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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미 히데오 中上英雄 / Hideo Nakagami | |
이전 본명 | 후지모토 히데오 (藤本英雄)[1] |
한국명 | 이팔용 (李八龍) |
출생 | 1918년 5월 18일 경상남도 동래군(現 부산광역시) |
사망 | 1997년 4월 26일 (향년 78세) |
출신지 |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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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시모노세키 상업학교 - 메이지대학 |
신체 | 170cm, 65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42년 |
소속팀 | 토쿄 쿄진군 (1942~1946) 츄부닛폰 드래곤즈 (1947) 요미우리 자이언츠 (1948~1955) |
지도자 | 토쿄 쿄진군 감독(1944~1946, 선수 겸임[2])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1956)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코치(1957) |
1. 개요
한국계 일본인 야구선수. 일본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로써 13년의 선수생활 동안 여러 굵직한 기록들을 수립한 선수였다.2. 생애
현역 시절엔 옛 성씨인 후지모토를 등록명으로 계속 써왔기 때문에 이 문단에선 후지모토로 서술한다.2.1. 프로 데뷔 전
1918년에 현재의 부산광역시인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나 8살에 일본 시모노세키시의 히코시마로 건너갔다. 소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처음 접했고 시모노세키 상업학교에 진학한 후[3] 1935년과 1937년 봄 코시엔 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며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메이지대학으로 진학했다.[4]메이지대학에서도 4년 동안 통산 34승 9패를 거두며 야구부의 4번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맹활약을 펼쳤고, 통산 34승은 현재까지 도쿄 6대학 리그 역대 10위이자 메이지대학 선수로써는 역대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2.2.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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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초창기의 후지모토 |
1942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토쿄 쿄진군에 입단해 데뷔 첫 해부터 14시합에 등판해 111이닝 10승 0패, 평균자책점 0.81을 기록하며 화려한 데뷔 시즌을 만들어냈고, 이듬해인 1943년에는 팀의 에이스였던 빅토르 스타루힌과 히로세 슈이치가 각각 지병과 징집으로 팀을 이탈하게 되자[5] 새로운 에이스 투수로 도약해 괴물 같은 성적으로 일본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들을 여럿 수립했다.
- 56시합(46시합 선발)에 등판해 432.2이닝 34승 11패(승률 .756) 평균자책점 0.73으로 최다승, 최고승률,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상하며 투수 3관왕을 달성[6]. 이 밖에도 39완투 19완봉으로 완투와 완봉 역시 1위를 차지했고 이 중 19완봉은 같은 해 니시테츠군(西鉄軍)[7]의 노구치 지로와 함께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 완봉 기록으로 남아있다.
- 당해 쿄진군의 시즌 승수인 54승의 63%를 차지하는 34승을 혼자서 기록.
- 1943년 5월 22일 코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나고야군과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62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달성.[8]
- 8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6경기 연속 완봉승 달성.
- 여담으로 이러한 기록들을 수립했음에도 당해 최우수선수(MVP)는 리그에서 유일한 3할 타율을 기록했던 같은 팀의 고 쇼세이[9]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역대급 시즌을 보낸 그는 다음 해인 1944년에 태평양 전쟁의 격화로 인해 선수들이 잇달아 전쟁터로 떠나면서 경기를 치를 인원이 부족해지자 투수는 물론 3번 타자까지 맡았고 여기에 감독까지 겸임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로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연소 감독으로 남아있다. 이 해엔 전쟁물자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투타겸업 및 감독으로 뛰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10] 팀을 이끌며 분전했으나 빅토르 스타루힌이 시즌 도중 국적 문제로 팀을 이탈하게 되는 바람에 부담감이 더해지면서 여름 이후 팀 성적과 개인 성적 모두 하락세를 걸었고, 결국 10승 8패 1.58, 탈삼진 114개로 최다탈삼진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다소 아쉬운 성적에 그친 데 이어 팀 역시 19승 14패 2무로 한신군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고 2위에 그쳤다.
패전 위기 때문에 아예 리그가 열리지 않았던 1945년을 지나[11] 1946년 시즌 중반까지 감독직을 맡다가 시즌 도중에 종전 이전 팀의 주축 외야수였던 나카지마 하루야스가 복귀하자 나카지마에게 감독직을 넘겨준 채 다시 선수에 전념했고, 당해엔 21승 6패(승률 .778), 평균자책점 2.11로 2번째 최고승률,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상했다.
