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시게루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이케가야 고지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고바야시 시게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마쓰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 |
마쓰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고바야시 시게루 (한신 타이거스) | → | 수상자 없음 |
197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이케가야 코지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고바야시 시게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고바야시 시게루 (한신 타이거스) | →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9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보유 기록(NPB) | |
단일 일본시리즈 최다 등판 | 6경기(1976년, 타이기록)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40번}}} | ||||
니우라 히사오 (1969~1972) | → | 고바야시 시게루 (1973) | → | 나카무라 유타카 (1974)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9번}}} | ||||
유구치 토시히코 (1971~1973) | → | 고바야시 시게루 (1974~1978) | → | 릭 크루거 (1979) |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19번 | ||||
카도 카즈히코 (1975~1978) | → | 고바야시 시게루 (1979~1983) | → | 나카니시 키요오키 (1984~1996)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70번 | ||||
스즈키 케이시 (1993~1995) | → | 고바야시 시게루 (1997~2001) | → | 코다 이사오 (2002~2003)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79번 | ||||
시마다 카즈테루 (2006~2007) | → | 고바야시 시게루 (2009~2010) | → | 니시 슌지 (2012~2014) |
}}} ||
고바야시 시게루 小林繁 | Shigeru Kobayashi | |
출생 | 1952년 11월 14일 |
돗토리현 토하쿠군 아카사키초 (現 돗토리현 토하쿠군 코토우라초) | |
사망 | 2010년 1월 17일 (향년 57세) |
후쿠이현 후쿠이시 | |
국적 | 일본 |
학력 | 돗토리현립 유라이쿠에이 고교[1] |
신체 | 178cm, 68kg |
투타 | 우투우타(사이드암 스로) |
포지션 | 투수 |
프로입단 | 1971년 드래프트 6라운드 (전체 70번, 요미우리)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3~1978)[2] 한신 타이거스 (1979~1983) |
지도자 경력 | 킨테츠 버팔로즈 1군 투수코치 (1997~1998)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2군 투수코치 (1999)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군 투수코치 (2000~2001) SK 와이번스 2군 투수 인스트럭터 (2007)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투수코치 (2009) |
[clearfix]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및 지도자. 별명은 "비극의 히어로(悲劇のヒーロー)"로, 한때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으나 에가와 스구루의 요미우리 입단을 둘러싼 논란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되면서 이후 순탄치 못한 선수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2. 선수 시절
2.1. 프로 데뷔 이전
초등학생 때까지 소프트볼 선수로 뛰다가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고 고등학생 때 오버핸드 스로에서 사이드암 스로로 바꿨다.원래는 고교 졸업 후 간사이대학 야구부로 진학하려 했으나, 칸사이대학 측에서 급작스레 체육특기생 제도를 없애버리면서 진로가 붕 뜨고 만다. 이제 와서 프로야구 구단의 지명을 받을 수도 없는 데다 다른 대학으로 가기에도 타이밍이 늦은 상태였는데, 자신에게 칸사이대학 입학을 권유했던 선배의 추천으로 1971년 사회인야구팀 젠다이마루(全大丸)[4]에 입사한다.
그렇게 사회인야구에서 1년간 뛰다가 드래프트 참여를 권유받았고 킨테츠 버팔로즈, 난카이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3개 구단이 관심을 보였지만, 고바야시는 우선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프로로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킨테츠와 난카이는 이 반응을 보고 고바야시의 지명을 포기했고, 요미우리도 고바야시를 하위 순번인 6순위로 지명했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입단 후 1년간은 2군에서만 뛰다가 2년차인 1973년 9월에 1군에 데뷔했고, 이후 1974년까지 불펜 투수로 뛰다가 1975년부터 서서히 선발 투수로 전향한다.프로에서의 전성기가 열린 건 1976년부터인데, 1976년 43경기(29선발) 217.1이닝 18승(2위) 8패 2세이브 방어율 2.99(2위), 1977년 42경기(30선발) 216.1이닝 18승 8패 7세이브 방어율 2.92를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에이스가 되었고, 1977년에는 베스트나인과 사와무라상까지 수상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팀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 일본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와 대결하게 된다. 다만 이 2번의 일본시리즈에서 고바야시 시게루가 불을 질러버리면서[6] 일본시리즈 우승은 끝내 달성하지 못했다.
1978년에는 전 해 너무 달린 탓인지 43경기(31선발) 191.1이닝 13승 12패 평균자책점 4.03이라는 살짝 떨어진 성적을 기록. 뭐 그래도 출장 경기수나 소화이닝이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직전 해 사와무라상 수상자기도 해서 요미우리의 에이스 자리가 위협받을 일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이해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행을 고집하던 괴물 신인의 입단으로 인해 야구인생이 크게 뒤틀리게 되고 말았다.
