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21:50:35

NBA 드래프트/1984년도

NBA 드래프트
NBA 드래프트/1983년도 1984년도 NBA 드래프트 NBA 드래프트/1985년도

1. 1라운드2. 기타
2.1. 하킴 올라주원2.2. 샘 보위2.3. 패트릭 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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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라운드

  • 금색 : NBA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
<rowcolor=#ffc224> 순위 구단 선수 국적 포지션
1순위 휴스턴 로키츠 하킴 올라주원 나이지리아 센터
2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샘 보위 미국 센터
3순위 시카고 불스 마이클 조던 미국 가드/포워드
4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샘 퍼킨스 미국 포워드/센터
5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찰스 바클리 미국 포워드
6순위 워싱턴 불리츠 멜빈 터핀[1] 미국 센터
7순위 샌안토니오 스퍼스 앨빈 로버트슨 미국 가드
8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랭커스터 고든 미국 가드
9순위 캔자스시티 킹스 오티스 소프 미국 포워드/센터
10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레온 우드 미국 가드
11순위 애틀랜타 호크스 케빈 윌리스 미국 포워드/센터
12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팀 맥코믹[2] 미국 센터
13순위 피닉스 선즈 제이 험프리스 미국 가드
14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마이클 케이지 미국 포워드/센터
15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테렌스 스탠스버리 미국 가드
16순위 유타 재즈 존 스탁턴 미국 가드
17순위 뉴저지 네츠 제프 터너 미국 포워드/센터
18순위 인디애나 페이서스 번 플레밍 미국 가드
19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버나드 톰슨 미국 가드/포워드
20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토니 캠벨 미국 가드/포워드
21순위 밀워키 벅스 케니 필스 미국 가드/포워드
22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톰 시웰[3] 미국 가드
23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얼 존스 미국 센터
24순위 보스턴 셀틱스 마이클 영 미국 가드/포워드

2. 기타

지명 당시부터 엄청난 인재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 기대를 충족시켜 역대급 선수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NBA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불리우는 중이다.[4]

사실 한국에서 NBA의 인지도가 그리 높진 않았던 시절이었던데다[5] 3순위 마이클 조던이 너무 크게 성공한 탓에 이야기가 안 되는 것 뿐이지 사실 한명한명 따져봤을 때 해당 드래프트의 인재풀은 굳이 조던 한 명만을 논하지 않더라도 다른 드래프트와 비교해봤을 때 압도적으로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2003 드래프트와 비교해보면 올스타에 한 번이라도 출전한 선수 수는 9명 대 7명으로 2003 드래프트가 앞서지만, 올-NBA 팀에 한 번이라도 뽑힌 선수는 6명 대 4명으로 1984 드래프트가 앞서며[6][7] MVP를 한 번이라도 수상한 선수도 3명 대 1명으로 앞선다.[8] 파이널 MVP 출신은 각각 두 명이지만 MVP 횟수는 1984 드래프트가 7회 대 4회, 파이널 MVP 횟수는 8회 대 5회로 앞선다. 올해의 수비수상은 1984 드래프트는 두 명이서 총 세 번 탔는데 2003 드래프트는 없다. 올-NBA 팀의 경우 퍼스트 팀 경험자는 1984 드래프트는 4명이고 2003 드래프트는 2명, 선정횟수도 23회 대 15회로 1984 드래프트가 압도적이고, 올-NBA 팀 전체로 따져도 51회 대 21회로 여전히 압도적이다.[9]

명예의 전당 4인방이 많이 유명하지만 그 외에 역사상 최고의 가드 수비수 중 하나이자 올-NBA 세컨드 팀까지 오른 알빈 로버트슨, 올-NBA 팀 경험자이자 무려 44세까지 뛴 케빈 윌리스, 1회 올스타이자 하킴 올라주원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로서 1993-94 시즌 우승에 공헌한 오티스 쏘프, 준척급 빅맨으로 3개의 다른 팀에서 3번의 파이널을 경험하고 3번의 준우승을 기록한[10] 3점 쏘는 센터 샘 퍼킨스, 사상 최고로 치열한 리바운드왕 경쟁의 승리자 마이클 케이지[11] 등 올스타거나 이에 준하는 수준급 선수들도 많았던 역대급 드래프트.

