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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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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宇植
1952년 2월 23일생

1. 소개2. 고교야구의 특급에이스3. CEO가 되기까지4. 기타

1. 소개

전 야구선수. 푸르밀[1]의 대표이사이다. 1981년 롯데햄·우유에 일반 사원으로 입사해 29년만에 CEO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일화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만으로는 위키에 문서가 생길 이유가 없으니...

2. 고교야구의 특급에이스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72v3jpgxR1sqk8veo6_r1_400.png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장효조
OF / 상원고
이정훈
OF / 상원고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류중일
SS / 경북고
김성래
2B / 경북고
김동주
3B / 배명고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유지홍
1B / 선린상고
백인천
C / 경동고


1971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대회 창설 남우식(경북고등학교) 김정남(배명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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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 재학 시절

남우식은 고교야구의 붐이 일던 1970년대 초반에 철완투수, 불세출의 투수로 유명했다. 비록 프로선수가 되지는 않아 프로에 입단한 동기들과 비교해서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고교야구 역사를 짚어보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명덕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해 원래는 포수였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감독이던 박창용[2]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했다. 배대웅, 정현발, 천보성 등의 동기와 함께 중학교 3학년 때 6개 전국대회 중 5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경북고로 진학한 남우식은 고교 1학년 때인 1969년 황금사자기에서 6경기 완투했지만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5대12로 졌고, 감투상을 수상했다. 고교 2학년 때인 1970년에는 대통령배 MVP와 타격상, 화랑대기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남우식의 전설 같은 일화는 그가 고교 3학년 때인 1971년에 시작된다. 이 해 경북고는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화랑대기, 문교부 장관기까지 제패하며 전무후무한 6관왕을 달성했다[3]. 경북고는 이 6개 대회에서 32전 29승 3패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남우식은 대통령배 MVP[4], 청룡기 우수선수상, 봉황대기 최우수선수상, 황금사자기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특히 봉황대기에서는 전경기 완투하면서 2실점 밖에 하지 않아, 결승전 후 봉황대기를 주최한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이 직접 남우식을 찾아와 철완투수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이 해 5개 전국대회에서 남우식의 기록은 19승 1패 182이닝 평균자책점 0.34.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경북고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한국 고교대표팀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고교 팀들과 교환경기를 가졌는데, 한국 대표팀이 6전 전승을 했다. 남우식은 이 때 전경기 등판해 그중 3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뒀고, 일본 스포츠신문에서 남우식의 호투가 대서특필됐다. 이로 인해 일본고교야구연맹회장이 직접 한국 대표팀을 찾아와 한국에 배울 점이 있다면서 사정해 이후 한일 고교 교환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당시 경북고 야구부에는 남우식을 비롯해 그의 동기인 배대웅, 손상대, 정현발, 천보성 등과 1년 후배 황규봉, 이선희, 함학수 등 다른 학교와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동기 천보성은 상대 타자들이 남우식의 공을 치지를 못해 다른 선수들은 별로 할 게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남우식의 호투는 경북고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남우식이 잘한 결과였다. 스피드건이 없던 시절이라 그의 구속은 알 수는 없지만 동료들이나 그의 투구를 본 사람들은 그의 속구가 시속 150km/h를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빠른 공을 갖고 있었던 탓에 4번타자를 상대로는 커브나 슈트 등의 변화구를 섞어 던졌지만, 다른 타자들을 상대할 때는 그냥 속구만 던졌다고 한다. 게다가 연속 볼넷이라도 내주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제구력도 좋았다. 한 마디로 또래 고교야구선수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찼던, 탈고교급 투수였다. 우완 정통파로 키는 176cm였지만 당시에는 작은 키가 아니었고, 중학교 3학년 때 후지모토 히데오가 방한해 전국을 돌며 순회 강연을 하다가 남우식의 투구를 보고는 일본에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투구폼도 좋았다.

남우식이 호투를 펼치던 1971년이 마침 고교야구 붐이 시작되던 시기였던 탓에 고교 시절만 놓고 보면 최동원, 김시진, 선동열 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박노준김건우보다 앞선 오빠부대의 원조라고 할까. 하루에 팬레터를 100통 넘게 받았고, 누가 알아볼까 교복 입으면 명찰을 가리고 다녔고, 친구들과 같이 빵집에 들르면 테이블에 팬들이 사준 빵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그 인기는 한양대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계속됐고, 한양대 체육부 사무실로 매일 300통씩 남우식을 찾는 전화가 쇄도하는 바람에 연애하러 대학 왔냐고 혼나고 기숙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한양대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그의 활약은 고교 시절에 비하면 잘 안 알려져 있는데, 대학 2학년 때 정순명이 입학하면서 매경기 등판하지 않아도 됐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교야구나 실업야구에 비하면 대학야구는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언론에 나올 기회가 애초부터 적었다. 어깨와 팔꿈치가 아팠던 대학 3학년 때를 빼면 정상적으로 등판했다. 그렇긴 해도 혹사의 여파로 인해 대학 시절부터는 구위가 떨어졌다고 남우식 본인도 이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73년에는 대학 대표팀에 선발됐고, 대학 4학년 때인 1975년 대통령기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수훈상을 받았다. 이 수훈상이 대학 시절 수상 기록의 전부였다.

