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2 12:30:36

칼 루이스

칼 루이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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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육상 남자 4×100m 계주 우승국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80)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1984)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88)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88)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1992)
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
(1996)

올림픽 육상 남자 멀리뛰기 우승자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동독 국기.svg 러츠 돔브로스키
(1980)
파일:미국 국기.svg 칼 루이스
(1984, 1988, 1992, 1996)
파일:쿠바 국기.svg 니반 페드로소페드로소
(2000)

올림픽 육상 남자 100m 우승자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오륜기.svg[1] 앨런 웰스
(1980)
파일:미국 국기.svg 칼 루이스
(1984, 1988)
파일:영국 국기.svg 린포드 크리스티
(1992)

올림픽 육상 남자 200m 우승자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오륜기.svg[2] 피에트로 메엔나
(1980)
파일:미국 국기.svg 칼 루이스
(1984)
파일:미국 국기.svg 조 도르아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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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9CarlLewis.jpg
이름 <colbgcolor=#fff,#191919>프레드릭 칼톤 루이스(Frederick Carlton Lewis)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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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1년 7월 1일 ([age(1961-07-01)]세)
앨라배마 주 버밍햄
신체 188cm, 80kg
종목 육상
주종목 멀리뛰기, 100m, 200m, 4×100m 계주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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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남자 육상 선수이며, 9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멀리뛰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이며, 100m와 200m, 400m 계주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2.1. 유년 시절

육상 클럽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육상을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 이블린 루이스는 1951 부에노스 아이레스 팬아메리칸 게임에 미국 대표로 출전한 허들 선수였고, 형 클리블랜드는 축구 선수, 여동생 캐롤 역시 멀리뛰기 선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멀리뛰기에 두각을 보여 여러 대학의 러브콜을 받았으며, 휴스턴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2.2. 1980-1984

입학 직후인 1980년부터 대학 대회를 폭격하기 시작하고, 단거리 육상에서도 재능이 개화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멀리뛰기 및 4×100m 계주의 국가대표로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미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하여 출전하지 못했다. 1981년에는 기량이 더욱 발전하여, 루이스의 기록은 단거리와 멀리뛰기 모두에서 세계 수준으로 올라왔다. 10초 플랫대의 기록을 냄과 동시에 8.5미터가 넘는 멀리뛰기 기록을 안정적으로 낼 수 있었으며, 출전한 모든 멀리뛰기 대회에서 여유롭게 우승하기 시작한다. 당시 파울로 처리된 한 점프에서는 9미터를 여유롭게 넘어서기도 했다. 루이스는 언젠가 1968년 올림픽 당시에 세워진 밥 비먼의 신화적인 8.90미터 세계기록을 깨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는데, "기록 앞에 A[3]가 붙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4] 1983년에는 1983 헬싱키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100m, 4×1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모두 우승하였다. 다른 대회에서 뒷바람과 고고도 없이 최초로 100미터에서 10초 이내 기록을 내기도 했다. 졸업반이 된 1984년에는 육상 외의 다른 스포츠를 한 적이 없지만 프로 스포츠에 드래프트당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가 전체 334순위로, 시카고 불스가 전체 208순위로 뽑았지만 계약하지 않았다.

2.3.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00m, 200m, 4×1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며 4관왕에 올랐다.[5] 이 기록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제시 오언스가 세웠던 것을 48년 만에 재현해 낸 것이었다.

하지만 오언스와 같은 주목은 받지 못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공산권 국가들이 1980년 올림픽 보이콧의 보복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올림픽에서 루이스가 멀리뛰기 세계기록인 8.90미터에 도전할 것이라 예상했으나[6], 루이스는 1차 시기에서 금메달에 충분한 8.54미터를 뛴 뒤 2차 시기를 대충 뛰고, 3-6차 시기에 모두 뛰지 않았다. 다른 종목에서 또 금메달에 도전해야 하며, 단거리에서 루이스의 기량이 멀리뛰기에서처럼 압도적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타당한 전략이긴 했지만. 또한, 그의 오만한 성격과 그가 동성애자라는 헛소문이 퍼진 것 역시 악영향을 끼쳤다.

2.4. 1984-1988: 벤 존슨과의 경쟁

루이스의 왕좌는 곧 위협받기 시작했다. 멀리뛰기에는 소련의 선수 로베르트 에미얀이 있었다. 루이스보다 4살 어렸던 이 선수는 기록을 차츰 늘려가더니 1986년에는 8.61미터를 뛰기에 이르렀다. 4년 만에 루이스를 제치고 시즌 최고 기록을 가져간 것이다.