2.3. 공백의 1일
자세한 것은 에가와 스구루 항목으로.공백의 1일 사건의 최대 피해자.
1978 시즌 후, 일본프로야구는 평소대로 드래프트를 진행했는데, 요미우리에 입단하고 싶었던 에가와[7]는 당시 입단교섭권은 드래프트 지명 당일부터 다음 드래프트 2일 전까지 유효한다고 규정한 드래프트 제도의 헛점을 이용하여 전년도인 1977년에 에가와를 지명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입단교섭권이 무효 처리된 다음날, 즉 드래프트 전날(11월 21일) 요미우리와 번외계약을 체결한다.
문제는 앞서 말한 드래프트 제도의 헛점을 개선하기 위해 드래프트 지명 범위를 일본의 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모든 선수로 확대한 새 규약이 드래프트 당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던 것. 이 때문에 센트럴리그 사무국은 번외계약이 무효라고 통보했고, 에가와는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지명된다. 그러나 드래프트 당일 요미우리가 전면 보이콧을 선언해 버리는 등[8] 에가와와 요미우리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심지어 요미우리는 독자리그를 만들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일본프로야구기구는 12월 21일 중재안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일단 한신이 에가와와 계악하고 1월 31일까지 한신이 요구하는 선수와 에가와를 트레이드할 것.
한신은 처음에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고 트레이드 협상을 진행했는데, 여기서 한신이 요미우리의 에이스 고바야시를 트레이드 대상으로 요구했고 요미우리는 이를 바로 승낙한다. 요미우리는 고바야시를 1월 31일이 될 때까지 내내 설득했고, 고바야시는 좋아하던 요미우리를 떠나 갑자기 다른 팀으로 가게 된 상황에 반발하여 트레이드를 계속 거부했으나 끝내 이를 받아들인다. 2월 1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고바야시는 최대한 담담하게 심중을 표현했지만, 속으로는 요미우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옛 동료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9] 쫓기듯이 한신으로 떠나야 했다.
2.4. 한신 타이거스 시절
2.4.1. 1979년
트레이드에 있어 지금보다도 훨씬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고바야시는 요미우리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요미우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 "나를 버린 것을 후회하게 하겠다"라는 생각으로 1979 시즌을 맞이한다. 당시 한신 감독이었던 돈 블레이저에게 자기의 선발 로테이션을 요미우리전에 맞춰 짜달라고 했을 정도. 이렇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요미우리전에 표적등판한 결과는 요미우리전 8연승.[10] 시즌 성적도 37경기(36선발) 273.2이닝 22승 9패 1세이브 방어율 2.89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며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 생애 2번째 베스트나인, 사와무라상까지 수상하며 자신을 버린 요미우리를 단단히 후회하게 해 주는 듯 하였다.
그러나 고바야시 자신은 훗날 이 때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다.
あの年に俺がやったことは野球選手として褒められたことじゃないんだよ。自分のためだけの野球をやっていたから。あんな事件があって、トレードで阪神に移って、悔しくてね。だから、『俺は生きるぞ、負けてなんかいないぞ』って主張したかった…それだけの野球。そんな野球は全然、駄目でしょ。チームより自分が先に立っていた…そんなのは、あざといだけの野球だよ。なのにファンもマスコミも俺が巨人に勝つたびに大騒ぎをする。世の中が、そんな風に動くのが嫌だった。『あんたら馬鹿か』と思いながら、それでも、俺は巨人に負けたくないと思って必死に投げていたんだ。結局、世間に踊らされていたんだよ、あの年の俺は。
그 해 내가 했던 행동은 야구선수로서 칭찬할 만한 건 아니었다. 자신만을 위한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건(공백의 1일) 때문에, (본의 아니게) 트레이드로 한신으로 가게 되어서 분했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겠다. 지는 일 따윈 없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것뿐인 야구. 그런 야구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겠지. 팀보다 자기를 먼저 앞세우고... 그런 건 되바라진 야구일 뿐이다. 그런데도, 팬들도 매스컴도 내가 쿄진에게 이길 때마다 난리였다.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당신들 바보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쿄진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결국, 세상에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그 해의 나는.
그 해 내가 했던 행동은 야구선수로서 칭찬할 만한 건 아니었다. 자신만을 위한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건(공백의 1일) 때문에, (본의 아니게) 트레이드로 한신으로 가게 되어서 분했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겠다. 지는 일 따윈 없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것뿐인 야구. 그런 야구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겠지. 팀보다 자기를 먼저 앞세우고... 그런 건 되바라진 야구일 뿐이다. 그런데도, 팬들도 매스컴도 내가 쿄진에게 이길 때마다 난리였다.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당신들 바보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쿄진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결국, 세상에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그 해의 나는.
