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비아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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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감독 | ||
<nopad>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주세페 비아니 Giuseppe Viani | |
출생 | 1909년 9월 13일 이탈리아 왕국 베네토주 트레비소 | |
사망 | 1969년 1월 6일 (향년 59세)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페라라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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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83cm, 83kg |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올림피아 트레비소 (1924~1926) 트레비소 FBC 1993 (1926~1928) 암브로지아나 인테르 (1928~1934) SS 라치오 (1934~1938) AS 리보르노 칼초 (1938~1939) 유벤투스 FC (1939~1940) US 시라큐사 (1940~1941)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41~1943) |
감독 | US 시라큐사 (1940~1941)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41~1943) 베네벤토 칼초 (1943~1945) 콜레페로 칼초 (1945~1946)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46~1948) 루케세 리베르타스 (1948~1949) US 팔레르모 (1949~1951) AS 로마 (1951~1952) 볼로냐 FC (1952~1956) AC 밀란 (1957~1958) 이탈리아 대표팀 (1958~1960) 제노아 CFC (1965~1966) 볼로냐 FC (1968) 우디네세 칼초 (1968~1969 / 코치) | |
감독 | AC 밀란 (1958~1965 / 기술 이사) | |
국가대표 | 없음 |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지포(Gipo)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감독으로서는 특히 AC 밀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탈리아 축구 전술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리베로 포지션을 체계적으로 도입한 초기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비아네마'라는 독특한 전술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는 이후 이탈리아식 카테나치오의 기원이 되었다. 2018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선수 경력
올림피아 트레비소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트레비소에서 활약했다. 1929년 움베르토 비센틴과 함께 암브로시아나 인테르로 이적했다. 1929년 10월 6일 2-1 승리를 거둔 암브로지아나와 리보르노의 경기에서 세리에 A에 데뷔했으며, 1929-30 시즌에는 팀의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다.그렇게 암브로시아나에서 6시즌을 보낸 후, 라치오, AS 리보르노 칼초, 유벤투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US 시라큐사와 살레르니타나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3. 감독 경력
선수 생활의 마지막 3년 동안 US 시라큐사와 살레르니타나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시라큐사에서는 세리에 C 리그 H조 1위를 차지했지만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3위를 기록해 세리에 B 승격에 실패했다. 살레르니타나에서는 1941-42 시즌에 1위를 차지했으나 부정행위로 플레이오프 참가 자격을 잃었고, 1942-43 시즌에는 다시 1위를 차지하고 플레이오프에서 2위를 기록해 세리에 B 승격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리그가 중단되면서 실질적인 승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년간의 비활동기 이후 베네벤토를 맡아 세리에 C 우승을 이끌었으나, 클럽의 경제적 문제로 세리에 B 참가 등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946년까지 콜레페로 칼초를 지휘했다. 비아니는 세리에 B의 살레르니타나로 복귀해 그의 독특한 전술 시스템 '비아네마'(Vianema)를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센터포워드를 리베로로 활용하고 측면에서 효과적인 공격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술을 바탕으로 살레르니타나는 세리에 A로 승격했다. 캄파니아에서의 성공적인 경험 이후, 1948-49 시즌에는 루케세 리베르타스를 맡아 세리에 A에서 8위를 기록했다. 이후 1949년부터 1951년까지 US 팔레르모의 감독을 맡아 13위와 10위를 차지했다.
1950-51 시즌 로마의 역사상 유일한 세리에 B 강등 이후, 비아니는 로마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즉시 팀을 세리에 A로 복귀시켰는데, 시즌 내내 1위를 유지하며 브레시아를 1점 차이로 제압했다. 승격에도 불구하고 비아니는 로마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4년 동안 볼로냐 FC를 이끌며 상위권 성적을 거두었다.
1956년 AC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한 비아니는 1958년까지 감독직을,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구단 기술 이사직을 맡았다. 이 9년 동안 3번의 스쿠데토[1] 획득했고, 1957-58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맷 버스비의 맨유를 물리치며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AC 밀란의 기술 이사로 직책을 옮겼고, 1962-63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AC 밀란의 디펜딩 챔피언 벤피카를 결승전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목격했다. 다만 1963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산투스 FC에게 패했다. 비아니는 밀란의 기술 이사로 재직하면서 루이지 보니초니, 파올로 토데스키니, 네레오 로코, 루이스 카르닐리아[2], 닐스 리드홀름 등등 성공적인 감독들과 함께 일했다. 특히 타 구단과의 이적 협상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대표적으로 빅토르 베니테스를 로마로 보내는 대신 안젤로 소르마니와 카를하인츠 슈넬링어를 밀란으로 영입하는 유리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으며,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의 디렉터 역할도 수행했다. 밀란에서의 활동 이후 제노아를 지휘했고, 1967-68 시즌 후반기에는 볼로냐 FC로 복귀해 루이스 카르닐리아의 후임으로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우디네세를 맡았다.
4. 둘러보기
분류
- 1909년 출생
- 1969년 사망
- 베네토 주 출신 인물
- 1924년 데뷔
- 1943년 은퇴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 이탈리아의 축구 감독/은퇴·사망
- 트레비소 FBC 1993/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SS 라치오/은퇴, 이적
- AS 리보르노 칼초/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US 살레르니타나 1919/은퇴, 이적
- 베네벤토 칼초/역대 감독
- US 살레르니타나 1919/역대 감독
- AS 루케세 리베르타스/역대 감독
- 팔레르모 FC/역대 감독
- AS 로마/역대 감독
- 볼로냐 FC/역대 감독
- AC 밀란/역대 감독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제노아 CFC/역대 감독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