 대신 그 당시의 토탈풋볼의 주인은 미헬스다. 앞서 말했듯이 전술로 한정지어서 보면 미헬스가 토탈풋볼의 대명사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미헬스가 그걸 완성하고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 SK 라피트 빈 (1942~1954, 1956~1959)
-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1945–46, 1947–48, 1950–51, 1951–52, 1953–54, 1956–57
- ÖFB컵: 1945-46
- 젠트로파컵: 1951
-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1947~1958)
- FIFA 월드컵 3위: 1954
5.2. 감독
5.2.1. 대회 기록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9~1973)
- 클뤼프 브뤼허 KV (1974~1978)
-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 A: 1975-76, 1976-77, 1977-78
- 벨기에컵: 1976-77
- 유러피언컵 준우승: 1977-78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77~1978)
- FIFA 월드컵 준우승: 1978
- 스탕다르 리에주 (1979~1981)
- 벨기에컵: 1980-81
- FC 티롤 인스브루크 (1987~1991)
-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1988-89, 1989-90
- ÖFB컵: 1988-89
5.2.2. 개인 수상 기록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10]: 1978, 1983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82-83
6. 여담
리누스 미헬스와는 묘한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다. 둘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준우승을 하였고, 각각 페예노르트 로테르담과 AFC 아약스를 이끌며 팀에게 첫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토탈 풋볼을 발전시켰고 둘 다 같은 해에 축구인생을 마무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11]후고 마이슬과 오스트리아 축구감독 순위를 메길 때 1, 2위를 다투는 감독이다.
7. 둘러보기
{{{#!wiki style="color:white;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181818" | <colbgcolor=#7BAFDE,black> 1조 |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 | 엔초 베아르초트 | 미셸 이달고 | 버로티 러요시 |
2조 | 헬무트 쇤 | 야체크 그모흐 | 압델마지드 체탈리 | 호세 로카 | |
3조 | 클라우디우 쿠티뉴 | 헬무트 제네코비치 | 쿠발라 라슬로 | 예오리 에릭손 | |
4조 | 에른스트 하펠 ☆ | 마르코스 칼데론 | 앨리 매클라우드 | 헤쉬마트 모하제라니 | |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30 | 1934 | 1938 | 1950 | 1954 | 1958 1962 | 1966 | 1970 | 1974 | 1978 | 1982 1986 | 1990 | 1994 | 1998 | 2002 | 2006 2010 | 2014 | 2018 | 2022 | }}}}}}}}} |
[1]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2] 지금까지 이 기록을 가진 감독은 하펠 감독 포함해 6명뿐인데 나머지 5명은 오트마어 히츠펠트(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바이에른 뮌헨), 주제 무리뉴(포르투, 인테르나치오날레), 유프 하인케스(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카를로 안첼로티(AC 밀란, 레알 마드리드), 펩 과르디올라(FC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시티)다.[3] 브뤼허는 이 때를 제외하면 결승은 커녕 준결승조차 밟아본적이 없다.[4] 舊 유러피언 컵 시절 포함[5] 각각 에른스트 하펠: 56-57 유러피언 컵 1라운드 2차전, 빅토르 누렌버그: 59-60 유러피언 컵 8강 1차전, 찰리 조지: 75-76 유러피언 컵 2라운드 1차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12-13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6] 나중에 리베로 포지션으로 발전[7] 세계 챔피언[8] 그러나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와 함께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월드컵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주최국을 우승시키기 위해 당국이 유럽강호들을 한조에 묶여 죽음의 조를 만드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 승부조작 의혹이 있다.[9] 다른 한 사람은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스웨덴 대표팀을 이끌어 준우승을 기록한 잉글랜드 출신의 조지 레이너 감독.[10]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11] 정확히 말하자면 미헬스는 은퇴, 하펠은 재임중 지병으로 사망.
분류
- 1925년 출생
- 1992년 사망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 오스트리아의 축구 감독
- SK 라피트 빈/은퇴, 이적
-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은퇴, 이적
- ADO 덴하흐/역대 감독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역대 감독
- 세비야 FC/역대 감독
- 클뤼프 브뤼허 KV/역대 감독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스탕다르 리에주/역대 감독
- 함부르크 SV/역대 감독
- FC 바커 인스브루크/역대 감독
-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오스트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참가 선수
-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참가 선수
- 오스트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48 런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참가 감독
- FIFA 월드컵 준우승 감독
- UEFA 챔피언스 리그 다회 우승 감독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감독
- 빈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