100m에는 많은 선수들이 루이스와 경쟁했고, 특히 캐나다 선수 벤 존슨이 있었다. 존슨은 1984년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땄지만, 곧 발전된 기량을 보여주며 루이스를 많이 이기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87 세계 선수권에서는 200m를 포기하고 나머지 종목에 집중하기로 한다.

멀리뛰기에서, 에미얀은 선수권 몆 달 전에 고향 아르메니아의 고원에서 8.86m의 기록을 냈다. 이것은 아직도 미국 외의 선수들 중 최고 기록이다. 루이스는 이전과는 달리 6회 시기 모두 최선을 다했고, 8.67m로 8.54m의 에미얀을 제치고 우승한다. 100m 계주에서도 미국팀이 우승한다. 하지만 100m에서, 루이스는 당시 세계기록 타이인 9.93초에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9.83초를 기록한 존슨에 밀려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존슨에게 약물 의혹을 제기했지만 존슨은 루이스가 올림픽에서 자신을 이겼을 때, 본인은 약물 의혹 같은 걸 제기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2.5. 1988 서울 올림픽

루이스는 이전 올림픽과 같이 100m, 200m, 100m 계주, 멀리뛰기에 출전했다.

멀리뛰기에서, 유력한 경쟁자였던 에미얀이 부상으로 탈락하여 비교적 싱겁게 금메달을 딴다. [7] 100m 계주에서는 앞 주자들이 파울을 저질러 뛰어보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200m에서는 1984년보다 좋은 기록을 냈지만,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미국 선수 조 드로치에게 밀려 은메달을 기록했다.

100m 달리기에서는 캐나다의 벤 존슨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벤 존슨의 도핑이 발각되어 기록과 메달이 박탈되었고[8], 칼 루이스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써 2관왕.

비록 도핑으로 얼룩졌지만, 당시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대결은 지금까지도 서울 올림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또한 개최국 대한민국의 도핑 검사 능력을 인정받은 계기가 되었다.

2.6. 1991 도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이 대회는 루이스가 가장 좋은 기량을 보여준 대회라고 할 수 있다.

100미터에서, 루이스는 치열한 경쟁 끝에 당시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르로이 버렐 등을 물리치고 세계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당시 루이스는 이미 4년 가까이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약물 복용자 벤 존슨 때문에 레이스 직후 세계기록임을 알게 된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루이스는 눈물을 흘렸고, 인터뷰에서 "인생 최고의 업적"이라고 말했다. 100m 계주 역시 세계기록으로 우승했다. 200미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멀리뛰기 예선에서 8.56미터의 기록으로, 2위와 0.35미터의 압도적인 차이를 벌리며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루이스는 멀리뛰기 결승의 첫 시기에서 8.68미터를 뛰었다. 당시 세계 선수권 기록보다 높았고, 루이스를 제외하면 오직 세 명만 이 기록보다 멀리 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기에서는 뒷바람이 있었지만 8.83미터를 뛴다. 그의 개인 최고 기록이고, 당시 역대 3위 기록이다. 바로 다음 시기에서는 8.91미터를 뛰었다. 뒷바람이 있기 때문에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23년 만에 처음으로 밥 비먼의 8.90미터를 넘는 기록이 나온 것이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시기에서도 8.87미터와 8.84미터를 뛰었다. 2023년 현재까지 뒷바람을 포함한 8.80미터를 넘는 멀리뛰기 기록은 모두 9회 나왔다. 이 중 4회는 1991년 세계 선수권 결승의 칼 루이스가 기록한 것이다.[9] 하지만 이 모든 기록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10여년만에 처음으로 패배했다. 1988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마이크 파월이 다섯 번째 시기에서 8.95미터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기 때문이다. 이 날 파월의 두 번째로 좋은 점프는 8.54미터였지만, 단 한번의 최고 기록으로 우승했다. 이 날 이후 누구도 8.80미터 이상의 공식 기록을 내지 못했다.

2.7.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만으로 30대에 접어든 루이스의 기량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100미터와 200미터에서 루이스는 국대 선발전에서 탈락했고, 멀리뛰기에서는 파월에 이은 2위로 통과했으며 100미터 계주에서도 국가대표로 또 다시 선발되었다.

4×100m 계주에서는 또 다시 세계기록으로 우승했으며, 멀리뛰기에서는 1차 시기에서 8.67미터를 뛰며 마지막 시기에서 8.64미터를 뛴 파월을 누르고 금메달을 따며 또 다시 2관왕에 올랐다.