2.4.2. 선수 생활 후반
고바야시는 그 이후에도 별 일 없으면 200이닝 이상 먹어주고 2점대 후반 ~ 3점대 초반의 ERA과 10승 이상을 기록해 주는 한신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1979년도와는 다르게 요미우리전에서의 결과가 나빠지고 있었다. 80년부터의 요미우리전 전적은 5승 15패. 특히 1980년 처음으로 자신의 트레이드 상대 에가와 스구루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으나, 에가와가 9이닝 3실점을 기록한 데 반해 고바야시는 5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완패하고 말았다. 고바야시 본인은 79년 이후로 요미우리전에 임할 동기가 사라졌다고 표현했다.그리고, 82시즌 후 그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83년에 15승을 거두지 못하면 은퇴하겠다고 한 것. 82년 성적이 조금 안 좋긴 했지만(27경기 163.1이닝 11승 9패 방어율 3.42) 은퇴를 불사할 성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를 그저 다음 시즌을 대비하는 자세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83년 최종 성적은 35경기(32선발) 209이닝 13승 14패 평균자책점 4.05. 최다패에 4점대 평균자책점 등 조금 아쉬운 모습이 보였어도 아직 은퇴하기엔 일러 보이는 성적이었지만, 15승을 거두지 못하면 은퇴하겠다는 선언대로 그는 이해 시즌 종료 후 정말로 은퇴했다.[11] 그가 은퇴 선언을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첫 번째는 한신으로의 트레이드 때부터 갖고 있었던 팔꿈치 부상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트레이드 이후 야구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것. 사실상 에가와가 고바야시를 은퇴시켰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こんなことを言っても仕方がないけれど、もし、あのトレードがなくて、ジャイアンツに残っていたとしたら、もっと長く現役を続けていただろうね。ジャイアンツにいたら35歳ぐらいまで、いや投げれる間はユニフォームを着ていたんじゃないかな。結局、あのトレードから、人の評価に振り回される僕の人生が始まった。自分のやりたいように生きていなかったね。周りの評価ばかり気にして、そんな自分が嫌で、つかれて、もう野球から離れたかったんだと思う。だから引退を決めた時、自分の野球人生を振り返ろうともしなかったし、感傷に浸ることもなかった。
이런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만약, 그 트레이드가 없어서, 자이언츠에 남아 있었다면, 좀 더 길게 현역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 자이언츠에 있으면 35세 정도까지, 아니 던질 수 있는 동안에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 않았을까. 결국, 그 트레이드로부터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는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는데 말이다. 주위의 평가에만 신경쓰는, 그런 자신이 싫었고, 지쳤기에, 이제 야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을 때, 자신의 야구인생을 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감상에 젖지도 않았다.
이런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만약, 그 트레이드가 없어서, 자이언츠에 남아 있었다면, 좀 더 길게 현역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 자이언츠에 있으면 35세 정도까지, 아니 던질 수 있는 동안에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 않았을까. 결국, 그 트레이드로부터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는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는데 말이다. 주위의 평가에만 신경쓰는, 그런 자신이 싫었고, 지쳤기에, 이제 야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을 때, 자신의 야구인생을 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감상에 젖지도 않았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곧바로 해설가로 전향하여 1984년부터 1996년까지 TBS테레비, TV 아사히에서 해설가로 활동했다. 1985년 일본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가 우승할 때 축승회를 취재하다 한신 시절 동료인 카와토 코조가 그에게 맥주를 끼얹기도. 사실 은퇴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을 때라 동료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한편으로 1984년에 야구선수 장훈과 같이 이나가와카이의 초대 회장 이나가와 세이죠를 다룬 야쿠자 영화 '수라의 무리'에 출연하기도 했다.해설자로 뛰던 중간에 카와카미 테츠하루로부터 신당 사와야카의 참의원 선거 후보로 나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비례 1번으로 출마했지만, 일본의 신생 정당이 그렇듯 득표율 1%도 못 나오고 낙선하고 만다. 득표율이 저러니 공탁금이나 그 외 선거비용도 보전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타격을 크게 입고 만다. 결국 이것 때문에 파산신청을 한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는 킨테츠 버팔로즈 투수코치로 재직. 킨테츠는 1997 시즌에 퍼시픽리그 3위, 2001 시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12]했지만 사실 투수들의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13], 때문에 리그 우승을 하고도 투수진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001년 시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 후에는 아까 말한 한신 동료 카와토 코조의 소개로 골프장 지배인을 맡았다가 앞서 말한 이유로 파산신청을 하고 물러난다.
본인의 야구 인생을 뒤틀리게 한 장본인인 에가와 스구루에 대해선 은퇴 후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입단 당시의 논란으로 본인의 야구 인생이 변해버리게 된 것엔 아직도 약간의 응어리가 남아 있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2007년엔 에가와와 함께 화해를 주제로 서로 대담을 가지는 일본주 CM을 찍으면서 서로 간에 남아있던 감정들을 푸는 시간을 가졌다.