당시는 현재처럼 1, 2라운드 제한이 생기기 전이라 무려 10라운드, 228명의 선수들이 지명을 받았다. 물론 이 정도 되면 하위권에선 아무나 막 지명하는 경우가 많아 도박성 지명은 물론 저축성 지명이나 아무리봐도 반장난성인 듯한 지명도 있었다. 브라질의 농구 대통령 오스카 슈미트는 6라운드 131순위로 지명되었으나 NBA 진출을 거부하고 커리어 통산 4만9천 703득점으로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프로선수가 되며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또한 육상 레전드 칼 루이스는 대학때 농구선수도 아니었음에도 생뚱맞게 시카고 불스에 10라운드 208순위로 뽑혔으며, 당연히 합류하지 않았다.[12] 마지막 순위로 뽑힌 선수는 클라크 대학교의 댄 트렌트란 선수인데, 그는 보스턴 셀틱스에 합류는 했으나 경기에는 한 번도 출장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13]

그 외의 선수로는 철저히 무명이었지만 감독으로 대성한 경우는 3라운드 70순위로 보스턴 셀틱스에 뽑힌 릭 칼라일이 있는데, 30세 젊은 나이에 코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보스턴에서 3시즌, CBA를 거쳐 뉴욕 닉스와 뉴저지 네츠에서도 잠깐 뛰었다. 평균 2점 정도 넣은 별볼일 없는 선수였지만 보스턴 역사상 최고의 시즌 중 하나인 1985-86 시즌에는 77경기를 뛰며 심지어 한 경기는 주전으로 나왔다.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도 들어 10경기를 평균 6분 좀 안되게 뛰며 우승에 조금이나마 공헌했다.

그리고 KBL팬이라면 귀에 익은 이름이 있을텐데, 훗날 전자랜드의 감독이자 KBL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된 제이 험프리스가 1라운드 13순위로 뽑혔다. 칼라일과 달리 주전급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은 밀워키에서 15.2점 6.7어시스트를 기록한 1990-91 시즌이다.

2.1. 하킴 올라주원

  • 역대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1순위 지명자이다.
  • 해당 드래프트는 데이비드 스턴 총재 취임 후 시행된 첫 번째 드래프트이고, 따라서 올라주원은 스턴 총재가 최초로 지명한 선수이다. 이후 올라주원은 스턴 총재의 마지막 드래프트였던 2013 드래프트에서 마지막으로 1라운드 30순위를 호명한 후 그와 포옹을 나눈 바 있다.

2.2. 샘 보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는 해당 드래프트에서 스포츠 역사상 길이 남을 희대의 삽질을 벌이게 되는데, 이른바 Sam Bowie Picks 사건이다. 2순위로 지명된 샘 보위는 NBA에서 10년 정도 뛰기는 했지만 대학시절의 활약과는 달리 부상이 도져 출장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고, 성적도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 정도로 포텐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남긴 채 은퇴를 선택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드래프트 실패 또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유망주의 사례 정도로 남았을 수 있으나 문제는 바로 다음에 지명받은 선수가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마이클 조던이라는 데에 있었다. 조던을 드래프트한 시카고가 1990년대에 6번 우승하는 동안 포틀랜드는 단 한 번의 우승도 추가하지 못하고, 1992 파이널에는 시카고와 파이널에서 직접 만나 패하기에 이른다. (단 보위는 90년대에 포틀랜드에서 뛰지 않았다)