2.8. 1993 슈투트가르트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루이스는 100미터 계주 미국 팀에 선발되지 못했고, 멀리뛰기를 포기하고 100미터와 200미터에 출전했다. 100미터에서 10.02초의 기록으로 4위, 200미터에서는 19.99초로 동메달을 기록했다.

2.9.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루이스는 부상으로 93년에서 96년 사이 거의 경쟁하지 못했으나, 1996년에 복귀하여 개인 통산 다섯 번째로 멀리뛰기 미국 대표로 선발되었다.

당시 금메달을 두고 경쟁할 것으로 예측되었던 마이클 파월과 쿠바의 이반 페드로소는 폼이 좋지 않았다. 루이스는 멀리뛰기에서 8.50미터의 기록으로 다시 금메달을 따내며, 멀리뛰기 올림픽 4연패라는 금자탑을 달성했다.[10] 이 때 기록한 8.50미터의 기록은 지금도 35세 이상 선수들 중 최고 기록이다.
올림픽에서 총 9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하고 은퇴하였다.

3. 수상 기록

대회
올림픽 9 1 0
세계선수권 8 1 1
팬 아메리칸 게임 2 0 1
친선경기 3 1 1
합계 22 3 3

올림픽
금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 4×100m 계주
금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 멀리뛰기
금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 100m
금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 200m
금메달 1988 서울 멀리뛰기
금메달 1988 서울 100m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4×100m 계주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멀리뛰기
금메달 1996 애틀랜타 멀리뛰기
은메달 1988 서울 200m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3 헬싱키 4×100m 계주
금메달 1983 헬싱키 멀리뛰기
금메달 1983 헬싱키 100m
금메달 1987 로마 4×100m 계주
금메달 1987 로마 멀리뛰기
금메달 1987 로마 100m
금메달 1991 도쿄 4×100m 계주
금메달 1991 도쿄 100m
은메달 1991 도쿄 멀리뛰기
동메달 1993 슈투트가르트 200m
팬 아메리칸 게임
금메달 1987 인디애나폴리스 4×100m 계주
금메달 1987 인디애나폴리스 멀리뛰기
동메달 1979 산후안 멀리뛰기
친선경기
금메달 1986 모스크바 4×100m 계주
금메달 1990 시애틀 멀리뛰기
금메달 1994 상트페테르부르크 4×100m 계주
은메달 1991 시애틀 100m
동메달 1986 모스크바 100m