같은 해 한국으로 건너와 SK 와이번스의 2군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며, 2009년부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2군 투수코치로 부임하여 이듬해인 2010년 1군 투수코치로 영전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스프링캠프를 불과 2주 앞둔 그해 1월 17일, 후쿠이현의 자택에서 코바야시는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심근경색에 의한 심부전으로 끝내 사망하고 만다. 향년 57세.
장례식에선 요미우리 시절의 절친 김일융을 비롯해 현역 시절 친분이 있던 관계자 500여명이 참석해 코바야시의 마지막을 함께했고, 에가와 스구루는 코바야시를 추모하면서 입단 당시의 여러 사건들에 대해 면목이 없다며 거듭 사죄했다. 사망 당시 투수코치로 재적 중이었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는 그 해 3월 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시범경기를 추모시합으로 개최하여 코바야시의 넋을 기렸다.
4. 기타
근육맨에서는 주인공 근육 스구루가 에가와 스구루를 풍자한 캐릭터다보니, 고바야시 시게루의 패러디 캐릭터도 등장시켜서 공백의 1일 사태도 풍자했다.[1] 현 돗토리현립 돗토리추오이쿠에이 고교.[2] 1972년 입단이 아닌 이유는 1년간 사회인야구팀 다이마루에서 뛰며 입단을 유예했기 때문이다. 지명권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 요미우리에 입단했다.[3] 2010년부터 1군 투수코치로 승격할 예정이었으나 스프링캠프 개막 직전 심부전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4] 유명 백화점 브랜드 다이마루 소속의 사회인야구부로 1981년 폐부했다.[5] 지역리그와 도시대항전 예선 기록이 좋았다. 노히트 노런도 달성했을 정도.[6] 사실 76년 일본시리즈에서는 2번 모두 5이닝 3실점을 기록했던 1차전(패)하고 3차전(노디시전)을 제외하면 4~6차전에서 2승 1세이브를 기록하면서 리버스 스윕의 찬스를 여는 등(7차전에서 패하면서 무산) 7경기 중 불펜으로만 6경기에 나와서 2승 1패 1세이브 ERA 2.84로 나름 잘 던져줬다. 문제는 77년 일본시리즈에서 중요한 승부처인 1차전(패), 5차전(노디시전)에서 한큐 타선에게 무참하게 공략당하는 바람에 시리즈의 흐름이 한큐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77년 일본시리즈 당시 성적은 4경기 0승 1패 6.1이닝 ERA 6.00[7] 에가와는 고졸, 대졸 당시의 드래프트에서 이미 2번이나 타팀 입단을 거부한 전적이 있었다. 이중 1977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1위 지명이 공백의 1일 사건이 터지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8] 덕분에 1978년 드래프트는 역대 최소 지명(44명) 드래프트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요미우리의 보이콧에 더해 당시 드래프트는 최대 4순위까지 지명 가능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 대신 요미우리는 이 해 드래프트 번외로 80년대 주축 계투로 활약한 카토리 요시타카 등 무려 10명의 선수를 영입하며 드래프트를 하지 않고도 나름 쏠쏠한 재미를 맛보았다.[9] 이 때 요미우리는 미야자키로 전지훈련을 떠난 상태였는데, 고뱌야시가 그 곳을 방문하는 것을 구단이 거부했다.[10] 이 해 요미우리는 6월까지 리그 선두를 달리다가 7월부터 리그 5위로 떨어지고, 9월부터는 승패마진마저 마이너스로 바뀌면서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고 만다. 결국 10.5경기차 5위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DTD의 주 원인으로 한신과의 맞대결 성적(9승 17패)이 꼽히는 만큼 고바야시로서는 복수 제대로 한 셈.[11] 에가와도 4년 뒤인 1987 시즌 종료 후 어깨 부상의 악화를 이유로 돌연 은퇴한다. 공교롭게도 이쪽 역시 은퇴 시즌 당시의 성적이 괜찮았음에도 그대로 은퇴했다.(26시합 25선발 13승 5패, 166.2이닝 평균자책점 3.51)[12] 그 유명한 키타가와 히로토시의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12년 만의 우승을 결정짓는 전설의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이 나온 시즌이다.[13] 2001년 리그 우승 당시의 킨테츠의 팀 평균자책점은 4.98(리그 최하위)였다. 최악급의 투수진을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의 슬러거들이 즐비했던 압도적인 강타선의 힘으로 커버하면서 우승한 것. 그러나 이 극심한 투타 불균형이 끝내 2001년 일본시리즈에서 화를 부르며 야쿠르트에게 1승 4패로 무기력하게 우승을 넘겨줬고, 이후 킨테츠는 첫 우승의 꿈조차 이루지 못한 채 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흡수합병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