1975년 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실업야구팀인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 당시 김동엽 롯데 감독은 선수들을 부산에서 서울까지 구보를 시켰는데, 15일간의 구보 도중 남우식은 오른쪽 발바닥 살이 떨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다른 선수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완주했다고.# 롯데에서는 주로 중간계투로 나왔다.

1977년 공군 야구팀인 성무에 입대했는데, 이 때 박철순을 지도했다. 남우식이 막 입대했을 때 박철순은 자신보다 4살 많은 남우식을 찾아와 깍듯이 선배로 대하면서 투구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당시 박철순은 상병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후 롯데로 복귀했지만 1980년에 천보성[5]과 함께 은퇴했다. 다들 남우식이 고교 시절 완투를 자주한 바람에 어깨가 망가진 탓이라며 남우식의 은퇴를 안타까워했다. 이에 남우식 본인은 당시에는 프로야구가 없고 실업야구선수로서는 은퇴할 시기가 다가와 어떤 직장이라도 하루 빨리 자리 잡기 위해서 은퇴를 선택했다고 회고했다.[6]

3. CEO가 되기까지

1981년 남우식은 롯데햄·우유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대구·경북을 연고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당연히 고교 시절 이름을 날린 남우식을 영입하려 했는데, 동기 천보성은 프로행을 선택했지만 남우식은 샐러리맨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프로에 입단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코치직까지 보장하면서 영입하려고 했는데, 그때도 남우식은 거절했다.

일반 대졸사원과 같은 일을 하게 됐는데, 야구만 해왔던 그였기에 입사 초기 때는 세금계산서가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나마 야구계 인맥을 동원해 영업을 했는데, 대다수가 남우식이 영업 뛰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어떤 야구계 선배는 영업은 때려치고 야구계로 복귀하라고 일갈하기도 하고, 동명이인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었다. 으아니, 그 경북고 남우식이 영업을 뛸리가 없잖아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5년간 영업사원으로 일한 끝에 관리직으로 승진했다. 그래서 그런지 후배직원들에게 깐깐하게 굴었다고. 틈틈히 관련 서적을 읽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14년간 총무, 인사, 구매, 경리,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2009년 마침내 대표이사직을 맡게 됐다.

운동선수 출신 CEO는 김응용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이 된 게 최초이긴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는 야구 구단인 탓에, 스포츠와는 관련 없는 회사의 CEO가 된 남우식을 실질적인 최초 운동선수 출신 CEO로 보는 경우가 많다.

4. 기타

남우식의 1982년 프로야구 불참은 '부상'과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갈망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남우식이 프로 진출을 고사한 주원인 중 하나가 어깨 부상인데, 그 이유는 고교 재학 시절 선배들의 압박에 의한 혹사로 알려져 있다. 그 부상은 적절한 조치와 치료만 있었다면 재활에 성공 할 수 있을 법한 부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잘못된 민간요법으로 남우식의 어깨는 완전히 치료할 수 없을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그때 남우식은 무리한 어깨 사용으로 어깨의 혈관이 터져 어깨가 달아오를 때, 어깨를 뜨거운 물에 담구는 잘못된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럴 때에는 아이싱(Icing)으로 어깨를 식혀줘야 하는데, 뜨거운 물에 어깨를 담군다는 것은 죽을 만큼 맞은 사람을 한번 더 짓이겨놓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7] 게다가 프로 선수마저도 당시에는 민간요법 내지는 사우나로 아픔을 다스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80년대 일찍 은퇴한 선수들 대부분이 이런 잘못된 조치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 케이스다. 다행히 현대 야구에 들어서는 기업 차원에서 의료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선수단에 첨단 의료 시설을 제공하거나 아예 야구 선수들만을 위한 재활 시스템을 마련하는 등 긍정적인 의미에서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천만다행일 수도 있다.


[1] 원래 회사명은 롯데햄·우유로 롯데그룹의 한 계열사였다가 유업 부문이 2007년에 롯데에서 분리·독립했다. 햄 부문은 2013년에 롯데삼강과 합병되어 롯데푸드로 개편되었다.[2] 삼성 라이온즈2군 초대 감독이기도 했다.[3] 대구에서 열린 문교부 장관기를 빼고 5관왕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부산에서 열린 화랑대기를 뺀 다른 4개 전국대회만 놓고봐도 한 해에 4개 대회에서 우승한 팀은 경북고 밖에 없다.[4] 2년 연속 수상. 대통령배 MVP를 2년 연속 수상한 건 남우식을 비롯해 임신근(1967, 1968), 김동수(1984, 1985), 추신수(1999, 2000) 등 4명 뿐이다.[5] 남우식과 천보성은 중학교 시절에 만나 고교, 대학을 거쳐 실업야구 입단, 군복무까지 같이 한 사이다.[6] 부상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프로야구 창설 이전까지는 길어야 30세를 전후해서 은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우식은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 이른 은퇴는 아니었던 셈.[7] 박철순도 뜨거운 물에 담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가 미국 마이너리그에 가서야 아이싱을 하는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처음에 미국 코치들이 아이싱을 해주려 할 때 이것들이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