사실 샘 보위 지명이 그렇게 단순하게 삽질이라고 까기에는 포틀랜드가 너무 불운했던 측면이 있다. 당시 포틀랜드는 전년도에 이미 당대 2인자 슈팅 가드로 성장할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지명한 상태였고, 그 외에도 스윙맨 포지션에 다른 건실한 선수들이 많아서 포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안 그래도 가장 낮은 기대치를 가진 포지션인 슈팅 가드를 보완하는 대신 빅맨을 지명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샘 보위는, 비록 대학에서 이미 부상을 겪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학 무대에서 보여준 실력은 정상급이었고 프로에 와서도 실력 자체는 준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포틀랜드가 운이 너무 없었다고 봐야 한다.[14]

그러나 Sam Bowie Picks의 평가를 떨어트리는 또 다른 요인이 존재했으니, 바로 찰스 바클리존 스탁턴의 존재이다. 특히 바클리의 경우 포틀랜드가 보강하고자 하던 빅맨 포지션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포틀랜드의 선택을 더욱 뼈아프게 만든다.[15] 스탁턴이야 당시로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유망주를 알아본 유타 재즈의 안목이 더 빛나는 부분이라 쳐도, 바클리에 더해 하다못해 11순위로 뽑힌 케빈 윌리스도 올-NBA 팀 유경험자로 성장하며 보위보다는 훨씬 나은 활약을 펼쳤다. 다만 바클리의 경우 경쟁력이 떨어지는 오번 대학교의 198cm 짜리 단신 센터로서, 사이즈와 실력 모두 훌륭했던 보위를 제치고 뽑기에는 지나치게 모험성이 강했다. 올라주원과 보위와 모두 지명받고 나서야 단신 빅맨들인 바클리와 샘 퍼킨스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대학빨이 있던 퍼킨스가 먼저) 뽑힌거지, 포워드 전환이 필수적인 데다 몸무게 조절까지 실패해 의문점이 있던 바클리가 정통 센터 보위보다 먼저 뽑힐 가능성은 희박했다. 또한 스탁턴의 경우, 16순위로 뽑힌 것 자체가 엄청난 이변으로 본인은 유럽행을 알아보고 있었을 정도로 무명이었다.[16] 이런 선수를 2순위로 뽑을 단장이 있을리가 없었다. 실제로 바클리는 실력 자체는 엄청났기 때문에 글릭맨처럼 고민한 사람은 있었으나, 스탁턴은 그런 얘기조차 없었다.

결론적으로, 포틀랜드가 마이클 조던을 뽑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가는 선택이나, 너무 운이 없었다. 이후 그들은 2007년 드래프트에서 케빈 듀란트를 거르고 그렉 오든을 지명하면서 비슷한 실수를 다시 저지른다.

2.3. 패트릭 유잉

만일 패트릭 유잉이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4학년을 끝마치지 않고 해당 드래프트에 참가했다면
  • 1순위 휴스턴 로키츠는 하킴 올라주원 대신 패트릭 유잉을 지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유잉이 대학 농구에서 차지하던 위상은 타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이었고, 비록 조던이 당시 대학농구 관련 상들을 모두 석권했지만, 포지션 상의 측면에서 가장 가치가 높았던 선수는 유잉이었다.
  • 2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는 샘 보위 대신 하킴 올라주원을 지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드렉슬러와 함께 휴스턴 대학, 그리고 나중에 휴스턴 로키츠에서 다시 결성되는 Phi Slama Jama 콤비를 앞세워 더 좋은 성적을 냈을 것이다.
  • 3순위 시카고 불스는 마이클 조던 대신 샘 보위를 지명하고 폭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시카고도 빅맨 포지션을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에 따라 남아있는 선수 중 가장 뛰어난 마이클 조던을 드래프트하기는 했지만 별로 탐탁치 않아하던 상황이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샘 보위가 남아있었다면 시카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보위를 뽑았을 것이고, 역대 최고의 선수를 놓친 시카고는 지금까지도 우승은 근처에도 못가는 그저 그런 팀으로 남았을 것이다.[18]
  • 4순위 댈러스 매버릭스는 샘 퍼킨스 대신 마이클 조던을 지명했을 가능성이 높다.[19] 퍼킨스는 센터지만 키가 206cm에 불과해 그리 기대치가 높은 선수가 아니었고[20], 조던의 동료이자 조력자이고 나이까지 한 살 많아 가치가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NBA의 판도가 뒤바뀌게 되는데, 휴스턴은 기존 올라주원-샘슨과 별 차이없는 유잉-샘슨 트윈타워로 여전한 위력을 발휘하고, 포틀랜드는 대권에 조금 더 일찍 도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안 그래도 1980년대에 상당한 전력을 보인 댈러스는 단번에 우승후보급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당시 동부 컨퍼런스에 비해 강팀이 적은 서부 컨퍼런스에서 레이커스에 대항할 강력한 팀이 생기는 것이다.