그러나 계약금 문제를 두고[12] 구단과 사이가 벌어져 1947년 츄부닛폰 드래곤즈로 이적했고, 츄부닛폰에서도 17승 15패 1.83을 기록하면서 순항하는 듯 했으나 후반전 도중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8월 이후 승리와는 인연이 없이 5연패를 기록하다 결국 9월 말에 시즌아웃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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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후지모토(가운데). 왼쪽은 카와카미 테츠하루, 오른쪽은 치바 시게루 |
1947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후지모토에게 요미우리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고 주니치 구단에서도[13] "쟤 어깨가 저래서야 뛸 수 있겠는가?" 라고 의문을 표하며 전력 외 선수로 빼서 방출해 버렸다. 194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돌아온 그는 츄부닛폰 시절 부상당한 어깨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전반기에는 외야수로 활약했는데 후반기에는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투수로 돌아왔다고 한다. 투수로 복귀하면서 슬라이더를 배웠는데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한 구종이었고, 이 슬라이더를 정말 잘 던진 선수가 바로 나카가미 였다고 한다.
1948년 부진한 시즌을 보냈지만[14], 이듬해인 1949년부터는 일본 야구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당시 래빗 볼을 도입하면서 반발력이 전 시즌에 비해 넘사벽급으로 올라가 버려 투수들의 평균자책도 껑충 뛰어버린 와중에도, 그 해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 중 나카가미만 유일한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49년 시즌에는 평균자책점 1위(1.94), 다승 2위(24승), 승률1위(24승 7패 .774), 사와무라 상 수상,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등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인 1950년에도 360⅓이닝을 던지며 26승 14패, 평균자책 2.44, 33번의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이 해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게 된다(자세한 내용은 하기에 기재). 이후로도 오오토모 타쿠미, 벳쇼 다케히코와 더불어 교진 마운드 3총사로 불리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끌어 나가는 에이스 급 투수로 활약했고 1949년부터 1953년까지는 매 시즌 15승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1954년 시즌에는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경기 출장수가 급감하고 1승밖에 챙기지 못했으며 1955년에도 1승에 머무르면서 프로 통산 200승을 채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가 기록한 통산 기록은 367경기, 2628⅓이닝, 200승 87패, 승률 .697, 평균자책점 1.90 이며, 이중 통산 승률과 평균자책은 현재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최고기록이다. 또한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2자리 패배를 기록한 투수이기도 하다.[15]참고
2.3. 일본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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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게임 당시 사용했던 글러브. 도쿄 돔 야구박물관에서 전시중. | 아오모리 야구장에 있는 퍼펙트 게임 기념비. 비석에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다. "아오모리 시영 야구장에서 일본야구사상 최초 완전시합 달성." |
1950년 6월 28일[16], 교진군과 니시닛폰 파이리츠[17]간의 경기가 아오모리 구장(青森球場)에서 열렸다.[18] 사실 이 날 선발 투수는 타다 후쿠조(多田文久三)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경기 당일 아침 타다가 식중독으로 인한 구토와 복통으로 병원으로 실려가는 바람에 나카가미가 갑자기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전날 후지모토는 다음 날 자신의 등판은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 하고 이동중이던 기차와 숙소에서 새벽까지 마작을 하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한마디로 맨 정신이 아닌 몽롱한 상태로 마운드에 오른 것이다.
오후 4시 14분 심판의 플레이 볼 선언과 함께 시작된 이 날 경기는 불과 1시간 19분 후, 일본 프로야구의 새 역사를 쓴 경기로 기록되었다. 후지모토는 이날 경기에서 9이닝 27타수 0피안타 0사사구 ERA 0.00. 내야플라이 3개, 내야땅볼 11개, 외야플라이 6개, 탈삼진 7개로 니시닛폰 타선을 농락하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 달성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나카가미가 1948년 밥 펠러의 투구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배워 주 무기로 사용한 슬라이더[19]를 니시닛폰 타자들이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고 하며, 아쉽게도 그날 경기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20]
참고로 이날 경기를 당시 중학생이었던 테라야마 슈지[21]가 지켜 봤다고 한다.
