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7:44:36

지지뉴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파일:zizinho brazil.png
이름 지지뉴
Zizinho
본명 토마스 소아레스 다시우바[1]
Thomaz Soares da Silva
출생 1921년 9월 14일
브라질 제1공화국 상곤살루
사망 2002년 2월 8일 (향년 80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 니테로이
국적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69cm / 체중 63kg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2]
소속팀 CR 플라멩구 (1939~1950)
방구 AC (1951~1957)
상파울루 FC (1957~1960)
→ 상벤투 지마릴라 (1959 / 임대)
우베라바 SC (1960)
아우닥스 이탈리아노 (1961)
국가대표 53경기 30골 (브라질 / 1942~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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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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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경력
2.2.1. 클럽
2.3. 국가대표 경력2.4.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지지뉴에 대한 헌사5. 어록6. 뒷이야기7. 수상
7.1. 클럽7.2. 국가대표7.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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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로 브라질 축구계의 전설 중 한명이다. 단 한번의 실수로 황제 등극에는 실패하였지만 축구 황제 펠레와 브라질 역대 최고의 롱패서로 손꼽히는 제르송이 어린 시절 가장 존경하던 선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지지뉴는 리우데자네이루 근처의 상곤살루(Saõ Gonçalo)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축구에 꽂혀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여러 클럽들을 돌아다녔지만 몸이 약했던 지지뉴는 하나같이 딱지만 맞았다. 심지어는 축구 선수 대신 자기 팀에서 잡일이나 하라는 모욕적인 제안까지 들었다.

결국 지지뉴는 CR 플라멩구에 입단 테스트를 신청했고 당시 브라질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대신 연습 경기를 뛰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테스트에서 지지뉴는 해트 트릭을 기록했는데 특히 한 골은 40야드를 드리블해 들어와 팀의 수비수 3명을 벗겨내고 넣은 골이었다. 이를 본 플라멩구는 당장 지지뉴에게 계약을 제시하였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CR 플라멩구에 들어온 지지뉴는 CA 인데펜디엔테를 상대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2년간 그의 기량은 급성장하여 브라질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자리매김했고 소속팀에서는 1942년에 커리어 처음으로 히우 주 챔피언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 후로 리그 3연패를 차지하는 등 클럽 축구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1946년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시련을 겪었다. 그렇게 플라멩구는 그 해에 우승을 놓쳤고 지지뉴는 다시는 플라멩구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1950년 월드컵을 앞두고 지지뉴는 플라멩구에서 방구 AC로 팔려가게 되었고 이 이적은 "다리가 부러진 채로까지 팀을 위해 몇 번을 뛰었는데 이런 나를 뒤에서 팔았다"라며 지지뉴를 격노하게 했다.[4] 하지만 지지뉴는 월드컵에서 터진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클럽에서도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방구에서 커리어 유일의 주 리그 득점왕에도 오르는 등 예전의 실력은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방구를 우승으로까지 이끌지는 못했다.

1957년, 방구에서도 떠난 지지뉴는 상파울루 FC우베라바 SC에서 몇년 더 활약하다가 칠레아우닥스 이탈리아노에서 40살의 나이로 은퇴했다.

2.3. 국가대표 경력

지지뉴는 1942년에 국가대표팀에 선발이 되었고 그 해에 우루과이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하였다. 지지뉴는 그 대회에서 2골을 넣는 활약을 했지만 브라질은 3위에 그치고 말았다.

1949년의 자국 대회에서 지지뉴는 초반 3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그러다 그는 페루와의 경기에서 루이스 칼데론과 주먹다짐을 벌이다 퇴장을 당하기도 했지만 다음 경기에 바로 복귀했다. 결국 지지뉴는 대회에서 5골을 넣고 대표팀을 27년 만에 다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우승시키는데 성공했다. 지지뉴와 브라질 대표팀의 다음 목표는 다음 해에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의 우승이었다.

브라질은 월드컵 우승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지지뉴는 자신이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브라질은 4강 결선 리그[5]에 진출했고 스웨덴을 7대1, 스페인을 6대1로 대파했다. 남은 것은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승부였다.

우루과이의 성적이 1승 1무라 비기기만 해도 브라질이 우승하는 시합. 브라질은 지지뉴를 필두로 우루과이의 골문을 말 그대로 사정없이 폭격했지만 우루과이의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에게 걸리거나 수비수들게 막히면서 가장 중요한 골이 1골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브라질은 우루과이의 카운터 어택 2방에 무너지고 말았다.[6]

마라카낭의 비극은 브라질 축구팬들도 그랬지만 당사자 중 한 명인 본인에게는 정말로 큰 충격이었다. 그로 인해 큰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지지뉴는 대표팀에서 3년간 뛰지 못했고 1953년에서야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브라질은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지지뉴는 대회 이후에 대표팀 공백을 다시 가졌다가 1955년부터 다시 뛰기 시작했고 195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가 그의 대표팀 은퇴 무대가 되었다.