[1]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2]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3]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4] 비교되는 다른 드래프트로는 코비 브라이언트, 앨런 아이버슨, 스티브 내시, 레이 앨런 등이 지명된 1996 드래프트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서니, 크리스 보시 등이 지명된 2003 드래프트가 있다.[5] 조던이 늦은 나이까지 기량을 유지했기에 간과하기 쉽지만 이때 드래프트된 선수들 대부분은 1962년, 1963년생이었고 이들은 199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다. 쏘프와 윌리스 둘 다 1991-92 시즌에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쏘프는 많은 한국 팬들은 블루컬러워커로만 알고 있는데 올스타 시즌에는 올라주원 옆에서 평균 17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새크라멘토 시절에는 20-10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도 한국에서 중계가 되긴 했지만 한국에서 NBA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마이클 조던이고, 특히 1993 NBA 파이널을 기점으로 팬이 된 사람들도 많은데 1990년대 이전에 데뷔한 선수들은 30세 전후로 하락세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30세는 한창 뛸 나이지만 당시는 선수관리가 지금보다 훨씬 미흡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6] 더 대단한 점은 1987-88 시즌까지는 세컨드 팀까지 밖에 없었다. 즉, 올-NBA 팀 선정횟수에서 1984 드래프트가 불리한데도 앞선다는 것. 예를 들어 올-NBA 팀 선정경력이 하나도 없는 마이클 케이지는 1997-88 시즌에 14.5점 13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알빈 로버트슨은 1985-86 시즌에서 1987-88 시즌까지 3시즌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음에도 올-NBA 팀은 세컨드 팀 1회 (1985-86 시즌) 뿐이다.[7] 애초에 올스타와 올NBA팀은 권위면에서 차이가 있다. 올스타는 팬의 투표로 인기만 많다면 부진해도 선정이 가능하다.[8] 트로피 갯수는 조던 5개, 올라주원 1개, 바클리 1개로 1984 드래프트는 총 7개, 2003 드래프트는 오직 르브론 뿐으로 4개이다.[9] 다만 2003 드래프트의 빅3는 전성기 때 서로 뭉쳐서 손해를 본 것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르브론은 매년 퍼스트 팀에 올랐고, 웨이드는 2010-11 시즌에는 세컨드 팀, 2012-13 시즌에는 서드 팀에 올랐으나 2013-14 시즌부터 기량저하가 뚜렷했고 보시는 그 전까지 세컨드 팀이 최고였기 때문에 셋이 안 뭉쳤다고 쳐도 아주 후하게 봐줘도 퍼스트 팀 1회, 세컨드/서드 팀 2회 정도 추가되는 수준이다. 이것도 "안 뭉쳤다면 매년 올-NBA 팀은 따놓은 당상"이란 건데 사실 보시가 토론토에서 올-NBA 팀에 1회 선정됐고 웨이드는 퍼스트 팀에 두 번 올랐다는 것을 고려하면 너무 후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추가해도 1984 드래프트에는 크게 못 미친다.[10] 1990-91 시즌 레이커스, 1995-96 시즌 시애틀, 1999-00 시즌 인디애나. 이 중 2번은 대학 후배 마이클 조던의 팀에 패했다.