2.4. 보유 기록
- 단일시즌 최저 평균자책점 (0.73,1943년)
- 일본 최초의 퍼펙트 게임 달성 (최고령달성 32세 41일)
- 일본프로야구 최초 통산 200승을 달성
- 일본프로야구 통산 승률 역대 1위(.697)
- 일본프로야구 통산 평균자책점 역대 1위(1.90)
- 200승 투수중, 유일한 2자리수 패배(200승 87패)
- 역대 최연소 감독(1946년, 25살)
- 일본프로야구 연속 완봉승(1943년, 6경기)
- 일본프로야구 투수 한시즌 최다 홈런(1950년, 7홈런)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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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야구전당에 게시된 그의 동판 |
현역에서 물러난 후엔 곧바로 코치로 전임해 1956년엔 2군 감독, 1957년엔 1군 투수코치를 역임했으나 1957년 일본시리즈에서 팀이 니시테츠 라이온즈에게 1번도 못 이긴 채 1무 4패로 참패하자 팀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코치직에서 해임됐다. 이후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다이와증권 사회인 야구팀 감독을 맡아 팀을 1961년 도시대항 야구대회 진출로 이끌었고, 감독 퇴임 후엔 니혼 테레비 해설가 등으로 일하다 1973년에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명목상 요미우리신문 로스앤젤레스 지부 주재원을 맡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국 담당 스카우터로 근무했다.
1976년에 일본야구전당에 입성했고, 1997년 4월 26일, 심근경색으로 인하여 도쿄도 치요다구에 있는 도쿄경찰병원에서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4. 기타
- 개명을 정말 많이한 인물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귀화하기 전 이름은 이팔룡(李八龍)이었으며 중학교 때 후지모토 하치류(藤本八龍)로 바꿨다가 이후 후지모토 히데오(藤本英雄)로 다시 개명했다. 그리고 1943년 데릴사위로 결혼하여 부인의 성씨를 따라 나카가미 히데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며 이름을 총 3번 바꾸었다. 우선 야구전당엔 결혼 후 본명인 나카가미 히데오라는 이름으로 헌액되어 있으나 현역 시절 후지모토 히데오라는 등록명을 계속 사용해 왔기에 현재도 각종 스포츠 기록물 등에선 후지모토 히데오로 표기되고 있다.
- 1968년, 대한야구협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한해 전국순회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본으로 귀화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한국 전쟁 이후 젊은 재일 한국-조선인 남성들이 한국에 가면 한국 군대에 징집된다는 루머가 재일교포 사회에서 퍼지면서 나카가미도 그런 소문에 솔깃하여 귀화했다고 한다.[22] 당장 퍼팩트게임 달성 당시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고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 중이라 사정을 알던 몇몇 요미우리 팬들은 징집을 우려하기도 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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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타 마스미 | 발비노 갈베스 | 우에하라 코지 | 우츠미 테츠야 | 타카하시 히사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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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 그레이싱어 | 우츠미 테츠야 | 토노 슌 | 우츠미 테츠야 | 미야구니 료스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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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노 토모유키 | 마일스 마이콜라스 | 스가노 토모유키 | 타일러 비디 | 토고 쇼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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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야케 다이스케 (1934~1935) | 2대 아사누마 요시오 (1935~1936) | 3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36~1942) ★★★★★★★ | 4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3) ★ | 5대 나카가미 히데오 (1944~1946) | |
6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6~1947) | 7대 미하라 오사무 (1947~1949) ★ | 8대 미즈하라 시게루 (1950~1960) ★★★★★★★★ | 9대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1974) ★★★★★★ ★★★★★ | 10대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 | |
11대 후지타 모토시 (1981~1983) ★★ | 12대 오 사다하루 (1984~1988) ★ | 13대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 | 14대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 | 15대 하라 타츠노리 (2002~2003) ★ | |
16대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 17대 하라 타츠노리 (2006~2015) ★★★★★★ | 18대 타카하시 요시노부 (2016~2018) | 19대 하라 타츠노리 (2019~2023) ★★ | 20대 아베 신노스케 (2024~) ★ |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단일리그 우승 |
