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비야롱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folding ▼ | 둘러보기 틀 모음 | |||
대표팀 | ||||
32대 | ||||
클럽 | ||||
20대 | 30대 |
스페인의 축구감독 | ||
| ||
<colbgcolor=#eee,#191919> 이름 | 호세 비야롱아 José Villalonga | |
본명 | 호세 비야롱아 요렌테 José Villalonga Llorente | |
출생 | 1919년 12월 12일 스페인 왕국 안달루시아지방 코르도바주 코르도바시 | |
사망 | 1973년 8월 7일 (향년 53세) 스페인국 마드리드지방 마드리드주 | |
국적 |
| |
신체 | 불명 | |
직업 | 축구 감독 | |
소속 | 감독 | 레알 마드리드 CF (1955~195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59~1962) 스페인 대표팀 (1962~1966) |
1. 개요
스페인의 축구 감독. 유러피언컵의 첫 우승 감독이며 2024년 현재까지 스페인과 마드리드의 양대 클럽에서 유럽대항전 우승을 한번씩 이상 거둔 유일한 감독이다.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초대 유러피언컵 대회에서 우승한 후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우승했으며, 스페인에서는 1964년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이 모든 우승이 각 팀들에게 국제대회 첫 우승이었기에 스페인 축구의 첫 부흥기를 이끈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야롱아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프란시스코 헨토 등을 비롯한 스타 플레이어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W-M 시스템의 3-2-2-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고, 이는 페렌츠 푸스카스가 오기 전까지 레알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포메이션으로 자리 잡았다.2. 축구인 생활
젊은 시절 여러 아마추어 클럽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자신의 관심사에 맞게 군대 내 스포츠 교사가 되었다. 1949년에는 감독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마지막으로는 톨레도 군사 학교에서 중령 계급으로 복무했다.1952년, 비야롱아는 라리가 소속 레알 마드리드의 코칭 스태프에 합류했다. 1954-55 시즌 14라운드 후, 그는 전년도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우루과이 출신 감독 엔리케 페르난데스를 대체하여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엑토르 리알이 활약하던 레알은 리그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시즌 마지막에는 라이벌 FC 바르셀로나를 5점 차로 앞서며 리그 타이틀을 방어했다. 같은 해 6월에는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알베르 바토가 이끄는 스타드 드 랭스를 2-0으로 이기며 코파 라티나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서 3위에 그쳤지만, 프랭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초대 유러피언컵 대회에 참가하여 FK 파르티잔, AC 밀란같은 쟁쟁한 우승 후보들을 탈락시키며 결승까지 팀을 이끌었고, 결승전에서는 작년 코파 라티나에서 맞붙었던 스타드 드 랭스를 다시 만나 4-3으로 이기며 우승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 6개월로, 이는 지금까지도 UEFA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연소 우승 감독 기록으로 남아있다.[1] 1956년 7월에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스몰 월드컵[2]에서 브라질의 CR 바스쿠 다 가마를 이기고 우승했다.
1956-57 시즌에는 프랑스 국가대표 레몽 코파와 수비수 마르퀴토스가 합류한 팀을 이끌고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두 번째 유러피언컵에서도 레알은 강력한 모습을 보였으며, 5월 말에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ACF 피오렌티나를 2-0으로 꺾으며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다. 3주 뒤에는 SL 벤피카를 1-0으로 이기며 코파 라티나 역시 다시 우승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스포츠 디렉터 역할을 하던 후안 안토니오 이피냐와의 갈등이 심해져, 결국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아르헨티나 출신 루이스 카르닐리아를 새 감독으로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1959년 10월 말, 비야롱아는 레알 마드리드의 로컬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초반 6경기에서 3패를 기록한 슬로바키아 출신 페르디난드 다우치크를 대체했다. 비야롱아는 중도 부임한 첫 시즌에 아틀레티코를 리그 5위로 이끌었으며, 국내 컵대회[3]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당시 전 소속팀인 레알 마드리드였고, 그들의 홈구장에서 경기가 열렸음에도 3-1로 승리하며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12점 뒤진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컵대회에서는 다시 결승에 진출했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결승전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였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3-2로 승리하며 컵 타이틀을 방어했다. 1961-62 시즌에는 리그 3위를 기록했고, 컵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결승전에서 ACF 피오렌티나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1로 비겼고, 당시 규정에 따라 재경기가 필요했다. 월드컵 일정으로 인해 9월로 미뤄진 재경기에서 아틀레티코는 3-0으로 승리하며 유럽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62-63 시즌은 아틀레티코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리그에서는 다시 레알 마드리드에 이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도 다시 결승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토트넘에 1-5로 패배했다. 1962-63 시즌 중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4년 동안 3개의 트로피를 획득한 아틀레티코를 떠나게 되었다.
1962년 월드컵에서 스페인의 부진한 성적 이후, 비야롱아는 새로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국가 최초의 큰 성공을 이루었다.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 조셉 푸스테, 아만시오 아마로 등이 활약한 팀을 이끌고 홈구장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964년 유럽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소련의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이 지키는 소련을 2-1로 이겼다. 이 우승은 2008년 티키타카 스타일의 스페인이 다시 우승할 때까지 스페인의 유일한 국제 타이틀로 남았다.
비야롱아는 44세의 나이로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UEFA 유러피언 챔피언쉽 역대 최연소 우승 감독이 되었다. 그는 이후 스페인을 1966년 월드컵으로 이끌었지만, 서독과 아르헨티나에 패배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 이후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67년 비야롱아는 국립 감독 학교(Escuela Nacional de Entrenadores)의 디렉터가 되었으며, 마드리드 국립 체육 교육 연구소(Instituto Nacional de Educación Física)에서 축구 분야 최초의 교수가 되었다. 1973년 8월 7일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인해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둘러보기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참가 감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FFFFFF, #FFFFFF)" {{{#!wiki style="color: #000;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7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or: #000000" | 호세 비아롱아 ★ | 버로티 러요시 | 폴 페테르센 | 콘스탄틴 베스코프 ☆ |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60 | 1964 | 1968 | 1972 | 1976 | 1980 1984 | 1988 | 1992 | 1996 | 2000 | 2004 2008 | 2012 | 2016 | 2020 | 2024 |
{{{#!wiki style="color:white;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181818" | <colbgcolor=#004f9f,black> 1조 | 알프 램지 ★ | 앙리 게랭 | 이그나시오 트레예스 | 온디노 비에라 |
2조 | 후안 카를로스 로렌조 | 호세 비야롱아 | 알프레도 포니 | 헬무트 쇤 ☆ | |
3조 | 비센치 페올라 | 루돌프 비틀라칠 | 버로티 러요시 | 오투 글로리아 | |
4조 | 루이스 알라모스 | 에드몬도 파브리 | 명례현 | 니콜라이 모로조프 | |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30 | 1934 | 1938 | 1950 | 1954 | 1958 1962 | 1966 | 1970 | 1974 | 1978 | 1982 1986 | 1990 | 1994 | 1998 | 2002 | 2006 2010 | 2014 | 2018 | 2022 | }}}}}}}}} |
[1] FIFA 월드컵은 초대 대회인 1930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우승팀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끈 알베르토 수피시로 당시 무려 31세에 불과하였다.[2] 인터컨티넨탈컵과는 다른 대회이나, 유럽와 남미의 축구 구단이 맞붙는 대회 형식이 같다.[3]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