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5:33:35

우에다 토시하루

우에다 토시하루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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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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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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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토시하루
上田利治 | Toshiharu Ueda
출생 1937년 1월 18일
토쿠시마 현 카이후 군 시시쿠이 정[1]
사망 2017년 7월 1일 (향년 8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토쿠시마 현립 카이난 고등학교
간사이대학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히로시마 카프(1959~1961)
지도자 히로시마 카프 2군 배터리코치 (1962)
히로시마 카프-도요 카프 1군 배터리코치 (1963~1969)
한큐 브레이브스 1군 수석코치 (1971~1973)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감독 (1974~1978, 1981~1990)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1995~1999)

1. 개요2. 현역 시절3. 히로시마 코치 시절4. 한큐 코치, 감독 1기 시절5. 한큐, 오릭스 감독 2기 시절6. 닛폰햄 감독 시절7. 이후8. 평가9. 에피소드10. 감독으로서의 특징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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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2. 현역 시절

카이난 고교를 졸업하고 간사이대학 법학부에 진학해 후에 한신 타이거스의 레전드가 되는 무라야마 미노루와 배터리를 이루며 야구부의 칸사이 6대학 리그 4회 우승과 1956년 서일본 지역 대학 사상 최초의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뤄냈다. 대학 졸업 후엔 프로에서 활약할 자신이 없었기에 프로야구에 진출하지 않으려 했지만, "(카프의 모기업인)도요공업에 입사시켜 줄 테니 파견근무 형식으로 카프에 입단해서 3~4년 뛰고 나면 다시 도요공업으로 복직시켜 주겠다" 라는 조건을 내건 히로시마 카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9년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으로 인해 출장기회를 많이 잡지 못하고 불과 3년 만에 현역 생활을 접고 말았다. 통산성적은 121경기 출장, 타율 0.218(257타수 56안타), 2홈런 17타점 5도루 로 상당히 초라한 편이다.

3. 히로시마 코치 시절

선수생활을 접은 우에다는 도요공업 복직을 원했으나, 구단주인 마쓰다 쓰네지의 요청으로 불과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히로시마의 2군 배터리코치로 임명되었다.[2] 1963년 1군 배터리코치로 승격된 우에다는 1969년 시즌까지 코치로 재임했으나, 네모토 리쿠오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 코치직을 내려놓고 히로시마를 떠났다. 결국 퍼시픽리그에서 상대팀 감독으로 재회하면서 시원하게 호구잡았다.

4. 한큐 코치, 감독 1기 시절

파일:external/mainichi.jp/053.jpg

히로시마에서 퇴단한 후 주고쿠 방송 해설위원으로 일하던 1971년, 히로시마 시절 동료였던 야마우치 카즈히로[3]의 추천으로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지휘하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1973년 시즌을 끝으로 니시모토가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으로 옮겨가면서 감독직을 물려받았는데, 이 때 우에다의 나이는 노무라 카츠야, 나가시마 시게오 등의 일부 현역들보다도 어린 37세였다. 젊은 무명선수 출신의 감독이 전임 니시모토 감독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변의 우려가 많았으나, 우에다는 니시모토가 그동안 다져놓은 터전에 자신의 지도력을 자양분 삼아 선수단을 이끌었고, 취임 2년차인 1975년, 친정팀 히로시마 카프를 제물로 한큐 창단 후 첫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 그때까지 회색 구단이라 불리며 하위권을 전전하던 한큐의 진정한 황금기를 열었다.

이 후 한큐는 1977년까지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고, 우에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한큐는 1978년도에도 퍼시픽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퍼시픽 리그 4연패와 동시에 4년 연속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는데, 이 일본시리즈에서 사건이 터졌다.

1978년 10월 22일, 고라쿠엔 구장[4]에서 열린 센트럴리그 야쿠르트 스왈로즈 와의 시리즈 7차전, 한큐가 0대 1로 뒤지던 6회말 1사 후 주자없는 상황에서 야쿠르트의 타자 오오스기 카츠오가 한큐 에이스 아다치 미츠히로의 3구를 공략해 좌측 폴대 위를 넘어가는 타구를 날렸는데 심판은 이를 홈런으로 판정하였고, 우에다는 이에 격분해 맹렬히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파일:external/pds.exblog.jp/b0117729_1225182.jpg
오오스기의 홈런 판정에 대해 심판진에 맹렬히 항의하는 우에다.

뚜껑이 열린 우에다는 한큐 선수단을 덕아웃으로 불러들인 후 무려 1시간 19분 동안이나 항의[5]를 계속했고, 보다못한 퍼시픽 리그 회장이 직접 내려와 설득한 후에야 경기를 재개했다. 이후 한큐는 우에다 감독의 항의 때문에 어깨가 식어버린 아다치 대신 마츠모토 마사시가 구원투수로 올라왔으나 찰리 매뉴얼이 야쿠르트의 기세를 올리는 솔로포로 우에다 감독의 항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8회말에는 야마다 히사시피꺼솟한 오오스기에게 또 다시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0:4로 패했고, 그 해 시리즈 준우승에 그치며 쓴잔을 들었다. 결국 우에다는 시리즈 7차전에서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며 감독직을 수석 코치 가지모토 타카오에게 물려주고 사임했다.

5. 한큐, 오릭스 감독 2기 시절

파일:external/special.buffaloes.co.jp/img_photoplayer02_01.jpg

이후 우에다는 1979~1980년 NHK의 해설가로 활동하였으나 후임 감독인 가지모토 타카오가 성적 부진으로 2시즌 만에 사임하며 한큐 감독으로 복귀했고, 1984년 타격 삼관왕을 달성한 외국인 선수 부머 웰즈의 활약을 앞세워 개인 통산 5번째 리그 우승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해 1984년 일본시리즈에선 히로시마 카프에 3승 4패로 패했다. 히로시마 투수진의 집요한 인코스 공격에 부머가 제대로 된 타격을 못하면서 공격의 맥이 끊겼던 것이 주원인.