[1] 중학교 때 한국명인 이팔용을 그대로 딴 후지모토 하치류(藤本八龍)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가 재차 후지모토 히데오로 개명했다가 결혼하면서 성씨를 나카가미로 바꿨다. 후술하겠지만 일본에선 '후지모토 히데오'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2] 1946년 시즌 도중인 6월 13일에 외야수 나카지마 하루야스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선수에만 전념했다.[3] 이때 이팔룡에서 일본식 이름인 후지모토 하치류(藤本八龍)로 개명했다.[4] 상업학교 졸업 당시 일본프로야구 창설기인 1936~1940년에 참가한 나고야킨코군(名古屋金鯱軍)이란 구단의 입단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거절했다. 참고로 주니치 드래곤즈와는 무관한 구단으로, 이 구단의 모기업이었던 나고야신문이 1942년 군부의 신문통제로 같은 나고야에 있는 츄부닛폰신문과 합병하여 탄생한 것이 지금의 주니치 드래곤즈의 모기업인 주니치신문이다.[5] 이들 중 히로세는 1944년 레이테에서 전사하면서 끝내 그라운드에 돌아오지 못했다.[6] 참고로 1943, 1944년에 각각 253, 113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탈삼진 1위도 기록했으나 당시엔 최다 탈삼진이 타이틀 시상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최다 탈삼진 기록만 반영된다.[7]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존재했던 구단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와는 모기업이 서일본 철도라는 점을 제외하면 무관한 구단이다.[8] 참고로 연속 무실점 최고 기록은 1958년 카네다 마사이치가 기록한 64.1이닝이다.[9] 일본프로야구 초창기에 2번의 수위타자를 수상하며 활약한 대만인 야구선수로 본명은 우보(呉波). 이쪽도 나카가미와 마찬가지로 데뷔 초엔 본명인 우보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하'를 등록명으로 쓰다가 1943년에 고 쇼세이(呉昌征)로 등록명을 바꿨고, 은퇴 후인 1977년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본인의 현역 시절 등록명과 아내의 성씨를 합친 이시이 마사유키(石井昌征)로 개명했다. 1987년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70세에 별세.[10] 여기에 코라쿠엔 구장 그라운드가 구황작물을 심을 부지가 되는 바람에 연습도 힘들어져서 모교인 메이지대학의 운동장을 빌려 연습을 진행해야 했다.[11] 이 무렵 고향인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면서 그의 국적은 일본 제국에서 미군정으로 변경된다. 그가 서류상 일본인 선수에서 외국인 선수가 되는 시점이었다.[12] 1946년 재계약을 맺을 당시 구단으로부터 계약금 5,000엔을 받았으나 시즌 도중 "그런 큰 돈을 단 1명에게 줄 순 없다. 나중에 돌려줄 테니 일단 반납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아 계약금을 구단에 반납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단에선 시즌이 끝날 때까지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약속을 어겼고 이 때문에 팀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결국 쿄진을 떠나게 되었다.[13] 1948년 구단명을 주니치 드래곤즈로 개명했다. 이후 1951년에 나고야 드래곤즈로 개명했다가 1954년부터 다시 구단명을 주니치로 되돌려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14] 한편 이 무렵은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으로 수립되었으며, 국적이 또다시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된다.[15] 150승 이상으로 따지면 180승 96패를 기록한 사이토 마사키가 있다.[16] 불과 3일 전 모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으며 그 또한 대한민국 국적 남성으로서 징집대상이었으나 여러 사정상 징집되지는 않았다. 본인 또한 해당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며, 후일 일본에 귀화하는 이유가 된다.[17] 西日本パイレーツ. 1950년에 후쿠오카에서 서일본 신문에 의해 창단되어 센트럴 리그 연맹에 가입했지만 그 해를 끝으로 여러 사정으로 인해 1951년에 동년 창단된 퍼시픽 리그 연맹의 같은 지역 팀인 니시테츠 클리퍼스에 흡수통합되어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었다.[18] 현재의 아오모리 시영 야구장(青森市営野球場)이며, 이 야구장에는 최초의 퍼펙트게임 달성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구글 어스로 보자.[19] 히데오 본인은 "작은 커브"라고 불렀다. 일본야구 슬라이더의 비조, 한국계 후지모토.[20] 당시 아오모리 구장에는 총 4명의 신문기자가 있었는데 이들 중 사진기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일본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경기 전날까지 날씨가 심히 좋지 않아서 사진기자 들이 오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라고.[21] 寺山修司. 일본의 극작가, 수필가, 하이쿠 시인, 비평가, 배우, 사진 작가 등 로 활동 방대한 양의 문학 작품을 발표한 인물.[22] 예전에는 그런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장훈의 어머니인 박순분 여사도 장훈이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은 절대 반대했지만, 재일교포 고교야구팀으로 선발되어 한국에 갈 때 한국에 가지 말고 일본에 남아 있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장훈이 직접 민단에 확인해서 소문이 거짓임을 알고 장훈이 한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현재 재일 한국인의 징집은 없지만, 지원제도가 있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