[11] 1987-88 시즌 당시 마지막 경기까지 시카고 불스의 찰스 오클리와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8개를 잡아야 리바운드왕이 될 수 있었는데, 무려 30개를 잡으며 타이틀을 차지한다. 평균으로 따지면 0.02 정도 격차로 이 정도면 웬만한 스탯 사이트에선 표기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basketball reference를 포함한 메이저 사이트에선 두 선수의 해당 시즌 리바운드 평균이 동일하게 13.0개로 나와있다.[12] 그는 같은 해 열린 NFL 드래프트에도 뽑혔다.[13] 훗날 트렌트는 9.11 테러 당시 하필 무역센터 건물에서 근무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14] 포틀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는 올스타 이력이 있는 짐 팩슨, 드렉슬러는 당시 백업이었다. 2번 포지션은 현재-미래까지 확보한 상황에서 센터를 포기하고 포지션 선호도도 낮은 슈팅가즈를 뽑는다는 건 말도 안되는 선택이다. 게다가 당시 조던은 대학 최고의 선수긴 했지만 개인플레이를 철저히 제약하는 딘 스미스 때문에 평균득점은 20점 정도로, 그의 재능이 얼만큼인지 기록으로도 다 드러나지 않는 선수였다. 조던은 뛰어난 유망주였으나, 당연히 그 시점에서 그가 역대최고의 선수로 클 것이란 예상을 하는 건 불가능했으니 샘 보위란 거물 센터 유망주를 두고 그를 뽑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조던을 뽑은 불스도 당시엔 센터를 원했다. 3번에 득점력이 좋은 올랜도 울리지가 이미 있었기 때문.[15] 실제로 당시 포틀랜드 드래프트의 책임자였던 헨릭 글릭맨은 훗날 그 당시 샘 보위를 뽑지 않았다면 조던이 아니라 바클리를 뽑았을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16] 올림픽 트라이아웃 참가가 아니었다면 아예 안 뽑힐 가능성도 있었다. 높지 않은 순번인 16순위로 유타가 그를 호명했을 때 야유가 쏟아졌을 정도였으니.[17] 실제로 조던이 팀에 처음 합류하던 날, 팀에서 공항으로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조던이 당황한 바 있다.[18] 시카고 프런트는 짠돌이에 선수 보는 눈이 없기로 유명했기에, 만일 조던이 없었다면 1옵션 스카티 피펜으로 어중간한 강팀의 지위를 유지하다 결국 탱킹에 돌입했을 것이다.[19] 실제로 훗날 언론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댈러스는 팀 내 슈퍼스타이자 전 시즌 올스타에 29.5점이나 올렸던 마크 어과이어를 오퍼하면서 조던을 트레이드해오려고 했으나, 시카고의 단장 로드 쏜이 거절했다고 한다. 쏜은 잘 알려진대로 조던을 뽑고 센터가 아니라며 아쉬워했지만, 조던의 재능이 비범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아본 듯 하다. 게다가 불스는 이미 주득점원인 올랜도 울릿지가 스몰포워드에 있지만 골밑이 약해 빅맨을 원했는데, 3번인 어과이어가 합류해봤자 문제는 그대로고 오히려 가드인 조던보다 포지션 중복 문제가 더 심하다.(어과이어와 조던은 키가 같았지만 탄탄한 몸집의 포워드였던 어과이어와 달리 조던은 훨씬 가볍고 빨랐기에 2번, 심지어 1번까지 소화하는데 문제가 없었다)[20] 엘튼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프로에선 풀타임 센터 소화가 불가능해 사실상 파워포워드였다. 실제로 데뷔 이후 계속해서 포워드로만 뛰었으며, 말년에 더 이상 주전급이 아니게 된 이후에야 센터를 겸직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