지지뉴가 이렇게 나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자신의 몫을 해줬다 보니 지지뉴에게 브라질 각지에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만 나가지 말고 FIFA 월드컵에도 다시 나가서 명예회복을 하라는 권유가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 권유를 두 번 모두 거절했는데 자신이 월드컵에 나가게 되면 누군가 한 명이 엔트리에서 빠져야 할텐데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가 월드컵 참가를 거부한 이유였다.[7]

2.4. 이후

지지뉴는 축구계에서 은퇴한 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대중들의 눈을 피하며 살았고, 80세로 천수를 다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시야도 넓고 그에 따른 패싱 능력, 데드볼 처리 능력, 골결정력도 일품이지만 특히 드리블 실력은 자타공인 당대 최고였다.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함께 남미의 1940년대 축구계를 양분했으며 펠레가린샤의 등장 이전으로 한정하면 브라질 내 역대 최고급으로 꼽히는 선수이다.

4. 지지뉴에 대한 헌사

어린 시절 나는 두 명의 선수들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하나는 나의 아버지 돈지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지뉴였다. 내가 커리어를 시작할 무렵, 그는 상파울루에 있었는데 1957년에 그의 상파울루가 우승했고 그가 최고임을 증명해 보였다. 지지뉴는 완벽한 선수였다. 중앙에서 공격을 하고 수비도 잘했으며, 누구보다 뛰어난 헤더였고, 드리블러였다.
펠레
그의 축구를 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희귀한 그림들이 떠오른다.
조다노 파토리(가제타 델로 스포츠의 기자)
지지뉴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우송 로드리게스
나는 마라카낭에서 매주 지지뉴를 읽는다.
아르만도 노게이라

5. 어록

이 '숙녀분'들께서는 우리 시대에 뛰어봤어야 됐어.
1970년대 선수들이 자기들이 축구하는 환경이 거칠다고 불평하자
공에도 생명이 있어. 잘 다뤄주는걸 좋아한다고.

6. 뒷이야기

  • 지지뉴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때 쯤 웬 깡마른 소년갑툭튀하여 상파울루 리그를 씹어먹더니 지지뉴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지 6개월 후에는 대표팀에도 선발되어 지지뉴의 공백까지 메워갔다. 그러더니 이 소년은 만 17세의 나이에 월드컵에까지 출전, 8년 전에 선배들이 눈앞에서 놓쳤던 월드컵 트로피를 브라질에 가져오면서 축구계의 불멸의 기록 중 하나인 최연소 월드컵 챔피언 기록을 완성시켰다. 이 소년은 그 후 월드컵 우승을 2번 더 차지하면서 브라질을 축구의 제국으로 만들어버렸고 자신은 축구계의 황제가 되었다. 지지뉴는 이 전설적인 축구 황제와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뛰어보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했다고 한다.
  • 지지뉴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마라카낭의 비극. 비록 지지뉴가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자나 수비수들처럼 직격탄을 맞지는 않았지만 지지뉴라고 편할 리가 없었다. 지지뉴는 그 일이 일어난 7월 16일만 되면 집의 전화선을 끊어놓았는데 죽기 직전까지 50여년을 그리 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브라질 전국에서 왜 그 때 브라질의 패배를 막지 못했냐는 전화가 하루종일 울렸기 때문이라고. 지지뉴는 선수 생활의 수많은 영광보다 그 날의 상처를 평생 가슴 아파했다.
  • 지지뉴는 제르송의 아버지와 친구였다. 그래서 제르송이 처음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할 때 지지뉴가 마킹, 시야나 패스길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었고 제르송은 이에 대해 평생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7. 수상

7.1. 클럽

7.2. 국가대표

7.3. 개인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스트라이커를 제외한 공격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했다.[3] 1950년 월드컵 당시의 등번호. 하지만 이것은 포지션 개념의 등번호이다. 현재라면 아마 10번을 썼을 것이다.[4] 다른 이야기로는 지지뉴가 돈때문에 플라멩구를 버렸고 이로 인해 브라질 축구계가 한동안 시끄러웠다는 이야기도 있다.[5] 1950년 월드컵은 대다수 팀들이 기권해서 13개국만 출전했다. 본선 13강 조별리그로 8강전 없이 조 1위팀들끼리 결승 리그에서 한번 더 리그를 치르는 방식으로 월드컵 대회를 진행했다.[6] 브라질은 앞선 5경기에서 21골을 넣는 화력쇼를 펼쳤고 그 중심에는 지지뉴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골이 들어가지 않았다.[7] 어쩌면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월드컵 무대를 다시는 밟고 싶지 않은 점도 이유였을 수도 있다.[8]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골든볼을 지지뉴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82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며 여러 잡지에선 50년 대회 골든볼은 지지뉴와 옵둘리오 바렐라, 후안 스키아피노로 갈리는 편.[9] 17골로 노르베르토 멘데스와 공동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