한큐의 구단 매각으로 팀명이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바뀐 1989년, 우에다가 이끄는 오릭스는 시즌 전반기까지 2위와 8.5게임 차이의 1위를 질주하며 창단 첫 해 우승이 유력했으나, 주전들의 부상과 롯데 오리온즈고춧가루 투척으로 인하여 랄프 브라이언트가 홈런포로 시즌 내내 하드캐리오기 아키라 감독의 긴테쓰 버팔로즈불과 승률 1리 차이로 밀려 2위에 그쳤다. 1990년 감독 통산 1천승을 채운 뒤 구단 편성부장에 임명되면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났다.

6. 닛폰햄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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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

1992년 오릭스의 편성부장 직을 사퇴하고, 1995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에 취임 하였으나 1996, 1998년 시즌 팀을 리그 2위로 올린 것 외에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99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닛폰햄에서는 프런트 직을 제의했지만 우에다는 이를 사양하고 그라운드를 영원히 떠났다.

감독 생활 20년 동안 1322승 1136패 109무승부(승률 0.538)일본시리즈 우승 3회, 리그 우승 5회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7. 이후

2000년 이후로는 주로 간사이 지역 언론의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였고, 2003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7년 7월 1일 노환에서 온 폐렴으로 인하여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8. 평가

현역 시절 성적은 별 볼일 없었지만 지도자가 된 이후 1970년대 중후반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이끈 무명 선수 출신 명 감독의 전형적 인물.[6]

9. 에피소드

  • 어릴 때는 도쿠시마현 변호사회장인 삼촌을 존경해 변호사를 꿈으로 삼았다. 그래서 간사이대의 체육특기생 입학 제의를 뿌리치고 가산점 100점을 받는 조건으로 법대 입시에 응시했는데, 결과는 400점 만점에 398점으로 법대 수석이었다. 그러나 학점 메우기도 벅찬 혹독한 훈련과 선배들의 강압적 구태 등이 맞물려 사법고시를 포기했고, 결국 야구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 1988년 10월 22일 한큐 브레이브스 해단식에서 선수들을 소개하면서 "은퇴하는 야마다 히사시, 그리고 남아 있을 후쿠모토 유타카"라고 말하려다가 실수로 "은퇴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말했다. 우에다 본인은 곧장 실언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이미 각종 스포츠 신문 1면에 후쿠모토 은퇴!라고 대서특필 되었고, 결국 후쿠모토는 본의 아니게 은퇴하고 말았다.
  •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으로 재직하던 1996년 9월에 그의 아내와 딸이 통일교 신자[7]인 것이 밝혀지며 야구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고, 우에다는 "가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팀을 어떻게 지도하겠는가" 라며 감독직 사임을 선언했지만, 구단 측의 적극적인 만류와 설득으로 3주일 만에 "그동안 많이 고민해 봤지만 역시 나는 우리 선수들과 우리 팀을, 또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라면서 사의를 철회하고 감독 직에 복귀하는 소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우승경쟁을 벌이던 닛폰햄에 악영향을 주었고, 결국 이해 닛폰햄은 오릭스에게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허용하고 말았다.
  • 도쿠시마현 출신으로 전직 부총리, 법무대신, 내각관방장관 등을 지낸 고토다 마사하루에게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받기도 했으나 본인이 고사했다고 한다.

10. 감독으로서의 특징

  • 3년만에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20년간의 감독생활 동안 통산 1322승(역대 7위), 일본시리즈 3연패(사상 4명)를 차지했으며 감독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최하위를 경험하지 않았다.(사상 3명)
  • 우에다의 지도자로서의 발자국은 4단계로 나뉘는데 회사로 비유하면 아래와 같다.
24세의 나이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코치로 취임한 히로시마 시절 경험이 많고 연상의 부하들이 모인 조직을 맡은 신임 관리직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한큐의 감독으로 발탁 황금시대 선대의 흔적을 이은 2대째 경영자. 혹은 실적도 기세도 있는 회사 및 부서로 오게 된 젊은 관리직 경영자
강호이나 매너리즘을 맞이하던 제2기 한큐~오릭스 시대 매너리즘화하고 성적이 하락세를 시작한 기업의 관리직 경영자
최하위에 가라 앉는 팀의 재건을 맡은 니혼 햄 파이터스 시대 약소기업의 관리직 경영자

11. 관련 문서


[1] 現 카이후 군 카이요 정[2] 이는 지금까지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코치 취임 기록이다.[3] 훗날 롯데 오리온즈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역임했다. 다만 추천당시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격코치로 있었다. 그때 나가시마의 기행 중 상대팀 타격코칭질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4] 당시 야쿠르트의 홈구장은 메이지진구 구장이었으나, 도쿄6대학리그와 일본시리즈 일정이 겹친다는 핑계로 고라쿠엔 구장을 임차해 사용했다.[5] 이걸 배운 가장 대표적인 제자가 제60대 요미우리 4번타자를 지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전 주니치감독.[6] 무명 선수 출신으로 야구계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네모토 리쿠오도 대표적이지만, 그는 감독 시절 뚜렷한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대신 구단 경영인(GM)으로 세이부 라이온즈, 다이에 호크스를 강팀으로 성장시키며 명성을 날렸다.[7] 정작 통일교는 야구보다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