4. 기타

  • 마이클 펠프스 때문에 올림픽 다관왕에서 비교가 될뿐이지,[11] 칼 루이스가 따낸 9개의 금메달은 공동 2위에 해당되는 대기록이다. 은메달과 동메달까지 고려하면 4명 중 마지막 순위이어서 공동 5위에 해당되지만, 결코 폄하될 기록이 아니다. 우사인 볼트가 금메달 8개를 획득했기에 칼 루이스보다 아래에 위치한다.[12]
  • 현역 시절 미국의 육상 스타였기 때문에 캐나다의 벤 존슨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에서 더 띄워주는 경향이 있었는데, 1990년 출시된 올림픽 PC 게임에는 칼 루이스 본인이 코치(도움말)로 등장할 정도였다.
  • 1991년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멀리뛰기 8.87m는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현재 세계최고 기록은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던 미국인 마이크 파월의 8.95m이고, 칼 루이스는 8cm 차이로 은메달을 얻었다.[13]
IAAF WCH 1991 Tokyo - 칼 루이스와 마이크 파월의 대결
  • 1988년~1991년(32개월), 1991년~1994년(34개월), 도합 66개월 간 남자 100m 달리기 세계신기록 보유자로, 우사인 볼트 등장 이전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 타이틀을 보유한 바 있다. 1991년 6월에 르로이 버렐에게 이 타이틀을 잠시 빼앗기긴 했지만, 불과 두 달 후에 본인 스스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며 왕좌를 되찾아왔다. 그러나 1994년 버렐에게 다시 빼앗겼다.
  • 은퇴 이후 영화에도 관심이 있어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정치에 입문하기도 했지만, 자격 미달로 상원위원에 출마하지 못했다. 현재는 모교인 휴스턴 대학교에서 코치로 활동중이다.
  • 특이하게도 NBA 출전 경력은 없으나, 연관성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래프트 중 하나로 뽑히는 1984년 드래프트에서 칼 루이스는 10라운드에 208위로 뽑혔다. 그를 뽑은 팀은 이 해 3픽으로 마이클 조던을 뽑은 시카고 불스였다. 다만, 칼 루이스는 농구가 아닌 육상을 선택했다.
  • 칼 루이스가 올림픽 4관왕을 달성한 해에 일본에서 방송된 초전자 바이오맨 40화에서 신제국 기어의 쥬노이드 중 하나인 쥬오에게 "칼 루이스보다 빨리는 무리예요."라고 언급되기도 했다.
  • 이처럼 당대 육상계의 레전드이자 아이콘으로 대접받았지만 농담으로라도 인성은 좋다고 볼수 없다.
    • 87 세계선수권 당시, 벤 존슨이 압도적인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자 약물 의혹을 제기했다.
    • 88 올림픽 당시, 멀리뛰기 출전당시 자신이 예선 첫번째 출전으로 결정되자 카메라가 비치는데도 경기 진행요원들에게 온갖 쌍욕을 퍼부으며 진상을 부렸고 미국 선수인데다 올림픽 최고의 흥행카드였던 칼 루이스였기에 결국 멀리뛰기 예선을 가장 마지막으로 돌리는 당시로써는 말도 안되는 특혜를 누렸다. 거기에 상대를 전혀 존중하지 않고 비아냥대는 태도도 논란이 되었는데 나이가 한참 든뒤에도 벤 존슨이 약물은 자신만 한게 아니라고 인터뷰하자 그 사실을 기자로부터 들은 루이스는 맘대로 하시라고 하라며 안하무인격 태도를 보여주었다.
    • 96 올림픽 당시, 이변을 일으키며 9번째 금메달을 따자 최초로 10개의 금메달을 딴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본인이 100미터 계주 팀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자신이 현역일때 아주 유명한 여자 육상선수도 도핑을 그렇게 했는데 정작 도핑검사에서 안걸렸다고 그리피스 조이너를 돌려까기도 했다. 물론 도핑은 옹호되선 안되지만 당시 88올림픽때 어지간한 육상선수들은 다 썼다는 설도 유력한데다 칼 루이스가 워낙 인성질로 유명해서 자국에서조차도 똥묻은개가 뭐묻은개 나무란다고 까는중.


[1] 서방(자유주의) 국가들이 올림픽 출전을 포기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출전한 선수들은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들고 출전했다. 해당 선수는 본래 영국 국적이다.[2] 서방(자유주의) 국가들이 올림픽 출전을 포기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출전한 선수들은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들고 출전했다. 해당 선수는 본래 이탈리아 국적이다.[3] Altitude의 약자.[4] 지금은 그 정도가 덜하지만, 1970년대까지 많은 육상 세계기록이 고고도 지역에서 세워졌다.[5] 만화 심슨 가족에서도 이 때의 활약상이 언급된다. 작중 1984 올림픽이 개회하자 광대 크러스티가 자신이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이벤트를 여는데, 그 내용이 미국이 금메달을 따면 공짜로 버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대회에서 소련 등 공산국가의 보이콧이 이뤄지는 바람에 미국 선수단이 금메달을 독식하게 된 것.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크러스티는 절규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손님들은 환호한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인 클랜시 위검 경찰서장은 대놓고 칼 루이스의 이름을 언급하며 찬양한다.[6] 이전 기록 보유자 밥 비먼은 "예야, 네가 해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하는 내용의 맥주 광고를 찍기도 했다.[7] 에미얀은 몇 개월 후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친지를 잃게 된다. 이후로도 선수생활을 이어가지만, 세계 수준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다.[8] 아울러 결승에서 벤 존슨이 세운 9.79초의 세계신기록도 자동으로 무효 처리가 되었다.[9] 뒷바람이 없는 공식 기록으로 하면 5회 중 2회이다.[10] 멀리뛰기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2개 이상 딴 선수는 아직도 칼 루이스가 유일하다.[11] 사실 비교가 안된다. 이분은 올림픽 금메달만 23개다. 물론 수영이라는 종목 특성상 메달이 타 종목에 비해 많은 것도 감안해야 한다.[12] 원래는 9개를 땄는데, 그 중 4×100m 계주 종목에서 팀 동료가 도핑에 발각되는 바람에, 볼트의 금메달 1개도 박탈당하는 손해를 보았다.[13] 참고로, 역대 2위 기록은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인 밥 비먼의 8.90cm이다. 이는 반세기가 넘도록 하계올림픽 육상 종목에서 남녀불문 유일하게 깨지지 않는 올림픽 최고 기록인데, 그 당시 멕시코시티가 고지대인 특성상 단거리 트랙과 필드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이 무더기로 쏟아지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